타인보다 더 민감한 사람 - 내 안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공감과 위로의 심리학
일레인 N. 아론 지음, 노혜숙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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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가 던지는 왠지 친근한 어감, 아니 무엇보다 내 성격적 특성을 말하는 것만 같아 냉큼 읽게 된 책이다. 심리학에서는 특별한 이유 없이 계속 불안해하는‘신경증’이라는 질병적 해석이 있긴 하지만, 이는‘민감함(sensitive)'과는 전혀 다른 것임에도 사회적, 학문적 관심은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저자가 말하듯이 인류의 공격적인 문화, 즉 충동적이고 저돌적인 전사(戰士), 확장과 이익에 관심을 갖는 전사중심의 문화에서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신중하며, 자극에 민감한 사람들을 정상적 고려의 대상으로 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략 전체 인구의 20~25퍼센트는 유전적으로 '매우 민감한(highly sensitive)'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외부의 소음(noise; 정신적, 물질적)에 대해서 75~80퍼센트의 사람들보다 훨씬 민감한 감수성을 가지는 것인데, 이는 정신적 긴장을 차단하는 신경계가 긴장하는 정도차이로 자극을 걸러내는데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나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소음이나 자극에 노출되면 그것을 견뎌내는데 엄청난 고통을 느끼고 결국에는 완전히 탈진해 버려서 이후에 어떠한 행위를 하는데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수선한 주변을 무시해버리고, 복잡한 놀이시설이나 쇼핑공간을 하루 종일 돌아다니고도 저녁에 다시금 술자리를 하기위해 나갈 준비를 한다. 하지만 나는 완전히 뻗어서 그저 혼자 조용히 있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 애를 쓴다.

이러한 성격상의 특성은 주위에서 내성적이라든가 사교성이 떨어진다, 또는 숫기가 없다는 식으로 정의되곤 한다. 그런데 매우 민감하다는 것은 이러한 표현들처럼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 성격적 특성이 아니다. 다수의 권력과 힘의 관계에 열중하는 사회성이 만들어낸 왜곡된 정의일 뿐이지 바로 지금의 인류사회가 그나마 존재하게 한 고귀한 유전적 특성이다. 신중함, 침착함, 사려깊음, 민감함을 불안, 어색함, 두려움, 억압됨과 동일시하는 공격적 충동성이 지배하는 폭력적 문화의 속성이 만들어낸 편견일 뿐인 것이다. 이 책은 인류의 1/4을 구성하는 바로 이러한 내면적 소리에 보다 관심을 갖는 매우 민감한 사람들에게 더 이상 다수의 그릇된 시선과 상황에 종속되지 말고 고유의 성격적 특질을 발휘하고, 또한 정신적으로 억압되어있던 심리적 기억들을 재구성해서 긍정적 자기실현으로 견인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기 위해 유아기에서부터 성장기(사춘기)는 물론 성인으로서의 제반 사회적 상황과 직장, 직업인으로서의 장애와 극복, 연애와 사랑 등에 걸쳐 마주하게 되는 자극과 고통, 현상을 통해 이를 이해하고 장점을 실현하는 방법들을 심층심리학적 기반 하에 섬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 매우 민감한 특성은 신경계적 유전의 산물이지만 영유아기는 물론 성장기에 부모의 양육방식 등 환경적 여건이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태어나서 최초로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고통이 긴장이란 것인데, 이는 세상에서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어야 멈추어진다고 한다. 여기서 애착심리, 회피심리, 불안심리 등 부모와 아이와의 관계, 즉 부모의 보살핌이 무관심과 과잉보호의 사이에서 여하하게 제공되는가에 따라 일종의 자극에 대한 반응체계인 아이의 행위억제시스템(멈춤 확인시스템)에 대한 숙련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우는 아이를 그대로 내버려 둘 것인가? 먹을 것을 달라고 하기 전에 미리 젖병을 물려주는 것이 좋은 것인가? 어떻게 부모가 반응하는 것이 아이에게 세상에 대한 안전성, 신뢰를 높여주는 것이 되는 것일까를 배우게 된다. 이처럼 매우 민감한 당사자가 아니어도 아이를 양육하는 모든 부모들을 위해서도 이 책은 아주 중요한 심리학적 가르침을 준다.

한편 이 책이 말하려 한 것, 즉 내가 관심을 갖게 된 내성적 또는 숫기 없음과 같은 부정적 시각을 포함하는 민감한 사람들이 사회에서 겪는 곤란함과 편견적 시선의 극복에 대한 실례(實例)를 포함한 방법론은 매우 민감한 사람으로서의 저자의 체험적 기술방식으로 인해 더욱 친근하고 진실하게 다가온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면 신체적 활동에 참여하기보다는 구경할 때가 많았다는 저자의 체험담으로부터 자신감과 희망을, 모험을 하지 않음으로서 발생하는 실망감과의 대체를 고려해보라는 조언으로부터 시작해서, 민감한 사람들의 성격인 자극의 회피나 우선순위 설정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일들을 타인의 일들보다 나중으로 미루거나, 인생의 의미와 죽음과 복잡한 세상사에 대한 생각에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 보다 직관적이고 반의식이나 무의식으로부터 정보를 찾아내려하며, 정치놀음을 좋아하지 않는 탓에 영악하지 않으며, 가면을 쓰지 않는 순수함과 양심적 결벽성 등이 오늘의 주류적 사회 문화에서 수용되지 못하고 소외되는 원인을 탐색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과 사회의 속성을 이해함으로써 어떻게 세상과 조화하고 그러함으로써 자기, 즉 자신의 개성을 찾을 수 있는지 설득력 있게 그 길을 안내한다.
 

때론 물리적 피난처로 긴장을 피해 도피하는 것이, 그리고 보이지 않는 피난처를 만들고 의지하는 법을, 세상을 견디고 기꺼이 참여할 수 있기 위해 세상으로 나가는 법, 좋은 페르소나를 의식적으로 만들고 사용하는 것이 결코 민감한 사람인 우리가 거부하는 위선이 아니라 적당히 솔직한 것으로서 필요하다는 것, 내면의 이상을 마비시키는 세속적 요구를 떨치고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개성화 과정에 대해서, 다수자의 모임에서 말없는 행동은 그들의 눈에 어떻게 보이며 그래서 그들에 표현하여야 할 긍정적 신호의 발신에 대해서, 조직 내 상사와 주변인들에 대한 신뢰와 의심에 대한 용기에 대해서처럼 매우 민감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성격적 특성을 발휘하는 구체적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나아가서 매우 민감한 사람들의 사랑이 “바깥세상으로부터 소중한 내면세계를 보호하기 위해 에너지를 안으로 쏟는” 특성 탓으로 안에 쌓였던 에너지가 터져 나오면 한 사람, 한 장소나 물건에 기착해서 물불을 가리지 못해 상처를 커다랗게 받는 현상을 설명하면서 이러한 자신들의 속성을 통해 보다 성숙한 사랑으로 그리고 치유법을 세심하게 알려주기도 한다.

제각기 살아오면서 쌓은 그 경험의 무게가 다르겠지만 우리들의 지나간 기억, 경험을 민감성이 지닌 재능, 그 장점을 중심으로 재구성하여 삶의 기대치를 높여주는 적응성 높은 현실적 심리프레임을 제시한다. ‘매우 민감함’이란 성향이 획일적인 어떤 것이 아닌 만큼 정도의 차이가 분명 있을 것이다. 사교적이며 수다스러운 민감한 사람도 있겠지만 혹여 사회가 무차별적으로 발산하는 자극을 회피하기만 했던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지닌 엄청나게 놀라운 능력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어 그 빛나는 재능을 사회에 마음껏 발휘하는 작은 불씨가 되어줄 수 도 있다. 내적인 경험은 보이지 않기에 비교가 되지도 않으며 타인들이 알 수도 없다.  단지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지하는 것보다 훨씬 미묘한 차이까지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 편견에 의해 억압의 기제로 작동해서는 안 된다. 내부로 침잠한 많은 민감한 사람들에게 안도와 구원을 주는 책이다. 주변에 민감한 친구나 동료, 부하직원을 두신 분들, 민감한 자녀를 두신 부모님들에게도 이 책은 귀중한 이해를 제공할 것이다. 민감한 자아를 확인하고 돌보는 방법을 말해주는 최초의 심리학 연구서이자 치유서로서 감동스럽고 고마운 저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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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 우리 차 - 계절별로 즐기는 우리 꽃차와 약차
이연자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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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맛, 우리의 신체를 다스려 온 전통의 음료를 까맣게 모르고 산다는 것이 불현듯 꽤나 모순처럼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더구나 차(茶)라 하면 왠지 고풍스럽고 다례(茶禮)니 다도(茶道)니 하여 까다롭게 느껴져 불편한 심사에 가까이 하지 못한 연유도 있다하겠다. 

책에서 차(茶)에 대한 정의를 소개하고 있기도 하지만, 다산선생이 『아언각비』에서 지적했듯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강차, 상지차, 송절차, 오과차 등 차가 아닌 탕을 마시면서 관습적으로 차라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차나무 잎으로 만든 것을 차라 해야 옳다.”와 같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조 27년에 이르러 “차를 마시는 것과 탕제와 약은 하나다.”라고 “가벼이 마시는 음료를 아우르는 표현에 차(茶)를 사용”함으로써 오늘에는 잎차뿐 아니라, 열매, 뿌리, 꽃을 사용하는 모든 음료를 차라고 부르게 된 것 같다.

그럼에도 고유의 차 잎으로 우려낸 차를 모르고 차를 말할 수 있겠는가. 해서 책에는 차나무에서 차 잎을 채엽하고 그리고 덖고 발효하는 정도와 찌는 과정의 유무 등의 과정에 따라 구분되는 녹차에서 백차, 황차, 청차, 홍차, 흑차의 특성과 산지(産地), 향, 맛, 성분, 효능, 우려내는 법을 소개하여 그 성능 및 취향에 따른 관심을 갖도록 안내하고 있기도 하다. 이중 우리나라는 녹차가 주로 생산, 제다(製茶)되는 모양인데, 그중 곡우(穀雨; 양력 4월20일)전후하여 채엽되는 어린 새싹을 최상품으로 친다고 한다. 이후 채엽 시기에 따라 세작, 입하차등으로 나뉘어 불리는데, 역시 잎사귀 뒷면에 흰털이 보송보송 달린 일명 첫물차를 따르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이와 같은 차나무 잎차를 즐겨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명약도 한 가지만을 오래 취하면 해가 따른다”고 하듯이 차도 바뀌는 계절마다 그 계절에 맞는 재료를 이용하여 자연과 생체 리듬의 조화는 물론 계절 특유의 맛과 기능을 즐기는 것은 또 하나의 멋스런 지혜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각 계절 특유의 꽃과 과실을 통해 계절에 어울리는 색감과 효능을 간직한 60여 종의 차에 대해 차를 만들고 우려내는 방법은 물론 각기의 의학적 성능 등 실용적 지식과 함께 친절하고 유용한 길을 안내를 해주고 있다.

생꽃 그대로 우려내도 좋다는 봄이면 제일먼저 어디에서나 피어나는 개나리꽃, 그리고 신비한 향기와 은은한 차색이 일품인 꽃 잎 아홉 장짜리 토종 목련의 꽃 잎차, 생강향이 나서 이름인 생강나무꽃차, 그리고 진달래, 복사꽃, 민들레 꽃차가 봄철 차들을 수놓는다. 그래도 잎차인 제철의 차나무 녹차인 햇차를 빼 놓을 수는 없다. 값이 다소 비싸지만 가장 먼저 딴 어린 차 잎으로 만든 우전차는 효능과 맛에서 최고라니 말이다.

한편 성큼 다가온 여름에는 갈증이나 속 열을 시켜주고 탈나기 쉬운 내장을 다스려주는 차들이 그만일 것이다. 그래서 장미꽃, 아까시아꽃차부터 식후에 마시면 위의 자극으로 소화를 촉진시켜주는 박하차, 설사, 해열에 특효인 청매실차,  레몬보다 비타민C가 스무 배나 많으며, 더위로 오른 혈압을 내려주고 갈증 날 때 속 열을 풀어주는 것은 물론 카페인 성분 또한 없어 위에 부담도 주지 않는 감잎차는 진정 여름철 차로서는 제격인 듯싶다.
그리고 칡꽃, 맨드라미, 국화꽃이 피어나는 가을에는 이들 꽃차와 포도차, 내장 통증을 다스려주는 우엉차, 송이차가, 겨울에는 중풍, 고혈압 예방에 좋은 송화차, 동백꽃차와 꽃차의 백미라 하는 입안  가득 퍼지는 청향이 그만인 매화차가 우릴 기다린다.

꽃차에는 투명한 유리 다기가, 잎차에는 우리 전통장인의 얼이 담긴 도자기 다기로 조합을 맞추어 차를 우려내면 차 마시는 즐거움에 품격과 멋이 더해져 분위기와 차 맛이 한층 우아해질 것 같다. 소개되는 모든 차마다 어울리는 다기세트와 우리는 방법이 화려한 화보와 어울려 그 시각적 즐거움도 이 책의 또 하나의 장점이라 하겠다. 게다가 물맛이 절반이요, 나머지 절반은 정성이라고 하는 차 맛이 살아나게 하기위해 물이 끓으면 뚜껑을 열어 한 김 날려 보내는 세심한 방법들까지 더해서 이 책은 우리의 건강은 물론 세련된 미감을 살려주는데 더 할 수 없는 산 정보를 준다. 가정에 한 권씩 비치해두고 계절별로 차를 끓여낼 때마다 참조하면 아주 유용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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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생각해
이은조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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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왠지 내 마음은 신산한 느낌을 비켜가지 못하는 것 같다. 제아무리 세속적 화려함을 구사하거나 생과 사의 초월적 경계에 이른 달관한 사람이거나를 막론하고‘자기’의 저 심연에서 말하는 것을 그대로 실현하면서 살기위해서는 시간적 희생은 물론 숱한 장애를 극복할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결코 강요되는 것이 아닐지언정 온갖 사회적 속박을 무시한다는 것이 그리 간단명료한 일이 아닌 것처럼, 그래서 세상이 요구하는 것에 휘말려 끌려 다니다 보면 어느새 삶의 황혼이 다가서 착잡한 심정에 놓이곤 당황해 하는 것이다.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고, 또한 표현하며 살 수 있다면, 그것이 사랑이 되었든, 정체성이 되었든, 그 무엇이 되었든, 조금은 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의 인물들은 그래서인지 자기가 요구하는 행복의 근원이랄 수 있는 사랑과 삶의 방식을 추종한다. 그것이 동성애적이건 이성애적이건, 자기 재능의 실현이건, 연대에 대한 의무이건, 행위의 자기 주도적 결정은 만족이란 걸, 미소와 평온을 준다. 연극 극단의 홍보 팀장이자 극작가인 스물여덟 살 미혼 여성인‘유안’을 중심으로 여배우인 엄마, 이혼녀인 한 여성과 정신적 동반자로서 동거생활을 하는 언니, 가족을 등지고 떠나버린 아빠, 자신의 불안정한 미래에 갈등하는 남자친구, 그리고 뼛속까지 연극인인 중년의 실장, 평생 고독한 삶을 살다간 할머니까지, 이들의 자기실현과 현실사이의 번뇌, 그러면서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고, 이별하는 이 순환하는 삶의 변주곡들을 들려준다.

그러나 이 변주곡들에 실린 사랑의 현실적인 우리의 모습들은 의외로 낯설다. 아니 그 사실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이지도 모르겠다. 만나면 음식을 먹거나 자기만(모텔)을 줄기차게 하는 유안의 사랑, 엄마와 엄마의 친구, 할머니의 동성애적 정체성과 같은 또 다른 사랑, 언니의 동반자인 이혼녀와 그녀의 딸이 조성해내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관과 사랑의 방식, 아내와 두 딸을 떠나 제2의 인생을 꾸려가는 아빠의 사랑은 이들 각각에 여하한 이론적 분석을 떠나 이것이 우리네들 사랑의 실제임을 보게 된다. 때문인지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행복을 추구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새로워진 삶의 방식을 확인케 된다.

한편 가난한 극단의 실장으로서, 연극의 지원자로서, 보조자로서, 자기 인생을 함몰시킨 중년의 남자가 돌연 지방 극단의 배우로서 자기 삶을‘바야흐로’새로이 시작하는 모습은 비로소 세상과의 타협이 아닌 자신의 재능에 대한 사랑의 용기를 보여줌으로써 자칫 실패, 파멸 할 수 있는 인생 행복의 구원이란 이런 것인가 하고 생각게 한다. 여기에 극단의 주체가 되어 세상과 부딪히며 자기를 구축해나가는 여정이나, 쇠퇴해가는 아버지사업의 지원자로서 가족이라는 연대의 의식을 키워나가는 젊은이들을 통해 변할 수 없는 삶의 역사성, 건강성에 대한 믿음을 다지게도 된다.

사랑 그리고 삶을 선택하는 방식이 이젠 꽤나 주체적이 되어가고 있는 듯 하다. 어제의 금기와 구속이 더 이상 자기의 목소리를 제약하지 못하는, 어쩌면 거대한 20세기 식 담론이란 것이 사회의 작동 원리로서의 힘을 상실하는 그야말로 다원화되고 개인화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거의 선명했던 이미지, 사랑과 삶의 원인이었던 추동력이 시간이 지나 퇴색되고 변색되어 흐릿해지는 것처럼 그렇게 오늘의 사랑과 삶의 방식은 과거의 그것과 다른 모양이다.
일상적 피로에 억압되어 내면 깊숙이 가두어졌던 것들이 현대 여성의 도회적 감수성으로 진솔하게 그려졌다는 느낌을 갖는다. 사건이나 서사적 변화무쌍함과 같은 화려함, 거대한 사회적 선정성이 없음에도 세련된 정갈함으로 고상한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 나는 내‘자기(individuation)’를 위해 이제라도 용기를 실현화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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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제노비스를 죽였는가?
디디에 드쿠앵 지음, 양진성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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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에서 타인간의 문제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인간의‘방관자 효과’를 설명 할 때면 대표적 사건사례로 예시되는 것이 ‘제노비스 신드롬’이라 할 수 있다. 당시의 신문기사들을 보면 27살 여성이 이웃들에 도와달라는 구원의 외침을 하는 32분간 살인이 진행되는 장면을 지켜본 “38명의 이웃 어느 누구도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았다!(38 Watched Murder -- And Did Nothing) ”라고 타인의 고통, 죽음을 방관한 인간들의 행동을 비난하는 듯한 신문의 헤드라인을 볼 수 있다. 아무튼 이후 이 사건은 심리학적 한 현상을 표현하는 고유명사가 되었을 정도로 우리 인간들에게 어떤 근본적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소설은 이 유명한 심리학적 과제를 던진 사건의 증언들과 정황, 이후 판결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도시 생활에 내재하는 개인의 소외와 공동체 의식의 결여를 되짚어 보게 한다.

1964년 3월 13일 뉴욕의 퀸즈 구역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이라는 실화를 토대로 재구성된 일종의 팩션인 이 소설은 익히 잘 알려진 내용이지만 당시 목격자인 이웃들의 증언, 아니 변명들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자극한다. 왜 자기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웃 처녀의 잔인한 피살상황에 수수방관을 하였는지는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성실하게 자기 인생을 가꾸어나가던 이태리계 미국인인‘캐서린 수잔 제노비스’가 자기 집이 있는 주택가에서 그것도 도와달라고 소리치는 상황에서 38명의 이웃(실질적으로는 이보다 많을 것으로 추정)이 마치 텔레비전 화면 보듯 지켜보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태도를 대체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는 우리 인간의 본성을 해석하는데 중요한 실증자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이 소설적 구성의 측면을 무시하고 사실의 나열만으로 구성된 것은 결코 아니지만, 인간의 ‘다원적 무지’라든가 ‘책임 분산 효과’와 같은 너무도 유명한 심리학적 사례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 인문학적 관심에 묻히는 것은 이 작품이 각오한 한계라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학문적 흥미와 관음증적 원시욕구를 건드리는 소재여서 흥미를 호락호락 양보할 수는 없다 하겠다.
살인당시의 장면을 재구성하여 보여주는가 하면, 살인자의 신원과 성향, 재판과정부터 목격자인 이웃들의 핑계이자 자기 방어를 위한 (도덕적)책임의 회피적 증언 등이 맛스럽게 배열되어 주제에 대한 의문과 다양한 인간 본성에 대한 사고의 재미를 더해준다.

나 같으면 그녀를 위해 뛰어나갔을까? 아 역시 자기중심적인‘나쁜 사마리아인’처럼, 퀸즈의 방관한 주민들처럼 행동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자문도 해보게 된다. 그리고 이 방관과 무관심을 만드는 심리적 동기는 무엇일까? 우리의 도시란 곳은 이처럼 황폐한 곳일까? 하는 의문도 떠올리게 된다.
“목격자가 많으면 아무도 안 도와준다? ” 여기에는 모호한 상황에 맞서면 어떻게 해야 할 지 결정할 때 우리 인간들은 타인의 인도와 도움에 의지한다는 ‘다원적 무지’의 심리가 깃들어 있으며, 결국 구경꾼들 모두 서로 타인에게 인도를 구할 경우 실제로 아무런 행동도 없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즉 아무도 행동하지 않고, 그러고 나서는 자기 위안적 판단으로 스스로의 심리를 보호하며, 적절한 핑계로 회피하는 것이 바로 본성인 것이다. 이웃인 목격자들의 증언을 보면 역시 동일한 이러한 범주 내에서 변명의 내용을 담고 있다. 사랑싸움인지 알았어요, 남녀간의 희롱이라고 판단했어요, 나서면 골치 아픈 상황에 빠질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그랬어요, 사람들이 많다보니 다른 누군가가 신고할 줄 알았아요,... 등등 과 같이 책임분산의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에 더해 소설은 살인자와 그의 평범한 일상에 대해서도 조명하고 있는데,  죄의식 없는 살인행위와 사이코패스로서의 성향이 일상과 부조화를 이루지 않는 모습은 더욱 섬뜩함을 느끼게 한다. 방관자의 심리에 묻혀 가려진 범죄자의 죄악, 죽음과 시체를 탐하는 살인괴물의 악마성도 하나의 축을 형성하여 실화적 사건을 더욱 입체감 있게 재구축한다. 냉담했던 목격자들, 악을 행하는 인간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악행을 보고도 저지하지 않는 우리들, 우리의 사회가 더럭 두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비극적 사건, 인간 심리의 치부를 드러낸 이 사건은 타인의 고통과 위험에 대한 우리의 행동양식 교정(矯正)이란 중요한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유명한 심리학적 연구 모델로 회자되던 소재에 다각적인 관점이 입혀진 인문학적 성향을 지닌 독특한 소설이라 하겠다. 아마도 작품에 등장하는 뉴욕타임지의 편집장 "로젠탈(A.M. Rosenthal)"이 쓴“38명의 목격자들(Thirty-Eight Witness)"이란 저술의 소설 판(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흥미와 지적욕망을 아우르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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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러 나가다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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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평범한 중년 남자의 소박한 해프닝으로서 1주일간의 탈주라는 소재에 산업사회가 야기하는 우울한 정경들을 담아내고 있다. 주인공인 보험조사원,‘조지 볼링’은 주급 7파운드를 버는 하류 중산층, 즉 시대를 대표하는 계층, 일반인의 전형적인 표상이다. 그런데 작품은 오웰의 잘 알려진 작품들인 『위건 부두로 가는 길』,『1984』나 『동물농장』처럼 주제의 무게가 주는 진지함과는 사뭇 다르다 할 만큼 경쾌하고 밝다. 그럼에도 이야기의 그 가벼운 흐름 속에 진중한 문제의식들이 아우성치는 기막힌 작품이다. 더구나 위의 후자인 두 작품을 구성하는 사고의 원천이랄 수 있는 문장들을 발견하게 되거나, 직간접적 영향을 준‘H.G.웰스’를 비롯한 문학 작품들을 흘끔거리게도 하는 것은 부가적 요소치고는 그 가치가 지고(至高)하다.

오웰의 노골적이고 경박하지 않으면서 구사되는 재치 넘치는 문장 또한 지루하기 십상인 1인칭 서술의 구조적 한계를 슬쩍 넘어버리게 해준다. 은근히 재미있어지는 것은 갑자기 굴러들어 온 17파운드의 돈을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고자 결심한 중년 가장의 용처에 대한 고민으로 시작되어 유년시절의 무한한 자유, “시간이 무한정 자기에게 펼쳐져 있으며 무얼 하든 영원히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느낌”으로 충만한 그 활력의 시공간으로 안내되어 펼쳐지는 추억담이라 할 수 있다. 사내아이들만의 독특한 시심(詩心)이라 주장하는 악동으로서의 다양한 일화, 특히 낚시에 얽힌 무용담으로 시작된 추억들은 작은 종자가게를 꾸리는 아버지, 가사(家事)를 우주적 소명으로 아는 어머니와 함께 정말 유쾌한 세계로 한동안 꿈을 꾸게 한다.
그리곤, “한적한 연못가 버드나무 아래 온종일 앉아”있는 것과 같은 안정감과 지속성으로서의 삶, 배가 따뜻해지는 평온함 같은 시공간으로 숙성된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기억은 현실의 삶, 생활의 냉엄한 현실에서 발버둥치는 보통 사람들의 전형인 자신에 대한 자각과 대비되어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두 아이와 항상 돈에 쪼달려 활력이 다 빠져버린 아내, 그리고 허리가 휘청거리는 주택 할부금의 부담을 안은 집, 그래서 마치 무언가 잃을 것이 있는  냥 착각하며, 보수주의자가 되어 남의 밑이나 핥아주는 사람으로 숨 막힐 틈도 없이 틀을 벗어날 수 없는 삶 말이다.
그래서 “나에게 활동적인 삶은 열 여섯 때 끝났다.”라는 이 중년의 보험조사원 조지 볼링이 선언하는 말에는 현대적 삶의 방식이 요구하는 피로가 그대로 묻어있다.

이렇듯 화자의 내레이션을 따라가다 보면 문득 1세기전의 영국사회를 걷는 것이 아니라 21세기 한국사회를 걷고 있다는 느낌에 빠져든다. “해내라! 성취하라!”라는 온통 앞을 위해 달리라는 종용이 난무하고, 물질과 문화적 과시를 위한 소비를 위해 여유로움과 주변의 경이로움을 모두 놓친 채 뛰어가는 조지 볼링이 묘사하는 시대상이 그대로 한 치의 이탈도 없이 판박이 같으니 말이다. 이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조차 동일하다. “양식은 있지만 정신은 멎어버린”사람들, “위협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위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 과연 물질적 풍요를 위해서 우리들이 잃어버리고 있는 것들, 빼앗긴 것들을 소위 신자유주의자들의 공리주의적 계산기는 어떻게 산출해 낼까? 를 생각게 한다.

한편 길가에서 발견한 “본 모양을 그대로 간직한 발간 잉걸 불”에서 “살아있다는 무엇보다 더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고 그것으로부터 “묘하게도 인생이 살 만한 것이라는 확신을 불현듯”느끼는 장면은 이 소박하고 세상을 의심할 줄 알게 된 하류 중산층 가장에게 20여년을 잊고 지내던 자신의 유,소년기를 품어주었던 고향 마을에 대한 향수, 잃어버린 그 무엇들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이어지게 한다.

자신만을 위해 쓰리라 다짐했던 17파운드를 지니고 아내와 직장을 속이고 1주일의 일탈을 감행한다. 현대산업사회가 만들어내는 그 인위와 부정적 흐름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기회주의적 유선형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그러나 평화와 정적을 기대하고 찾아간 고향마을‘로어빈필드’는 산업단지로 바뀌어 있고, 동심의 활력과 예전의 평화로운 안정감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음만을 확인한다. 남몰래 한적하게 1주일을 지내러 간 곳은 더 이상 삶의 지속성이나 평정심이 머무는 곳이 아니다. 이미 세상은 온통 오염되어 있다. “숨 쉬러 나가다니! 숨 쉴 공간이 없는데.”하는 탄식은 이 불온한 세상에 대한 침통한 낙망이다. 결국 실패로 돌아간 조지 볼링의 금단의 영역을 향한 탈주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곳, 바로 현실의 공간, 삶의 일상성, 그 너절한 다툼의 시공으로 회귀한다.

100년 전의 영국사회, 그 시공을 초월하여 오웰이 전하는 현대사회가 만들어내는 황무지 같은 삶의 표현들은 오늘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2차 대전의 발발이 있기 전에 써진 이 작품이 예견하는 전쟁의 공포와 그 후에 다시금 반복될 인간사회의 어리석음의 반복, 문명적 위기에 대한 전망은 그야말로 그의 선견적 통찰력을 확인케 하여준다. 또한 이야기로서의 친근함은 나와 우리들의 그것처럼 가까이 느껴져서 지금은 서울의 도심 한복판인 곳에 있던 미나리 깡에서 어울려 놀던 어린 시절의 추억에 한 동안 잠기기도 하는 포근한 그 무엇으로 모처럼의 안정감에 빠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걸작은 역시 세월에 풍화되지 않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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