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Thirty - 젊은 작가 7인의 상상 이상의 서른 이야기
김언수 외 지음 / 작가정신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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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나이 삼십, 내겐 이 시절이 어떤 것이었나를 기억해보게 된다. 그리곤 젊은 작가들이 그려내고 있는 서른처럼 경계에선 고통의 치열함이 있었는지를 비교해보게 된다. 그래서 오늘의‘30’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지배하는 인식을 이해하는 시간이 되어 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이처럼 온통 흑색의 혼돈일지는 예상치 못했다. 한 없이 허방을 딛고 공허하며 죽음의 그늘만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암흑을 말하니 빛이 있는 것 아니냐는 말장난 같은 것을 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서른 살, 삼십대의 나이가 이렇게 서툴고 강렬한 삶의 통증에 휘청거려야만 하는 것인지 낯설기만 하다.

강물에 몸을 던지고, 몇 푼의 돈 때문에 살인에 휘말리고, 순회 살인에, 유령이 된 불륜녀의 죽음이 떠돌며, 생의 기억을 팔아 쾌락과 죽음을 사고, 자살을 위해 심산의 고시원을 찾아들기도 하며, 자살이 상품이 된 공간을 떠도는 그야말로 서른의 삶이 온통 죽음의 세계로 도배 되어있다.
이들이 회피하는 것이 삶 자체인가? 아니면 삶의 배경이 되는 것들, 인간이 만들어 낸 무수한 질서들, 다가가야 할 세계에 대한 미지의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한 것인가? 세뇌된 욕망의 충족될 수 없는 허기를 알아차린 것 때문일까?

오늘의 서른은 지금 이렇게 혹독하고도 잔인한 시공에 놓여있는 것인가?! 안락과 지배와 권위와 부와 물질만을 선이라고 가르쳐 온 이 사회의 반작용이 아닐까? 망국적 교육열, 타자는 경쟁해서 물리칠 대상이거나 복속시켜야 할 존재라는 기이한 개인주의에 몰입해왔던 시대의 몽매함에 세뇌된 이 사회의 정신 때문이 아닐까? 먼저 손을 내밀지 모르는 사람들, 사랑도 단지 몸이 따라가는 감각적 쾌락일 뿐이라고 믿는 사람들, 돈은 도덕성위에 존재하는 신앙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 인간도 역시 다른 모든 사물과 자연처럼 상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사회가 바로 우리 사회이긴 하다. 이것이 거대한 질서를 형성하고 시스템화 되어 스스로들을 숨 막히는 경주의 대열로 몰아세우는 것이 맞다.

그러나 우린 반성할 줄 알고, 끊임없이 저항 할 수 있으며, 자신의 내적 평온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닌가? 견고하게 짜인 무수한 사회의 네트워크들, 자신들의 영역을 항구화하려는 누적된 질서들이 삼십이란 나이에겐 더없이 버거운 장벽이지만 세상에 그 어떤 것이 영구적이던가? 단 한 순간도 변하지 않고 정체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찰나의 멈춤도 없이 변화하지 않는가?
무한히 계속 될 것만 같은 생의 공포? 이것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더욱 깊어진다. 그럼에도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이냐는 정의에 따라 이 공포는 다른 것들로 대체 될 수 있다. 어떤 세상의 질서에 편입되기만 하려는 삼십은 공포만 느낄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부모 세대들이 숭배하라고 가르친 것들의 많은 허상들을 내 던지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일곱 작가의 글 중, 유독 하나의 작품만이 내 시선을 오래 머물게 했는데, ‘정용준’의 『그들과 여기까지』이다. 아마 유일하게 닫혔던 마음이 열리고, 타인이 내미는 손의 의미를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이다. 자살을 결심한 청년의 생존 연장의 이유가 하찮을 정도로 당연하다. 산다는 것은 이렇게 사소한 것으로 지탱되는 것일 게다. 그리고 ‘김성중’의 『국경의 시장』이나, ‘박화영’의 『자살 관광 특구』에서 공히 느껴지는 거래할 수 없는 것을 거래하는 환상의 공간인 오늘, 이 위태로운 세계에 대한 그 시니컬한 관조가 마음 깊은 곳에 파문을 일으킨다.

이십의 삶, 삼십의 삶, 사십의 삶, 오십의 삶, 육십 그리고 노년의 삶, 그 본질이 무엇이 다를까? 그 허망함과 어처구니없음, 욕망의 좌절, 엉뚱한 곳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모두 같은 일이지 않을까? 삼십, 삶을 이렇게 치열하게, 강박적으로만 볼 이유는 없지 않을까. 죽음이 있음으로서 삶이란 말이 가능하듯이 모든 것에는 다른 세계가 있기 마련이다. 서른을 말하는 이 소설집을 읽게 되면서 내 아이들이 부대끼는 세상에 대한 인식이 이 정도였구나 하는 시린 통증을 느낀다. 그들이 경계에 서서 위태로운 걸음을 더 이상 걷지 않는 세상을 기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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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어의 성립 - 서구어가 일본 근대를 만나 새로운 언어가 되기까지
야나부 아키라 지음, 김옥희 옮김 / 마음산책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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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는 구체성을 띤 것이던 어떤 관념적인 추상성을 함축하는 것이던 그것을 통해 우린 그것에 해당하는 개념이나 이미지를 떠 올린다.
형체가 있는 사물일지라도 보지 못한 것을 지칭하는 단어를 들으면 우린 단어와 사물을 선뜻 연결하지 못한다. 연상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인데, 하물며 경험하지도 느낄 수도 없는 추상적 관념어야말로 그 의미 그대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서구의 문명이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동아시아에 본격적으로 밀려들어 온 것을 일본의 메이지(明治)유신을 기점으로 보면 150년 가까운 시간이 된다. 우리의 경우는 이러한 일본의 근대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식되었으니 일본과는 다소 다른 과정을 거쳤다고 할 수 있겠다. 어쨌든 이 낯선 세계의 사물들과 관념의 이해를 위해서는 동아시아의 언어로 번역되어야 했는데, 한 번도 있었던 적이 없고, 느낀 적도 없는, 아니 생각해 본적도 없는 관념의 세계와 사물이니 당연히 자국의 언어에 그런 의미를 그대로 대체할 단어가 있을 리 없다. 당대의 번역어는 이처럼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내는 과정일 수밖에 없었으며, 이것은 시대상, 문화적 배경, 사람들의 정신적 구조 등을 반영하는 산물이었음을 의미한다.

저자는 이 이질적인 서구문명을 표상하는 언어를 어떻게 일본의, 동아시아의 언어로 반영하는 가의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그래서 그 반영과 성립의 과정을 통해서 번역어에 침윤된 문화적 욕망의 재생산의 현상을 분석하고 있다. 일례로 18세기 일본에는‘society’라는 특정의 목적을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광의의 공동체라는 개념이 있지 않았으며, ‘Individual'처럼 인간 개체에 대한 자율적 존재로서의 개인이란 인식이 존재할 여지가 없었다. 따라서 이들 단어를 동일한 의미를 가진 자국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실로 난감한 일이었으며, 결국 새로운 조어를 만들어내는 작업이 진행되어야 했는데, 바로 이 신조어의 제작과 자국의 언어적 습관에 정착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여러 문화적 정신구조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대표하는 단어로 사회, 개인을 비롯해 「존재, 미, 연애, 근대, 권리, 자연, 자유, 그(그녀)」등 열 개의 단어를 통해 이들 단어가 어떻게 번역어로 조성되고 살아남아 오늘에 기계적으로 치환되는 언어가 되었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어떤 단어가 이질적인 사회에 지식으로 들어올지라도 그 구체적인 용례가 여전히 부족한 상태에서 그 뜻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힘들 수밖에 없다. ‘교제’나 ‘세상’과 같은 이미 사용하던 단어를 society 의 초기번역어로 사용하지만 이들 기존의 단어로 소사이어티의 의미를 온전히 전달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결과적으로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던‘사(社)’와‘회(會)’의 합성을 통해 사회(社會)라는 신조어가 번역어로 정착되는 것처럼 두 글자의 고유의 의미는 사라지고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단어를 만드는 것이다. 이 신조어는 이처럼 의미를 대응시키지 않음으로써 원어와의 의미의 어긋남을 회피하는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당대 일본인들의 한자어에 대한 일종의‘카세트 효과’가 반영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왠지 어감이 좀 더 고상하고 고급스러운 것과 같은 막연한 느낌, 사실은 텅 빈 보석함(카세트)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괜찮은 것이 들어 있을 것 같다는 매혹과 같은 현혹이라는 것이다. 이것에는 아주 중대한 시사점이 있다. 교제나 세상과 같은 말을 제치고 본래의 사의 어감도 회의 어감도 없는 사회라는 번역어가 살아남은 것에는 막연히 관련 있을 것이라는 믿음, 의미 반영의 미흡함이 오히려 본래의 의미를 채워 넣을 수 있다는 빈 공간의 역설이라는 발견이다.

또한 기존에 사용하던 일상 속 단어의 의미를 확장하여 바꾸고 그것을 통해 현실 자체를 바꾸고자 하는 것은 이미 현실의 무게를 짊어진 단어로는 한계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오히려 의미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유행하고 남용되어 다의(多意)적이 되고, 이 다의적이라는 의미 없음으로 인해 그것에 표면적 의미를 부여하여 이면적 의미와 결합하여 번역어로서의 의미를 완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태로 형성된 대표적 번역어로‘근대(近代)’를 설명하고 있는데, modern이 지니고 있던 “시대의 구분중 하나”라는 표면적 의미 외에 가치로서의 시대적 개념인 이면적 의미를 떠맡게 된 것은 하나의 본보기다.

한편 또 다른 카세트효과의 일종으로 beauty의 번역어인‘미(美)’에 대한 소개는 흥미롭다. 『금각사』와 『가면의 고백』으로 잘 알려진‘미시마 유키오’의 미의 트릭을 예로 들고 있는데, 대외적 대화나 평론에서는 미의 개념을 한없이 폄하하고 비난하다가 정작 자신의 소설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하는 이중 행위를 함으로써 모호함과 알 수 없음이라는 인위적인 카세트효과를 불러 미에 대한 우월감을 과시하여 고상한 언어로 고착화시킨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구태여 허영과 유사한 의식으로 간단히 정의하고 있지만 ‘사카이 나오키’가 그의 저술『번역과 주체』에서 말한 일종의 ‘문화적 본질주의’라는 전체주의적 요소를 발견할 수 도 있다. 이것은 감정이 무매개적으로 공유됨으로써 공감의 일체화가 이루어지는 전체성으로의 합일의 사례처럼 보이며, 공유된 심미적 정서로 통합된 공동체와 국가의 통합체로서의 관점으로 충분히 해석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점이 이 책의 한계로 보인다. 비평적 관점을 가지고 있으나 표피적인 판단에 그치고 있다는 점이다. 카세트효과를 야기한 그 근원의 심층에는 다가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책의 주제로 돌아가서 번역어의 문자 그대로 성립과정의 유형을 통해 정신문화적 현상을 탐색할 수 도 있다. 자국 언어의 고유한 특성으로 인한 한계에서 비롯된‘존재(存在:being)’와 같은 단어들이나, 기존의 단어가 지닌 의미와의 모순을 일으키는‘자연(自然: nature)’이나 부정이 오히려 자체의 의미를 덮어버림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 '자유(自由;liberty)'와 같은 단어가 그 예이다. 추상적 의미를 지닌 기본적 동사는 명사화하기 힘들다는 언어적 한계로 인해, be동사의 진행형인 being의 직역인 ‘있음’을 기초로하여 ‘있음론’의 활용이 아니라 ‘존재론’으로 활용하는 것처럼 ‘있음’이 아니라 ‘존재’가 번역어로 살아남는 것이다. 자유의 경우는 ‘제멋대로 구는’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었었으나 liberty의 번역어로 자유를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부정적 카세트효과가 이용되는 양상도 발견된다.

특히 자연은 “저절로 그렇게 된 모습”이라는 ‘자연스럽다. ’의 의미는 지니고 있었으나 nature가 지닌 “정신적이 아닌 외적 경험 대상의 총체, 즉 물체계 및 물체계의 여러 현상”이란 뜻은 없었다.
이것은 자연이 nature의 번역어가 되었다고 곧바로 nature의 의미를 제대로 갖게 된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결국 일본문학이 이러한 몰이해(기존의 자연에 대한 인식)로 인하여 소재의 이상화를 배격한다는 구실 하에 ‘자연을 그대로 쓴다’라는 왜곡된 도입으로 이어진 것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일본 자연주의 문학을 발흥하게 했으며 이것을 곧 극사실주의 문학인 사소설로 이어지게 한‘다야마 가타이’로부터 번역어 성립과정에서 발견되는 왜곡, 오해, 허영이라는 의식의 총체를 이해 할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우리들이 무심코 별다른 저항 없이 사용하는 이들 단어들이 이러한 번역어로서의 성립과정을 겪고 살아남은 언어라는 이해는 우리가 놓치고 있던 관점을 일깨운다. 가장 의미적 접근이 잘 된 적절한 단어가 번역어로 성립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나, 빈약한 의미의 비대칭의 언어가 의미를 채워감으로써 완성되어간다는 것, 한자어 중심의 표현으로 자국 고유의 표현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 등의 지적은 우리의 언어 사용에 반성과 귀중한 참조점이 되어 준다. 근대화가 이들 서구문명의 번역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에서‘번역된 근대’라 불리듯이 서구에 대한 무분별한 동일화의 욕망과 상실한 주체성의 반영이 아니라 이제 우리의 번역된 단어 하나하나가 우리의 정신과 문화를 담아내는 것으로서 성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가 반성해야 할 언어 습관이 떠오른다. 한자어의 조합을 통해 신조어로서 번역어를 만들어 낸 일본인들과 달리 최근의 우리는 영어를 그대로 우리의 언어로 이식하고 있다. 이것은 역시 일본의 서구에 대한 동일화의 욕망, 주체의 상실을 반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정신을 서구의 것으로 대체함으로써 그것이 될 수 있다는 문화국민주의적 퇴보라 할 수 있다. 언어란 하루 아침에 자기의 것으로 정착되지 않는다. 어쩌면 속 빈 카세트에 의미를 채워 넣어 완성적인 진짜 보석함으로 만들어가는 일본인들의 일견 허영심 속에 진실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언어는 자국의 정신이다. 이 책이 비록 문화적 본질과 주체의 탐구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지만 문화로서의 외국어를 자국의 언어로 해석하려는 과정의 치열함을 통해 어떻게 정신으로서의 문화가 변화해나가는지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일본, 동아시아의 근대를 언어와 문화라는 시각에서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귀한 계기가 되어주는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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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7 1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9 0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도권 둘레길 여행 바이블 - 지친 일상을 쾌적하게 바꾸는 참살이 여행
이상호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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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 고층빌딩과 수많은 사람들, 차량들이 만들어내는 감각을 무디게 만드는 이질적인 소음에 시달리고, 꽉 짜여 무력감을 야기하는 단조로운 일상의 지루함과 피곤에 쪄들어 있는 나를 느낄 때면 어딘가를 무작정 걷고 싶은 충동으로 헐떡이곤 한다. 메마른 아스팔트와 시멘트길이나 인공적인 장소가 아닌 그 어떤 곳, 마냥 홀로 걷다가 사위를 둘러보고 또는 가던 길 멈추고 나무나 바위에 앉아 무념의 여유를 자연과 호흡하고 싶은 그런 욕구에 시달리곤 한다.
그렇다고 인파가 즐비한 유명한 산이나 계곡, 관광지를 찾아 나설 마음은 추호도 없으며, 어딘가를 올라 세상을 저 아래로 내려다보며 호연지기 같은 걸 느끼고픈 허영도 없으니 마땅히 이 모호한 심사를 받아 줄 장소가 흔쾌히 그려지지 않곤 했다.

이런 내게 사는 곳 가까이에 언제라도 다가가 내 몸과 정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 도보 길을 안내해 주는 이 책은 마치 내 마음 속의 간절한 정화의 욕망을 알기라도 한 듯한, 좀 과장하자면 성스런 경전과도 같은 고마움이라 할 수 있다. 그저 작은 준비로 배낭 하나 둘러메고 가볍게 향할 수 있는 자연과 어우러진 길, 도심에서 수 십 미터만 벗어나도 자연 속에 있는 듯한 길, 구태여 산 정상과 같은 목표를 가질 필요가 없는 길, 그저 무념무상 터벅터벅 내 발걸음과 흙이 마찰하는 소리만을 들리는 그런 길에 대한 기대가 충족되었으니 그리 과장이랄 것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초행길일 밖에 없는 내게 소개되는 서울과 수도권에 개설된 수십의 둘레길, 게다가 둘레길 마다 저마다 고유의 특색을 지닌 코스들에 접근할 수 있는 진입 경로로부터, 둘레길 내비게이션이랄 만큼 혹여 경로에 잘 못 들어설까 꼼꼼하고 상세하게 기술된 안내는 길눈 어두운 나 같은 이에게는 진정 완벽한 트레킹 지침서가 아닐 수 없다. 열 세 개의 코스로 이뤄진 남양주 소재 다산길이나, 무려 스물한 개 코스로 구성된 북한산 둘레길처럼 각 둘레길마다 너 댓개의 코스로 구성되어 비교적 평지인 곳, 약간의 구릉이 있는 곳, 강변길이 이어진 곳, 사찰과 유적 등 역사와 이야기가 흐르는 곳, 숲과 호수와 계곡이 있는 곳 등 둘레길마다 고유의 성격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어 내 감정의 느낌에 따른 선택이 가능토록 설명되어 있다는 것도 아주 유용한 정보라 할 수 있다.

지속적인 체력단련을 하지 못하고 있는 내겐 둘레길의 코스별 거리나 소요시간, 요구되는 걷기의 난이도는 매우 중요한 정보가 아닐 수 없다. 가볍게 운동화신고 별다른 의복을 준비하지 않았는데 등산화나 트레킹 전문화가 요구된다거나 스틱, 여벌의 옷 등이 필요하게 되면 난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소개되고 있는 일백여 남짓한 코스마다 별 한개 두 개 등 난이도의 표시와 코스의 고저 등 중요한 특징, 정확한 코스연장과 음료나 휴식처 유무는 내 자신의 능력에 기초한 선택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보면 내 성향과 체질에 맞게 느껴지는, 호감이 가는 몇 개의 둘레길 코스가 눈에 띈다. 예를 들어 난이도에 별 세 개가 표시된 북한산 둘레길 제14구간인‘산너미길’은 왠지 체력적 자신감이 붙고 나면 찾아야지 하고 미루게 되고, 북한산 생태 숲이 있는 별 하나짜리 4구간‘솔샘길’은 마음에 새기게 된다.

특히 북악산 툴레길은 방송매체에서도 수차례 소개되었음에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건만 창의문에서 시작하여 백사실계곡을 지나 홍치문으로 이어지는 2코스는 인상적인 자연의 풍광과 미술관, 이국적 카페까지 어울려 하시라도 달려가고픈 심정으로 유혹한다. 또한 다산 정약용선생의 유적지에 이르는 다산실 2코스의 폐철로와 연꽃마을로 이어지는 여정 또한 매력적으로 다가오며, 경기도 시흥 늠내길 제4코스인 옛길은 여우고개, 소래산 마애상, 청룡약수터와 어울려 각각에 서린 다양한 이야기들이 들려 올 것만 같은 기대감을 갖게 한다. 이외에도 군포의 진산이라는 수리산 자락에 펼쳐진 일명 바람고개길(수릿길)이나 화성시에 있는 융건릉둘레길의 솔숲은 마냥 낭만적인 정취로 유혹해댄다. 예술의 향기를 느끼고 싶을 때, 자연 속에서 한껏 고독의 멋을 부리고 싶을 때, 옛 선현들의 그윽한 향취에 물들고 싶을 때, 그저 자연의 숲과 강이 발산하는 순수함에 깃들고 싶을 때, 그러한 다종의 느낌에 따라 내가 하시라도 내 딛을 수 있는 길들이 나를 위한 길처럼 손짓하고 있다는 매혹에 젖어든다.

이제 내겐 나를 해소할 수 있는 장소에 대한 변명의 구실이 사라졌다. 언제라도 마냥 걸으며 자연의 신비로운 기운을 온 몸으로 느끼고 싶었던 욕망의 길이 내게 펼쳐졌으니 말이다. 그저 갇혀있어 막혀있던 내 숨통이 그야말로 탁 트일 것만 같다. 아마 이 책은 내 배낭에 담겨 의기소침하고 표정을 빼앗아 갈 때면 나를 위한 위로와 충전의 길을 동행할 것 같다. 절로 마음이 상쾌해지고 의욕이 솟는 어떤 즐거움이 몰려온다. 겸손함으로 시작하는 작가의 말에도 불구하고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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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세상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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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가 배출해대는 욕망의 찌꺼기가 쌓아 올린 거대한 쓰레기 더미, 그것이 하도 추해서 강의 물안개가 피어올라 자꾸 가리려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무대인 꽃섬을 헤매는 내내, “생명이 없는 물질은 우아한 것으로 만들어져 공장을 나오지만, 인간은 거기서 부패하고 타락한다.”라는‘E.F.슈마허’가 들려준 한 구절이 뇌 속을 맴돈다. 기술, 조직, 정치가 한 몸이 되어 인간성을 거역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침식해서 타자의 욕망을 획득하기위해 물질적 낭비를 반복케 하고 비생산적 소비의 열중 속에 파멸해가는 우리의 우매함을 말이다.

과시적이고 물질적인 욕망이란, 게임기의 슈퍼마리오처럼 “무수하게 반복되는 행진이며 최대의 성취에 이른다 할지라도 언제나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영원한 갈증의 쳇바퀴란 걸 영악한 인간이 모를 리 없지만, 스스로를 끝장내기 위해 달려가는 길이 단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만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기만적 눈가림을 하는 모습은 지성(知性), 아니 이성(理性)의 무능력만을 확인하게 한다.

쓰레기가 만들어 낸 동네, 도시가 버린 그 쓰레기 속에서 삶이란 걸 일구는 사람들이 있던 곳, 그러나 이젠 특권층의 골프장이 들어서고 꽃단장이 되어 자신들의 더러운 욕망과 폭력의 현장을 기억의 표면에서 지워버린 듯이 태연해 보이는 어느 장소가 떠오른다. 소설이 내 시간에 대항해서 망각하고 있었던 배제된 역사의 기억들, 그 차이의 리듬을 새롭게 생성해내게 하는 것 같다.

사람들이 다 버린 것만 모여드는 곳, 그리고 버려진 쓰레기처럼 사회에서 떠밀려든 사람들의 생활터전인 꽃섬이라 부르는 쓰레기의 산, 이 반어적 이름 탓인지 아니면 소설을 견인하는 두 소년, 딱부리와 땜통의 순결함 때문인지 명치끝에 무엇이 걸린 것 같은 느낌에 한동안 사로잡혀있기도 했다. 쓰레기더미로부터 그들의 경계 밖에서 소용될 물질을 찾아내기 위해 흉측스러운 썩은 냄새와 파리 떼, 뿌연 연탄재에 파묻혀 호미질을 하는 작업자들, 그것에조차 이권이 도사리고 있어 구분하고 차별하는 흉물스런 인간들의 초라한 현장의 냄새가 내 코 속에도 확 침입해 든 것처럼 생생하다.

이러한 쓰레기장의 배경으로서의 장치가 시사하는 황폐하고 더러운 인간 세상과 대비되어 두 소년의 피난처이자 비밀장소인 일명 본부와 신들린 여인 빼빼엄마가 향하는 허물어진 당집과 당나무, 그리고 푸른 불빛으로 나타나는 영귀(靈鬼)인 김서방네가 안내하는 피안(彼岸)은 이제라도 돌아가야 할 당위로서의 인간세상, 순결함의 신성한 이상향으로서의 어떤 그리움으로 다가와 기울어졌던 마음의 균형을 잡아준다.

쓰레기동네가 지닌 그 버려짐의 외로운 기운 탓인지, 어른들의 어울림으로 형제가 되어버린 딱부리와 땜통, 두 소년이 바라보던 여울목을 비추던 달빛처럼 그들의 발 길이 닿는 곳은 추한 것들이 감춰지고 주변의 사물들을 친근하게 다가오게 하는 힘이 느껴진다. 천막교회를 찾아 라면상자를 전달하고 쓰레기동네의 추레한 아이들을 앞세우고 사진을 찍어대는 선량한 도시인들의 그 이중적 가면조차 이들의 소박한 기쁨과 계획에 가려지고, 도시의 휘황찬란한 소비의 광란, 그 폭력적 권위도 둘이 비워대는 자장면 곱빼기 한 그릇과 게임기의 뿅뿅 소리에 묻혀버린다.

쓰레기장의 더러움이 자신들이 사는 도시로 행여나 옮을까봐, 그리고 사회에서 버린 이들 인간들까지 소독해서 아예 없애버리려는 듯 낮게 비행하며 살포하는 소독약, 모든 것이 과잉이다. 끊임없는 권력욕, 명예욕, 물욕, 그칠 줄 모르는 그 도달할 수 없는 요원한 만족이란 걸 향해 질주한다. 그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만족이라는 효용의 극대화를 신봉하는 이 반(反)이성적 신념의 우리 세계, 역사의 교훈, 아니 자연사의 교훈은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가! 혼자서 그리 오래 가는 종(種)은 없다고 말이다.  결국 우리가 스스로를 끝장내 버릴 것인지? 우리가 가진 지성이 과연 특별하다면 그것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김서방네 영귀가 “사람들이 그길로 가다가 모두 망쳐버렸다. 지름길인 줄 알고 갔지만 호되게 값을 치를 게다.”라고 안타깝게 막아서는 그 진리의 말처럼.

쓰레기가 뿜어내는 메탄가스가 마침내 폭발해서 판자촌과 소년을 활활 태우고 잿더미만 남기듯이 우리는 이미 극히 불안전한 세상으로 너무 멀리 치달았는지 모른다. 필요치 않음에도 너무 많이 가지려 하고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그 댓가로 얼마나 귀중한 것들을 잃고 있는지를 거듭 거듭 반추하게 된다. 그래서 소설은 궁극에는 우리들의 아이들이 푸른 대지위에서 서로 어울려 뛰 놀 수 없게 된다면 우리 뒤에 과연 무엇이 남을까? 하고 절망어린 물음에 대한 공감을 우리네와 이 사회에 요청하는 것 같다.

소박한 장소와 사람들, 그 낯익은 일상들을 통해 오늘 우리네 마음에 담긴 것들이 무엇인지, 그러나 정작 채워지지 못한 소중한 것들이 무엇인지, 잊고 있는 것은 또 무엇들인지를 생각게 한다. 무심코 바라본 강 건너 과거가 된 그곳, 매연인지 욕망의 무로(霧露)탓인지 그 흐릿함이 꿈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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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미술관 - 그림, 한눈에 역사를 통찰하다 이주헌 미술관 시리즈
이주헌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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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사에 남긴 족적의 뚜렷함으로 수없이 회자되던 인물들, 시대의 변화와 흥망의 현상을 상징지운 자취들, 그리고 그 사실이 존재해 온 연혁의 기록들인 역사의 의미를 조각과 회화작품 속에 표현된 의미를 통해 해석하고 재조명한다.
미술은 시대를 담고 있다. 설혹 그 표현이 왜곡되어 있다할지라도 그 오류를 만들어 낸 인식 자체는 시대의 시선을 담고 있으니 말이다. 인물의 초상화에서도 소박한 정물화에도, 나신의 조각상에도, 하물며 시대의 전경을 묘사한 역사화는 우리들에게 실로 수많은 의미를 전해준다.

영웅에서 폭군까지, 클레오파트라에서 왜곡의 절정인 오달리스크로, 피와 죽음의 시대를, 그리고 인류 정신의 변천사로 구분하여 전달하는 이 역사서이자 그림책은 인간 해석의 또 하나의 인문학적 통로를 제공한다. 문학이 그렇고 철학이 그렇듯이 미술 작품 속에 들끓는 시대의 인식을 발견하는 것은 분명 지성의 도구를 하나 더 구비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익히 습득된 역사적 인물들과 사건들에 대한 비평적 이해를 미술 작품들과 대비하여 그 진실을 다시금 탐사하는 재미는 흥미로운 지적 경험이다.

그림이 전하는 인간 내면의 역사들

대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드로스의 관용의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는 일견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시선을 매혹하는 그림이 있다. 「캄파스페를 그리는 아펠레스」라는 알렉산드로스의 정부(情婦)를 그리는 총애하는 화가와의 에피소드에 나타난 일화인데, 왕의 여인을 사랑하게 된 화가의 불안한 마음을 헤아리는 알렉산드로스의 관대함이 깊은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다. 그림 속 화가를 바라보는 알렉산드로스의 경이로운 시선이 일품이다. 그런가하면 수세기가 지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무덤을 찾은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를 묘사한 17세기 화가‘부르동’의 그림은 알렉산드로스와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을 신격화하고 정치적 함의를 과시하려 한 아우구스투스와 시대적 환경을 완벽하게 담아내고 있다.

이처럼 회화는 인물의 내적 세계는 물론 시대의 정황을 한 폭에 압축적으로 담아 몇 권의 책으로 서술될 의미들을 토해내고 있다. 이러한 기능적 역할의 대표적인 그림인‘이아생트 리고’가 그린 「루이 14세」의 위세초상(swagger portrait)은 왕이 지향하던 절대권력에 대한 열망을 더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한 편의 초상화가 이토록 많은 이야기들을 말해주는 작품도 없으리라. 절대군주의 이미지에 집착했던 루이 14세를 통해 17~8세기 절대주의 프랑스의 역사를 조명한다.

이에 버금가는‘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의 대관식」은 그야말로 역사화의 걸작이라 할 것이다. 저자는 나폴레옹의 예술가들에 대한 존경이 만들어 낸 절대걸작이라 추켜세우고 있는데, 인물들의 배치와 세밀한 작은 동작조차도 역사적 의미를 덧씌운 화가의 열정에서 당시 각 인물들의 자기 인식과 심리를 읽어 낼 수 있을 만큼 강렬한 직관이 살아나게 한다.
피투성이가 된 아들의 시신을 안고 황망한 눈을 하고 울부짖는 이반 뇌제의 그림이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전형작인 노란 광명의 빛을 온전히 받으며 의연히 서있는 스탈린을 묘사한 「조국의 아침」같은 우상화, 여인의 품격을 한 없이 고귀하게 표현한 ‘리투르드’의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 사도 바울에서 히틀러, 케네디로 이어지는 카리스마의 개념 변천과 그에 따른 묘사들까지 인간의 내면과 정신사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시대를 대변하는 그림들

시대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회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는데, 중세를 상징하는 카톨릭의 위세가 시대를 고할 수밖에 없게 된 중대한 역사적 배경에 대한 관점이다. 14세기 유럽대륙을 휩쓸었던 페스트의 창궐이다. 유럽인구의 1/3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 자연의 위력에 인간과 종교는 한 없이 취약한 존재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삶과 괴리되었던 죽음이 삶에 들러붙어 죽음이 일상의 인식에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죽음은 계급도, 재산도, 성과 인종의 구분도 없는 무차별적인, 모든 인간에 평등하게 드리워진 것이라는 이해이다. 결국 평등한 죽음의 도래, 이 공포는 중세를 무너뜨렸으며, 종교개혁과 인간 평등과 같은 계몽의 시대로 이어지는 인류사의 대 전환점이 되었다는 시각이다.

이의 상징적 대표작으로서 당시 인간들의 태도를 보여주는 ‘죽음의 춤’이라는 모순된 이중적 태도는 죽음 앞의 참회와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쾌락주의적 열정을 결합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홀바인’의 「죽음의 춤」시리즈는 교회의 타락과 죽음, 그리고 개혁의 비판적 이미지를 극히 선명하게 각인시켜준다. 이는 20세기에 들어 다시금 강렬한 이미지들을 남기는 1차 대전(Great war)의 참혹한 전쟁화들로 이어지는데, 잘 알려진‘사전트’나 ‘오토 딕스’의 전쟁의 기억, 죽음의 참상을 그린 회화들이 그것이다. 이 전쟁이 낳은 또 다른 대변혁, 전쟁근로자가 되어야 했던 여성들, 죽음으로 사라진 수많은 젊은 남성들이 남긴 무수한 젊은 미망인들, 이것은 여성의 성적 개방과 지위의 향상, 여성 참정권의 부여로부터 이어진다. 이를 아마 가장 적확하게 그려낸 작품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리하르트 치글러’의 「젊은 미망인」은 전쟁의 상흔, 기존의 도덕적 관습과 성적 자유의 갈등과 공존, 욕망의 주체자로서의 지위를 확보한 여성상을 모두 함축하는 걸작으로 다가온다.

미술의 정신사적 탐사

이 책의 백미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어떤 부분보다 인문학적 서술이 돋보이는 장(chapter)으로 카리스마 개념의 역사학적 변천에 따른 지배 유형의 고찰을 ‘막스 베버’의 『경제와 사회』 , 그리고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를 통해 회화작품에 표현된 이미지와 곁들여 인류의 정신사를 탐조하는 것이다. 특히 당대의 풍속화와 정물화에 나타난 속세의 금욕주의와 종교개혁, 근대 자본주의의 연계를 읽어내는 것인데, ‘얀트렉’의 「바니타스 정물」이나, ‘얀스테인’의「사치를 조심하라」같은 작품은 인류의 윤리의식이나 지성사의 흐름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역사와 미술, 이 둘은 항상 우리들의 정신을 저 멀리 떨어진 과거의 시공(時空)으로 데려다 준다. 거기에는 우리들이 알고자하는 삶과 죽음의 기막힌 이해와 지혜들이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지금에도 영감을 선사하는 사랑들은 어떤 모습인지, 인간의 본성과 그 사회적 발현이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변주들의 시작과 종말은 어떠했는지 와 같은 경이로움으로 안내한다. 미술과 역사의 이야기를 결합하여 시각적 이미지와 인문학적 서술이 서로 교호하며 안내하는 인간 사상의 세계는 그야말로 화려하고 즐거운 지적 산책이 되어준다. 빼곡하게 인류의 전환적 역사의 서술이나 수백 컷에 이르는 그림과 조각 작품들의 이미지는 저자의 말처럼 그림에 대한 이해를 높이면서 역사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채울 수 있는 유용한 인문교양서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다해내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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