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시
아모스 오즈 지음, 김한영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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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 제목에 달라붙은 ‘~시(詩)’에 현혹되면 작품을 읽어나가는 데 혼란이 있게 된다. 작가의 감수에 의해 영역(英譯)된 제목을 보면 ‘Rhyming Life and Death’, 즉 이치 혹은 까닭이 있는 삶과 죽음, 또는 운율이 있는 삶과 죽음 정도로 직역 될 수 있다. ‘삶과 죽음’의 이치(理致)를 말하는 것이다. 작품은 바로 그 조화의 질서를 탐색하는 것이지 시를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렇게 이해하고나면 소설을 읽어나가는데 저항감이 사라진다.

 

소설의 주인공은 익명의‘저자’이다. 그는 왜 글을 쓰는가? 왜 그런 글을 쓰는가? 독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려고 노력하는가? 당신의 책들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고 끊임없이 자문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작가의 치열한 글쓰기에 대한 자기 검열과 세상을 향한 겸허한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래서 주인공 저자는 소설 속에서 소설을 씀으로서 인간의 모든 것, 바로 삶과 죽음의 얘기를 들려준다. 글 쓰는 것의 실천 양상(樣相)을, 글이 궁극에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만들어 보이는 작업을 통해 인생의 본질을 들려주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신작에 대해 독자들과 대화하는 문학의 밤에 가는 길이다. 시작 시간이 남아 카페에 들르고 웨이트리스의 스커트에 밀착되어 드러난 속옷의 비대칭 윤곽에 가벼운 흥분을 느낀다. 이내 그녀에게 이름을 부여하고 상상의 공간으로 밀어 넣는다. 풋볼 선수와 사귀고 이내 헤어지고 남자는 또 다른 여자와 동일한 휴양지 호텔에서 사랑을 나눈다. 소설은 이처럼 보잘 것 없고 빈약하기 그지없는 인물들과 소재들이 상상 속에 인생의 주인공이 되고 이야기가 되어 현실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직조해내는 되돌이표 있는 악보이다.

 

문학의 밤 주체자인 문학부장, 작품 낭독자인 여성, 문학 평론가인 남자, 비아냥대는 듯한 어느 남자 청중, 문학에 관심이라곤 없는 길거리에서 마주친 소년과 아이의 엄마, 그들로 인해 관계를 맺게 되는 가공의 인물들이 생성되면서 어느덧 삶과 죽음의 모습들이 하나의 완결된 모습으로 드러난다. 소설에는 하나의 중심 플롯이 있는데, ‘체파니아 베이트할라크미’란 시인의 『삶과 죽음의 시』가 바로 그것이다. 이 시인 조차도 저자의 짧은 현실의 시공에서 마주한 인물들, 그가 상상의 공간에서 만들어 낸 사람들의 삶과 죽음의 이야기에 합류시켜버린다.

 

그런데 이 상상의 얘기가 문학의 밤을 마치고 어둠이 내린 쓸쓸한 도시의 늦은 밤과 새벽을 거니는 저자의 현실세계와 수없이 교차하여 그 경계가 흐릿해져 버린다. 현실이 곧 허구로 연결되고, 허구는 어느덧 현실에 와 닿는다. 자신의 작품을 낭독한 여성과의 산책, 그녀와의 하룻밤 기묘한 정사, 그러나 남성의 실패와 여인의 자격지심이 교묘히 얽히는 장면들, 복권에 당첨되어 잘나가던 한 남자가 죽음을 앞에 둔 채 병원에 누워있고, 어머니의 용변을 받아내야 하는 임시직을 전전긍긍하는 남자 등등 끊임없이 관계들이 만들어지고 전개된다.

 

이들 얘기는 살아있음에 대한 실제의 비루함으로 그득하다. 이 지리멸렬한 삶을 증거 하는 것으로 관능이 세밀하게 묘사되는 것도 아마 이 작품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피부로 그녀의 호흡에 일어나는 미세한 변화들과 그녀의 살갗에 이는 잔물결들을 감지하고, 그녀의 몸에서 일어나는 반응들을 ....(이하 생략)”처럼 그 능숙하고 기막힌 관능의 포착은 작가의 소설적 기교가 어디에까지 이르러있는지에 대한 목격이 되기도 하다. 그리고 이 성의 이해는 “유성 생식이 출현했을 때 비로소 노쇠와 죽음이 출현했다.”고 말하면서, 이 세상에 함께 태어난 것은 ‘삶과 죽음’이 아니라 “성과 죽음일 것이다.”에서 정점에 이른다.

 

삶이 있었고 죽음과 성은 나중에 생긴 것이니 죽음의 불가피성은 제거할 수 있다는 논리로, 그러기 위해서 성을 제거하면 영생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흥미로운 주장에 이르기도 한다. 이것은 몇 차례 모습을 바꾸어 반복 등장하는데, 죽음의 순간에 자신의 몸을 애무하는 듯한 젊은 여자의 손길을 느끼는 환상으로 내비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죽음의 파트너는 성이란 것이니, 일견 낭만적이고 희극(喜劇)적이라고 까지 할만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내일도 무덥고 축축할 것이다. 그리고 사실 내일은 오늘이다.”라는 마지막 문장은 그래서 삶의 보잘 것 없음에 더욱 쓸쓸함을 더한다. 그저 이따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불을 켜는 것 말고는 별로 기대할 것 없는 것이 삶이란 말일 게다. 그러고 보면 결국 남는 것이 없다. 바로 무(無)! 그것의 깨달음 말고는..., 아니면 유성 생식과 죽음이란 그 영원한 반복, 영생의 이치 말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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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전쟁 - 군사적 폭력의 탈국가화
헤어프리트 뮌클러 지음, 공진성 옮김 / 책세상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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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전의 종식, 그리고 첨예한 냉전시대가 종말을 고하면서 민주주의의 확산과 아울러 국가 간의 전쟁은 점진적으로 줄어들고 평화의 세상이 오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이래 21세기는 지구촌 곳곳이 총성이 울리는 분쟁지역으로 가득하고, 그 전쟁의 양상은 그 어느 때보다 훨씬 잔혹하며 지속적이다. 산업화와 근대화로 불리는 19세기와 20세기에 전개된 영토 국가 간의 대칭적 전쟁은 더 이상 발견하기 힘든 고전적 전쟁의 모습으로 사라지고, 전장의 경계도, 전후방도 없으며 어떤 결전도 없는‘탈 국가적’ 전쟁이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

 

국가 간의 전쟁, 즉 선전포고가 있고 제한된 지역에서 군사적 전투를 수행하여 승패를 가려 상대의 정치적 의지를 조속하게 굴복시키고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전쟁과는 달리,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전쟁들은 이와는 전혀 다른, 승자도 패자도 불분명하고, 전투요원과 비전투요원의 구분도 모호하며, 끝이 보이지 않는 지구전의 양태를 보이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현대의 전쟁을‘새로운 전쟁’이라고 명명하고, 이 전쟁의 속성 들을 분석, 통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전쟁, 낯설어 보이는 전쟁은 사실 인류 전쟁의 역사들을 보면 새로운 것은 아니며, 오히려 2세기 남짓 근대에 인류가 겪었던 국가 간의 표준화된 대칭적 전쟁이 예외적 현상이고 대개는 현재 진행형인 서아시아, 아프리카, 동유럽에서의 낯설어 보이는 전쟁의 모습들이었음을 중세유럽의 30년 전쟁의 사례와 비교하면서 그 동질성을 규명하고 있다.

 

유럽의 경우 오늘날의 민주화되고 영토의 경계가 명료하며 중앙 집중의 통치권이 완벽하게 전 지역에 미치는 그러한 국가의 성립이라는 것은 18세기 이후에나 시작된 것이고, 이전의 시기에는 대개 각 영주나 지방 토호 세력의 상황에 따라 국왕의 그 지배적 권력의 영역이 변동하는 시대였기에 국가 간의 전쟁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으며, ‘30년’이란 장기간의 표현처럼 당시의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이었다. 영주와 영주, 국왕과 이웃의 국왕, 교황과 국왕 등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서 확전되고 그리곤 그 복잡한 이해관계로 인해 쉽사리 중단 할 수 없는 전쟁이 되고, 전쟁의 자원 역시 민간으로부터 차출하는 양식이었기에 군인과 민간인의 구분이 무익하다보니 민간인을 전쟁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당연한 것이 된다. 결국 당대의 전쟁은 특정한 전쟁터에서 전투요원이 맞붙어 싸우는 형태가 아니라 아예 마을과 도시, 노인과 부녀자를 불문하고 초토화시켜버리는 그야말로 잔인한 것이었다.

 

이것이 근대 국가 간의 전쟁 양식으로 이전 된 것은 사거리의 연장, 발사율의 증진, 정확도의 제고와 같은 무기의 발전, 포병이란 존재의 등장과 함께하는 전투 대열의 변화가 병사의 오랜 훈련을 요구하게 되었으며, 전쟁 규모의 대형화로 군비, 전쟁비용의 비약적인 증가를 가져왔음을 들고 있다. 따라서 용병에 의존하던 전쟁은 상비군 조직으로, 세수의 안정적 조달기반의 확립과 같은 현대국가 조직의 성립으로 정착되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은 전쟁 당사국의 대칭성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었으나 전쟁 수행자본의 비대칭성이 심화되는 현대에 이르러 이러한 고전적인 국가 간의 전쟁이 강자와 약자의 구분이 선명한 대결국면에서 더 이상 유용한 방식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음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이의 적절한 사례인데, 이미 두 국가 간의 군사력, 정치력, 경제력에서 엄청난 비대칭성을 안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정규군을 통한 전쟁은 승리 한듯하지만, 전쟁이 종료되었다고 할 수 있지 못하다. 전투요원과 비전투요원의 구별이 불가능한 양상으로 전통적인 적의 표시가 없으며, 게릴라전, 테러의 형태로 끊임없이 전장의 특정함 없이 저항이 지속된다. 이는 공격군의 피로를 급격하게 상승시키며, 장기화됨에 따라 막대한 인명 및 물자의 손실과 군비의 증가를 초래한다. 결국 약자가 채택하는 비대칭성에 의거한 전쟁 수행방식으로 인해 전쟁의 목적인 적의 정치적 의지를 자신의 의지에 복속시키는데 요구되는 비용이 이익을 초과하는 것일 뿐 아니라, 자국 군사의 희생이 국민들의 정신적 지지를 유지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비대칭 전략에 의한 전쟁은 대부분의 분쟁 지역에서 발견 할 수 있는 형태이다. 아마 이 비대칭 전략의 성공적 모델이 된 것은 1993년 10월 3일 소말리아 모가디슈에서 벌어진 악질적인 군벌 ‘무하마드 파라 아이디드’의 체포에 미국이 실패한 사건인 모양이다. 미군 18명이 살해당하고 80명이 부상당하였으며, 더구나 미군의 시체를 토막 내고 훼손하여 길거리를 끌고 다니는 장면이 CNN에 보도됨으로써 미군은 즉시 철수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으니 전 세계의 개발도상국, 저개발국의 군벌들, 전쟁 사업자들, 테러 조직들이 미국을 상대하는 효과적인 방식으로 이를 숙지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을 게다.

 

이것은 열등한 군사력과 저비용으로 거대한 상대를 무너뜨리는 효과가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분쟁 지역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양상은 바로 이 저비용의 전쟁이 가능하다는데 기초하고 있다. 전쟁 비용이 너무 저렴해져서 누구든지 전쟁의 주체가 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이나 보스니아에서 벌어지고 있거나 있었던 전쟁, 아프리카 국가들의 지속적인 내전들은 이러한 양상을 잘 설명하게 해준다. 이제 용병회사, 지역 군벌, 파르티잔, 테러 조직망, 유사 국가행위자, 사적 행위자, 누구든지 의지만 있으면 전쟁을 일으킬 수 있고, 전쟁 이익과 권력까지 획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에 더해 전쟁 재정의 조달 방식까지 변해서 난민촌에 주어지는 국제 원조자금과 물자는 이들의 병참(보급)기지이자 예비군 부대의 역할로 포함되어 있으며, 민간의 물자를 착취하고 이용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결국 이러한 저비용 전쟁 모델은 돈과 권력을 노리는 무수한 군벌들을 만들어 내고, 이들로 인해 국가 조직망 및 경제는 완전히 붕괴된다. 자유경제 체제는 약탈적 전쟁 경제체제로 바뀌며, 사회 안전망이 해체된 곳에서 소년들과 청년들은 생존수단을 위해 이들 군벌이나 전쟁사업자의 휘하로 들어가고 지급받은 AK소총(경량무기)은 생존 수단화되며 남성의 권위와 자존감을 획득하게 해준다. 언론에 자주 소개되는 소년병들의 잔혹성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 의해 조성되고 강화된다. 특히 이들의 전쟁 수행 방식은 소위 초토화 방식으로 점령한 지역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것인데, 여기에 더욱 주목할 것은 부녀자에 대한 강간 등 성 폭력을 들 수 있다. 일종의 유전적 말살, 정신적, 도덕적 규범의 파괴를 통해 한 사회내의 내적 결합을 완전히 해체시키는 것이다. 성의 강력한 전쟁 무기화라 할 수 있다. 즉 저비용 전략에 부합하며, 점령지에서 적을 완전히 몰아내는 목적 달성에 완벽하게 기여하는 방식이라는 점이다.

 

국가로서의 무늬를 띄고는 있지만 대다수의 아프리카지역은 이러한 국가붕괴전쟁의 지속으로 국가적 체계의 구성에 실패 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비용이 들지 않는 전쟁, 높은 수익과, 권력까지 향유 할 수 있는 수단이므로 수많은 군벌들과 전쟁사업자들로 내전은 항구화 된다. 이는 사회구조를 완전히 파괴하여 국가 존립이 불가능한 상태에 빠져버리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전쟁 당사자들, - 지역 군벌, 테러 조직망, 전쟁 사업자, 민간 군사회사 등 - 평화가 중요치 않은 이익집단들은 종족적, 종교적 대결을 마치 갈등의 원인이라 치장하지만 단지 자신들의 개인적 권력추구, 탐욕과 부패의 치장 이상이 아님을 발견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다. 이처럼 새로운 전쟁은 일과 폭력을 사용하는 것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범죄와 암시장은 동맹관계가 되며, 교환과 폭력사용이 하나로 결합하는 그림자 경제로 인해 더욱 견고해진다.

 

비대칭성에 의한 전쟁 전략이 더욱 효과적인 수단이 되게 한 것으로 현대 방송 미디어를 빼 놓을 수 없다. 높은 미디어 밀도, 개방적 미디어 접근성과 결합하여 테러가 자립하고, 적은 비용과 무력으로 최대효과를 얻을 수 있게 된 점이다. 대표적 사례가 9.11 테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협상도 없고 어떤 텍스트화 된 메시지도 없다. 그저 강력한 이미지, 무한 공포를 야기하고 대상이 누군지도 알 수 없는, 상대를 모르니 타협이 원천적으로 배제되어 항구적 위협에 대한 상존만이 부각된다. 폭력의 이미지와 모호함이 결합하여 위협과 공포를 생산하고 이는 더없는 전쟁 도구가 되는 것이다.

 

‘새로운 전쟁’의 대표적 속성인‘비대칭성’을 중심으로 이 책이 이와 같이 들려주는 더 잔혹하고 끔찍하며 훨씬 오래 지속되어 사회와 국가를 근본적으로 붕괴시키는 오늘의 전쟁 양상 탐사는 이미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주제이지만 지구촌 그 어느 지역보다 군사력이 집중되어 대치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로 인해 다량의 참조점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새로운 전쟁이 과거나 후진적 전쟁 양상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 전쟁 양식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전쟁을 하게 되면 맞이하게 될 바로 그 전쟁의 무참한 모습을 짐작케 한다.

 

칸트의 『영구 평화론』에서 언급된 민주주의가 전쟁을 억제할 수 있다는 얘기나 , 저자의 한국어판 서문에서도 지적하고 있듯이 경쟁할 다른 수단(경제적, 정치적)을 갖지 못한 측에서는 전쟁에 의존 할 수밖에 없다는 한반도에 대한 진단은 시사(示唆)하는 바가 자못 지대하다.

북한은 물론이고 인접국인 중국 역시 일당 독재의 비민주화된 전체주의 국가이다. 이들은 군비 증강과 과시에 호전적인 지구에서 몇 안 되는 국가들이다. 더구나 21세기 분쟁지역이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개입 능력을 가진 강대국의 수가 매우 제한적일 뿐만 아니라 엄청난 군사비용으로 인해 정치적, 경제적 계산이 명령하지 않으면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전쟁의 민영화가 가속화되는 새로운 전쟁의 시대에서 적극적인 군사적 지원의 기대는 점점 희박해지고 있다. 이러한 전쟁의 속성과 군사개입 전략의 세계적 변화에서 우리는 우리만의 전쟁 전술에 대해 깊숙이 고민해야 할 것 같다.

 

군사적으로는 비대칭 전략에 입각한 전술부대의 육성, 역으로 비대칭성 공격에 대한 방어 전술전략을, 정치경제적 측면에서는 북한의 경제력 제고와 인권을 비롯한 민주주의의 전파를 위한 다각적인 지원과 모색을 통해 그들이 전쟁이 아닌 다른 경쟁수단을 선택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할 것이란 생각도 하게 된다. 외교적으로는 미국과 중국, 두 강대국의 한반도에 대한 정치경제적 계산이 항시 균형을 유지 할 수 있도록 편협하지 않은 포괄적이고 거시적인 시각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 같다. 오늘의 세계를‘전쟁’이란 언어를 통해 새로운 관점에서 국제 정치와 경제, 사회문화를 이해하고, 우리의 현실을 조명 할 수 있는 유익한 기회가 되게 해준 책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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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메랑 - 새로운 몰락의 시작, 금융위기와 부채의 복수
마이클 루이스 지음, 김정수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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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시스템 붕괴와 국가 부도 위기에 내몰린 유럽 발 형국은 안방 수신기를 지켜보는 우리들에게도 고스란히 경제위협의 파국적 우려로 전달된다. 그리스 경제의 침몰이 몰고 올 유럽전역의 위기감은 유럽중앙은행, IMF의 국제자금 긴급 투입을 결정케 하고, 임시적 진정 국면에 들어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막대한 자금이 그리스 경제의 궁극적인 회생으로 연결될지, 이미 부실해진 경제 체제로 흔들거리는 나머지 유럽 국가들이 정상을 찾을지 의문이다. 사실 믿을만한 구석이 없다. 거품이 만들어 낸 가짜 자본으로 흥청망청 대던 도덕적 해이가 일시에 사라질지도 만무하지만 그네들의 민간 금융기관의 천문학적 대출 부실과 국가 부채는 폭발직전의 화산처럼 예측 불허이다.


이 책은 이렇듯 경제체제의 붕괴로 치닫는 유럽 국가들의 경제실체를 민간금융기관을 중심으로 각국의 중앙은행, 재무 부처등 정부, 사회 전반의 도덕성 등 국민의 의식수준과 실태 등을 통해 전(全)방위적으로 탐색하고 있다. 특히, 유럽최초의 경제시스템 붕괴국가가 된 아일랜드나, 국가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헤지펀드로 불렸던 아이슬란드의 국가 부도 사태, 국가부도 위기에 직면한 그리스 사회의 총체적 분석, 미국 지방정부들의 신용위기, 독일정부의 이기적 금융 행동 양태들을 통한 문제의 본질에 대한 성찰은 우리 한국사회, 한국경제의 실상에서 시사하는 바가 자못 거대하다.


그 첫째로 신자유주의 시장 만능주의 경제기조를 신봉하는 한국 사회의 맹신적 논리가 여지없이 허무맹랑한 거짓이거나 기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며, 둘째는 공직자등 공공부문의 부패가 항상 문제의 중심에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이러한 도덕적 해이와 물질적 탐욕이 사회전반에 만연하여 공익을 희생해 개인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익숙해져 사회가 “원자화된 입자들의 집합”처럼 탈규범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시장 만능주의자들이 항상 대단한 철칙처럼 떠들어대는 말이 있다. ‘민간의 실패보다 정부의 실패가 크다’ 그러니 시장에 맡겨두라 라는 기만인데, 자본주의 역사 이래 이러한 양상이 드러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다는 것이며, 오히려 민간의 실패가 국가 체계를 붕괴시키고 국민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는 것이 비일비재한 실상이다. 아일랜드의 경우만도 ‘아이리시 뱅크’ 단 하나의 은행 손실만으로도 국가 조세수입 4년 치를 깡그리 집어삼켰으며, 이로인해 부도덕한 금융자금으로 돈을 번 자들의 부실을 국민들이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떠안고 허덕이는 현실이 증명한다. 또한 아이슬란드는 민간 금융기관이 저지른 부실을 재무부와 중앙은행이 떠안았으며, 정부의 시장 불개입의 목소리를 높이던 신자유주의자들의 나라인 미국 역시 금융시장의 붕괴로 막대한 정부 재정자금의 투입으로 가까스로 위기를 봉쇄한 것은 이젠 얘깃거리도 되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 손의 신화는 시장 만능주의자들의 기만적 망상일 뿐이며, 몰염치한 탐욕의 위장 논리에 불과하다.


이것은 사회전반에 만연한 자기중심적 이익추구를 취해 공익을 희생시키는 황금지상의 무절제한 탐욕으로 연결된다. 그리스의 국가 부도 위기는 “나라 자체가 문제”라고 하는 이 책의 지적에서 이러한 현상을 상세하게 목격할 수 있다. 의사, 변호사 등 개인 전문직 사업자들의 탈세는 세무공무원과 사회의 기득권적 우월이 연계하여 일상적이 되고, 금융은 미래수입을 증권화하여 자금조달을 일삼으며, 라디오 아나운서, 음악인이 중노동으로 분류되어 50세면 연금수령을 받기 시작하는 그야말로 국가 전체가 거짓과 탈세의 부패로 부글거리는 사회라는 것이다. ‘죄의 용서’외에는 아무것도 팔 게 없는 수도원조차 부동산 투기로 재산을 불려나가며, 공립학교 교사 수는 복지국가 핀란드의 4배에 이르는 등 국가전반의 도덕적 해이가 갈 때까지 갔음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무절제한 탐욕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무한적 이기주의에 매몰되어 있어 4000억 달러의 미상환 대외부채, 정부연금 부채가 8000억 달러에 이르러 국가도산 상태에 이르고, “도둑질로 살아가는 나라”라고 세계가 혐오와 증오의 시선을 보내고 있음에도 그리스인들은 여전히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는 이들과 다를까? 심화된 정도에 다소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거의 닮은꼴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교회들은 저마다 엄청난 부동산 재산에 열을 올리고, 전문직종의 개인 사업자들의 세금 탈루는 새삼스런 얘기도 아니다. 저마다 지역과 집단 이기주의로 공익과 대결하는 것이 바로 한국의 현주소 아니던가?


여기에 더해 금융시장의 부도덕이 국가를 파국으로 몬 대표적인 나라, 아이슬란드의 상징적인 일례는 일명 자해(自害)상품이라 불리는 신용부도스와프(CDS), 즉 금융시장 살상무기로 자기 목을 따버린 집단적인 자기 파괴의 교훈을 보여준다. 빌려온 대외자금으로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하고, 그래서 경쟁적으로 가격은 급등한다. 그러나 정작 실수요도 없이 자기들끼리 만들어 낸 거품에 흥청대다가 하루  아침에 휴지가 되고 폐허가 되어 그 손실과 빚더미에 스스로 몰락하는 자가당착, 바로 ‘부메랑’에 제대로 얻어맞은 것이다. 이러한 도덕성 상실은 한결같이 지배층과 공직자들의 자세와 연결되는데, 특히 그리스나 미국 지방정부의 공무원들이 보여주는 실질임금 및 연금에 대한 집단 이기주의이다.  늘어만 가는 공공부문의 지출에 국민과 주민 스스로가 볼모가 되고, 이는 악질적 부채가 되어 서로를, 사회전체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저마다 자기 것만을 최대한 많이 챙기려다 공멸하는 사례이다.


대출자와 대출기관을 연결시켜주기 위해 존재하던 금융시스템이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자해상품까지 만들어내며 미래수입까지 끌어다 뻥튀기하는 부도덕성이 마치 기발한 금융기법이나 되는 양 까불대다가 국가와 국민 경제 전체를 말아먹는 것, 게다가 공직사회의 부패가 어울리고, 절제를 상실한 사회전반의 자기중심주의의 이익이추구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이처럼 확인케 된다. 국가부도나 경제시스템 붕괴는 결과적으로 재정적인 것이 본질적 원인이 아니라 사회문화 전반에 퍼진 정신의 몰락에 있다는 것이다. 사회 모든 측면에서 스스로 절제하는 기능을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파충류의 뇌처럼 보상경로를 억제하지 못하고 침을 질질 흘려대는 동물적 본능만이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본질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내면의 성찰, 인간 정신의 복구는 이제 뒤로 미룰 수 없는 시급한 인류의 과제라 할 것이다. 세계금융 및 경제시스템의 문제를 마치 여행 에세이처럼 자연스런 일상의 언어로 풀어낸 이 책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이처럼 분명하다. “변화의 대상은 사람이다!”, “질병은 문화에 있다!” 현재를 충족시키기 위해 미래를, 도덕성을 착취하는 경제는 결국 자기가 던진 부메랑에 맞아 죽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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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하루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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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자신의 육신붙이와 이내 같이 할 것을 예견하였던 것일까? 생전의 마지막 작품이랄 수 있는 「석양에 등을 지고 그림자를 밟다」는 단편이 자신의 일대기로 써진 자전적 소설인 것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자식을 앞세운 어머니이자 여인의 통한의 글 인 것에서 숙연함을 갖게 된다. 마침내 기나긴 인생이란 하루를 마치고 평화로운 그녀의 내세로 가셨으리라는 믿음과 함께 감히 진심의 명복을 빈다.

 

이 첫 번째 수록 작품은 『그 남자네 집』이나 『아주 오래된 농담』등 몇 편의 장편들을 떠 올리게 한다. 작가의 성장기와 전쟁 통의 성년기 등 당대의 묘사가 중첩되는 것인데, 아마 그녀가 천착했던 “걷잡을 수 없는 증언의 욕구”가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이 작품은 작가의 글쓰기가 무엇을 의미하려 했던 것인지도 읽게 되는데, 전쟁의 모순, 이념의 허위가 만들어 낸 터무니없는 폭력의 고발과 복수를 삼키는 수단이 되었다는 고백도 있다. 그녀의 인생 후반부는‘내 붙이’의 죽음이 가져온 삶의 자괴감 속에 견딜 수 없는 슬픔의 시간이었던 듯하다. 더 이상 “내 식구가 귀가하는 발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사랑하던 이들이 부재하는 삶의 쓸쓸함이 사무치게 그려져 있다.

 

이 부재의 공허함은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라는 작품에 가 닿는데, 민주화 운동 중 희생된 자식의 어머니, 그 자식을 상실한 어미의 가슴 깊은 곳을 울려대는 입을 앙다문 통곡이 억제된 처절함을 통해 자식의 죽음이란 어쭙잖은 연민으로 위로되는 것이 아님을 비로소 가슴으로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인물이나 출세나 건강이나 그런 것 말고 다만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생명의 실체가 그렇게 부럽더라구요. 세상에 어쩌면 그렇게 견딜 수 없는 질투가 다 있을까요?”

 

반편이라도 산 자식을 곁에 둔 여인네에 대한 이‘질투’라는 단어가 이렇게 진실로 다가왔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돼먹지 않은 기득권을 지키겠다고, 권력을 차지하겠다고 거짓된 이념으로 시민을 사지에 몰아넣는 폭력의 흔적은 이렇게 이 땅에 치유되지 않고 남아 있음이다. 그 생명을 대체 어떤 것이 대신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처럼 이 땅에 저질러진 폭력의 기억과 상흔들이 한 여인에게 바이러스처럼 잠재한 고통의 기억으로 술회되는 「빨갱이 바이러스」란 작품에 고스란히 배어있다.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우연히 지키게 된 고향집을 팔지 못하고 별장처럼 이용하는 여자가 폭우로 길이 끊겨 교통편을 잃은 낯선 세 여자와 한 밤을 같이하며 나눈 고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녀들의 고백이란 외도와 불륜, 성적 욕망과 환락 등 망측하고 지저분한 자신들만의 비밀들이다. 그러나 여자는 고백 할 것이 없다고 등을 돌리지만 결코 입 밖에 낼 수 없는 잠복한 기억을 더듬는다.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북쪽으로 넘어갔던 삼촌을 삽으로 내려쳐 죽였던 아버지와 그 삼촌을 마당에 묻었으리라는 짐작, 즉 “이념 갈등이 동기간의 골육상쟁으로 치달은”, 발설 할 수 없는 고통의 기억이다. 그래서 “나의 입과 우리 마당은 동일”한 것이 되고, “둘 다 폭력을 삼켰다. 폭력을 삼킨 몸은 무쇠같이 단단한 것 같지만 자주 아프다”는 것이다.

폭력의 기억을 품고 있는 이 땅은 ‘빨갱이 바이러스’로 되살아나 수시로 우리를 괴롭힌다. 툭하면 빨갱이 운운하는 탐욕스럽고 파렴치한 기득권자들의 가장 천한 폭력이 정말 대책 없이 불쌍해지는 것이다.

 

작가의 많은 작품들이 시종 그려냈던 전쟁과 이념 갈등이 초래한 상처는 폭격으로 부모를 잃은 조카를 자식처럼 키웠던 고모의 심정을 통해 대물림되는 피해자의 삶을 조명하는 「카메라와 워커」라는 단편에서 다시금 확인된다. 우리의 헛된 이념과 전쟁의 상흔은 과거가 아닌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음을.

한편, 이 사회가 안고 있는 세태의 풍자이자 물질이 인간성을 압살하는 도시의 단면을 시어머니이자 며느리이기도 한 여인의 내적 심리를 통해 묘사하고 있는 「갱년기의 기나긴 하루」는 속물들, 위선, 정말 하찮은 인간들을 양산하는 현실을 시어머니의 위장가난, 이혼한 아들내외의 그 버르장머리 없음의 편린들로 맛깔스럽게 지펴내고 있다.

 

이것은 「닮은 방들」이란 작품에서 그야말로 몰(沒)가치화 되어가는 개성 없는 세상과 인간들의 그 파국적 형상으로 절정에 이른다. 오랜 친정살이를 벗어나 마련한 아파트에 입주하고, 독립된 살림에 서툰 여자는 이웃 여자로부터 살림의 조언을 받으며 친해진다. 가구와 벽지, 커튼조차 닮아가고, 반찬등 상차림마저 이웃여자의 맛을 낸다. 아파트는 작은 자존심의 경연장이 되어 누군가 새로운 것을 하면 이내 누가 흉내 내고 말아 어떤 우월감도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닮음에 싫증으로 진저리를 쳐가면서도” 서로 닮아 감을 멈추지 못한다.

 

급기야 남편들에 대한 얘기에서 이웃집 여자는 자신의 남편을‘그 새끼’라며 도발적인 음란성을 자랑한다. 여자는 그저 순수하기만 한 자신의 남편과 다른 이웃집 남자의 다름에 매혹된다. 이웃집 여자가 지방에 있는 친정나들이를 위해 집을 비운 날, 여자는 이웃집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한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갖기 위한 같아지기의 극한!, 그 간음(姦淫)은 자기파괴, ‘같아지기’, 존재의 차이를 무너뜨리는 이 파국의 적나라함이 너무 절망적이어서 괜스레 허공을 향해 나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게 된다. 이런 된장!, 썩을....

 

작가의 소설들은 이와 같이 삶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은유이자 우화이다. 체하거나, 지성을 뽐내지 않으며, 이념이나 주의(主義)를 말하지 않는다. 어떠한 분류로 편 가름도 이론도 없다. 그저 삶의 현상들, 사랑, 가족, 욕망, 슬픔, 상처의 이야기들 속에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진실과 진리들이 빼곡히 빛을 발하며 가슴을 적신다. 작가의 작품들은 읽을수록 그 문장이 발설하는 풍성함과 진정함으로 망각했던 겸허함을 일깨워주는 듯하다. 미출간작 3편과 엄선된 3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작가의 마지막 소설집이 된 이 작품집은 시대를 대표하는 우리문학의 귀중한 지표로 길이 남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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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맨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7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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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도입부에 묘사되는 장면의 강렬한 암시는 성의 자유가 그 어느 지역보다 관대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실상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게 된다. 아빠가 아닌 남자와 얽혀있는 엄마의 부도덕한 현장을 목격하는 소년, 엄마를 향해 “우린 이제 죽을 거라고요.”라고 외치는 소년의 분노가 왠지 오래도록 어떤 서늘함에 지배될 것 같은 예감을 갖게 한다. 그리곤 시간이 24년을 훌쩍 뛰어넘어 일견 평온해 보이던 가정의 주부 실종 사건에 앵글이 맞춰진다.

 

비록 강렬하지만 너무 짧아서 어떤 판단을 하기에는 미흡한, 그리고 분명치 않은 꺼림칙한 느낌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여자의 실종은 오슬로경찰청 강력반장‘해리 홀레’의 등장과 함께 심상치 않은 사건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사건 현장에서 발견되는‘눈사람’은 의문의 미해결 실종사건들과 연계되어 사건의 범위와 규모가 확대되고, 강도 높은 스릴에 급격하게 닿으면서 순식간에 긴장과 다음 장면에 대한 기대의 설렘으로 몰아 부친다. 600여 쪽에 이르는 두툼한 소설이 불과 몇 쪽을 읽었을 뿐인데, 이미 책을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할 만큼 이야기에 압도당해 버린다.

 

특히 인간 남녀의 성(性)선택에 대한 진화론적 해석을 수시로 떠오르게 하는 이 소설의 제재 역시 저항 할 수 없는 매력이라 할 수 있다. 짝짓기라는 종족번식, 즉 자기 재생산 비용의 남녀 차이로 인해 여성이 자신과 아이에게 충성하고 자원을 계속해서 제공할 남성을 선택하기위해 신중한 전략을 채택했음은 잘 알려진 얘기이다. 그러나 여성의 전략은 남성에게 매우 불리하다. 만일 한 여성만을 위해 충성하게 될 경우 남성이 부담할 위험은 증가한다. 여성이 낳을 자식은 확실히 그 여성의 자식이 분명하지만 그 자식이 남성의 자식일 확률은 보장되지 않는다.

   

이 위험율이 소설에서는 노르웨이의 통계로 반복하여 등장하는데, 자기 자식이 아닌데도 알지 못하고 양육하는 남자가 20~25%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의 자식이 아님에도 충성하게 된다면 남성의 재생산성은 제로(zero)라는 재앙에 직면하게 된다. 속된 말로 오쟁이 진다고 하는 것인데, 결국 남성의 재생산 전략은 여자를 성적으로 독점해서 이 위험을 차단하는 것, 바로 일부일처를 유지하는 것이며, 이 신뢰가 유지 될 수 없으면 남자는 재생산을 극대화하는 저비용 생산전략을 구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으로의 이행은 사실 끔찍한 인류의 붕괴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소설이 물론 이를 주제로 삼는 것은 아니지만 유부녀들, 즉 여성의 불륜을 이처럼 중심 플롯으로 삼고 있다.

 

사건의 희생 제물이 되는 여성들은 남편이 아닌 남자의 자식을 마치 부부의 친자처럼 양육하는 유부녀들이다. 반면에 남성의 저비용 성전략 행태를 보이는 언론재벌의 파렴치도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의 성 행태로 인해 야기되는 아이들의 정체성 혼란과 도덕적 갈등으로 초점을 맞추면 이는 또 다른 사회적 문제로 연결 된다. 여성들의 실종과 피살사건이 연속되고, 현장에는 동일범의 소행임을 암시하는 눈사람이 경찰을 조롱하듯 놓여있다. 수사팀을 조직하고 사건 조사에 착수하는 해리 반장에게 여성 경관‘카트리네’가 합류하면서 해리의 수사 방향은 활기를 찾는다.

 

소설은 많은 장치들과 다채로운 이야기 거리들이 교차한다. 장면들은 시간을 현재에서, 12년 전으로, 24년 전으로, 다시 12년 뒤로, 그리고 현재를 반복하면서 과거와 현재 사건들의 유사성과 관련성을 숙지시킨다. 또한 인간관계에 서툴고 반사회적이기까지 한, 해리 홀레의 고독한 삶의 모습과 헤어진 여인 ‘라켈’과 그녀의 아들 ‘올레그’에 대한 사랑, 동료 수사관 ‘카트리네 브라트’와 함께하는 미세한 교감과 신뢰, 관능적 호감과 공적 거리에서 흔들리는 내적 혼동이 어우러져 남편을 배신하고 타인의 아이를 양육하는 여인들만을 대상으로 한 다분히 정신병적인 연쇄 살인 사건을 풍성한 이야기가 되게 한다.

 

의혹을 잔뜩 불러일으킨 용의자의 죽음, 그러나 뒷골목의 여성들과 아이들에게 선행을 베풀었던 사람으로 드러났을 때의 당혹감은 믿을 수 없는 우리의 편협한 인지능력을 생각게 하고, 희생자를 편의적으로 가해자로 치부하여 영원히 진실을 덮어버리는 공권력과 사회의 집단 심리가 지닌 어리석음의 폭력성을 목격하게도 된다.

그런데 이 소설이 정말 매력적인 것은 이러한 선입견과 편협성, 폭력성, 이기심의 부당성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해리, 카트리네, 해리의 직속상사인 하겐 경정과 같은 사람들, 그리고 사생아의 위치에 놓인 아이들의 불안정한 지위와 정체성에 따뜻한 시선을 맞추고 있음에 있다. 우리들이 항상 간과하고 있는 곳에 정작 우리들의 관심과 진실을 향한 에너지가 요구되고 있음이다.

 

소설은 분명 여성들의 불륜이, 부유함과 권력을 가진 남성들의 부정이 만들어낸, 즉 성도덕의 파괴적 현상이 야기하는 사회 범죄적 영향의 병리적 현상을 지적하고 있지만 이러한 표피적이고 직관적인 이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부당하게 희생되는 아이라는 존재들, 그에 부속되는 현실의 문제들에 대한 성찰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일면 진화심리학적인 접근이 보이는 결혼 여성의 불륜현상이란 성 선택 방식이 오늘의 물질중심의 문명사회에서 자연스레 적응하고 있는 진화적 산물이 아닌가하는 의심의 제기이기도 하지 않을까? 가슴에 있어야 할 양 쪽의 눈이 없는 신체적 기형을 가지고 태어난 소년, 더욱이 자신이 불륜을 저지른 엄마로 인해 잉태되었다는 자각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증오를 수반하는 것이었을 게다. 그로인해 정신과 육체가 붕괴되어가는 존재, ‘눈사람’의 처절한 복수극이 가히 수준 높은 지성과 영리함으로 똘똘 뭉쳐져 완벽한 스릴러를 탄생시켰다. 북유럽 특유의 얼음 같은 분위기에 압도당하는 즐거움이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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