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학의 - 시대를 아파한 조선 선비의 청국 기행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1
박제가 지음, 박정주 옮김 / 서해문집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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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세기 조선사회의 피폐함에 대한 정황은 비교적 많은 문헌들과 고증에 의해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당위성 주장을 위해 설명되는 비루한 조선의 참상에 경솔한 분노를 일으킬 정도가 아닐 만큼 익숙해져 있지만 200년이 흐른 지금에도 발견되는 동일한 반복을 행하는 우리 사회의 안일과 편협함, 위선의 모습 탓에 은근히 부아가 치미는 것까지 누르기에는 버거운 무엇이 있다.

책은 내편과 외편, 그리고 왕명에 의해 올린 진북학의 세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명확하게 내용의 성격을 구분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긴 하지만 내편은 풍물과 기술, 문화를 중심으로 청(중국)의 선진문물의 수용을 통한 경제부흥을 역설하고 있으며, 외편은 과거제도를 비롯한 국방, 외교, 관직 등의 제도와 운영에 대한 개혁을, 진북학의는 이들 내외편과 내용상 부분적으로 중복되고 있으나 왕에 상신한 공식적 제안으로서의 구체적 방법론을 담고 있다.

그러나 200여 년 전의 한 깨어난 선비의 시각으로만 온전히 바라보는 데에는 분명 거북함이 있다. 조선조 내내 사대부들인 양반 선비의 정신에 찌들어 있는 중화(中華)에 대한 사대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라는 아쉬움이 그것이며, 마치 한글이 언문불일치의 원흉인양 매도하며 중국어 사용의 당위성 주장으로까지 나아가게 한다. 그럼에도 조선의 유교 선비사회가 만들어 낸 폐쇄성과 후진성에 대한 냉혹한 비판과 이를 혁파하기 위한 구체적이고도 실용적인 대안들의 제시로 인해 민과 나라에 대한 충심, 선각자의 통증에 공감을 회피할 수 없게 한다. 또한 제도와 풍물 등 시대상에 대한 풍부한 묘사로 당대를 이해하는 귀중한 사료적 가치와 아울러 ‘북학파’로 알려진 이덕무, 유득공, 박지원 등의 서문이나 참조문 등으로 그 사실적 관계를 보는 역사의 즐거움도 있다.

하루 한 끼 먹기가 힘든 지독하게 헐벗은 민족, 누추하다 못해 걸인의 움막 같은 백성들의 부끄러운 초막들, 남루한 복장에 새끼줄로 허리를 졸라매고 선 궁궐 호위병, 중국 사신이 한 번 왔다 가면 국가의 경비가 없어 야단이 나는 나라였으니 사신단의 일원으로 북경의 넘쳐흐르는 물질의 화려함과 운송수단, 여성들의 화장과 복색, 벽돌을 사용한 가옥과 성(城)의 축조, 관개기술을 비롯한 발전된 농업기술 등 효용성을 우선시 한 물질과 기술에 시선을 맞춘 것은 당연한 요구였을 것이다.

이러한 실사구시의 기술문화 수용의 주장에서 하나의 간과할 수 없는 뚜렷한 기초 사상을 발견 할 수 있는데, 이 모든 것의 저변에는 수탈당하고 착취 속에 신음하는 고단한 백성에 대한 깊은 연민이 있다는 것이다. 김훈의 소설『흑산』에 묘사되었던 역참마부인 마노리의 애환처럼, 말(馬)이 양반의 체면수단으로서의 가치로 전락하여 말은 단지 양반 사대부를 태우고‘걷는 말’에 불과하여, 수레나 마차의 효율적 운송기능에의 접목이라는 지점에 이르지 못한, 소위 물류기능의 낙후성을 지적하고, 이를 통해 불필요하게 동원되는 백성의 노동력 절감이라는 경제적 효과와 아울러 착취로부터의 해방을 도모하는 것과 같다.

당시 조선의 절반이 선비일 만큼 놀고먹는 계급이 많은 사회에서 나머지 백성이 부담하여야 할 공,노역과 세금, 군역의 고통은 삶을 파괴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구조는 제반 사회현상에 연결되어 총체적인 난맥상을 드러내게 되는데, 농업, 상업, 공업과 괴리된 양반계급들이 이들 분야의 발전적 연구를 한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환경이며, 따라서 국가의 기간산업의 생산성은 정체되거나 점진적으로 낙후될 수밖에 없는 토양이 되는 것이다. ‘위항도인(박제가의 호)’이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기도 하다. 즉 비생산적 소비인력이기만 한 양반계급의 생산적 흐름으로의 참여라는 계급제도의 혁파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외편에서는 2개 항에 걸쳐 당시 공맹이나 외우고, 시나 읊어대는 과거제도에서 탈피하여 국가의 정치, 경제, 외교, 산업 정책 등에 실질적인 지식을 검증하는 제도로의 혁신을 주장한다. 이들의 사례로서 꿀 먹은 벙어리인냥 외교무대에서 입 한번 벙긋하지 못하는 양반 사대부들의 무력과 무능이나, 농공업은 물론 건축 및 도로, 운송 등 산업인프라(산업 기간시스템)의 전무와 같은 국가 생산의 낙후성을 비판한다. 특히 이러한 비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제반 부문별로 그 구체적 대안들을 방법론까지 설명하며 제시하고 있다.

인간의 육체에만 의존하는 전국의 생산물 운송체계가 수레의 이용과 그‘규격화’를 통해 획득되는 효율성을 일일이 비교하여 입증하는가 하면 수레의 개발이 가져올 파급적인 효과로서 도로의 규격화, 개발로의 이행 및 물류비용 및 시간의 혁신적 단축 등에 이르는‘총합적 사고’를 도입하고 있다. 이러한 시스템적 사고는 벽돌의 생산, 배의 구조 개선처럼 일면 단순한 발상의 변화이지만 이것들이 주거와 도시, 군사적 방어 체계와 연계되고 생산물의 안정적 수송, 절감 및 유지보관의 효율성, 나아가 국가 생산성의 제고로까지 이어지는 것인데, 이러한 체계적인 정책 사고는 아마 당대에는 획기적인 선견이었을 것이다.

우물안 개구리인 당대 조선 사회의 기득권 계층인 양반계급들이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입으로 유교경전을 충실히 인용하는 것 말고는 외교도, 농사도, 무역은 물론 상업유통도, 그리고 하찮은 농기구는 물론 농업기술을 비롯한 어떠한 산업기술에도 아는 것 없는 그야말로 상무식한들이었으니 국가의 경제력 피폐화의 원인을 알 수 없는 것은 자명한 것이었을 게다. 고작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서 그 얼마 되지도 않는 것으로 행세만 하려고 하였으니, 당대의 도기나 자기들의 바닥이 평평치 못하고 모래가 그대로 붙어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는 것 또한 자업자득인 것이다.

“쓸모없는 선비가 오늘날에는 많고, 쓸모 있는 수레는 오늘날에는 없습니다.”라는 이 한 구절만큼 조선사회를 명료하게 표현하는 문장도 없겠지만, 이는 지금 우리 사회에 그대로 인용하더라도 무난한 말이기도 하다. 대체로 속된 사람이 현명한 사람보다 많으면 속된 사람이 우세하다는 초정선생의 지적처럼 다수가, 지배계층이 이렇게 엉뚱한 길로 들어서서 나라를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것이 우리 사회이다보니 목숨 내걸고 진언하였던 28조 58항목으로 구성된 정유선생의 이 기록에 새삼 행동하지 않는 자신이 부끄럽다는 생각도 든다. 곤고한 백성에 대한 연민과 나라의 발전을 위한 충심이 촘촘히 배어있는, 진실과 강직한 개혁인물의 인격의 진면목이 드러난 귀중한 18세기 정책기획안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의 한심스러운 정치현실을 볼 때 개혁가 박제가 선생의 의지가 더욱 새롭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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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의 고백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
미시마 유키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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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동경을 ‘나’라는 부인하기 어려운 자기 내면 심리의 섬세한 묘사를 통하여 강력한 설득력을 구사한 회심의 미학적 개가(凱歌)이다.
마치 동성애의 고고학적 고찰인양 자신의 성장과정상 성적 발현의 특징들을 성애와 관련한 다양한 인문학적 성찰을 곁들여 당사자인‘나’의 다수와의 다름에 따른 고통에 무심한 듯 동정과 공감을 요구할 만큼 교활하다. 이렇듯 배경을 조성하고 그리고 성적 위기에 처한 동성애자의 심리적 갈등을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깊숙이 탐색한다.

그 탐색은 융의 자아와 자기의 분별적 추구와 같은 지극히 분석적인 성찰이다. 거기에는 자신의 남성성의 모순적 발현에 저항하고 세상의 가치관에 적응하려는 노력의 처참한 고통이 있었음을 확신시키려는 의지가 담겨있는 것 같다. 이것은 자기내면의 반복적인 기만, 그 거짓된 내면이 진실처럼 굳어져야했던 인물을 통해서‘사랑’의 본질을 발견케 하는 작업이 되고, 또한 마음속에 감추어둔 것을 사실대로 숨김없이 말하는‘고백’이라는 드러냄의 형식으로 내밀한 감성의 세계를 통해 증언하고 있는 정신과 육신의 배반적 동거라는 낯선 가능성을 입증하는 수단이 된다.

이것은 고교시절의 한 일화인 버스 안내양에 대한 동급생들의 여성에 대한 반응에 공감하지 못하는 자신의 동성애를 위장하기 위하여 과잉의 성적 언사를 행사하는 기만을 보이는 것으로 드러난다. 또한 어떠한 성적 유발이나 관심도 일으키지 않는 친구의 여동생에 남성으로서의 호감과 친밀감을 가장하여 성 정체성의 정상성을 외부에 확신시키려는 자기 불안의 행위로도 나타난다.
이처럼 남성에게만 반응하는 소년의, 청년의 육체라는 배반된 자기 인식을 숨길 수밖에 없는 자의 무력감으로 이를 은폐하기 위하여 거짓된 외연, 가면을 자기화 시킨다. 그럴수록 이러한 이중성은 자기혐오를 증폭시키고 급기야 이 가면이 진실과 혼동을 일으키고 일면 진실을 대체하기에 이른다.

속인 자기의 내면이 속아서 그 속은 거짓이 자기의 내면이 되는 기만. 이 배신적 공생, 모순이 한 인간을 끝나지 않을 고독 속에 가둬놓는다. 이것은 세상에 적응하려는 남성성의 확인을 위한 시도로 이어져 매춘여성을 통해 남성의 발흥을 확인해보지만 결코 여성에게는 어떠한 정상성도 발생하지 않는 자신을 확인케 할 뿐이다. 결국 이것은 자기 정체성, 변할 수 없는 동성애적 기질의 진실에 사회적 공감을 요구하는 확신 행위이기도 하다. 이것은 노력해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외침이기도 하다.

특히 소설의 마지막장인 4장에 이르면 자기기만으로 혼인을 좌절시켜야만 했던 친구의 여동생 ‘소노타’와의 정신적 불륜을 이어 나감에 따라, 타인의 아내가 된 그녀와의 만남이 귀결되어야 하는 성적 결합의 기대를 완성시킬 수 없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동성애자인‘나’의 심리를 밀도 높게 묘사함으로써 불변적 성 정체성, 그 불가능의 한계를 확고한 진실로 굳혀버린다. 1949년 발표작인 만큼 당대의 일본사회가 동성애를 수용한다는 것은 가능한 이해가 아니었을 것이다.

성도착증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이해는 동류의 인간들에게 고립과 가면의 생활을 강요한다. 그러나 ‘미시마 유키오’의 처절한 자기‘고백’의 형식을 띤 이 치열한 성의 심리학적 폭로는 자기변호에의 안주가 아니라는 측면에서 주류사회에 강력한 설득을 이루어냈을 것만 같다. 그럼에도 이러한 의문이 남는다. 제아무리 자기 감상에 냉소를 보내지만 육체의 그 실체적 감각을 과연 영구히 배반할 수 있을까?하고.

한편 이 작품의 미학적 묘미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고교시절‘오미’라는 어떤 시원적인 거친 야만성, 탄력 넘치는 근육과 터질듯이 굽이치는 혈류의 활기참, 그 피의 역동성을 느끼게 하는 동급생에 대한 성적 갈망의 관능적 터치나, 상상의 공간에서 전개되는 모순적 성희의 묘사, 정신과 육체의 배반적 반응, 성적 갈증과 죽음의 임박성이 동일선상에서 작동하는 그 악마적 쾌락, 내면의 무수한 기만과 합리화의 심리적 작용들이 애틋하다 못해 사무치는 진실성으로 미적 승화, 일종의 숭고함까지 느끼게 한다는 점이다. 더욱이 감각의 화려함이 만들어내는 야릇한 긴장, 춤추는 듯한 이야기의 기복이 가져다주는 쾌락적 요소들은 어떤 만개한 아름다움으로 빠져드는 환각조차 들게 한다. 동성애란 소재를 통해 심약한 인간 정신의 한계를 돌파해보겠다는 호기로운 이 시도는 이처럼 소설적 성공에 동의하게 한다. 그러나 육체를 정신과 분리한 이원적 구조 속에서 통제의 논리로 냉담함을 유지한 그의 시선은 실패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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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11-11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먼저 읽으셨군요, 필리아님. 저도 미시마유키오를 좋아해서 얼마 전에 샀거든요. [금각사]를 좋아하지만 이 책이 편하게 읽히지는 않더라고요. 제가 워낙 중간에 던져놓기를 잘해서 아직도 그대로 있어요. 그래서 필리아님 리뷰도 제게는 좀 어렵네요. 다시 독서를 시작해야겠어요.

반갑습니다, 필리아님 :)

필리아 2011-11-11 16:38   좋아요 0 | URL
네, <금각사>만큼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에요. 그러나 읽기에는 감각적 호소가 많은 만큼 보다 수월하죠. // 결국 태생적인, 일종의 주어진 조건에 안주하며, 자신의 다름을 쓰다듬으며 훌쩍거리기보다는 본능, 혹은 무의식에 저항하는 것이죠. 이를 보다 확대하면 약해빠진 인간들의 자기연민에 냉소를 보내는 것이기도 하구요. 그러나 저는 ‘미시마 유키오’가 정신과 육신을 이원적으로 구분하고 이를 통제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공감하지 못하고 있어요. 육체의 반응과 모순된 정신을 내면화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주인공인 ‘나’는 실패한 것이라고 봐요. 전 미시마의 주장에 반기를 드는 것이지요...

아이리시스 2011-11-11 16:57   좋아요 0 | URL
아, 설명을 들으니 수월해지는데 감각적 호소에 동조하지 못하고 읽어내려갔기 때문일 수 있겠어요. 저도 정신과 육신을 이원적으로 구분하는 게 가능할까 하고 있거든요. 그러니 드라마틱한 자살도 가능한 작가였겠지요. 남들이 보지 못한 것, 남들이 쉽게 인정하지 않는 것들. 그렇게 본인을 몰아간 것은 아닐지. 작가비평을 하자는 건 아니지만요. 잘 안 읽히던 원인이 거기 있었던가 봐요. 저는 [금각사]는 오래됐지만 어려운데 비해 잘 읽힌다고 느꼈던 기억이 있어서요. 무언가에 저항하는 건 언제나 어렵군요. :)
 
사물들 펭귄클래식 109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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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적’인 작품이 발표되자 프랑스 비평가들은 “위대함이 없는 시대와 장엄함이 없는 세계에 관한 충실한 보고서”라고 격찬했다. 즉 대중매체가 욕망하도록 가르쳐준 것만을 갈망하는 무력한 소비사회와 그 속에서 자신들의 내적 삶을 사물들에게 복종당하고 장악당하여 길들여진 사소한 존재로 전락한 인간의 완벽한 묘사라는 것이었다. 모든 인간들이 사물들을 소유하고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꿈, 그것이 곧 이상이며 존재이유라고, 그것이 바로 삶의 진실이라고 여겼던 상처투성이의 욕망의 세상을 묘파한 60년대 프랑스 지식인의 시선은 사실 2011년 지금의 우리사회, 우리들의 초상에 더 가깝다. 아니 우리들이 더욱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회에 있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한 마디로 오늘의 사회를 우린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사는 체계의 모습이 이 사회분석서 같은 소설에 그대로 담겨있다면 지나치다고 하여야 할까. 우린 사물들에 사로잡혀 사물이 내리는 명령, 물질적 부(富)를 꿈꾸는 데 온통 혈안이 되어 있지 않은가? 광고사회, 소비사회라고 부르는 이 시대의 정의처럼 “구입을 유도하고 갈증을 도발하며 경쟁과 상품의 가열된 사기와 쾌락을 촉발하는” 그런 곳이란‘프랑수아 누리시에’의 정당한 지적은 그래서 획득가능성과 실현성과의 간극으로 인간들을 더욱 신음하고 고통스럽게 한다.

사물들은 인간들이 자신들에게 봉사하도록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편리와 신상품에 대한 광기어린 집착과 같은 욕망들을 창조하는 광고사회인 자본주의의 생리는 사물들 자체가 삶인 것처럼 가치를 전도시켜왔다. 본질이 호도된 것인데, 이처럼 사물의 획득에 대한 꿈과 몽상, 인간들이 희구하는 것에 진실이 자리잡는다는 측면에서 사물의 소유가 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 진실을 인간들이 과연 정복할 수 있는가는 정말 꿈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삶 내내 물질적 불안에 시달리는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신음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기도 할 것이다.

이야기(livre) 속으로...

이야기의 대상인물인 스물다섯 살 젊은 커플‘제롬’과 ‘실비’만큼 오늘의 대중을 묘사한 인물도 없으리란 생각을 갖게 된다. 소위 ‘주변 지식인’이라는 범주에 속하기도 하며, 프티부르주아라는 자본주의사회의 대표적 계층이라 할 수 있는 우리들의 초상이기도 하다. 이들은 문화와 지식으로 무장한 사람들이고 그래서 꿈과 몽상에 신속히 달려갈 준비가 되어있는 자들이다. 거침없이 쏟아지는 광고의 홍수들, 그리고 사물들, 이것은 그들이 성취할 수 있는 세계라고 상상하게 한다. 사람들의 비극은 바로 이처럼 외부에서 발생한 문화가 점차적으로 자신들의 내면의 형태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외부에서 주어진 욕망들과 그 실현 가능성 사이에 벌어진, 다시 말해 현대 소비사회에 의해 야기된 갈등으로 사람들의 정신은 분열되고 마모된다. 제롬과 실비는 멋진 아파트, 자동차, 고급식당, 화려한 바캉스, 안정적이고 높은 사회적 지위를 꿈꾼다. 이들은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 맞서는 개성을 결핍한 인간, 내면의 불안을 잊게 해줄 치열한 전투, 진정한 전쟁이 부재한 젊음이다.
욕망을 실현코자하는 계획을 수없이 구상하지만 그 물질의 소유를 위한 여건은 늘 부족하다. 그래서 금방 화를 내며 없애버리곤 한다. 현실적인 삶이 늘 불안하고 허구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처럼 감정적인 생활의 상당부분이 경제적인 것과 긴밀히 연결되어있다 보니 설혹 어떤 사물의 획득이 있을지언정 늘 불만족스럽고 불안한 행복에 멈추고 만다.

그렇다면 소유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물을 지님으로써 얻게 되는 쾌락의 단순한 소유라면 그 소유는 곧 그 이상의 소유를 꿈꾸게 한다. 획득하고 성취하려는 욕망이 적절한 의지로 조절되지 못하고 좋은 취향이라는 순수한 자질로 초월되지 못하는 소유는 불만과 불완전한 기쁨에 머물게 할 것이다. 아마 늘 불안의 반응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결국 소시민화 되어 결핍의 불만 속에 안주하던지 여전히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환상(부자가 되더라도 그것은 영원한 과정에 불과할 것이라는 의미에서)을 꿈꾸거나 할 것이다. 또는‘보장된 행복’을 준다는 광고에 무관심하여 소비에 대해서 파업을 선포하는 태도를 취할 것이다. 사물의 소유가 인간 영혼의 창조적 부활이란 수단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한 이러한 괴로운 욕망을 떨쳐내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끊임없이 사물에 대한 욕망을 창조하는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속성은 인간 개체들을 분열시키고 불안과 불만족한 존재로서 병들게 한다. 이 불온하기 그지없는 자본주의의 생존방식은 잔혹하며 비인간적인 피투성이의 욕망의 세계로서만 작동하는 것이다. ‘조르주 페렉’의 “단순한 방법으로 살기를 방해하는 수많은 사물들(상품들)에 대한 광고 유혹”이 바로 ‘사물들’이라는 대답은 이러한 욕망의 시선과 물질적 재산의 본질에 대한 직접적 답변이라 할 것이다. 또한 오늘의 대중이 사물이라는 저주스런 신비에 물신화 되고 있음은 잠자고 있는 의식의 깨어남에 대한 요청이기도 할 것이다. 사물들의 욕망과 소비사회에 의해 생성된 유혹에 민감하고 확실하게 반응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이기도 한 이 소설적 이야기는 노동과 물질적 쾌락에 대한 사회학적 관점의 유익한 증명과 인식을 제공한다.
인간 모두를 소유의 욕망에 신경증적 발작을 앓게 하는 현대 소비사회의 전경을 한 걸음 떨어져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이 책에는 이처럼 우리들 삶의 태도에 실체적인 의문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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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
아데나 할펀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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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일생’이란 ‘모파상’의 그것처럼 매양 신산한 어떤 통증을 준다. 아마 여자의 성적 자유와 삶의 여러 수단들을 선택 할 수 있는 자유가 남자의 그것에 미치지 못했다는 약자에 대한 연민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세월의 풍상을 이겨내지 못한 머리에는 서리가 하얗게 내리고 피부는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아래로 흘러내리는 육신이 못 견디게 느껴지는 어떤 날이 되면 문득 지나버린, 혹은 잃어버린 듯한 젊은 시절의 이루지 못한 욕망들로 몸을 부르르 떨어댈지도 모를 일이다.

일흔다섯 살의 노년에 이른 여자, 아니 여전히 누군가의 아내였으며, 엄마이며 할머니로서 존재하는 자신이 온통 여인으로서의 삶을 빼앗겨온 삶 같다고 여겨지는 것. 그래서 그녀는 일흔다섯의 생일 케익 촛불 앞에서 스물아홉 살 여자이기를 기도한다. 결코 재화의 부족함을 느끼지 않게 해주었지만 애틋한 사랑이 있었는지 의심스럽기만 했던 부부생활, 먼저 떠나버린 남편 ‘하워드’가 아닌, 설렘이 그득한 사랑을 꿈꾸면서.

이처럼 여성의 심리적 터치가 돋보이는 이 소설은 일견 발칙함 그것이다. 스물다섯 살 손녀가 누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부럽기만 하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 마음껏 삶의 현장에 뛰어들어 자신들만의 세계를 일궈 나가는 그 당당함, 세련되고 화려한 주점들과 식당들, 그 속에 어우러져 발산되는 젊은 남녀의 열기, 자유로운 자기 선택과 책임에서 나오는 현명함 등 이십대 여인의 싱그런 향기에 작은 질투를 느끼는 것이다.

스물아홉 여인으로서의 단 하루의 삶이라는 환상 같은 소원이 이루어져 매력적인 여체를 다시금 갖게 된다면 여자들이여, 그 귀중한 하루의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겠는가? 스물아홉이 된 일흔다섯의‘엘리’는 패션디자이너인 손녀‘루시’의 격려로 멋진 젊은이를 만나게 된다. 소설은 이 격정적인 만남의 전후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흔다섯 동년배 친구, 오십대의 딸, 스물다섯 손녀의 에피소드에 렌즈를 들이댐으로써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은 진정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는 것은 또한 무엇인지, 주어진 삶의 순간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한다.
사라져버린 엄마 엘리를, 잃어버릴 것을 상상치도 못했던 친구인 엘리를 찾아 허둥대는 오십대의 딸 바바라와 일흔다섯 살 친구 프리다는 이 과정에서 자신들이 스스로 얽어맨 삶의 실체를 발견하고, 이처럼 자신을 찾는 두 사람의 행동을 바라보면서 엘리 또한 엄마로서 딸에 대한 기대라는 속박, 자기 삶을 위해 너그러워질 수 있는 친구에 대한 깨달음의 시간이 된다.

스물아홉 살 처녀로 변해버린 엘리, 죽은 남편 하워드와의 삶이 자신의 인생에서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와의 일생에 과연 사랑이란 것이 존재하긴 한 것인지, 그 주어진 하루가 확인하려 했던 것은 진정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휘몰아쳐대던 열정적 밤과의 작별만큼이나 고통스러운 것이다.

자신의 진정한 짝을 비로소 만났다는 흥분은 해방된 자유로 열정에 몸을 불사른다. 소설의 본질적 주제와는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남편으로부터는 받아보지 못했던 애무와 새로이 경험하는 성적 욕망의 분출로 황홀한 기분에 사로잡혀 남편을 원망하며 인생을 허비했다고까지 말하는 엘리의 목소리는 발칙하다 못해 끔찍한 기분이 들게 하기도 한다. 이러한 형태의 문장들이나 표현이 이 작품에는 비교적 무성하게 등장하는데 전형적인 ‘여성소설’이라 부르는데 주저치 않게 하는 요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엄마의 인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바바라의 순수한 자기 삶에 대한 직시, 나이듦이란 것이 주어진 시간에 대한 온전히 수동적인 삶의 요구인 것은 아니며, 자신을 소중히 끌어안음으로서 더욱 소중하고 풍요로운 삶으로의 전환이 가능한 것임을 증명하기도 한다.

젊음은 다시 오지 않는다. 그 시간의 소중하고 신비로움을 헛되이 보내는 어리석음을 우린 그때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그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젊음에 미련을 보내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또한 중년이 되었던 노년이 되었건 그 순간을 결코 피동의 시간으로 포기하는 것처럼 미련한 것도 또한 없을 것이다. 삶의 모든 순간이 얼마나 귀중하고 아름다운가. 일면 얄궂은 발랄함의 은밀함이 경망스럽기도 하지만 삶의 고귀함에 대한 진중한 성찰이 이 가벼움을 능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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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조짐 패러독스 7
보이지 않는 위원회 지음, 성귀수 옮김 / 여름언덕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 가에 따라 불온 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철학적 인식을 가미하면 ‘존재’라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비로소 볼 수 있게 하는 횡단적인 조치라고도 할 수 있다. 애써 외면하거나 회피해서 보이지 않기도 하며, 그로인해 인식자체에서 지워져버려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 것들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권력을, 부(富)를 독점적으로 유지하고 지속시키려는 부류에게는 이들의 자기 영역내 침입이 불온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습격해오는 알 수 없는 불안함으로 때려잡고 싶은 충동, 폭력을 행사하고 싶은 유혹을 참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을 진단하고 그 진실을 찾으려는 자들에게는 이 ‘보이지 않는 위원회’의 젊은이들의 분노를 포용하고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만들어내는 조언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자기가 평온하게 안주하는 영역에 낯설고 이질적인 것들이 밀고 들어오면 즉각 방어기제가 살아나 적대로 날을 세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생경한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공존할 수 있는 것인지 논의하고 타협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럼으로써 발전하고 완전한 진리로 다가설 수 있다. 이 엄연한 삶의 공리를 실천하는 것은 간단하고 수월한 일이다. 허나 기득권자들은 자기의 능력 이상을 가지기 위해 무조건 공격적 모드에 돌입한다. 여기엔 무한한 소모전과 후퇴의 손실만 기다릴 뿐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그 첫 부분은 오늘의 선진경제 체제를 가진, 아니 지구촌 모두라 해도 별다른 왜곡은 없을 것이다. 세계화를 외친 신자유주의가 어디 휩쓸지 않은 곳이 없는 만큼, 지옥처럼 변해버린 지구촌 전체에 내재된 공통된 현상 - 개인화, 인간관계의 소멸, 노동의 허구성, 도시화의 냉소주의, 경제, 환경, 문명의 쇠퇴 - 을 진단하고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장에서는 이처럼 황폐화되고 잔혹한 세상을 전복하기 위한 실천 매뉴얼로서 그야말로 반란을 위한 행동 단계별 세부 지침을 설명하고 있다. 아마 ‘에릭 호퍼’의 대중운동의 시작과 성공을 위한 과정별 가이드를 완결하는 세부 행동요강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선 ‘나는 나’라는 마치 개성을 추켜세우는 듯한 지금 이 세상을 휩쓰는 표어를 들여다보자. 이 대중의 개인화는 생활, 노동, 불행의 모든 조건이 개별화되는 것이며, 이로 인해 개인들의 분열증은 확산되고 편집증적 미세입자로 핵분열한다. 내가 나이고 싶을수록 공허감은 깊어지고 자신을 표현하려면 할수록 고갈되어간다. 결국 세상은 이렇게 분할된 자아를 만들어 낼수록 손쉽게 개인들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이 기획은 실로 오랫동안 축적된 개념의 개가이다. 권력이 이 상황을 즐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더구나 국민을 조사, 비교, 훈육, 분리하는 교육에 나섬으로써 체제의 통제를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분쇄하는데 학교 중심의 구조를 통해 유용한 질서를 확보해왔다. 각 개인의 시민권만 남게 만들려는 혹독한 개체화 작업은 성공했다. 프랑스 등 서구 국가들은 이를 위해 수백 년이란 노력을 해왔으니, 20세기 들어서야 근대화를 시작하고 그나마 독립국가로서는 수십 년에 불과한 한국의 그 압축적 강도로 인한 민의 시련은 가히 혹독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이해해도 될 것이다.

이러한 개인화와 인간관계 해체 작업은 자본주의 지배질서가 축적한 놀라운 책략이다. 게다가 오늘의 노동현실은 노동의 두 가지 모순인 착취와 참여라는 양면적 감정을 교활하게 사용하는 자본가와 그들의 원숭이들이 제공하는 기만적 허구에 기초하고 있다. 여가활동이란 그럴듯한 언어는 결국 노동력 강화라는 기본전제를 통해 태어났으며, 숭배할 대상으로 노동을 치켜세움으로써 인간들의 고유한 근거인 친숙함, 혈연관계, 동네, 장소와 사람들, 애착 등을 박탈하고 황폐화 시키고 고립시켜왔다.

또한 일을 한다는 것은 더 이상 상품을 만든다는 경제적 필요성보다는 생산자와 소비자를 만들고, 어떻게든 노동질서를 보존한다는 정치적 필요성에 더욱 밀접하게 연관지워짐에 따라 생산활동이 부질없는 짓이 되어버리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그럴듯하게 빚어내는 일에 집중하게 되었다. 결국 ‘나는 나’라는 개성화의 술책에 함몰되게 하는 것이다.

이제 고용되려면 고용주가 내세우는 획일적 기준에 합치해야 한다. 여기에 동원 될 수 있으려면 살짝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함을 의미한다.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부터의 이탈, 그로 인한 소외상태는 자아가 노동의 주체가 아닌 대상이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노동력이 아닌 자가 자신을 팔아먹어야 생존대열에서 낙오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화의 새로운‘매춘적’규범이 고착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개인은 이제 상품 그자체이고 분열되어 권력이 용이하게 종속시킬 수 있는 물질이 되어버린 것이다. 여기에 무슨 인간적 연민이니 나아가 공동체 정신과 나눔이란 복지가 깃들 여지가 있겠는가?

착취로 쌓은 부로 점령한 언론 재벌들은 미디어를 조작하여 진실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강북과 강남이라는 계층의 대결, 변두리 지역과 국가의 대결이라는 악질적 구조까지 만들어내면서 광분하고 있다. 극렬한 구분짓기, 자기 영역을 철옹성처럼 공고하게 하는 작업의 일환이다. 이제 이번 정부가 재벌 컨소시엄들에게 베푼 종편방송의 개국으로 더욱 극성맞게 보이지 않는 존재들 - 청년, 노동자, 실업자, 소수자, 약자, 장애자, 빈곤층, 이주자... - 을 지워버리고 대중의 개인화에 열을 올릴 것이다. 분열된 개체들은 아무런 힘도 없다. 그저 개처럼 끌려가면서 뒤늦게 속았음을 후회할 것이다. 점점 회생의 가망성이 없는 지옥의 나래로 떨어져가는 형국이다.

소상인, 영세기업주, 하급공무원, 중견사원, 교수, 기자 등‘프티부르주아(petit bourgeois:소시민) ’들은 항상 역사의 과정에서 한 발 물러서서 자신들의 개인적 삶에만 연민 가득한 시선을 보내며 계층간의 전쟁에 대해 눈 딱 감고 모른 척 한다. 이들 비계급적 집단만큼 양심을 속이는데 능한 인간들도 없다. 자신들은 매춘 노예가 마치 아니란 듯이.
이와 같이 ‘일곱 개의 동심원’이라는 첫 장은 이 세상을 지옥, 바로 그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니 이 지옥을 사람이 살 수 있는 세상으로 뒤집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두 번 째 장은 그래서‘반란’이다. 이 반란의 장을 일일이 묘파(描破)하는 것은 일종의 게릴라행동 지침요강을 약술하는 우스운 모양이 되지만 일관된 목소리는 하나이다. 내부의 결집력, 그 밀도만으로도 충분히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코뮌의 구성에 대한 외침이다. 모든 경제적 의존관계와 정치적 예속을 청산하고 내부가 들여다보이지 않는 불투명한 영역인 코뮌을 만들고 행동하자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대중운동의 고전적 매뉴얼이라 하는 것들에 무수히 등장하는 내용이기에 그리 참신하고 이해하여야 할 지혜는 아니다. 물론 이것을 써 먹어야 한다거나 실천 기술에 참조해야 하는 불행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겠지만 말이다.

이 외에도 녹색자본주의의 허상, 종교가 된 자본주의 경제의 정치화 현상 등, 병적 상태에 빠진 현실의 비판이 질주하듯 씌어있다. 공통의 언어를 상실한 세상, 그러하다보니 언어를 공유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부와 권력의 비대칭성의 심화, 사회 공감대의 증발을 부채질하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보수 언론의 몽매함, 부와 권력을 지배하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는 꼭두각시들에 환멸을 느낀 대중들이 이들보다 훨씬 현명하고 성숙했음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야인인 시민을 시장에 당선시키지 않았던가. 다소 급진적이고 단선적인 언어로 거칠게 써진 책이지만 세계의 청년들과 좌절한 자들이 작금의 세상을 얼마나 위기로 인식하고 있는지 확인하기에 충분한 것이라 하겠다. 이 책은 두려워할 이유가 있는 자들에게만 불온할 뿐이다. 결코 대중에게는 불온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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