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 빈병 - 글쓰기 실력이 눈에 띄게 달라지는 100가지 노하우
배상문 지음 / 북포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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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이 왠지 낯익다. 「창작과 비평」이란 문예 비평지를 떠 올렸다는 것은 저자도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지만 ‘제목’이 독자에게 주는 호감의 중요성이란 측면에서 한 수 알려 주려는 이중의 의미였던 듯하다. 이 책을 읽고자 한 이유인 창작, 특히 글쓰기에 대해 한 수 배우고자 한 동기는 이것만으로도 성취한 것이리라.

 

그런데 이처럼 제목 하나 선정하는 데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는 언젠가는 작가가 되어보겠다는 의지의 다름이 아닐 것이다. 독자들에게 읽히는 글을, 그리고 공감과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소망에서 일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 책은 거의 완전히 기대에 보답한다. 작가 지망생들이 의례히 겪고 있는, 또한 겪게 될 장애에 대한 정곡을 찔러대고 그것에 대한 일종의 체험적 해법을 들려준다.

 

막상 어떤 아이디어나 주제를 가지고 글을 쓰려다보면 어느 순간 진부하기 그지없는 글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혹은 더 이상 몇 줄 쓰지 못하고 막혀 버리기가 일쑤이다. 저자도 말하고 있지만 수 천 권에 이르는 독서의 경험이 절로 묻어나겠거니 하는 자신감을 믿고 이젠 나도 써 낼 수 있겠다는 마음에서인데, 읽는 것과 쓰는 것은 결코 연결되지 않는다. 그렇다보니 어떤 완결된 글을 쓰는데 이르지 못하고 머릿속에 구상만 해대곤 한다. 완벽하게 구상만 해 내면 글을 잘 쓸 수 있을 거야라고 위안하면서 말이다. 문제가 뭘까? 아니, 작가 지망생이라면 이미 등단한 동료들이나 주변의 글쟁이들로부터 받은 무수한 조언들 때문에 알고 있음에도 실천하지 않는 것이 있을 터이다.

 

바로 많이 써 보야 한다는 것이다. 오랜 습작의 누적으로 훈련되어야 한다는 말인데, 한 편의 습작도 완결해 보지 못하고서 고작 세상 많이 살았다는 연륜, 책 많이 읽었다는 잡다한 지식의 양이 절로 글이 되겠거니 하는 안일함에 의존했으니 글을 완성시킬 능력이 있을 턱이 없었을 것이다. “많이 써 본 놈이 결국 작가가 된다.”는 이 말의 무게를 창작 메커니즘의 본질은 “글은‘몸’으로 쓰는 것”이라는 부연 설명과 함께 새삼 귀중한 가치로 느껴지게 된다.

 

“다독은 작가 지망생의 세련된 인테리어 감각은 길러주지만 건축술까지 가르쳐 주지 않는다. (중략)안목이 높은 것과 손목이 야문 것은 다르다.”

 

그럼 어떻게 쓰기 시작해야 할까? 사실 막상 쓰고 싶다는 소망과는 달리 소설 한 줄을 시작하려하면 막연함에 부딪혀 자괴감에 시달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아이디어도 변변찮고 스토리 구상도 만만치 않다고 고민하지 말 것을 조언하고 있다. 우선 인물 몇 명을 만들고 그들의 이력에 대해 써보라는 것이다. 외양, 성격, 신상정보, 버릇 등등을. 처음부터 굉장한 작품을 쓰겠다는 강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그리고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필사해보고, 소설들의 인물 묘사만을 정리도 해보고 하면서 자신만의 글을 무던히 쓰는 것이다. 이외에도 작가의 눈, 작가의 본능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글의 내용과 포장, 형식미에서부터 모방과 절제의 태도에 이르는 조언들은 어느 하나 놓칠 수 없는 글쟁이로서의 중대한 토대가 되어준다.

 

특히 작가라면 빈번하게 마주하게 되는‘상투성’과의 싸움을 이겨나가는 방법, 그리고 언어 예술가로서 단어의 사용과 문장, 문체에 대한 글 다루기에 대한 지식의 전수는 글을 쓴다는 실전(實戰)면에서 작가의 자의식과 관련하여 주요한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비판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대목도 있다. 언어순결주의와 나쁜 언어를 설명하면서 한글 사용과 개념어의 사용에 대한 다소 편협한 관점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는 여전히 지망생에 불과한 이들로서는 참조로 이해하면 족할 것이다. “듣기 좋은 글은 읽기도 좋다”는 퇴고의 방법론에 공감하면서 이 책은 그동안 경험과 읽기를 통해 입력된 데이터들이 언제가 있을 수 도 있는 출력의 즐거움을 기대하는 작가 지망생들에게 아주 긴요하고 날카로운 조언이 되어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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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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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화자의 미덥지 못한 기억의 편린들을 좇는 내내, 내 인생의 한 페이지들도 더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한 여자와의 이별에 대한 회한의 기억, 절망을 외치던 친구를 위해 썼던 편지, 그리고 기록되지 않은 것이 태반인 단편적인 기억들을 더듬는 나를.

결코 그리 현명한 삶이었음을 인정하기 어려운 역사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나 역시 육십의 노년 남자인 ‘토니 웹스터’처럼 삶의 본질과 그 삶에 딸린 조건 모두를 시험할 철학적 의무를 수행한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저 인생의 뚜렷한 방향도 없이 피동적으로 떠밀려왔다는 자괴감이 엄습한다. ‘토니 웹스터’의 “인생을 흘려보내는 무가치한 수동성”의 역사를 확인하는 우울함, 거북함이라 할까?...

 

한 개인의 사적 인생을 역사에 대유(代喩)하여 인생의 목적, 인생에 대한 어떤 믿음들, 즉 인생의 가치에 대한 사유의 기록이랄 수 있는 이 소설은 이렇듯 비록 사소하지만 역사적 사건으로서 내 삶의 기록들을 들춰보게 한다. “시간 속에 살고, 그것은 우리를 제한하고 규정하며 그것을 통해” 역사를 측량하고, 설혹 소소하고 사적이고 기록되지 않는 단편들의 기억임에도 불구하고 행위를 근거로 정신 상태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역사라는 이해를 통해서 말이다. 또한 화자의 인생전반을 지배했던, 소년과 청년기의 정신적 우상이었던 친구‘에이드리언’의 준열한 기질을 입증하듯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 바로 역사라는 주장의 관점에서.

 

그렇다. 소설은 우리들의 부정확한 기억과 불충분한 문서가 충돌해서 빚어내는 삶의 역사를 규명하는 작업이다. 한 때 연인이었던‘베로니카’와의 열등감에 휩싸인 만남과 그녀의 가족에 대한 결코 우호적이지 못했던 기억들, 그리고 이별과 친구 에이드리언으로부터 날아든 베로니카와의 만남을 알리는 편지, 답장, 이후 에이드리언의 자살 소식에 반응했던 기억의 편린들이 친구의 일기 한 쪽과 그에게 보낸 편지의 실체가 부딪혀 역사로서의 한 인간의 인생의 진실을 드러낸다.

 

자기 삶의 주도자였던 적이 있었던가? 라는 문장이 불현듯 마음속에 떠오른다. 연애에서도, 결혼생활에서도, 그 밖의 무수한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이 내 삶의 지향점이라는 본질과 연결되는 것이었던가 하는 의문이다. 원칙이 이끄는 것에 행동하지 않았었다는 느낌에 지배된다. 수동성의 삶, 그것이었을 것이다. 회한이 밀려든다.

 

토니는 베로니카의 엄마가 죽으면서 남긴 의외의 유증, 오백 파운드의 돈과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그에게 남겼음을 전달 받는다. 그러나 일기장은 베로니카가 지니고 전달되지 않는다. 이메일을 통한 집요한 요구 끝에 인수된 일기장중 한 쪽에 불과한 정수와 등식으로 이루어진 논리식을 포함한 사본은 에이드리언이 자살을 하게 된 이성적 논거처럼 보인다. 하물며‘피 묻은 돈’이라는 짤막한 베로니카의 회신은 물론, 토니는 이 문서의 의미를 해독하지 못한 채 오히려 베로니카에 대한 향수와 만남의 기대를 키워나간다. 그리고 짧은 만남에서 베로니카는 한 통의 편지를 건네준다. 베로니카와의 사귐을 통지했던 에이드리언의 편지에 대한 토니의 답신인데, 그것은 그의 기억과는 달리 저주와 적의의 문장으로 가득하다. 현재의 정신 상태를 근거로 과거의 행위를 판단하는 우리들 기억의 기만성은 토니의 주장처럼 자기보존 본능의 한 발로일 것이다.

 

이것은 에이드리언의 자살이 토니 자신의 편지가 담고 있는 저주, 그 예감의 실현이었음을 의미한다. 행위를 근거로 정신 상태를 판단할 수 있음을 입증하듯 에이드리언의 인생이란 거대한 기만에 대한 저항적, 자기 주도적 행동성의 귀결이랄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토니의 삶이란 우연성과 수동성에 깃댄 평범함, 삶의 본연적 예감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것, 그저 생존하고자 하는 모종의 본능에 의지하는 것이다. 조잡하게 윤색된 자기 보존적 기억의 허위에 에워싸인 채.

 

내 삶이라고 토니의 그것과 그리 다를 것이 있을까? 그저 꾸역꾸역 “환희와 절망이라는 말은 소설에서나 구경한 게 전부인 인간으로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자문을 하게 된다. 이 지리멸렬함. “자살이 단 하나의 진실한 철학적 문제”라고 했던‘카뮈’의 말이 새삼 선명한 의미가 되어 다가온다. 인간의 조건에 거부할 권리로서의 자기 죽음에 대한 당당한 진실을 말이다. 아마 나는 삶의 귀결이란, 주어짐에 대한 맹목의 수용이 아니라 철저한 자기 책임과 주도라는 것을 이해조차 못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어쩐지 토니처럼 내 묘비명도 “아무개, 전혀 감을 잡지 못하다. ”가 되어야 했으리라는 생각조차 깃든다. “기억의 묵은 폐쇄회로”가 노년의 토니처럼 터지지 않는 아직은 급급한 일상에 치여 고작 최근의 기억들에서 맴돌지만 이 자기 반성적 인생 성찰의 역사적 기록은 이렇게 삶의 본연에 대해 정말의 생각을 하게 한다. 사유를 인생에 적용할 수 있다는 믿음을, 원칙이 행동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을, 인생의 수동성에 적극 개입하는 행동성을, 그리고 기억과 인생이란 운명의 기만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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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연속 세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0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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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도시라는 환상적 공간에서 한바탕 자아의 심연을 헤집어 삶과 죽음이 일체화된 존재자로서의 각성을 던지고 무심히 발길을 돌리던 음반 프로듀서‘다몬’의 세상 보기 후속 작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이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이 세상이 과연 실재하긴 하는 건가? 하는 몽환적 인식이 지배하는 모호한 존재론에 대한 5편의 이야기들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엮인 소설집이다.

 

<나무 지킴이 사내>라는 첫 번째 작품은 타 작품과 달리 사회성을 많이 띠고 있다. 2008년도 발표 작 이다보니 당시 일본의 경제침체에 대한 집단적 불안 심리를 반영 한듯하다. 민속고유의 불안 징조인 유령적 존재인 ‘나무 지킴이 사내’가 환영처럼 등장함으로써 유행과 아이돌, 부동산과 주식에 흥청대던 물신적 존재들의 야단법석을 죽은 이의 시간에 빗대어 세상을 연상케 한다. 사실 메시지의 선명성에는 이 작품이 독보적이지만 정작 내 시선을 주목시킨 단편은 <악마를 동정하는 노래>와 <사구 피크닉> 두 작품이다. ‘온다 리쿠’만의 암흑 색채가 주는 기묘한 매혹, 죽음의 선율이 유혹하고, 절묘한 정신분석적 해독이 돋보이는 지적 반짝임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지역 음악방송에서 흘러나온 여인의 노래를 들은 사람들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문을 모티브로 하는 <악마를 동정하는 노래>는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소설, <산소리>를 슬쩍 끼워 넣어 작품의 어두운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죽음’에 매료된 이들이 잠든 산의 소리와 의문의 노래가 어우러져 빚어내는 인간의 악마성이 내밀하게 잠자던 시원적 본능을 관통한다.

 

“잠이 안와 오늘밤도 잠이 안와

그 소리가 들리니까

밤의 밑바닥 졸졸 소리 나뭇가지 스치는 바람

그리고 그 소리가 들려와”

 

세 번째로 수록된 <환영 시네마> 역시 ‘애드거 앨런포’의 <까마귀>에 등장하는 ‘네버 모어’라는 사랑하는 여자를 잃은 남자의 시(詩)를 모티브로 하여 여인을 상실한 남자의 정신적 상흔을 아이돌 로커를 주인공으로 하여 인간 기억회로의 불안정함에 연민을 가득 실어낸다.

 

한편 환영적 체험 사건인 사구(砂丘;모래 언덕)의 사라짐을 서술한 프랑스 물리학자의 과학논픽션이 시발이 되어 동행한 다몬과 번역자 여성의 상상력과 지력 충만한 이야기인 <사구 피크닉>은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잠자는 미녀>를 떠올리게 하는 관능적 환상까지로 연결되는 기발한 작품이다. 사실이 생략되고 감추어진 건조한 과학에세이에서 인간의 잠자는, 은폐된 욕망의 실체를 규명하는 장면은 그야말로‘온다리쿠 답다 ’라는 칭찬의 말이 튀어나오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 작품인 <새벽의 가스파르>는 주인공 다몬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죽음의 사실에 대한 통증을 트라우마의 이상적 징후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데, 갈수록 세대간, 집단간 가치관의 차이가 벌어지고, 파편화되어가는 개인들의 고통이란 지금의 세상에서 어떤 의미인지를 빗대어 보여 준다. 자신의 기억을 조작하면서도 그 사실성에 대한 현실감을 상실해가는 우리들의 초상이 유일하게 공감할 수 있는 공포감이란 감성으로 비로소 납득되어야 하는 현실에 대한 유감일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현실의 세상은 과연 존재하긴 하는 건가? 하는 이 기만적이기 조차한 물음은 실재와 환상, 시간에 대한 서로 다른 체감, 기억과 시각의 불편할 정도의 왜곡 등과 어울려 삶의 현실감을 아득하게 한다. 시간과 공간, 보고 느껴지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에 늘 열린 상태로 살아가는 주인공 다몬의 삶의 방식에 동화되고 끌려 다니다보면 어느덧 전혀 다른 낯선 시간에 놓여 어리둥절해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하는 소설이다. 현실의 세계가 고달프면 고달플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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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당당 - 성석제 장편소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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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장치들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곳, 과시와 기만이 부질없는 곳, 그래서 인간이 어떤 것으로 굳이 수식될 이유가 없는 곳이라면 그 곳이 바로 유토피아 아닐까! 유토피아라 해서 공정함의 정의나 민주주의와 같은 주의와 도덕율의 잣대로 정의할 필요까지는 없다. 사람들이 서로 믿으며,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서로를 지켜주려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 곳이면 족하지 아니한가?

 

소설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 소박하게 서로를 의지하며 사는 어느 벽지를 묘사한다. 금강산도 아닌 것이 봉래산이란 이름을 가진 곳, 한자말은 더욱 우습다. 봉황의 봉(鳳)이요, 래 자는 그저 올 래(來)이다. 단지 봉이 올 것이란 이 소망의 말에 더해 사백 여 미터에 불과한 야트막한 산이고 보니 더욱 보잘것 없어보이게 한다. 더구나 이 외진 산기슭 강마을에 인간의 온갖 욕망이 휩쓸고 지나간 흔적인 겉만 번지르르하고 내용은 하나도 없는 버려진 드라마 세트장이 생뚱맞게 촌 동네를 차지하고 있다. 이 우스꽝스런 공간의 대비(對比)가 꼭 우리들의 모순된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나는 마음껏 웃음에 동참하지 못한다.

 

아무도 찾지 않는, 아니 찾기도 힘든 깡 촌에 세상의 사연이란 속박을 버리고 제각기 찾아 든 일곱 명의 사람들이 나무와 풀, 꽃과 숲, 강물이 흐르는 자연 속에서 보이지 않는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정감을 나누며 소박한 일상을 함께한다. 이들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오직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서 가족이 된”사람들, 서로를 가족으로 선택한 사람들이다. 육십, 오십, 이십대의 세대를 달리하는 남자와 여자들이 자연 같은 마음으로 낙원 같은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가뜩이나 좁아터진 우리네 세상이 이 같은 낙원을 가만둘 턱이 없다. 전국구 폭력 조직배의 눈에 띤 처녀의 미모는 이 조용한 시골 마을을 격전장이 되게 한다. 여자의 걸음과 속도를 같이하며 산길을 따라가는 검게 선팅이 된 벤츠와 그 안에 선글라스를 착용한 세 명의 남자, 이미 불온함과 폭력의 기운이 가득하다. 게다가 ‘아르마니 넥타이, 페라가모 구두, 베르사체 선글라스, 카르티에 시계’를 착용하고 뒷자리에 앉아있는 조직 두목의 차림새는 휴대전화조차 걸리지 않는 오지의 마을에는 어처구니없을 만큼 희화적(戱畵的)이다.

 

이 희극적 모습의 의미는 두목의 독백에 들어있는데, “봐줄 사람 하나 없는 개떡 같은 절벽을 바보 같은 부하 놈 때문에 땀을 흘리며 내려간다. 구두에 그 놈의 똥을 묻히고”처럼 터무니없는 과시에 제 놈들의 똥을 처바름으로써 소비지상의 허접함이 적나라해진다.

이후 처녀를 추행하려다 예기치 못한 일격을 당한 폭력배들이 마을을 공격하는 것인데, 조직원의 모습 또한 이 시대의 얼굴들을 하고 있다. 미소년의 얼굴과 잘 다져진 육체가 그것이다. 거죽, 표피의 포장은 그럴듯하지만 속은 완전히 썩고 비어있는, 실종된 정신을 대체한 물질만이 주렁주렁 매달린 21세기 한국인의 모습이 이런 것이 아닐까? 그런 이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역시 그들과 같은 모습을 한 겉만 번지르한 세트장의 거대한 똥통이고 똥간이다. 문명의 광기는 이렇게 자신들이 주조한 허위와 기만의 공간과 장치에 응징된다. 그 잘난 물질의 폭력성이 무시하고 짓밟는 자연의 평화에 굴복하는 것이다.

 

문명과 자연의 싸움, 폭력조직과 촌동네 사람들의 전투는 그 극단적 대비만큼이나 우스운 것이지만 마침내 참았던 웃음을 터지게 하는 해학의 정점은 조직원들에게 뿌려진‘똥 폭탄’에 대한 서술이다. “똥 폭탄은 물리적 효과보다 심리적 효과가 훨씬 컸다”라면서, 전투력 상실과 스스로를 톨아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하면서 짐짓 너스레를 떠는 것인데, “나는 누구인가,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중략) 인간이란 뭔가”하면서 잃어버렸던 자아성찰이 돌아온다는 것이다. 똥물 세례가 이성을 찾게 하는 모티브가 되는 것이니 이 대목에서 나는 책을 읽다말고 큰 소리로 한껏 웃어젖혔다.

 

마침내 마을 철수를 내건 촌 동네 가장격인‘여산’과 폭력배 두목인‘정묵’의 일대일 대결이 펼쳐지지만 “강변의 흙길을 따라 열 지어”중장비와 덤프트럭 수백 대가 군대처럼 들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강이 생긴 이래 이토록 많은 내연 기관이 한꺼번에 진주한 적이 없었다.”고.  폭력배들이 퇴각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평화가 오는 듯하지만 문명의 광기는 이렇게 ‘거대한 기계괴물 집단’이 되어 낙원을 제거해 나가려고만 한다.

“어머이, 우리 그냥 예전처럼 살면 되겠소. 누구든지 쳐들어올까? 보였소? 우리는 싸운다, 이긴다. 그놈들 잘못, 가르쳐 준다. 자연 잘못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자연이 가르쳐준다.”라는 어눌한 여산의 외침이 제발 광기의 도시 문명에게 들렸으면 좋으련만 그 소망이 왠지 실낱같아 애처롭기만 하다. 내가 받은 책에는“강 같은 평화!”라는 작가가 손수 쓴 글귀가 있다. 이들이 있는 곳, 서로 지켜주고 믿음과 사랑이 있는 곳, 소리 없이 흐르는 강물과 야트막하지만 인간의 발길을 쉬이 허락하지 않는 강과 산이 있는 곳을 지켜야 할 당위의 선언 같다. 이 땅에 정말 강 같은 평화가 흐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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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 - 경제성장과 민주화, 그리고 미국
그렉 브라진스키 지음, 나종삼 옮김 / 책과함께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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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로부터의 독립한 1945년 이후 1987년까지란 시간의 구분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의미가 자못 커다란 숫자이다. 아마 저자도‘대한민국’이라는 동아시아의 작은 민족 집단에게 비로소‘국가’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 숫자일 게다.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이렇다 할 경제적 기반도, 국가 행정자원도, 통치력도 지니지 못한 보잘것없는 후진적 민족 집단이 소위 서구의 근대화, 민주화된 산업 국가를 형성할 수 있었는지, 나아가 세계무대에 개발국의 지위를 확보하는 성공적 민주국가가 되었는지, ‘발전 지향적 독재’를 비롯한 독특한 한국의 산업근대화와 정치민주화의 과정을 탐사하고 있다.

 

 

책의 표제를 보면 전능한 힘을 가진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냈다는 뉘앙스가 강하다. 일견 미국인인 저자의 오만함으로 비치기도 하지만 객관적 사실의 표현, 즉 대한민국을 근대적 국가로서의 탄생이란 의미에서 바라보면 굳이 사시로 바라볼 것도 아니다. 1945~1948년 당시의 국제적 시선을 보면 “국가라면 당연히 갖추고 있어야 할 최소한의 정치적 감각조차 갖추지 못한 뒤쳐진 국가”라는 것이 지배적이었으므로 실제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서의 형태를 지니지 못한 그야말로 오합지졸의 인구집단이라는 것이 진솔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로부터 60여년이 지난 오늘의 시점에서 우린 대한민국을 명실상부한 근대적 국가, 민주국가라고 자처하는데 크게 저항감이나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근대 국가의 이념적 기반을 이루고 있는 인권(人權) 및 개인의 자유, 평등과 민주주의 등 형식적 조건을 성취하는데 40여년의 시간이 소요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민초들이 탐욕스런 독재 권력들의 폭압과 폭력에 참혹하게 희생되어야 했으며, 일제 부역자들을 청산하지 못하고 민족의 배반자들에게 기득권을 여전히 향수하게 하고 있다는 치욕스러움이 남아있다. 또한 사회의 많은 부분에서 실질적 민주주의가 정착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천부적 인권이라고까지 불리는‘인간의 존엄성’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복지분야, 만인의 평등을 법이란 형식 속에 명시하고 있지만 실제 정치, 경제, 사회의 수많은 분야에서 차별과 분류, 구별짓기로 평등의 가치는 오히려 실종되어만 가고 있듯이 퇴행적 양태를 부인 할 수 없는 것도 현실이다.

 

 

이 책은 이러한 측면에서 그나마 형식적 민주화를 시작하게 된 원년, 세계인의 시선에 정말의‘국가’로서의 지위를 인정받게 된 1987년에 이르는‘국가화’의 시간에 전개된 양상들을 정면으로 직시하게 함으로써 우리들이 반복하는 어리석음의 실체, 그 부당함과 부정의 요인들을 통해 진짜의 정치,경제 민주주의, 국민의 행복과 자유, 평등이 보장되는 선진 국가를 향한 귀중한 사유의 초석이 되어준다.

사실 이 책이 기술하고 있는 한반도 남쪽지역의 인구집단이 경험한 42년 동안은 민주주의가 실행된 적이 없다. 아니 실행하기 위한 안으로부터의 저항과 밖으로부터의 압력과 지원이 있었지만 그 외형적 안정성을 확보하는 데에만 엄청난 시간과 민초들의 희생이 소요되었다. 바로 이들 압력과 저항, 희생, 지원이란 무엇이었는지, 그것들이 궁극적으로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국가를 탄생시키는 데 어떠한 작용과 영향을 주었는지 목격케 하는 기획이라 할 수 있다.

 

 

1. 근대화를 지체시킨 독재자들

 

 

 

이 책의 남다른 미덕중의 하나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국내권력의 시선을 인식하지 않아도 된다는 편향성에 대한 시비를 부분적으로 낮출 수 있음으로 인한 높은 객관성이다. 물론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역할이란 측면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한국의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승만과 박정희, 이 두 인물의 독재기간만 무려 30년인데다가, 이후 10 여 년간은 다시금 동족의 무차별적 살해를 통해 정치권력을 침탈한 군사 쿠데타 세력의 독재가 이어졌으니 여기에 뭐라 인문학적 성찰을 한다는 것이 수치스럽기조차 하다. 그럼에도 당사자로서가 아니라 제3자적 시선의 이들에 대한 평가, 특히 미국 정부의 당시 입장을 비롯한 근대화라는 가치 지향적 접근에서의 고찰은 국내사가(史家)들이 미처 서술하지 못한 것들을 발견하게 한다.

 

 

일례로 미국무부 작성 <이승만에 관한 비밀 보고서>에서 “현실 정치가로서 갖춰야 할 역량과 자질이 턱없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와 같이 미국 정부의 평가나, 왜 미국이 이승만을 한국정치의 리더로 선택하고 지원했는지의 배경을 볼 수 있다. 또한 이승만이 개인적 권력욕에 그토록 쪄들었는지, 국민의 의사 일체를 무시하고 안하무인의 독재자가 될 수 있었던 자원(資源)적 배후도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당시 모든 국가 재건과 전쟁비용 등 국가의 재원 모두를 미국이 제공했으므로 이승만으로서는 국민과 협상이 필요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재원들이 경제발전이나 국가사회를 위한 자원으로 이용되었으면 다행이었겠지만, 정치적 라이벌 제압과 같은 권력 유지비용, 기업에 특혜제공을 통한 정경유착의 씨앗비용은 물론 전쟁 중에도 자금을 비밀리에 빼돌려 결탁하고 개인사단을 위한 정보비로 사용하는 등 악질적이고 파렴치한 노회(老獪)한 늙은이가 우리민족의 가장 중요한 12년간을 갉아먹었다는 증언을 들을 수 있다.

 

 

이어진 군사쿠데타와 박정희의 군사혁명정권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당시 냉전체제하에서의 미국 케네디 정부의 입장이 어떠했는지, 박정희의 권력유지를 위한 외줄타기 외교모험의 결과나 한일국교정상화가 미국정부나 박정희 군사정권의 어떤 이해관계의 타협산물인지를 보게도 된다. 특히 박정희에 이르러‘발전 지향적 독재’로 명명되는 독재정권 하에서 국가권력의 일방적인 권위에 의한 경제발전 모델이 성립하게 되는 과정에 대한 기술은 항상 논쟁의 중심에 서는 항목인데, 경제자립의 명목 하에 거대재벌에 원조자금을 집중하여 줌으로써 자신의 정치자금원을 확보하고, 경제발전을 이루겠다는 일석이조의 야심에 대한 미국의 당시 목소리를 들을 수 도 있다.

 

 

1차 경제개발 계획을 시작으로 박정희의 경제적 자주권을 향한 노력 - 재벌의 집중 육성을 통한 경제발전 - 은 오늘의 시점에서 결과론적으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노동자를 비롯한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철저하게 유린하는 토대에선 부도덕하고 패륜적인 물질주의, 경제최우선주의 지향이 절대적 불가피 정책이었다는 주장은 그 정당성을 지니지 못한다. 여기서 우리나라에는 왜 중소기업이 육성되지 못하는지, 오늘날 기업집단의 파행적 행태와 고질적인 정경유착, 재벌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의 정치, 관료사회의 뿌리 깊은 부패함 등의 원인이 이로부터 시작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한편 유신헌법이라는 기본권은 물론 국민의 모든 권리가 제한되거나 부정된 막되 먹은 헌법 개정과 부패한 독재권력에 학문적 정당성이라는 방패를 마련하고 권력의 시녀가 된 원숭이들도 이 시절부터 한국의 혐오스러운 사회현상의 하나로 대두되기 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독재권력에 빌붙어 논리를 제공하고 관료자리를 한자리 꿰차는 것에 목메는 어용교수라는 것들이 유행하기도 했었다. 오늘의 이 사회의 모습을 보면 거의 모든 것이 박정희 독재정권이 낳은 패습들의 연장에 있다해도 무방할 정도로 그 농도 짙은 썩은 냄새가 쉽게 가시지 않는 것 같다. 아무튼 이승만과 박정희의 정치적 입지 및 권력유지와 관련하여 미국 정부의 입장 변화들의 상린(常鱗)성을 통해 다채로운 사실과 분석적 통찰을 얻을 수 있다.

 

 

2. 국가화 과정의 요인들

 

 

나로서는 가장 매력적으로 읽게 된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민주화와 근대 산업사회에 걸 맞는 지식인의 성장과 관련하여 정치, 경제, 사회문화의 근대화를 위한 연구와 노력이 어떻게 수행되었는지에 대한 분석이다.

식민통치 하에서 일제의 권위적, 그리고 전통적 유교 교육에 얽매여 있던 전근대적 교육체계에서 미국을 통한 서구의 근대식 교육체계의 주입으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사상의 유입이 이루어지는 경로와 프로그램 등 이식 방법 등이나, 특히 선택된 정치 행정 관료들 및 군 장교들의 교육이 한국의 정치경제 및 사회전반의 성장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를 당시 참여자들까지 거명하며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실제 사회전반에 미국의 지원 프로그램에 의해 양성된 사람들이 각 분야의 리더로서 한국사회의 근대화 등 성장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음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있는 것인데, 미국 공보실의 후원으로 언론 유학을 다녀온 언론인들이 중심이 되어 형성된 관훈클럽의 전신이라든가, 군대에는 육사와 국방대학원을, 하다못해 출판분야에서는 『사상계』까지 원조에 이르는 전방위적인 미국의 적극적이고 의도적인 국가형성 작업의 영향력의 범위가 그것이다.

 

 

특히 서구의 근대화 이론을 통한 미국식 사고의 주입이 한국의 학생들과 지식인 사회에 자극을 주고 여하한 방식으로 수용되었는가에 대한 고찰은 우리가 보다 심층적으로 연구해야 할 분야로 인식되는데, 단지 추상적으로 독재권력에 대항한 민주적 욕구 발현의 동력이 되었다거나, 서구의 근대화 과정에 결여된 한국의 전통적 가치가 도덕적 보완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정도에서 그쳐서는 부족할 것이다. 실제 우리는 서구가 근대화라고 일컫는 산업자본주의는 물론 민주주의, 자유주의, 합리주의의 이념을 성공적으로 받아들였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우리는 여기에 우리 고유의 양식과 과정으로 변환하여 수용하였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인들이 때론 충돌하여 갈등하거나 배제되었는가하면, 유연하게 조화를 맺거나 저항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것들 각각에 대한 우리만의 연구와 진단의 성과는 미약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현대 한국사회의 정체성에 대한 민감한 부분들을 다루고 있다. 후진국이 경제발전우선주의 정책이란 가치를 위해 인간의 존엄성을 비롯한 자유와 평등과 같은 기본권을 억압하고 유린하는 것이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인가? 와 같은 정의의 문제에서부터 이승만이나 박정희와 같은 독재자들과 그 권력에 이론과 행동의 실천으로 아첨하고 선전의 선봉에 섰던 자들에 대한 조명이 있으며, 미국의 권력이 한국 사회에 어떻게 작동해왔으며 실제 작동하는 양태와 그 역학 관계를 분석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 현대사, 그것도 민주화 이전의 시기를 되돌아 볼 때면 항상 눈살이 찌푸려진다. 오직 일그러진 초상만이 있기에 그런 것인데, 이 책이 이러한 성찰을 회피하는 것은 아니지만 근대화이론을 비롯한 경제발전론, 그리고 미국이라는 제3의 시각에서 자료를 덧대어 역사적 시점을 현재화 하여 왜곡되거나 편향됨을 배제하고 분석, 제시하고 있는 것은 새로운 이해와 관점을 갖도록 해준다. 마침 한국의 정치 사회는 시민으로 외면당하고 부인될 정도로 신뢰를 상실하고 있으며, 이러한 판을 새롭게 구성해야 하는 선거를 목전에 두고 있다. 우리 사회가 보다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민주화된 국가로 도약하는 중대한 전환의 시기라는 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현대한국의 정치경제사는 우리들이 판단하여야 할 귀중한 요인들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도와준다. 수준 높은 역사 인식과 안목을 지닌 책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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