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仁祖 1636 - 혼군의 전쟁, 병자호란
유근표 지음 / 북루덴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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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말

 

오늘 우리는 실존했던 민중의 고통과 죽음의 실재성을 부인하며 공동체의 기억을 방해 훼손하려는 무리들로 인해 다시금 역사의 분노를 마주해야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자신들의 권력 지키기에 급급해 정쟁을 일상화하며, 민생을 외면하고, 민의는 묵살하며, 주변 정세에 대해 무감하여 인민과 국가의 존망을 위태롭게 하는 작태는 이 땅의 역사 내내 변함없이 자행되고 있다.

 

역사 쓰기란 고귀한 문명의 장치로서 인간 역사의 부조리를 끊어내기 위한 공분(公憤)의 기록이어야 한다고 프랑스 역사학자 아를레트 파주는 말했다. 승자들에 의해 써진 기록은 분명 많은 실재를 가려 보이지 않게 만든다. 그래서 지배 담론이 드리운 그늘을 걷어내어 암살당했던 사실들을 드러내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불화와 충동의 비극적 실재를 포착, 현재의 가치 기준에 따라 재해석하고 삶의 새로운 관계를 이해, 구축하는 일은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하는 의무이기도 할 것이다. 대략 400년 전인 1636, 이 땅의 왕이 적의 군주에게 머리를 세 번 땅에 찧고 아홉 번 절하는 굴욕의 역사를 오늘 다시금 성찰해야 하는 까닭일 것이다.

 

책은 이 굴욕의 사건과 이를 전후(前後)한 당대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외세에 무력하게 국토와 백성이 짓밟히는 위난(危難)을 마주하게 될 때까지 국가의 리더와 정치관료 등 지배 권력이 어떻게 국가의 위기를 초래했으며, 그 위기의 마주함에서 그네들의 대응 행태란 대체 어떠한 것들이었는지, 그리고 국난 이후의 행태들은 또한 무엇이었는지를 규명하는 작업이다. 이 저술의 고귀함은 역사를 비평의 체에 거르지 않고 고작 기록된 내용을 기술자의 욕망에 맞춰 재배열하여 정리한 또 하나의 단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툭하면 역사의 공평한 기술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대립과 충돌의 공평한 이야기란 진실을 가리는 기만이자 왜곡의 역사가 되기 일쑤다. 나는 역사란 실재의 불균질함을 감당하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조리한 양상들에서 의미와 특정 형상을 해독해내야 하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1636년 급하게 비빈 및 세손 등이 도피한 강화도가 청의 군대가 공격을 시작한 지 반나절 만에 함락되었다. 이에 대해 당시의 권력이 기록한 내용은 물살이 세고 좁은 해협이어서 적의 수군을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기록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양측 군대의 군사 수와 군선(軍船)의 비교를 통해 이 기록이 패전의 기록이 될 수 없음을 규명한다.

 

조선의 수군은 두께 12~3센티미터의 송판으로 만들어진 50~200명이 승선하는 판옥선 40척이었으며, 청군은 수레에 실어 온 작은 배 80척이었다는 것이다. 즉 조선의 수군은 보수적으로 계산하더라도 3,000명 내외였으며, 강화도 방어 병력은 간신 김류가 인조에게 잘라 말했듯 10,000명의 육상군이 있었다는 것이다. 도합 13,000명의 군대가 3,000명에 불과한 청군에 반나절만에 패전, 함락 당하였다는 것은 당시 지휘자들의 무능과 무책임, 비겁함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라고 해독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독이 바로 부조리한 양상들에서 특정한 의미를 길어 올리는 진정한 역사 쓰기라 할 것이다.


역사의 치욕을 향해 달려가는 지배 권력의 행태

   - 인조반정에서 정묘호란까지

 

책은 총 3부로 나뉘어 기술되고 있는데, 1부는 병자호란이 발발하기 전 인조반정, 그리고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을 다루고 있으며, 2부는 병자호란에 대처하는 무능과 무책임으로 점철된 왕과 고관대작들의 행태들을 추적한다, 그리고 3부는 병자호란 이후에 발생한 백성이 겪는 고통의 형태들과 볼모로 청에 잡혀있던 소현세자의 귀국과 죽음, 그리고 세자빈 및 그의 자식들에 가해진 참혹함 등 권력이 자기 책임 지우기에 급급한 수치와 비극의 실체를 쫓는다.

 

인조반정을 정당화하는 기록이 권력을 찬탈한 세력의 입장에서 자신들이 추출한 광해군을 성군으로 취급하지 않았음은 불 본 듯 뻔한 일이다. 서인(西人)세력의 거두인 전 영의정 박순의 서자들이 일으킨 역모로부터 시작되어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 서궁 유폐와 소북(小北)파에 대한 처절한 참살로이어진 계축옥사에 대한 반발, 즉 폐모살제(廢母殺弟)를 명분으로 서인이 주도한 오늘의 표현으로 쿠데타다.

 

성공한 쿠데타의 공신들과 인조는 그렇다면 국가개혁과 백성의 삶을 돌보는 일에 관심이 있었을까? 이에 대한 답변이 이괄의 난이다. 이것은 반정공신 김류, 이귀 등이 12,000의 군사를 가지고 서북지역 방어를 위해 평안병사 부원수로 영변에 있던 이괄을 제거하기위해 역모의 누명을 씌움으로써 야기된 파렴치한 권력독점의 야욕에 대한 반발이다. 거침없이 궁궐의 턱밑까지 이괄의 반군이 밀어닥치자 왕과 이들 대신들이 나누는 대책이란 천박하기 그지없다. 왜관에 있던 왜인을 불러 반군을 진압하자는 외세 의존의 결정을 하는 것이다. 만일 영의정 이원익이 와서 구원하지 않고 대거로 몰려온다면 그 때는 어찌 하겠는가라는 반론이 없었다면 왜란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왜()에 조선을 갖다 바치는 결과를 초래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뜻밖의 환난이 닥칠지 모르니 보내지 말도록 하라.”는 것이 인조의 교지였다는 말도 그 무능의 한 증거 일 것이다.

 

이괄의 난은 국가 권력의 무엇이어야 하는지 오늘의 우리에게 많은 반성적 시선을 던져준다. 왕과 대신은 반군의 물밀 듯 내려오는 기세에 눌려 궁궐을 버리고 공주로 몽진을 떠난다. 백성의 삶은 아랑곳없다, 자신들만 살면 되는 것이라는 비겁과 이기심과 무책임이 국가 지배계층의 태도였다. 이렇다 할 저항 없이 무혈 입성한 이괄의 교만 역시 자멸의 길을 걷는다. 이괄의 난이 평정되면서 22일 만에 돌아 온 왕과 대신들의 행태는 정말 당혹스럽기조차 하다.

 

오히려 국경지대의 수비군은 물론 모든 군사의 조련을 전면 금지하고, 기찰(譏察)을 강화하며, 고작 자신들의 안위를 위한 경호군을 대폭 증가시키고는, 생활터전을 벗어나지 못했던 백성들에게는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의심으로 무참히 도륙하는 짓으로 자신들의 책임을 망각한 채 무고한 사람들의 안위를 틀어막았다. 오늘의 현실과 오버랩되며 기시감에 전율하게 된다. 어찌 권력의 하는 짓이 이렇게 동일한 것인지. 무책임과 이기심!, 이 두 단어는 인조정권 내내, 아니 오늘의 한국 사회에 이르기까지 반복되는 양상을 보일 터이다. 역사의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없는 족속들. 바로 이 족속들에 내 자신이 포함되어 있음에 수치감이 몰려온다.

 

게다가 친명배금이라는 주변정세를 헤아리지 못하는 외교적 무지와 정권의 정당성을 위해 명 황제에 책봉을 애걸함으로써 명이 보낸 책봉사에 의해 나라 곳간이 거덜나는 실상은 차마 읽어나가는 것이 부끄럽기조차 하다. 인조 3162667일자 승정원 일기에는 이렇게 기록되고 있다. 물건 모두가 떨어지지 않은 것이 없고, 특히 은과 삼은 바닥이 났습니다. 이번 천사(주청사)의 행렬은 전에 없던 변으로...”

 

국가 재정의 상황이 이러할진대, 공신들을 모아 회맹연을 열어 인조와 공신들은 권력의 영속을 자축한다. 그리곤 다시 회맹 뒤에는 분축연을 반드시 여는 것이 관례라며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을 외면하고 수일에 걸친 잔치를 강행했다니 공감능력 상실, 탐욕스러움, 권력의 도취, 무책임성이 국가의 중심을 채우고 있었다는 말이라 하겠다. 백성이 국가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던 당대와 오늘의 사정은 다르다. 민중이 정치권력에 대한 감시를 외면하면 그것이 만들어내는 불의의 결과가 오롯이 참담함으로 돌아온다, 오늘 우리 민중은 권력을 향해 그릇됨을 지적할 수 있다. 목소리를 잃지 않는 인민들의 책임이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현실이다.

 

조선을 둘러싼 주변 정세의 거대한 변화가 몰아치고 있는 시대였다. 인조와 그의 봉신들은 권력의 탐닉에 빠져 소위 국제 정세의 변화를 읽는데 관심이 없었다. 오직 명에 대한 사대에 매달린 어리석음은 거대해지는 후금을 공략하는 전쟁에 13,000의 조선군을 파병하기에 이르고, 살아 돌아온 이는 2,700에 불과했다, 이것이 후금()의 조선 침략 명분이 되는데, 1627년의 정묘호란이다. 파죽지세로 한양으로 치닫는 적군에 놀라 왕과 대신들은 또 다시 강화도로 도주한다. 이 전쟁이 내정과 길어진 보급로 등의 문제를 인지한 후금의 사정이 아니었다면 백성의 고통은 정말 끔찍한 사정에 놓였을 것이다. 훈련된 군대도, 위난 정보를 전할 통신체제(봉수제), 그 어느 것도 외세의 침입에 대응할 것이 없었음이다.

 

권력이 자기 안위를 위해 국가 존립 기반을 망가뜨리는 이런 역사가 우리에게 있었다. 결국 주화파와 척화파의 명분 싸움이 시작되는데, 이는 후일 병자호란에서 판박이처럼 반복된다. 군사력과 경제력이 뒷받침 되지 않는 현실임에도 백성의 안위에는 눈을 돌린 채 명나라를 배신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척화파와 백성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강화하여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주화파의 아무런 실익도 없는 고담준론으로 세월을 보내는 것이다. 바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정쟁(政爭)이고 당파싸움에 몰두하는 것이다. 백성의 삶의 토대를 희생시키며 벌이는 권력 싸움, 바로 오늘에도 우리들의 눈앞에 전개되는 추악한 정쟁의 동태(同態)이다

 


병자호란에서 우리가 해독해야 할 것들

   - 1636년 남한산성의 그날

 

1636128일 청의 선봉군이 압록강을 넘어 다시금 조선을 침략하는 병자호란은 1627년에 청군 앞에서 약조한 굴종의 맹서인 정묘약조의 위반을 구실로 한 것이다. 조선이 명에 붙어 배신했다는 명분이다. 청군 침입의 치계를 129일 조정에 보낸 것이 1212일 도착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즉 봉수제가 작동하지 않아 파발에 의존해야 했으며, 1213일에는 이미 적군이 안주에 이르렀고, 14일에는 개성을 통과하여 한양의 목전에 도달했다. 강화도로 몽진을 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급하게 왕과 대신들은 입보처(立保處)를 남한산성으로 바꾸고는 황급히 대궐을 버리고 또 도주했다. 인조와 대신들의 세 번째 궁궐을 버린 도망이다.

 

남한산성에 들어앉아 성문을 걸어 잠그고, 인조는 각 도의 감사와 병사 및 경기 열읍의 군대를 선발해서 적을 치게 하라라는 교지를 내린다. 즉 임금을 지키는 근왕군(勤王軍)을 결성해서 청군과 대적하여 자신을 구하라는 명령이다. 제일 먼저 응답하여 출동한 곳이 강원도 춘천방어사 권정길이었던 모양이다. 1,000명의 군사로 청군과 대결하였으나 전멸하였으며, 경상좌도, 전라도 등 속속히 출전하지만 패배한다. 여기서 다시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이들 패배에는 지휘관의 무능과 비겁함이 함께한다는 것이다. 하나같이 가장 먼저 도주하고, 선전(善戰)하는 동료 장수를 이간질하거나,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작태들이 난무한다.

 

우리 역사상 3대 패전의 하나인 수만의 군사가 전멸한 쌍령전투가 바로 병자호란에서 있었던 비극이다. 전술과 전략에 대한 무지, 시종일관 당파 간 불신, 무능한 지휘자의 비숙련 직관 등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요인들이 결합된 필패의 총체이다. ()과의 화친여부를 놓고 주화파와 척화파의 격돌은 재연되는데, 척화파의 좌장인 사대주의자 김상헌은 화친 주장자들을 모두 역적으로 몬다. 주화파의 좌장격인 최명길은 오랑캐의 말 발굽아래 어육(魚肉)이 되어가고 있는 죄 없는 백성은 어찌해야 한단 말입니까?”라고 반문한다. 정치권력이 자기 권력과 재화에 탐닉할 때, 그리고 백성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정치사회를 정쟁의 분열로 내몰 때, 국가와 백성의 삶은 필연코 황폐해진다. 정묘호란에서 당면했던 국방과 경제력에 대한 증강은 10년이 지난 병자년에도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었다는 점이다. 거듭 반복되는 국난에도 이들은 아무것도 배우는 것이 없었다.

 

청 황제 홍타이지를 향해 조선 국왕 이종(李倧)은 삼가 대청국 황제께 글월을 올립니다.”라며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하는 이 수치의 역사를 인조 응당의 몫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겠는가? 대신이라는 자들, 고작 자신과 자기 식솔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자들이 권력을 지키고 있을 때, 민중은 어떤 상황을 맞이해야 하는가의 충격적 장면이다. 사실 이 잘 알려진 수모의 한 순간보다 더욱 주목하게 되는 사건이 있다. 화친 조건에 앞서 청이 요구하는 것들이 있는데, 왕제와 대신을 인질로 먼저 자신들에게 인도하라 했을 때, 이들은 합심하여 자신들의 교활성을 뽐내며 가짜 인물들을 보냈다가 들통나는 것이고, 이는 더욱 강화된 조건을 야기하여 더 커다란 손실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왕과 고관대작인 이들은 자신들과 자신들의 형제, 자식에 안위에 대해서는 끔찍하면서도, 백성의 목숨은 언제라도 내어주어도 된다는 생각, 게다가 임기응변이 통하리라 생각했다는 그 우매함과 교활함이다. 이러한 태도가 당시 지배권력의 일반적인 믿음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이 얼마나 세상의 이치에 어두웠던가를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당대 관료들의 저열한 양식의 형태가 빚은 비극으로서 두드러지는 사건은 강화도 함락에 관한 기록들이다. 간신 김류는 자신의 식솔들을 보호하기 위해 비빈 및 세손들의 피난처인 강화도의 검찰사로 아들 김경징을 발탁하여 보내는 것이다. 전시에 부여된 지역 총책임자의 감투이다. 김경징은 강화도를 완벽한 은둔처로 여기고 술판을 벌이며, 추궁하는 이들에게 내 아버지가 체찰사이고 내가 검찰사다. 내가 술판을 벌이는데 누가 뭐라 한단 말인가?” 어째 요즘 안하무인의 국회의원과 그 자식을 빼 닮았지 않은가? 청군이 보이자 강화유수 장신동과 함께 산 속으로 제일 먼저 도주하고, 고려 최씨 정권이 38년간 항전하였던 난공불락의 강화를 반나절만에 적에게 내주었다. 지휘자들의 총체적 무능과 무책임의 전형이다.

 

당시 사관(史官)은 김류와 김경징 부자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단다. 김류는 사랑에 가리워 아들 김경징의 나쁜 점을 몰랐으나....탐욕과 교만을 일삼으며...한낱 광동(狂童)일 뿐이었다...김류는 부귀 때문에 나라를 망치고 또 제 아들을 죽였다.” 백성들은 전쟁의 참화 속에서 어떠한 안전 막도 없이 죽어 가는데, 대신과 그 가솔들은 여전히 흥청대고 있었으며, 성안에 둘러앉아 고작 술사의 점괘에 의존하여 전투 여부를 결정하였다는 그 몽매성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청이 항복조건을 작성해서 보내 온 조유문이 조선이 칭하는 화친조약이다. 즉 청이 조선에 내리는 명령서이자 항복문서일 뿐이다. 이것을 조선의 국왕이 청 황제 앞에서 낭독함으로써 전쟁은 종료되었다. ‘정축조약이란 말처럼 기만적인 명칭도 없을 것이다. 명목상 조약인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전후(戰後) 후유증들

   - 백성들의 지속되는 고통과 성찰(省察)없는 지배계급의 양태들

 

청은 척화파 대신을 자신들에게 보낼 것을 명령하고, 세자와 그들의 노비로 삼을 수많은 조선 백성을 이끌고 퇴각한다. 척화파 대신(大臣)들을 대신(代身)하여 청에 끌려가 처형된 오늘날 삼학사로 불리며 칭송되는 인물들은 실제 대신들이 아니었다. 김상헌, 김류, 정온 등 대신들은 슬그머니 제외되고 홍익한, 윤집, 오달제 3인이 희생자가 되었다. 그들은 국가와 왕에 대한 충성심과 명에 대한 사대를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들이 과연 기릴 인물들일까? 이들이 백성의 신음을 들을 수 있는 존재들이었을까? 나는 회의적이다.

 

역사의 아이러니겠지만 척화파와 주화파의 좌장인 김상헌과 최명길이 모두 청에 소환되어 감금되는 사건이 있다. 김상헌이야 척화파이기에 청을 부인하는 속국의 인물에게 죄를 묻는 건 강자의 권리일 수 있다. 그런데 주화파의 거두인 최명길이 호출되는 것은 여전히 지배계급 간의 권력 싸움이 반복되고 있었다는 하나의 증거다. 조선이 청과 강화를 한 것은 종묘사직을 보존키 위한 것이었을 뿐 본심이 아니었다.”는 명()으로 보내는 외교문서를 이계라는 인물이 청()에 밀고함으로써 끌려갔다는 점이다.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타자를 낭떠러지로 미는 것, 이것이 저들 지배계급의 성찰 없는 일관된 작태였다.

 

이 국가적 수치의 역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회자되는 단어를 남겼는데, 화냥년과 호로(胡虜)새끼라는 욕설에 가까운 악질적 언어다. 이 말에는 우리 선조들의 슬픔과 한이 담겨있다. 청에 끌려간 조선인들을 피로인이라 불렀으며, 속환되어 청에서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당대의 세계는 이들을 매몰차게 내쳤다. 특히 여성들은 오랑캐 청인들과 정을 나눴다고 가문을 들먹이며 죽음으로 내몰고, 자결이 강요되었다. 그네들이 후일 화냥년이란 말로 바뀐 환향(還鄕)녀다. 그리고 그네들이 출산한 아이를 일러 호로새끼라며 멸시, 배척했다. 이것이 사회적 문제가 되었던 것은 필연적이었겠지만 이들을 사회적 일원으로 보듬지 못하고 내치는 데에는 역시 사대부들의 이기심과 냉혹함이 작동했다.

 

전후의 공과(功過)처리 문제라는 관점에서 아주 중요하게 이해된 부분이 있는데, 23,000병력을 가지고 있던 황해도 및 평안도 도원수(都元帥) 김자점이 삼전도 굴욕을 치룰 때까지 오늘날 가평군 설악에 있는 미원이라는 곳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연히 대소신료(大小臣僚)의 처벌 요구가 잇따르는데, 위급한 상황을 외면하고, 그 어떤 구제의 행위도 하지 않은 자에 대한 기율에 따른 처벌은 정당한 요구였을 것이다. 적이 쳐들어왔는데, 군대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면 이적(利敵)행위라 할 수 있다.

 

인조는 오히려 이들을 호위대장, 병조판서, 좌의정까지 자리를 내주며 곁에 두었다. 국가를 배신한 이적 행위자가 버젓이 국가 최고위 관료에 임명된다면 이것을 정의롭다 할 수 있을까? 또한 백성들은 물론 그 밖의 관료들에게 어떤 메시지가 될 것인가? 국가에 대한 이적 행위가 오히려 존중되는 세계라면 어느 누가 질서와 윤리, 법을 존중하겠는가? 전쟁 후, 조선의 사회상이 얼마나 무질서와 광기에 젖어있었는가의 반증일 것이다. 여기에 백성이, 정의가 설 자리가 있었겠는가?

 

이처럼 군주의 패덕함은 8년에 걸친 이역의 땅인 청의 볼모가 되었던 소현세자의 귀국과 그의 죽음처럼 당시 국정의 혼탁함과 맞물려 뚜렷한 상징적 사건을 낳는다. 인조실록에도 인조가 세자의 귀국을 원치 않았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는 청이 자신을 입조시키고 아들 소현세자에게 양위시킬 것이라는 의혹에서 비롯된 권력에 대한 집착이라 할 것이다. 소현세자는 지병으로 산증을 앓고 있었으며, 이러한 의심과 냉대는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 죽음에 대한 연구들이 다수 있는 모양인데, 병을 잘못 이해하여 치료하는 바람에 죽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저자는 소현세자의 염습에 참여했던 진언군 아내의 증언에 더 힘을 싣는다. 옴 몸이 전부 검은 빛이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 물론 이 모호한 기록만으로 독살을 단정할 수는 없다.

 

인조의 총비(寵妃)인 소용 조씨의 모친과 염문을 일으키던 어의(御醫) 이형익이 한 말이다.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내용이다. “(상이) 전교하기를, 침을 맞을 때 침의 2인만 입시하고 여러 어의는 모두 세자궁에 나아가 대령하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지극히 좋은 독살 환경을 만들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평소 세자 부부를 무함(誣陷)하기 일쑤였던 조소용이 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이형익에게 소현세자의 독살을 사주했으리라는 추정이다. 게다가 세자의 사후 묘호의 등급도 왕과 왕비, 세자와 세자비에게 주어지던 능(), 혹은 그보다 낮은 원()을 물리치고 묘()로 명령했다는 것도 독살에 무게를 싣게 한다.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홀로 남게 된 강빈은 조소용의 간계에 의해 사사되었으며, 그의 세 자식들도 제주에 유배되어 둘은 굶주림과 학대 속에서 사망하였다. 조선의 대표적 혼군(混君)인 인조의 사망이후 적통인 소현세자의 생존한 아들을 배척하고 즉위한 효종 또한 적통성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강빈의 옥사를 거론하는 자는 역률로 다스리겠다, 진실을 지우려 한 효종의 비겁함에서 끈질긴 불의의 계승을 읽게 된다. 탐욕과 간계와 비굴, 비겁과 무능과 무책임, 그리고 광기가 빚어낸 17세기 이 땅의 역사는 수치와 비극의 역사라 해도 결코 지나친 이해가 아닐 것이다.

 

맺는 말


오늘은 17세기 절대권력을 지닌 왕이 지배하는 세상도 아니며, 형식적이든 외형적이든 지배 권력에 진입하는 계층에 제한이 주어진 세상도 아닌,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하는 민주공화국이라는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권리인 체제이다. 혼군의 무능과 무책임은 국민이 지탄하고 시정을 촉구할 수 있으며, 자기 이익에 탐닉하며 국민 삶의 건강성을 훼손하는 권력은 끌어내릴 수 있다. 이처럼 반복되는 불의로 그득하고 부조리한 양상은 이제 우리들의 세계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할 수 있어야 한다. 아마 이것이 역사를 읽는 까닭일 것이다.

 

이 책은 지배 엘리트로 자처하는 인간들의 절대 사회가 당연했던 것으로 만들어 냈던 권력관계의 충돌을 배제하고 외면함으로써 공평하게 정리한 따위의 역사서가 아니다. 역사의 자료를 어떻게 읽었는지, 어떻게 선택했고 분류하였는지를 드러낼 뿐 아니라, 진실이 좌초해 있는 사료들의 베일을 찢고 앎의 불투명을 해쳐내어 가려져 있던 것을 드러내 보여준. 왜곡과 진실 사이에 난 좁은 길을 역사가가 어떻게 걸어내야 하는지, 이를 통해 현재의 삶의 현상들의 관계를 이해케 하는 노작(勞作)이라 하겠다. 병자호란에 대한 이 역사평설은 전쟁이란 참화를 온통 몸으로 겪어내야만 했던 백성들의 흥건한 피() 위에서 풍악을 울려대는 권력의 파렴치에 대한 규명이며, 해독이다. 역사의 진실을 일그러뜨리고 더럽히면서 관련 사실을 기만적으로 이용하려는 인간들이 나라를 혼돈의 지경으로 몰아대고 있는 작금의 현실은 더욱 우리들에게 역사의 이해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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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켑틱 협회 편집부 엮음 / 바다출판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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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취약성, 바로 이 무지를 공략하여 부, 권위, 명예, 세력 등등을 취하는 무수한 행태들로 가득하다. 특히 미혹되기에 가장 유리한 자리에 있는 것이 인간 이성의 응결체라 여겨지는 과학이라는 외피를 걸치고 출현한다. 그런데 이러한 과학적 연구 결과라고 주장하는 지식들이 실제로 과학적이지 않은 전제를 가정하기 일쑤며, 더구나 학문적 또는 사회문화적 권위를 배경으로 실행된다는 점에서 그 기만이나, 거짓, 위선, 오류가 은폐되고 진실이라며 세상을 호도하곤 한다.

 

스켑틱(Skeptic) 33(2023.3.10.출간)호는 자기계발 심리학의 명과 암이라는 커버 스토리를 담고, 미국 모방의 최전선에 있는 한국 사회의 자기계발열풍에 문제의식을 지니고 살펴보게 한다. 그리고 낙태 반대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요즘 제기되고 있는 선거제도의 중대선거구제로의 변환을 통한 정치개혁 탐색, 침술, 즉 한의학에 대한 양학의 오리엔탈리즘 비판, 민족주의에 대한 제고 등, 논쟁적인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 사회를 장악하다시피하고 있는 자기계발 심리학에 대한 양상부터 시작해보자.

 

서점의 중심을 장악하고 있는 자기계발서들은 저마다의 심리학 분야의 권위로서 자신들의 명성이나 물질적 성공을 내세우며 개인과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과장한다. 하버드나 예일대 심리학 교수라는 신분표지나, 산업부문을 대표하는 유명기업 인사, 또는 엄청난 부를 축적한 인물이 말하는 것, 특히 테드(TED)강연이나 대중 매체에 출연하여 떠들어대지만, 실제 유의미성도 없거나 입증 불가능하며, 심리적 변화의 효과도 없을뿐더러 행동변화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는 것들이 태반이다.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이들 자기계발의 성공 경로를 얘기하는 것들은 사유하지 않는 직관적인 인간들을 용이하게 파고든다.

 

어느 누가 보아도 실소가 터져 나오는 자기계발서의 주장들에 현혹되는 사람들이 그치지 않는 것을 그 소비자의 우둔함을 탓하기에 앞서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그릇된 재화욕, 권력욕, 명예욕부터 비난해야 할 것 같다. 페미니즘에 결탁하여 파워포징(power posing)'이라는 주체성 강화법이 한 때 유행했다. 등을 꼿꼿이 펴고 몸을 반듯이 세우라, 이 자세를 하면 주변 공간을 장악하게 되고 자신감이 증가하며, 재정적 위험을 감수하려는 경향이 높아져 부의 축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캘리포니아 버클리 캠퍼스의 심리학 교수인 데이나 카니의 이 주장은 실험 통계조작을 통한 거짓이었음이 연구자들에 의해 밝혀졌다. 아무런 상관성도 유의미성도 지니지 못하는 허튼소리였다는 것이다. 비판이 계속되자 카니는 재직하는 학교의 웹페이지에 나는 파워포즈효과가 진짜라고 믿지 않는다.”고 입장을 밝혔다는 것이다. 지금도 한국사회에 유행하는 긍정의 심리학의 양상도 이와 그리 다르지 않다. 긍정 심리학의 창시자인 펜실베이니아대 마틴 샐리그먼이 개발한 개입 프로그램들은 실제 증거보다 과장된 주장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긍정적 감정을 늘리면...성격의 강점, 관계, 의미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심리학 교수들로 구성된 평가회의에서는 이실직고했다. 긍정 심리학 프로그램은 학생들의 우울감과 불안증세, 성격의 강점을 강화하지 못했고...”, 더구나 미국심리학회 회장이라는 명예까지 두른 사람이니 그 권위에 편승한 재화에 대한 욕심이외에는 아무런 진실도 없는 기만이었다. 여기에 휘말려 든 선의의 독자들이나 소비자들은 헛 돈을 쓴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다. 샐리그먼은 300만 달러의 연구비를 받아 챙겼다는 것이다. 그리곤 완결된 보고서로 발표된 적도 없다고 한다. 이것이 자기계발 심리학의 현실이다.

 

아마 한국에서도 대유행한 그릿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것이다. 끈질긴 근성을 지닌 사람들의 성공담으로 가득한 앤절라 더크워스의 이 책은 입맛에 맞는 사례만 수집하고”, “그릿을 지니고 있지만 성공하지 못한 사례는 제외하는 식으로 정리된 책이었음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이 성공을 증진시키는 효율적이고 근거 있는 방법들은 이미 존재한다. 그것의 실천이 결코 쉽지 않기에 모든 사람들이 시행하지 못하기 때문일 뿐이다. 시간관리와 집중하고 훌륭한 학습방법의 습관을 익히는 것인데, 이 습관화야말로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지름길이란 없다. 쉽고 빠른 길을 찾는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자기계발서는 대개가 부질없는 사실 뿐임을 증명한다. 넛지는 다를까? 바람직한 행동을 위한 환경 조성이라는 행동 전환 전략을 말하는데, 넛지에 주력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오히려 이 인식은 넛지를 실행해도 성취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며, 결과적으로 실망감과 적개심을 낳기까지 한다고 한다. 더구나 개인이 변화시킬 수 없는 제도적 문제들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으며, 이를 간과함으로써 실패를 더욱 크게 확장할 수 도 있다는 것이다. 뉴욕의과대학 신경학 교수이자, 뉴욕 페이스대 심리학 교수인 테런스 하인스자기계발 심리학 다시보기의 이 비판적 논문도 회의적 시각으로 읽어야겠지만, 오늘 우리사회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자기계발의 유행은 분명 반성적 관점을 필요로 하는 현상임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특히 흥미롭게 읽은 글은 한의사 김나희 박사가 가정의학의()인 해리엇 홀이 침술의 신화에 침을 놓다라는 논제(論題)하에 한의학을 비판한 글에 대해 다시 비판한 침술의 신화에 침을 놓다에 대한 잠언이다. 특히 이 글에 주목하게 된 것은 이번 호에 해리엇 홀의 낙태 반대론자들을 비판하는 글이 게재되었기 때문인데, 그의 논문을 읽을 때 비판적 시선을 놓쳤음을 깨달은 까닭이다. 이 잡지가 스켑틱(skeptic; 회의적 비판)인 이유를 스스로 실천하는 글인 것 같아 더욱 흡족하게 읽었다.

 

김나희 한의사는 해리엇 홀의 글은 여러 겹의 잘못된 전제위에 쌓아올린 복합질문의 오류에 해당한다, 조목조목 진실을 전개하고 있는데,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전제하고 비난하는 허수아비 때리기 오류에서부터, 알지도 못하는 것을 마치 아는 양 사실을 호도하는 무지에의 호소 오류’, 성급한 일반화, 개념 혼합의 오류로 점철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동양 폄훼로 꽉 들어찬 편향된 글임을 논박하고 있다. 서로 다른 관점과 무지에서 비롯되는 이러한 양상은 비단 동서 의학의 논의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권위에 서서 비전문 분야도 자신이 모두 아는 양 떠들어대는 것이 오늘 한국 사회의 작태인 것도 아마 이러한 현상과 동일한 것이라 해도 될 것이다.

 

이러한 실체에 대한 심리학적 개념어도 있다. 자신의 지식을 과대평가하는 더닝 크루거 효과(Dunning Kruger Effect)’라는 것인데, 이것은 어떤 정책이나 프로그램의 결과를 커다란 실패로 이끌어 막대한 사회적 손실을 낳는 주범이 된다. 의사결정자가 자신이 내리는 결정에 필요한 기술과 지식이 없음에도 자신이 모두 알고 있다고 하는 자기과신에서 비롯되는 '비숙련 직관(unskilled intuition)'이 우리 사회에 너무 심하게 부착되어 있는 듯하다

 

아무튼 세계화와 프로토피아(protopia)에 대한 사유에서부터 동물의 마음, 성 불평등의 편재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주제의 논의가 풍성하게 시의성을 띠고 독자의 비판적 지성을 자극한다.   오믈렛을 만들려면 달걀을 깨야한다.”는 레닌의 말처럼 당위적 진실 같은 말도 과연 그럴까하고 우리는 의심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사는 현실의 세계에는 이 말이 결코 진실이 아님이 곧 드러나기 때문이다.

 

4,500만 명의 인민을 죽이며 대약진의 개혁정책을 펼쳤던 마오쩌둥은 인간을 달걀처럼 엄청나게 깨뜨렸지만 그것은 오믈렛이라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대재앙이었음을 오늘의 우리들은 안다. 달걀을 함부로 깨부순다고 오믈렛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이 역사적 진실은 사람들에게 왜 회의적 비판의 시선, 비판 능력이 요구되는 것인지를 입증하는 귀중한 사례가 될 것이다. 오늘 한국사회에 펼쳐지고 있는 극단적인 이념적 양극화는 실로 마음을 어둡게 한다


이러한 현실 때문인지,   좌파와 우파의 뇌는 공명하지 않는다는 신경과학자 나타샤 모드의 짧은 연구 결과는 내게 직관에 의존하는 인간과 사유를 하는 인간의 그 철저한 양극성을 확인하고 확신하는 결정적 증거가 되었다. 물론 이조차도 비판의 시선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3월도 이렇게 작은 앎의 조각을 거두며 세상의 이해에 미미한 한 걸음을 옮겨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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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봄 2023 소설 보다
강보라.김나현.예소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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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호에 수록된 작품들은 전혀 예기치 않은 감흥으로 다가왔다고 얘기해야겠다. 이것은 자기 믿음의 변화란 외부 세계를 자기 내면으로 불러들이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수용의 과정 없이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 인간의 완고함에 대한 발견이다. 내 오랜 방어적인 인식이 이젠 찢어지고 벌어져 외부가 들어와 자리 잡고 섞이는 것에 제법 너그러워진 탓도 있을 것이다.

 

자기 계급이 가진 특권이라는 선민의식을 자각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매일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란 것들이 자기 내면의 의도와 얼마나 무관하게 벌어지는지, 또한 자기 내부 밖의 모든 세계에 대한 이해란 것이 얼마나 자기 편의적인지를 확인하는 것, 이러한 사태들을 마주하게 되고 이것들이 빚어내는 고통의 원인을 인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리만큼 어렵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케 하는 이야기들이라 할 것 같다. 너절한 시작 말은 거두고 작품의 이야기로 들어가야 할 것 같다.

 

(1) 수록된 순서를 조금 바꿔, 김나현 작가의 단편 오늘 할 일로 감상의 글을 시작하련다. 제목이 말하듯 다음 날 할 일을 하루 전날 식탁에 마주앉아 한 쌍의 맞벌이 신혼부부는 각자의 다이어리에 계획을 쓴다. 그 계획이라야 별 것 아닌 출근할 때 책읽기. 바닐라라테 마시는 것, 일할 업체를 확정하는 것처럼 단 세 줄을 넘지 않는 지극히 뻔한 평범한 일상이다. 자신들의 규모에 버거운 대출을 받아 아파트에 입주한 것은 둘이 번다.”는 믿음에서 저지른 일이고, 그 믿음으로 결혼을 했다.

 

이야기는 초반부터 어그러지기 시작하는데, 남편 선일이 직장을 그만둔다는 것이다. 갭이어, 이 단어의 자신만만함, 마치 계획에 다가가기 위한 준비의 어떤 완전성을 생각게 하지만, 이처럼 위선적인 단어도 없을 것 같다. 새로운 미래를 위해 충전하는 시간이란 사실 언제든 시작하기만 되는 그런 조건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위협적인 추상의 시간일 것이다. 선일의 행위에 대해 화자인 는 술기운을 빌어 사기 결혼이라고 어그러진 결혼 생활에 항의한다.

 

는 출근할 때, 책을 읽지도 못하며, 그나마 다행스럽게 옆자리 동료가 사다준 바닐라라테를 마실 수 있었다. 그리곤 촉박한 일정과 빠듯한 예산으로 포스터 발주조차 하지 못하며 일할 업체를 확정짓지도 못한다. 선일역시 자신이 주장해서 적는 오늘 할 일의 계획이지만, 갭이어라는 텅 빈 시간을 채울 일도 어긋나기만 한다. 나는 이 두 사람의 빗나가는 계획을 보면서 인문학자 고미숙의 말을 떠올린다. 이 끔찍한 계획을 버려!”, 삶의 울타리를 꽁꽁 묶어 놓는 우라질 계획을 버리라는 목소리를.

 

주인공 의 상사로 등장하는 게으른듯하지만 어느새 능청스럽게 일을 해내는 백 팀장이야말로 선일과 가 체득하여야 할 삶의 하나의 요체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 인물은 외도로 이혼당하고 모텔 방을 거처로 외로운 삶을 전전해야 하는 존재이지만 그는 생명차원의 연대, 세상을 향해 나가도록 힘차게 응원해 줄 줄 아는 사람이다. 어쩌면 다이어리에 두서없이 할 일을 욱여넣을 수도 있고 아무것도 채우지 않은 백지로 남길 수도 있지만, 무계획의 삶을 살아내는 것, 선일에게 요구되는 건 두 사람이 이룬 가족의 관계를 물질적 성취를 향한 달음질이 아니라 생명의 플랫폼으로 변환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아무에게나 오늘이 괜찮은 것인지 묻지 않아도 되는 것일 것만 같다.

 

아무튼 김나현의 이 작품은 소박한 웃음이 떠나지 않는 문장으로 그야말로 만끽한 소설이라 하야겠다. 피식 피식거리게 하는 웃음 코드들이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변화하려할 때마다 부드럽게 얼굴을 펴준다. 읽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소설이다.

 


(2) 강보라 작가의 단편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은 마흔 줄에 접어 든 예술비평을 직업으로 하는 재아라는 인물이 발리 우붓의 한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푸는 정경으로 시작된다. 이 인물은 자신의 눈과 귀에 들어 온 게스트하우스의 풍경을 스캔하며 싸구려 향냄새와 자신의 기억 속 환경과 다름을 감지하며 그냥 호텔로 갔어야 했다.”고 자신의 결정을 자책한다.

 

이 시작 문장에서 이미 자신의 계급적 취향이 예전과는 다른 것이며, 사실혼 관계에 있는 현오란 인물의 인정에 좋은 기분을 느끼는, 어려서부터 갈고닦은 취향과 관점으로 정해진 길을 걷듯 편안하게 예술계에 진입한 사람들로부터의 인정에 안착한 일종의 문화 엘리트 계급임을 자랑스러워하는 여성임을 예고한다. 이 인물이 유명 요가 구루가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한 며칠의 게스트하우스에 머무는 기간, 사람들과 내키지 않는 어울림의 과정에서 무쌍하게 겪는 내면의 이야기들이다. 그것은 젊음과 나이듦에 대한 은근한 자격지심이며, 사회적 연결망에 취약한 사람들에 대한 경시와 우월적 감각, 그리고 자기의 계급적 안전에 대한 의식의 확인이다.

 

게스트하우스의 호경이란 젊은 여성의 일탈에 질시의 감정을 갖으며, 그녀가 재아 자신의 신분을 감지하면서 변화된 태도를 보이며 접근하는 것에 경계의 감정을 지닌다. 소설의 표제는 호경이 재아에게 선물한 우붓의 노점상에서 산 손바닥크기의 그림이다. 호경이 맥락없이 건네는 그림 선물에 느낀 불쾌했던 감정이 유명 영화감독의 딸이며 실험예술을 하는 아티스트임을 알게 되자, 이렇게 바뀐다. 누군가 그 작은 모험에 대해 묻는다면 즐거웠다고 말할 것이다.”라고.

 

인간은 자기 손아귀에 쥔 편익을 결코 놓지 않으려는 존재이다. 그래서 계급적 특권에 한번 수렴한 인간이 주변의 인간들을 이해하는 것 역시 그 편익이라는 편협성을 벗어나지 못하며, 자기 자각을 상실하는 것 같다. 나는 재아가 자기 계급의 불완전성이나 불온함을 온전히 깨달았다고 믿지 않는다. 이것은 사실 비교적 오래된 비판의식이다. 새롭지 않은 문제지만 그 안에 자리잡은 허위의식들은 계속 드러내어 해체되어야 할 이 세계의 과제일 것이다.

 

(3) 예소연 작가의 사랑과 결함은 화자인 가 고모인 순정과 함께하며 지닌 애증, 그리고 친구인 에 대한 반감의 그늘에 있는 억압된 진심, 고모와 엄마 미애가 지녔을 법한 또 다른 애증의 감정을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에는 언뜻 뜬금없는 소재인 로봇청소기가 등장하는데, 그 기발한 상징성에 주목하게 한다. 내겐 소설 속 열연하는 수와 고모 희정과 엄마 미애를 넘어서는, 이들 모두를 담아낸 표상처럼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소원한 관계로 멀어졌다고 여기는 수에게서 줄게 있다는 문자가 수신됨을 계기로, ‘와 수와 고모와 미애의 사연들이 서로 엮여 사랑과 그 결점들의 자취를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다. ‘엄마에게 선물한 식기세척기로 인해 야기된 고모의 질투를 삭이기 위해 엉겁결에 고모에게 선물한 것이 로봇 청소기다. 이 로봇 청소기가 수에게 주어지고, 그것이 다시금 에게 돌아 온 것인데, 바로 이 순환의 역사를 온 몸에 새긴 실체가 로봇 청소기인 것 같다.

 

그것은 외롭게 암 투병을 하던 고모의 방에서 그녀의 삶의 현실을 고스란히 목격한 존재이며, 이제는 벽을 향해 무섭게 반복하여 돌진하는 고장 난 청소기이기도 하다. 수가 돌려주며 청소기가 그저 장애물을 인식하지 못하고 부딪는 정도가 아니라는 말을 흘려버리고 자신의 집에서 작동시켰을 때 는 그 무서운 돌진을 보고 달려가 로봇 청소기를 가슴에 안아든다. 그것을 멈추기 위해 스위치를 단순히 끄는 행동이 아니라 그 이상이 필요하다는 것을 감지하는 것인데, 이 장면은 왠지 가슴이 뭉클한 감각을 일으킨다.

 

미움, 저주, 연민, 사랑, 그리고 고통과 우울, 이 온갖 감정이 충돌하는 가장 가깝다고 여겨지는 인물들이 겪는 이 한편의 풍속화는 아마도 그 그림 속 인물들을 바라보는 것을 통해 독자 저마다의 동일시가 가져다주는 위안의 창작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우선 내 자신을 껴안아 주어야겠다. 그리고 말을 잊은 지 제법 오래된 가족들을 안아보아야 할 것 같다. 삶에서 너무도 많은 것을 잃고 사는 것만 같다.

 

세 편의 작품들, 어렴풋이나마 빈약한 자아의 인식을 하게 되는 문화 권력에 심취한 인물, 삶의 불완전성에 대한 학습을 내면화하고 생에 대한 시선을 변환시키고자 하는 사람들, 그리고 삶의 표준, 혹은 정상성이란 것이 망상임을, 경계를 표류하는 존재임을 흐릿하게나마 알아가며, 세상의 이해를 위한 작은 걸음을 앞으로 내딛는 인간의 모습들이다. 어느 소설이 이러한 얘기들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마는, 여기 수록된 김나현, 강보라, 예소연의 작품들은 딱딱하게 굳은 독자 내면의 벽을 허물어뜨릴 만큼 밀고 들어오는 힘이 강한 이야기들이었다고 해야겠다


정말 감흥이 잇따르는 그런 작품들이었다고 감히 말 할 수 있다. 특히 김나현 작가는 아마도 그녀가 하는 창작의 걸음을 지켜보게 할 것 같다. 내가 지니지 못한 해학의 코드를 지닌 작가, 정말로 오긴 오는 것인가하며 그 주춤거리며 둘러보는 시선에 깃든 마음이 정말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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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코스모스 - 40억 년에 걸친 미생물의 진화사 김영사 모던&클래식
린 마굴리스 & 도리언 세이건 지음, 홍욱희 옮김 / 김영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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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개의 생물체들이 한데 합쳐져서 양쪽의 합보다 훨씬 진보된

새로운 한 생물체를 창조했다.” - 158

 

린 마굴리스세포 공생 이론을 알게 된 것은 대략 2년 남짓한 비교적 최근이다. 그것은 이진경과 함께 펴낸 감응의 유물론과 예술<수유너머 104>에서 연구, 강의 중인 최유미박사의 평설 공생의 생물학, 감응의 생태학에 인용된 생명은 개체가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의 복합체라는 세포의 공생, 이종간의 우발적 엮임, 즉 세포 융합이 지구 생물 변화의 주요 원동력이었다는 문장에서 시작되었다. 생명의 운명과 진화의 토대는 경쟁과 적대가 아니라 화합과 공생이라는 의미이다. 이 책은 이렇게 내게 미생물의 우주, 인간을 비롯한 생태 우주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시야를 지니도록 다가왔다.

 

진화는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살벌한 투쟁이라고 주장하는 몰염치하게 왜곡 사용된 적자생존이란 용어의 남용과 더불어, 진화는 언제나 개체의 이익을 위해 진행된다는 신다윈주의자들의 신앙이 된 믿음의 오류를 입증하였다는 점이다. 언제나도 아니요, 독립된 개체의 이기적 이익도 아니다. 진실은 진화는 서로 다른 개체의 공생적 이익을 위해 진행된다! 생물학의 현대고전이 된 이 책, 마이크로 코스모스가 발표된 1986년부터 수년간 다윈을 교조로 받드는 자들에 의한 무차별적 비난과 조롱이 쇄도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린 마굴리스의 세포 공생, 세포 융합이론은 생물학 교과서의 유전자 교환 이론은 물론 미생물학 세계, 나아가 지구 생태계를 이해하는 주요 이론으로 정착되었다.

 

이 저술은 생물학 교과서의 내용을 바꾸게 하였으며, 진화론의 새로운 장을 연 지난한 연구노력의 직접적 결과물이라는 생물학 부문의 위대한 성과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 책에 더욱 고개를 숙이게 하는 것은 인간 중심주의 사고에 대해 다른 관점을 지니고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관계의 사유이다. 저자가 서문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위계적으로 대단히 견고한 철학적 이론이나 과학 이론을 비판하는 길은 전도와 제거를 동원한 방법뿐이다. 전통적 견해의 역전과 해체!, 그것은 인간을 진화의 사다리 가장 위에 둔 망상적 이해를 뒤집는 것이고, 가장 아래 자리잡고 있는 미소한 생물, 박테리아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소위 발달기원설을 주장하는 진화론자들은 마치 세포가 필요해서 어떤 기능을 갖도록 진화한 것처럼 말한다. 이러한 망상은 인간을 진화의 가장 꼭대기에 선 최고의 진화물이라는 사이비 결과를 만들어낸다. 박테리아와 같은 원핵세포 등 미생물의 진화는 인간의 출현에 수십억 년 앞선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진화는 결코 계획적으로 진행되었던 적이 없으며, 계획이란 것이 없다.” 인간의 몸은 10,000 ()개의 동물세포와 10만 조의 박테리아 세포를 지니고 있다. 동물세포인 개개의 진핵세포는 박테리아와 같은 원핵세포들의 융합체일 뿐이며, 바로 이것들의 유기적 연결체의 한 형태가 인간이다. 여전히 이 세계의 생물체들은 박테리아에 기초하고 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즉 린 마굴리스의 이 책은 공생기원설을 선언한다.

 

박테리아에서부터 포유동물로 불리는 생물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물의 화학적 유사성은 공통의 조상에서 유래했음을 시사한다. 책은 원시지구의 분자들에서부터 핵산과 세포막이라 부를 만한 것을 통해 원핵세포인 박테리아의 출현, 이들의 공생, 융합을 통한 자가조직화 등 자기보존능력의 보유와 다세포로 발전, 한 개 이상의 출처로부터 유전자를 받아 이를 재조합하는 과정인 성(sex)의 형태 변화들과 번식, 치아와 눈, 근육조직과 뼈의 형성들에 이르는 수십 억 년의 적응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세포 공생 이론은 별개의 생물체들이 한데 합쳐져서 양쪽의 합보다 훨씬 진보된 새로운 생물체가 창조되었다는 진화 이론이다. 소위 양육강식이라는 계산된 드라마에 의한 진화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 허위의 주장들은 린 마굴리스를 비롯한 수많은 학자들의 고고학적 발견과 실험실 연구들로 입증되어 오랜 동안 인간의 도덕과 종교를 장식했던 오만과 오류를 해체시키고 있다.

 

개체 이익 진화라는 전통적 다윈주의를 시정하게 하는 테네시대학 동물학 교수인 전광훈박사의 15년에 걸친 아메바 배양 실험은 박테리아에 감염된 아메바가 함께 생존하기 위해 협력의 기작을 작동하고, 둘의 공존 공생적 습관의 형성으로 상호 필수불가결의 존재가 됨을 입증한 전기적인 공생실험으로 인용되고 있다. 결국 진화에는 경쟁과 협동 사이의 뚜렷한 경계가 없으며, 미생물우주인 자연은 개체와 같은 추상적 개념의 범주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이를 넘어서는 진화를 진행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생물의 생활은 어떤 한 생물체가 다른 생물체를 압도해서 승리를 얻는다는 그런 운동 시합같은 것이 아닌 복잡한 넌(non)제로섬(zero-sum) 게임이라 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박테리아는 자신의 유전 물질을 복사하는 대신에 다른 박테리아에게서 빌려오기도 하고 조각난 DNA를 전달하기도 하며 유전자를 혼합, 결합한다. 박테리아에게 성이란 이렇듯 수평적(자기 이웃과 유전자를 나눔)인 아주 유동적인 성격을 지닌다. 박테리아는 타자에 대한 관용과 수용의 세계이다. 박테리아에게 바이러스와 DNA의 침입은 일상적이며 이에 적응한다. 진핵세포가 됨으로써 이러한 유동적 융통성을 상실했다. 진핵 생물은 유전자를 수직적(세대를 통해) 전달을 통해서만 생명을 이어간다. 융통성 있는 불멸의 존재에서 죽음과 연결된 것은 이러한 변화, 즉 격리된 막 속에 들어앉은 핵을 지닌 진핵 세포가 됨으로써 비롯되었다고 해도 될 것 이다.

 


이것을 극적인 드라마로 보여줄 수도 있다. 조금 큰 원핵세포가 작은 원핵세포를 먹이로 취했다가 소화시키지 못하는 불상사는 아마 10억 년에 이르는 시간동안 무수히 일어났을 것이다. 이 우연한 실패가 예상치 못한 관계를, 뜻밖의 존재를 만들어낸다. 둘은 서로의 기능을 조화롭게 이용한다. 이를테면 태양 빛을 회피하는 이동 능력 없는 원핵세포의 경우 편모를 모터처럼 추진력으로 이용하는 원핵세포(스피로헤타;spirohetes)와 협동하여 자기 생존의 환경을 바꿀 수 있다. 이렇게 합체함으로써 둘은 훨씬 뛰어난 생존과 번식의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이 소화불량의 메타포는 타산적 교환, 적자생존이라는 오늘의 자본주의 경제논리를 여지없이 허물어버린다. 사실 자연은 무자비한 생존 경쟁 장이었던 적이 없다. 물신화된 인간사에 투사하여 왜곡의 도구가 된 발생기원의 진화론이 지닌 그 환상을 부숴버린다.

 

미토콘드리아, 엽록체 등 독립된 원핵세포가 세포내 기관으로 정착하여 생명의 주요 기능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공생, 융합의 여실한 증거들이다. 원핵세포인 스피로헤타가 지닌 구조와 기능은 세포분비, 세포분열, 신경세포 형성에 관여한다. 발달기원주의자들은 인간의 두뇌와 생식세포에 있는 미세소관과 파상족이 필요했기에 스스로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스피로헤타는 이러한 구조를 지닌 원핵생물이다. 이것이 여타 세포와 융합하여 동반자 관계를 수립했다는 것이 오히려 타당한 가정이 되지 않겠는가?

 

우리의 뇌세포 속에는 미세소관이 풍부하다. 인간의 각종 신경 세포와 뉴런은 스피로헤타성 구조물이다. 그렇다면 뇌세포의 실체는 이러한 구조와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던 세포가 목적을 가지고 진화하여 가지게 되었다는 말이 타당할 수 있겠는가? 이것의 입증은 불가능한데, 완전 동화하여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아주 일상적인 사건이다. 다만 그 구조의 동일성, '9X2'의 미세소관의 동일성을 원시세포의 융합의 증거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일까?

 

성의 수평적 교환에서 수직적 형태로의 변화에서부터 유전물질이 옮겨지는 현상인 성의 개념은 물론,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전염도 성이 된다. 또한 공생도 성이 된다. 성이라는 유전자의 이전과 생식의 개념화로의 변화를 낳게 된 자연의 과정, 성 선택 요소와 배우자 선택 전략의 변경을 가져온 인간의 생활사에 이르기까지 미생물우주의 수십 억 년에 이르는 누적된 적응의 과정이 있다. 이러한 미생물우주의 역사를 추적하며 공생의 이론을 확립한 이 저술의 궁극의 취지는 이 세계와 우주는 이질적인 것들, 이종간의 우발적인 엮임이 빚어낸 비()지적 존재들이 만들어내는 생태적 지성, 타자와의 화합과 공생의 관점에서 보아야만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인간 존재의 생태계 내 위치에 대한 각성이다.

 

박테리아는 인류의 진화 훨씬 이전에 이미 양자 회전 모터의 원반 모양을 갖추었고, 발효, 황 호흡, 광합성, 질소 고정의 기능을 발전 시켰다.

그들은 고도로 사회적인 존재일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일종의 지방분권적 민주주의를 수행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125

 

지구의 대기 기체 중 산소의 농도는 21%가 줄곧 유지되고 있다. 인간이 대기의 산소 비율을 통제 관리하고 있다는 망상처럼 터무니없는 발상도 없을 것이다. 박테리아 등 원핵생물은 그네들의 유전자 교환의 난삽(難澁), 즉 타자에 대한 자유로운 일상적 수용이 만들어 낸 전()지구적 네트워크로 인한 자동 조절이라 상상해 볼 수도 있다. 린 마굴리스의 미생물우주에 대한 이 글들은 결국 지구라는 한정된 생태계의 진정한 점유자는 누구인가를 규명하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사(NASA)의 대기(大氣)화학자인 제임스 러브록가이아 이론은 대기권의 온도와 기체 조성이 미생물들에 의해 능동적으로 조절되고 있다는 이해를 기초로 하고 있다. 그는 화성 탐사에 앞서 자신의 가이아 이론을 토대로 한 실험에서 화성에는 생명체가 없다고 단언했다. 즉 미생물에 의한 대기의 통제 흔적이 없다는 확신이었다. NASA는 이 말을 신뢰하지 않았으나 이제 모든 지구인이 알고 있듯 화성에는 어떠한 생명체도 없다.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오직 변화와 번성하는 존재만 있을 뿐이다.

 

계통파충류로부터 적응방사라는 진화학적 발전을 이룬 현존 생물의 하나인 우리 인간은 미생물에서 기원한, 미생물의 물질대사 변혁물의 하나일 뿐이다. 이 공생 세포 이론을 한 푼의 가치도 없는 이론이라며 폄훼하였던 발생론자 리처드 도킨스의 조롱이 지금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인간의 몸체란  유전자의 운반체라는 개념만큼은 린 마굴리스의 진핵세포들로 연결된 하나의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몸체와 상통한다. 오늘날 공생 세포 이론은 주류 이론이 되었다.

 

이 사려깊고 철학적인 자연과학의 역작을 이제라도 읽게 된 것은 정말 다행스런 우연이 아닐 수 없다. 고등 기술을 독점하고 자신의 생존권을 확대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후보자인 우리 인간은 기어코 미생물우주의 신비를 벗겨낼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분명 새로운 생물의 삶으로 나아갈 것이다. DNA와 인간과 기계를 기본으로 하는 실체가 됨으로써 진화의 가속화를 연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능을 지닌 기계는 공상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으며, 다가 올 초우주 시대의 생명의 미래를 가정하는 책의 마지막 장 미래의 초우주는 생명과 새로운 행성 세계의 창조를 위한 탁월한 지적 상상력을 북돋아 준다.

 

진화생물학의 위대한 업적이자 생명의 진실, 인간의 위상을 숙고하게 해주는 고귀한 열정에 진심으로 머리 숙이게 된다. 이 자연과학의 엄청난 성취는 여느 철학적 사유를 훌쩍 넘어선다. 그야말로 지구라는 생명의 대서사시이며, 최유미 박사의 말처럼 감흥의 생태학이고, 마주침의 유물론이다. 서로 밀려들어가고 융합, 응결되어 새로운 감응을 촉발하는 것이야말로 이 세계의 존재조건임을 이 책을 통해 나는 더욱 확신하게 된다. 고귀한 지성을 만나 아름답다는 말이 왜 필요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아름다운 지성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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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선집 2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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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을 가로질러 서로를 발견하려는 인간들의 드라마가 

거리에서 끊임없이 펼쳐진다.”   - 52쪽


어쩌면 자기 내면의 풍경 속에 갇혀 사는 우리들이 이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나 외부에 무언가 있으리라는 환상을 쫓는 분열적 존재임을 상기시키는 위의 문장이야말로 오늘날 강화된 복잡성의 상징인 도시에 발 붙이고 사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고닉이 우리 몸의 감수성을 무너뜨리는 외부 세계인 거대 도시와 자신이 하나라고 선언할 수 있는 것도 이처럼 인간들 서로에게서 무언가를 발견하려는 환상, 외로움을 묻어두고 그로부터 벗어나 타자에 대한 허기와 호기심과 고독을 살펴보려는 우애의 감각일 것이다.

 

이저벨 볼튼의 소설 속 여자가 인생과 흥정을 할 수 있었던 건 사랑할 도시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고닉의 이해도 이러한 인간을 향한 친밀감과 정다움이라는 특정한 감각에서 비롯되는 것일 터이다.  나는 도시라는 공간이 야기하는 단절에 포획된 삶, 감각적 수동성이라는 현대적 징후에 갇혀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고닉은  번잡한 도시의 아름다운 단절이라고 쓰고 있다. 고닉은 현대 도시의 공간이 빚어내는 단절, 그 고립, 혼자됨을 사랑할 수 있을만큼 자기 내면에 미치는 불가피한 영향들, 그 자신을 빚어놓은 것들을 그대로 껴안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혼들이 다 끝장난 뒤 인생의 궁극이란 것은 없다는 깨달음, 욕망의 주체가 되는 데 골몰하는 사람임의 자각, 남자들에 대한 환상이 걷히고 여자와 남자 사이에 놓인 극복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얇은 막과 굳이 화해하지 않는 것처럼, 있는 그대로 갈등하고 느끼며 살아가는 지혜의 이야기들을 생생한 활기와 여유로운 솔직함으로 펼쳐낸다. 그것은 인생의 곡절을 모두 이해한 체 하는 자의 여유가 아니라 갈등과 괴리, 환상과 정서로 짜인 자기감정을 그대로 인정하는 자기 자신과의 친구 됨이다.

 

보이지 않는 속박, 내면을 구속하는 갈망과 환상에서 내가 자유롭지 못한 것은 존재하는 것,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는 이유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고닉의 어머니처럼 마춤맞은 것, 이상화된 무엇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견고한 욕망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이해에 다가가는 것이 대단한 철학적 사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듯, 고닉은 일상의 마주침들, 흔한 도시의 군상들과의 일화에서 유쾌하게 불러낸다. 시내버스 안에서 쩌렁하게 큰 소리로 통화하는 인간과의 말다툼에서  인생의 무작위성이란 게 다 그런 법이라는 해학적 진실을 길어 올리고, 사랑의 법칙엔 기대가 수반된다는 생각이 순전히 헛다리짚은 감상이었음을 고백하며, 우리 인간은  각자의 인생이라는 영토를 횡단하다 이따금 국경에서 만나 서로에게 정찰 기록을 건네는 고독한 두 여행자임을 이끌어 내기도 한다.

 

환상이라는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은 이처럼  자기인식이라는 교정을 필요로 한다. 우연히 길거리에서 마주한 어린 시절 뉴욕의 변두리 동네 브롱크스의 남자 친구와 침대에 뛰어들어 상상도 못했던 강렬하고 달콤한 행복감에 놀라기도 하지만, 감각이 아닌 다른 곳에서 발생하는 욕구들이 쾌락을 침범하며 자신을 빚어놓은 것의 정체가 불안임을 발견하기도 하고, 엄마가 너는  내 울분을 조제해내려고 태어난 사람이라며, ‘이 무정한 것아!’”라고 외치게 했던 왜곡된 어린 시절의 기억을 파먹고 살아왔던 자신의 오류를 알아차리기도 한다.

 


도시에 몰려든 각양각색의 사람들, 그 사람들 개별에 주의깊은 시선과 이해를 지니고, 그 인물들과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목격하게 되는 것, 그것은 타자로부터 언뜻언뜻 발견하게 되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삶의 모습들이다. 무리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배회하는 동료가 지닌 거리감의 성격으로부터 내면의 유리(遊離)를 발견하며, 자신 안에서 그 위험한 단절의 작동을 느끼는 것도 인간을 비롯한 타자에 대한 친밀한 우애의 감각일 것이다.

 

내게 이 도시라는 공간은 그저 뚫고 지나가기에 급급한 하나의 통로였을 뿐, 지나는 길의 도시와 사람들의 풍경을 시야에 담지 못했다. 도시의 공간과 그 속의 인간들과 단절감을 강화시키는 이러한 일상은 내가 사는 도시에 대해 정작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는 의미이며, 또한 그 단절을 고립 자체로 이해했음이다. 그래서 이 도시가 뿌려대는 거대함의 대량 소비에 그저 노출되어 무너지는 감각적 민감함에 분노하며 불화했다.

 

우리는 계속 함께 걷는다. 나란히 묵묵히, 끊임없이 형성중인 서로의 경험을 거울에 비춰주는 목격자로서, 대화는 언제까지고 깊어져만 갈 것이다

설령 우정은 그렇지 않더라도.-215

 

나는 이 고립과 도시와 인간이라는 타자의 부재가 만들어내는 외로움에 수장되어 있었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원하지 않은 고독이 쓸모있는 고독일 리가 없었다. 잃어버린 고독의 아름다움,  도시를 속속들이 아는 것으로 족적을 남기며, 허기로 디디고 선 땅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주는 자기 내면의 선량함에 말을 건네며, 넉넉한 양분이 되어 내 영혼을 정련해주는 친구 레너드 같은 우정을 경험할 그런 애착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아마 내면세계의 변덕스러움과 유동적이고 불안정함에 매몰되어 이 변화의 인식조차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고닉의 말처럼 심각한 도덕적 혼란을 예고하는 도시의 불온한 공기에 대한 나의 냉담함과 적대는 노스탤지어라기보다는 멜랑콜리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적막한 정서를 떨쳐내기 위해 발버둥치는 멜랑콜리, 도시에 짙게 드리워진 멜랑콜리 말이다. 그런데 나는 고닉에게서 배운다.   후회도 없이 있는 그대로 있음을 응시하고 선 자기를 지각할 수 있는 자들에게만 허락된 노스탤지어의 부재, 그 차갑고 고요한 순수한 응시를 할 줄 몰랐던 내 고독의 실체를.

 

인간 서로간 경험의 반향인 도시와 사람들, 자기 분열과 자기 지각 속에서 불안과 두려움이 매일을 함께하는 동반자가 되는 것임을 말하는 이 책의 유쾌하고 지적인 도시와 인간의 우정에 대한 포착은 번잡한 대도시의 단절 속에 비친 현대인의 삶으로부터 그 고립을 어떻게 아름다운 단절로 수용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외면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고닉의 동네 치과의사 빅터가 위로하듯,  사랑이 넘쳐요. 다들 마음을 쓴다고요. 다 흘려보내자 구요.”라며 나지막하게 들려주는 말을 믿고 싶어진다. 느낌을 여과없이 서술해주며, 누군가의 대화에 반응해주고 그 반향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고닉에게서 이 도시와 사람들을 친밀하게 바라보는 시선과 그 경험의 지혜를 배운다. 불경스러운 불만이 끝없이 가로막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이 도시와 인간들이 강박적 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고 징징대는 나를 보았다면 괜찮은 수확이리라. 혼자됨의 사랑, 지적인 진솔함에서 우러나온 생기 넘치는 대화들, 그리고 이로부터 연원하는 무한한 자기 지각의 이야기들에 매료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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