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쉬러 나가다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지극히 평범한 중년 남자의 소박한 해프닝으로서 1주일간의 탈주라는 소재에 산업사회가 야기하는 우울한 정경들을 담아내고 있다. 주인공인 보험조사원,‘조지 볼링’은 주급 7파운드를 버는 하류 중산층, 즉 시대를 대표하는 계층, 일반인의 전형적인 표상이다. 그런데 작품은 오웰의 잘 알려진 작품들인 『위건 부두로 가는 길』,『1984』나 『동물농장』처럼 주제의 무게가 주는 진지함과는 사뭇 다르다 할 만큼 경쾌하고 밝다. 그럼에도 이야기의 그 가벼운 흐름 속에 진중한 문제의식들이 아우성치는 기막힌 작품이다. 더구나 위의 후자인 두 작품을 구성하는 사고의 원천이랄 수 있는 문장들을 발견하게 되거나, 직간접적 영향을 준‘H.G.웰스’를 비롯한 문학 작품들을 흘끔거리게도 하는 것은 부가적 요소치고는 그 가치가 지고(至高)하다.

오웰의 노골적이고 경박하지 않으면서 구사되는 재치 넘치는 문장 또한 지루하기 십상인 1인칭 서술의 구조적 한계를 슬쩍 넘어버리게 해준다. 은근히 재미있어지는 것은 갑자기 굴러들어 온 17파운드의 돈을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고자 결심한 중년 가장의 용처에 대한 고민으로 시작되어 유년시절의 무한한 자유, “시간이 무한정 자기에게 펼쳐져 있으며 무얼 하든 영원히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느낌”으로 충만한 그 활력의 시공간으로 안내되어 펼쳐지는 추억담이라 할 수 있다. 사내아이들만의 독특한 시심(詩心)이라 주장하는 악동으로서의 다양한 일화, 특히 낚시에 얽힌 무용담으로 시작된 추억들은 작은 종자가게를 꾸리는 아버지, 가사(家事)를 우주적 소명으로 아는 어머니와 함께 정말 유쾌한 세계로 한동안 꿈을 꾸게 한다.
그리곤, “한적한 연못가 버드나무 아래 온종일 앉아”있는 것과 같은 안정감과 지속성으로서의 삶, 배가 따뜻해지는 평온함 같은 시공간으로 숙성된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기억은 현실의 삶, 생활의 냉엄한 현실에서 발버둥치는 보통 사람들의 전형인 자신에 대한 자각과 대비되어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두 아이와 항상 돈에 쪼달려 활력이 다 빠져버린 아내, 그리고 허리가 휘청거리는 주택 할부금의 부담을 안은 집, 그래서 마치 무언가 잃을 것이 있는  냥 착각하며, 보수주의자가 되어 남의 밑이나 핥아주는 사람으로 숨 막힐 틈도 없이 틀을 벗어날 수 없는 삶 말이다.
그래서 “나에게 활동적인 삶은 열 여섯 때 끝났다.”라는 이 중년의 보험조사원 조지 볼링이 선언하는 말에는 현대적 삶의 방식이 요구하는 피로가 그대로 묻어있다.

이렇듯 화자의 내레이션을 따라가다 보면 문득 1세기전의 영국사회를 걷는 것이 아니라 21세기 한국사회를 걷고 있다는 느낌에 빠져든다. “해내라! 성취하라!”라는 온통 앞을 위해 달리라는 종용이 난무하고, 물질과 문화적 과시를 위한 소비를 위해 여유로움과 주변의 경이로움을 모두 놓친 채 뛰어가는 조지 볼링이 묘사하는 시대상이 그대로 한 치의 이탈도 없이 판박이 같으니 말이다. 이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조차 동일하다. “양식은 있지만 정신은 멎어버린”사람들, “위협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위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 과연 물질적 풍요를 위해서 우리들이 잃어버리고 있는 것들, 빼앗긴 것들을 소위 신자유주의자들의 공리주의적 계산기는 어떻게 산출해 낼까? 를 생각게 한다.

한편 길가에서 발견한 “본 모양을 그대로 간직한 발간 잉걸 불”에서 “살아있다는 무엇보다 더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고 그것으로부터 “묘하게도 인생이 살 만한 것이라는 확신을 불현듯”느끼는 장면은 이 소박하고 세상을 의심할 줄 알게 된 하류 중산층 가장에게 20여년을 잊고 지내던 자신의 유,소년기를 품어주었던 고향 마을에 대한 향수, 잃어버린 그 무엇들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이어지게 한다.

자신만을 위해 쓰리라 다짐했던 17파운드를 지니고 아내와 직장을 속이고 1주일의 일탈을 감행한다. 현대산업사회가 만들어내는 그 인위와 부정적 흐름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기회주의적 유선형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그러나 평화와 정적을 기대하고 찾아간 고향마을‘로어빈필드’는 산업단지로 바뀌어 있고, 동심의 활력과 예전의 평화로운 안정감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음만을 확인한다. 남몰래 한적하게 1주일을 지내러 간 곳은 더 이상 삶의 지속성이나 평정심이 머무는 곳이 아니다. 이미 세상은 온통 오염되어 있다. “숨 쉬러 나가다니! 숨 쉴 공간이 없는데.”하는 탄식은 이 불온한 세상에 대한 침통한 낙망이다. 결국 실패로 돌아간 조지 볼링의 금단의 영역을 향한 탈주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곳, 바로 현실의 공간, 삶의 일상성, 그 너절한 다툼의 시공으로 회귀한다.

100년 전의 영국사회, 그 시공을 초월하여 오웰이 전하는 현대사회가 만들어내는 황무지 같은 삶의 표현들은 오늘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2차 대전의 발발이 있기 전에 써진 이 작품이 예견하는 전쟁의 공포와 그 후에 다시금 반복될 인간사회의 어리석음의 반복, 문명적 위기에 대한 전망은 그야말로 그의 선견적 통찰력을 확인케 하여준다. 또한 이야기로서의 친근함은 나와 우리들의 그것처럼 가까이 느껴져서 지금은 서울의 도심 한복판인 곳에 있던 미나리 깡에서 어울려 놀던 어린 시절의 추억에 한 동안 잠기기도 하는 포근한 그 무엇으로 모처럼의 안정감에 빠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걸작은 역시 세월에 풍화되지 않는 모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