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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 없는 여자와 도시 ㅣ 비비언 고닉 선집 2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월
평점 :
“고립을 가로질러 서로를 발견하려는 인간들의 드라마가
거리에서 끊임없이 펼쳐진다.” - 52쪽
어쩌면 자기 내면의 풍경 속에 갇혀 사는 우리들이 이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나 외부에 무언가 있으리라는 환상을 쫓는 분열적 존재임을 상기시키는 위의 문장이야말로 오늘날 강화된 복잡성의 상징인 도시에 발 붙이고 사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고닉이 우리 몸의 감수성을 무너뜨리는 외부 세계인 거대 도시와 자신이 하나라고 선언할 수 있는 것도 이처럼 인간들 서로에게서 무언가를 발견하려는 환상, 외로움을 묻어두고 그로부터 벗어나 타자에 대한 허기와 호기심과 고독을 살펴보려는 우애의 감각일 것이다.
‘이저벨 볼튼’의 소설 속 여자가 인생과 흥정을 할 수 있었던 건 사랑할 도시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고닉의 이해도 이러한 인간을 향한 친밀감과 정다움이라는 특정한 감각에서 비롯되는 것일 터이다. 나는 도시라는 공간이 야기하는 단절에 포획된 삶, 감각적 수동성이라는 현대적 징후에 갇혀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고닉은 “번잡한 도시의 아름다운 단절”이라고 쓰고 있다. 고닉은 현대 도시의 공간이 빚어내는 단절, 그 고립, 혼자됨을 사랑할 수 있을만큼 자기 내면에 미치는 불가피한 영향들, 그 자신을 빚어놓은 것들을 그대로 껴안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혼들이 다 끝장난 뒤 인생의 궁극이란 것은 없다는 깨달음, 욕망의 주체가 되는 데 골몰하는 사람임의 자각, 남자들에 대한 환상이 걷히고 여자와 남자 사이에 놓인 극복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얇은 막과 굳이 화해하지 않는 것처럼, 있는 그대로 갈등하고 느끼며 살아가는 지혜의 이야기들을 생생한 활기와 여유로운 솔직함으로 펼쳐낸다. 그것은 인생의 곡절을 모두 이해한 체 하는 자의 여유가 아니라 갈등과 괴리, 환상과 정서로 짜인 자기감정을 그대로 인정하는 자기 자신과의 친구 됨이다.
보이지 않는 속박, 내면을 구속하는 갈망과 환상에서 내가 자유롭지 못한 것은 존재하는 것,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는 이유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고닉의 어머니처럼 마춤맞은 것, 이상화된 무엇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견고한 욕망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이해에 다가가는 것이 대단한 철학적 사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듯, 고닉은 일상의 마주침들, 흔한 도시의 군상들과의 일화에서 유쾌하게 불러낸다. 시내버스 안에서 쩌렁하게 큰 소리로 통화하는 인간과의 말다툼에서 “인생의 무작위성이란 게 다 그런 법”이라는 해학적 진실을 길어 올리고, 사랑의 법칙엔 기대가 수반된다는 생각이 순전히 헛다리짚은 감상이었음을 고백하며, 우리 인간은 “각자의 인생이라는 영토를 횡단하다 이따금 국경에서 만나 서로에게 정찰 기록을 건네는 고독한 두 여행자”임을 이끌어 내기도 한다.
환상이라는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은 이처럼 ‘자기인식이라는 교정’을 필요로 한다. 우연히 길거리에서 마주한 어린 시절 뉴욕의 변두리 동네 브롱크스의 남자 친구와 침대에 뛰어들어 상상도 못했던 강렬하고 달콤한 행복감에 놀라기도 하지만, 감각이 아닌 다른 곳에서 발생하는 욕구들이 쾌락을 침범하며 자신을 빚어놓은 것의 정체가 불안임을 발견하기도 하고, 엄마가 너는 “내 울분을 조제해내려고 태어난 사람이라며, ‘이 무정한 것아!’”라고 외치게 했던 왜곡된 어린 시절의 기억을 파먹고 살아왔던 자신의 오류를 알아차리기도 한다.
도시에 몰려든 각양각색의 사람들, 그 사람들 개별에 주의깊은 시선과 이해를 지니고, 그 인물들과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목격하게 되는 것, 그것은 타자로부터 언뜻언뜻 발견하게 되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삶의 모습들이다. 무리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배회하는 동료가 지닌 거리감의 성격으로부터 내면의 유리(遊離)를 발견하며, 자신 안에서 그 위험한 단절의 작동을 느끼는 것도 인간을 비롯한 타자에 대한 친밀한 우애의 감각일 것이다.
내게 이 도시라는 공간은 그저 뚫고 지나가기에 급급한 하나의 통로였을 뿐, 지나는 길의 도시와 사람들의 풍경을 시야에 담지 못했다. 도시의 공간과 그 속의 인간들과 단절감을 강화시키는 이러한 일상은 내가 사는 도시에 대해 정작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는 의미이며, 또한 그 단절을 고립 자체로 이해했음이다. 그래서 이 도시가 뿌려대는 거대함의 대량 소비에 그저 노출되어 무너지는 감각적 민감함에 분노하며 불화했다.
“우리는 계속 함께 걷는다. 나란히 묵묵히, 끊임없이 형성중인 서로의 경험을 거울에 비춰주는 목격자로서, 대화는 언제까지고 깊어져만 갈 것이다.
설령 우정은 그렇지 않더라도.” -215쪽
나는 이 고립과 도시와 인간이라는 타자의 부재가 만들어내는 외로움에 수장되어 있었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원하지 않은 고독이 쓸모있는 고독일 리가 없었다. 잃어버린 고독의 아름다움, “도시를 속속들이 아는 것으로 족적을 남기며, 허기로 디디고 선 땅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주는” 자기 내면의 선량함에 말을 건네며, 넉넉한 양분이 되어 내 영혼을 정련해주는 친구 레너드 같은 우정을 경험할 그런 애착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아마 내면세계의 변덕스러움과 유동적이고 불안정함에 매몰되어 이 변화의 인식조차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고닉의 말처럼 심각한 도덕적 혼란을 예고하는 도시의 불온한 공기에 대한 나의 냉담함과 적대는 노스탤지어라기보다는 멜랑콜리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적막한 정서를 떨쳐내기 위해 발버둥치는 멜랑콜리, 도시에 짙게 드리워진 멜랑콜리 말이다. 그런데 나는 고닉에게서 배운다. “후회도 없이 있는 그대로 ‘있음’을 응시하고 선 자기를 지각할 수 있는 자들에게만 허락된 노스탤지어의 부재, 그 차갑고 고요한 순수한 응시”를 할 줄 몰랐던 내 고독의 실체를.
인간 서로간 경험의 반향인 도시와 사람들, 자기 분열과 자기 지각 속에서 불안과 두려움이 매일을 함께하는 동반자가 되는 것임을 말하는 이 책의 유쾌하고 지적인 도시와 인간의 우정에 대한 포착은 번잡한 대도시의 단절 속에 비친 현대인의 삶으로부터 그 고립을 어떻게 아름다운 단절로 수용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외면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고닉의 동네 치과의사 빅터가 위로하듯, “사랑이 넘쳐요. 다들 마음을 쓴다고요. 다 흘려보내자 구요.”라며 나지막하게 들려주는 말을 믿고 싶어진다. 느낌을 여과없이 서술해주며, 누군가의 대화에 반응해주고 그 반향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고닉에게서 이 도시와 사람들을 친밀하게 바라보는 시선과 그 경험의 지혜를 배운다. 불경스러운 불만이 끝없이 가로막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이 도시와 인간들이 강박적 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고 징징대는 나를 보았다면 괜찮은 수확이리라. 혼자됨의 사랑, 지적인 진솔함에서 우러나온 생기 넘치는 대화들, 그리고 이로부터 연원하는 무한한 자기 지각의 이야기들에 매료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