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사와 비난이 엇갈리는 비평이 공존하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작품, Ada, or Ardor: A Family Chronicle(에이다, 또는 열정: 어느 가족 연대기), 이후 에이다로 표기함의 국내 번역판이 존재하지 않는 아쉬움, 혹은 미련 때문에 이 조잡한 잡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나보코프 작품에 대한 대중적 몰이해는 소아성애의 소재로만 읽히는, 다시 말해 오독만 난무 하는 Lolita;롤리타정도로만 기억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다만 다행스럽게도 Pale Fire(창백한 불꽃이 번역 출간되면서 독자들의 나보코프 작품에 대한 지적 모험심을 한 단계 상승시켜주기도 했습니다. 사실 Pale Fire(창백한 불꽃은 문학적 단어 놀이랄 수 있는 애너그램(anagram)에서부터 다층적 서사, 극도의 조밀한 암시 등 매우 복잡한 글쓰기로 독자를 좌절의 지점에 내몰기까지 하는 아주 도발적인 복잡한 소설이었습니다. 롤리타 또한 단순한 비극적 사랑과 집착으로만 읽을 수 있는 작품이 아닙니다.

 

성애에 대한 묘사를 읽는 사람들은 위선적 이중성을 보이곤 합니다. 즉 대상화해서 소비하려는 욕망에만 매몰되어 알고 있는 편협성에 기초한 말만 중얼거리죠. 나보코프는 대중들의 Lolita;롤리타를 소비하는, 즉 독해하는 방식을 보고 고통스러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에이다; AdaLolita;롤리타를 오해한 사람들의 무지를 조롱하기 위해 집필되었다고 하기까지 한답니다. ‘에이다근친상간이라는 위반된 금기를 소재로 하고 있거든요. 에이다의 묘사는 대중적 표현으로 하자면 수위가 높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에이다; Ada는 그 감상을 단순 명쾌하게 기술할 수 없을 만큼 독해의 장애물이 무척이나 많은 소설입니다. 일단 연대기 자체도 구조의 혼란을 정리 할 수 있어야 하고, 호흡이 긴 문장을 따라가며 집중을 놓지 않을 것이 강요됩니다. 역시 애너그램, 대체 역사, 다층적 내러티브와 소설의 배경인 ‘Anti-Tera(안티 테라)’ 등 우주 해설까지 그야말로 환각과 공상 아닌 공상을 오가는 상상으로 한 마디로 녹초가 되게 하는 난해하다고 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그럼에도 프랑스 작가 에릭 오르세나두 해 여름;Deux E'te's에서 나보코프의 에이다;Ada번역의 열기로 채워진 섬의 분위기를 묘사하며, 섬의 어디에나 색정의 기운이 감돌고 있음을 느낌으로 알고 있었다. (中略) 향긋한 냄새로 미루어 근처 어디에선가 교접이 한바탕 벌어지고 있으려니 짐작하고 있었다.”고 전하기도 하듯이, 에이다;Ada는 아름답고 어떤 만족감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기술한다면 테라와 안티-테라로 불리는 쌍둥이 행성을 배경으로 한 천재 남매 사이의 뜨거운 사랑에 얽힌 해설사라 할 수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이 거주하는 세계는 안티-테라이지만 이들은 테라에 대한 환상을 지니고 있죠. 에이다와 밴 빈이 주역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역사적 연대는 대략 19세기 후반인 1884년이 소설적 사건의 시기이고, 이들 주인공은 안티-테라라는 세계에서 극도의 부를 축적한 귀족의 신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사실 두 남녀의 사랑의 불꽃을 위한 시간을 초월한 투쟁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한편, 우주의 다차원 공간을 설명하는 물리학의 브레인(brane; )이론을 토대로 한 4차원의 갇힌 브레인의 상상을 통해 새로운 관찰자적 시점을 생각하게 하며, 무수한 학문적, 정치적, 과학적 제재들로 인해 복잡다단하게 설계된 퍼즐처럼 산개(散開된 장면들과 대사들을 맞추는 작업을 요구합니다. 어쩌면 제임스 조이스의 반향(反響)인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달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19세기의 러시아 소설도 떠올리게 하는 정말 기이한 감응에 빠져들게 하는 소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러시아어, 프랑스어, 영어가 혼용되어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단어 놀음까지 더해져 어학 역량이 천박한 사람인 저에게 이 작품의 이해는 한계를 가지게 합니다. 나보코프 문학의 관문이기도 한 문학적 언어 놀음과 퍼즐로 가득 찬 이 작품의 국내 번역을 기대하는 바람이 간절해집니다. 나보코프의 공식 완전판으로 불리는 단편 전집의 발간에 즈음한 독자의 아쉬움의 변()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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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전, 10권 131



에피쿠로스 철학에 대해 전해져오는 문헌이 워낙 적을 뿐 아니라, 그마저도 그의 철학을 접할 수 있는 우리 말 번역 자료도 극히 미미하다보니 일반적 곡해가 진실로 둔갑해 정설처럼 회자되고 있는 형편이다. 왜 그의 사상에 성적 문란과 방탕함이란 꼬리표가 붙었는지, 육체적 쾌락을 좇는 음울한 변경 조직의 쓰레기 사상이 되었는지를 확인하고픈 충동을 물리칠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그가 썼다고 전해오는 세 편의 편지 내용과 함께 당대 에피쿠로스를 음해, 매도하던 스토아주의자들의 거짓 소문의 진상을 말하고 있는 2세기 말 3세기 초에 써진 것으로 추정되는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철학자전혹은 그리스 철학자 열전이란 이름으로 옮겨지고 있는 책이 부분적으로 이 충동을 해소해주고 있다.

 

중세 유력 사본(寫本)중 하나는 철학자들의 생애와 학설의 집성 10으로 책이름을 가지고 있고, 책의 수록 내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철학자들 가운데 저명한 사람들의 생애와 의견 및 각 학파 학설의 요약적 집성이란 표제를 붙이고 있기도 하다고 한다. 국내 한글 번역본 또한 이들의 제목을 각기 따르고 있는데, 나남 출판에서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을 제목으로 2권으로 출간한 것이 있으며, 동서문화사에서는 영문번역 대본의 제목을 따라 그리스 철학자 열전이란 이름으로 출간되어 있다.

 

이 책은 철학 학파별로 구분하여 총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기원전 3세기 전후에 활동한 에피쿠로스는 마지막 권을 차지하고 있다. 책의 저자인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피쿠로스에 대해 악의를 품고 있던 스토아파 인물들의 저열한 비난을 먼저 소개하고 있다.

 

1. 누가 에피쿠로스를 왜곡했나? - 스토아파의 비난

 

103절에서 8절까지 소개되고 있는 스토아파의 비난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합창가무단 무용수 출신의 냉소주의의 회의파 철학자로 불리는 티몬이란 자의 사악한 주장으로 시작된다. 이 자는 에피쿠로스를 자연 철학자들 가운데 가장 뒤처지고 창피함도 모르는 개 같은 사내(10-3)”라며 가장 환경이 나쁜 자라고 폄훼한다. 그런데 에피쿠로스는 명문 필라이다이 가문의 일원이었으며, 실제 데모크리토스를 비롯한 그 어떤 자연 철학자들보다 뛰어나며 독창적인 학문을 열었음이 입증되고 있다.

 

이러한 악의는 스토아파들에 의해 무수한 거짓말로 왜곡되어 매도된다. 마치 한국의 추한 공작 정치배들과 빼닮은 모습이다. 스토아파의 디오티모스란 자는 자신의 동료인 크리시포스(스토아파)’의 편지를 에피쿠로스의 것으로 편집(*무려 50통을 위조하였단다)하여 기만적 비난을 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창녀 레온티온에게 나의 구세주이고 주인인 분이여, (...) 나의 사랑스런 티온이여라고 편지를 썼다든가, 유부녀인 테미스타에게 만일 당신이 나에게 와주시지 않는다면 나 자신은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으므로 (...) 어디라도 달려 갈 준비가 되어있습니다.(10-5)”라며 외설스런 사내라고 조작하여 매도하는 식이다. 이에 가세하여 포세이도이오스, 니콜라오스, 소티온, 테오도로스 등 스토아파 인물들은 에피쿠로스의 쾌락과 원자(아톰)에 대한 사상은 남의 것을 훔쳐 쓴 것에 불과한 아무런 사상도 없는 것이라 비난하곤 매춘부 뚜쟁이란 낙인까지 찍어댔다고 한다. 또한 에피쿠로스의 철학 정원에는 역겨운 비밀 의식(秘儀)을 행하는 곳이라는 누명까지 씌워댔다는 것이다.

 

이 책이 써진 연대를 서기 2세기 말에서 3세기 중엽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는데, 당시는 기독교가 스토아 철학과 융합하여 자신들의 사상적 토대를 구축하던 시기이다. 원자론을 말하는 자연철학인 에피쿠로스에 대한 탄압이 극에 이를 때였다는 점에서 스토아파 인물들의 왜곡된 비난이 얼마나 억척스럽게 가해졌는지를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저자 디오게네스는 이들의 비난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에피쿠로스를 비방하고 있는 사람들은 상도(常道)를 벗어나고(10-9)”있으며, 그 어느 누구도 미치지 못할 친절과 고귀한 학문적 성취를 이룬 인물이었음을 당대의 증거들을 통해 반박 지적하고 있다. 그를 찬양하여 아테네에 세워진 동상, 다른 모든 학파의 학통이 끊어졌으나 여전히 많은 제자들에 의해 이어지는 학통과 헤아릴 수 없는 학두(學頭)의 배출을 사실로 들고 있다.

 

남 몰래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이 1 만 번이나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앞으로도 발견되지 않을 것이라 믿는 것은 불가능하다.

발견 되지 않고 있을 수 있는지의 여부는 삶을 마칠 때까지 모르기 때문이다.” (10-35)

 

특히 에피쿠로스의 편지글은 시작될 때 사용하는 인사말의 특이성을 예로 들며, 스토아파들을 비롯한 에피쿠로스 철학의 적대자들이 저지른 위선을 비판한다. 이러한 거짓은 반드시 드러나고 말 것이라는 에피쿠로스의 문장만이 한 위대한 철학자의 고귀한 정신을 드러낼 뿐이다. 부정과 기만을 밥 처먹듯 하는 오늘 한국 사회의 수구 정치배들에게 들려주고픈 대목이다.

 

 

2. 에피쿠로스가 직접 쓴 쾌락의 의미

 

에피쿠로스가 남긴 편지는 감각과 선취관념이 진리기준임을 설명하는 헤로도토스에게 보내는 편지, 자연의 탐구에 대해 말하는 피토클레스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고 윤리학을 말하는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세 통이 전부이다. 이 중에서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낸 편지가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삶의 목적으로서 평정심(아타락시아), 즉 쾌락에 대한 에피쿠로스 사상의 정수(精髓)를 이해토록 돕는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첫째의 선()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사람은 쾌락을 출발점으로 해서 모든 선택과 기피를 행하기 때문(10-129)”이라고 주장한다. 이 쾌락은 J.S.밀의 공리주의자들의 쾌락과 흡사하다. 쾌락이라고 무조건 선택하는 것은 아니라며 불유쾌를 초래할 쾌락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회피한다고 한다. 또한 고통(괴로움)의 인내도 보다 큰 쾌락을 얻을 수 있다면 감수한다는 것이다. 결국 쾌락과 괴로움을 상호 비교 측정하여 판단하는 것이 적절한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자신의 쾌락에 대한 개념은 방탕자들이나 성적 향락 속의 쾌락이 아니라 몸의 고통과 정신()의 동요가 없는 건강과 평정임을 거듭 역설한다. 이 말은 공복 일 때 빵 한 덩이가 최고의 쾌락이듯 불유쾌, 고통을 벗어나는 검소와 절제로서의 자연스러운 필요로서의 즐거움, 행복이다.

 

나아가 그는 덕을 선택하는 것도 건강을 위해 의술을 택하듯 쾌락 때문이지 결코 덕 그 자체를 위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한편 정신은 삶에 관한 두려움을 몰아낼 때 완전한 삶으로 이행될 수 있으므로 정신적 동요를 가져오는 대상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며, 이는 그의 자연 철학으로 이어진다. 자연에 대한 탐구는 인간의 욕망을 투여한 신에 대한 자의적 믿음이 아니라 관찰과 경험을 통한 자연의 이치를 밝힘으로서 이를 극복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3. 에피쿠로스의 자연 탐구

 

에피쿠로스의 자연 탐구는 사람의 정신을 동요시키는 왜곡된 신의 상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는 신이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라고 지적하며, 사람들이 믿고 있는 신들을 부인하는 불경신(不敬神)인 사람은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고(思考)를 신에게 밀어 붙이고 있는 자들이 오히려 불경신의 사람인 것(10-123)”이라고 힐난한다. 그러면서 신의 불멸성과 지복성을 유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신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그의 사상에 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이란 이미지를 뒤집어씌운 이유도 바로 이러한 주장의 곡해일 것이다.

 

아마 그의 자연 철학의 중심이 되는 원자(Atom), 즉 유물론적 사상의 기독교 교리와의 상충을 합리화하기 위한 스토아파들의 의도적 왜곡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다음의 문장은 기독교를 자극하는 주장이었을 것이다. ()에서는 아무것도 출현하지 않는다.(10-38)”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무엇이든 어디서나 생기고 사물이 생기기 위한 원인은 아무것도 필요치 않기 때문이라고 선언한다.

 

그는 만유는 언제나 지금 존재하는 것이었으며, 물체와 공허로 이루어져 있다.(10-39)”고 주장했다. 특히 물체와 공허 외에는 완전한 실재로서 파악되는 것이고, 이것의 우유성(偶有性)이나 속성으로 일컬어지는 것으로서 파악되는 것이 아닌 것은 상상에 의해서건, 상상되는 것과의 비교에 의해서건 아무것도 생각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만유의 구성인 물체의 근본이라 한 원자가 출현한다. 물체의 시원(始原)은 불가분한 본성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므로 공허가 장소를 양보한 영원히 운동하는 불가분으로 충실한 것으로서 원자를 말한다. 원자의 운동에 관한 두 가지 형태로서 상호 일정한 거리를 둔 운동과 진동을 계속하는 운동으로 구분하고 있다. 물론 현대 물리학에는 한참이나 미치지 못하지만 2,300년 전의 고대 학자의 사유로는 가히 빼어난 지적 사유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사람이 인식하는 사물의 표상을 사물 자체의 일종의 모방이 우리에게 와서 제각기 상응한 크기에 따라 시각이나 정신에 잠입하는 것이라는 이해는 쇼펜하우어나 칸트 철학에서 말하는 물자체인 실재와 표상의 인식과 한참이나 거리가 먼 저급한 수준의 성찰이라 할 수 있지만, 인식론이라 할 수 있는 사유를 시도했다는 측면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빼어난 인식을 발견 할 수도 있는데, 원자의 어떤 합성물인 집합체 가운데서 끊임없이 상호 충돌하는 아톰 운동의 연속성을 감각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라든가, 소리의 지각 성립에서도 소리를 구성하는 입자인 유체의 운반에 따른 것과 같은 사유이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죽음은 존재하지 않고 있는 것이고,

죽은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산 자나 죽어버린 자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10-125)

 

이것(원자 이론)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정신의 동요가 빚어내는 사람의 고통이 근원 없는 것이라는 데로 이어진다. 사람의 육체라는 물체란 원자의 우연한 결합이라는 점이다. 또한 선이나 악은 감각에 속하는 것이고 죽음이란 이 감각을 잃는 것, 결합 원자의 해체일 뿐이라는 인식이다. 감각의 부재는 곧 두려움의 부재이기도 하다. 죽음의 본질인 이 감각 부재를 이해한다면 삶에서 두려움, 정신의 동요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원자론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과 함께 별도의 감상으로 미루어두어야 할 것 같다.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즉 고통을 벗어나 평정심이라는 행복의 영속을 위한 방법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철학은 자연에 대한 철저한 탐구를 통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향한 치유(治癒)적 사유이다. 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유물론적 사유가 싹 텄으며, 후일 그의 사상이 마르크스라는 인간을 통해 비결정론적 원자론, 마주침의 유물론의 토대가 되었음을 안다면 꽤나 기뻐하지 않았을까? 박해 속에서 살아남은 한 저작으로나마 고귀한 사유의 모퉁이를 읽을 수 있도록 한 인류의 지성들에게 보내는 경외는 항상 미흡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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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나룻배 2022-03-18 1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필리아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우연히 본 리뷰글을 감명깊게읽었습니다!

필리아 2022-03-18 18:1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꿈꾸는나룻배‘님~,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은 우주의 시원성에 대한 사유, 특히 ‘클리나멘‘이 오늘의 사람들에게 주는 영감이 무엇보다 소중하죠. 원자들의 미세한 빗겨남으로 마주치는 그 우발성의 결합, 이것은 정말 인간 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이라 할 수 있답니다. 지금 우발적 마주침의 유물론을 성찰한 마르크스의 박사학위 논문을 읽고 있어요. 즐겁고 평안한 시간 되십시요 :)
 

쉽사리 물리치지 못하는 까닭에 책의 유혹은 여전히 그리고 즉흥적으로 새로운 자극을 뽐내는 선전 문구에 이젠 멈추어야 한다던 다짐을 잊게 하기 일쑤이다.

 

불륜 스토리를 통해 인간의 구원 문제를 우회하여 넌지시 도덕성을 촉구하는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읽다가 '쇼펜하우어'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로부터 구원의 길을 얻지 못하던 농촌 귀족 레빈때문에, 혹은 기독교에 의해 쾌락주의 누명을 쓰고 고귀한 사상이 자칫 묻혀버릴 뻔 했던 에피쿠로스가 눈에 밟히던 중 마침 출간된 '존 셀라스'의 엑기스 같은 책을 저버리지 못하는 식이다.

 

퀴어가 대중적 이해를 획득함에 따라 새삼스레 부상하는 '미시마 유키오'금색(禁色)은 그의 군국주의자로서의 반감에도 불구하고 육체와 인간의지의 치열한 투쟁의 공존과 균형을 향한 미학에 대한 호기심을 물리치기 어려워 구입하는가하면, '매들린 밀러'의 소설은 단지 화려한 장정과 '아킬레우스'의 현대적 해석은 어떤 것일까 하며 현혹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노리나 허츠고립의 시대는 저자의 대중을 향해 내뱉는 유창한 설득의 언변에 매료되어 있던 차에 무조건적인 지적 신뢰가 통하였으며, 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는 상처 받고 이방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인간의 울림을 뒤늦게 찾기도 했다. 아마도 공감의 감도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내 처지와 상통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인리히 호프만'더벅머리 아이에 대한 정신분석적 해석판 역시 스치듯 언급되던 역사서 모퉁이의 어느 한 문장이 떠올라 다행스럽게도 절판되지 않고 판매되고 있어 구입을 미룰 수 없었던 책이라고 판단했다. 타셴에서 출간하는 책의 그 촘촘한 밀도의 구성에 매료되었던 기억으로 20세기 사진 예술은 사물에 대한 통찰력의 압축으로서의 사진에 대한 매혹이 결합된 구매 욕심이었던 듯싶다.

 

이렇게 2월 한 달 구입한 책을 정리하면서 구입의 무수한 정당화의 변명을 하고, 책 마다 에 내 인상과 느낌을 기록해두는 의미를 기술해 본다. 이젠 그만 하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책을 향한 욕심이 아직 살아있음에 감사해 할 뿐이다. 이 책들은 또 어떤 책을 부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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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3-05 13: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플에서는 많아도 많아도, 해롭지 않은 것이 ˝책욕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책탑 보기만 해도, 덩달아 기분이 업됩니다

필리아 2022-03-05 15:38   좋아요 1 | URL
쌓인 책들 중 정리해버릴 책을 선별하는 작업을 몇 개월마다 하면서 탑을 줄여나가는데 다시금 영역을 확장해 나갑니다. 책에도 어떤 의지가 있는 듯 싶어요. 언젠가 제 욕심이 수그러들면 함께 책 영역도 사라지겠지요. 유쾌한 주말 시간 되십시요~~
 


많은 사람들이 어둠을 밝힐 불빛이 없어 세상이 이렇게 어둡다고들 얘기한다.

나는 이러한 시선에 그리 관대하게 동의하기가 어렵다.

정말 불빛이 없어 한국 사회가 어두운 것인가?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도시의 밤 거리도 대낮처럼 밝지 않은가?

철학자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은 『반딧불의 잔존』에서

오늘 사람들이 반딧불을 볼 수 없는 것은 이것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불 정도로 충분히 어두운 곳에 사람들이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불빛이 없어 어두운 것이 아니라 어둠을 내치고 몰아내는 불빛만 있는 세상이어서

그 밝은 불빛 탓에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정작 시야에서 사라지게 한 어둠이 그대로 남아 있어 밝은 대낮 같은 세상에도

어둠이 가시지 않으니 빛 타령을 하며 본질을 외면한 주장들을 넘치도록 하는 것 아닐까?

그래서였을까? 시인 장혜령은 보고 발견하고 그리고 깨우침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는

충분한 어둠이 있어야 한다고 산문집 『사랑의 잔상들』 에 쓰고 있다.

우리의 세계는 어둠은 커녕 온통 빛의 홍수이고,

잠깐의 단절도 참지 못하는 고독이 부재하는 시간을 잘 사는 삶이라고 까지 떠들다보니

막상 정말 제대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피상적 무사유의 언어들만이

넘실 댈 까닭 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극장은 영화라는 이미지를 위해 어둠의 장막을 내리고,

꿈을 꾸기 위해서는 잠의 어둠에 잠겨야 한다.

글의 진정한 함의, 그 이면의 사유를 탐색하기 위해서는

어둠의 터널을 통과하는 고독의 시간을 지나야 한다.

밝은 빛만 내리 쏟아지는 세계는 위장과 가면들, 과시와 무사유가 점령한다.

아무것도 꿈 꾸지 못하고, 적나라한 그 무엇도 내비치지 못한다.

눈 감고 저 깊은 사유의 언어를 끌어 올릴 겨를을 가지지 못한,

이런 시간을 견뎌낸 언어를 지니지 못한,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 세계를 차지한다.

디지털 혁명의 세계? 광소자가 빛나는 그 환한 가상의 공간은 생명의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아무런 사유의 자리도 남기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을 빨아들이고 있다.

점점 어둠을 상실해가는 오늘, 우리는 의지처를 찾지 못해 서성거리는 마음에게

어둠과 고독이라는 존재의 지혜를 선물해야 한다.

빛이 찬연한 곳에는 프레카리아트(precariat)가 보이지 않으며,

그 어떤 고통의 사건도 드러나지 않는다.

어둠의 공간으로 가야지만 이들의 모습과 상황이 보인다.

빛 속에서는 너무도 많은 것들이 은폐되어 있어 세계를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게 된다.

우린 어둠의 권력을 포기하거나 잃어버리고 있다.

어둠을 되찾아야 꿈도, 소망도, 사랑도, 사람들도 발견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은 불빛이 아니라 어둠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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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히 다른 타자의 세계를 알아가려 할 때 아마 우리는 조금은 더 살아갈 이유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이 소설집을 나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담한 정의라 해도 된다고 선언하고 싶다.  


작가는 이 책이  "대중에서 시민으로관중에서 독자로 이끄"는 그런 훌륭한 일을 해낼 만한 대단한 책이 아니라고 겸손해 하지만 그 일을 해낸 작품집이 맞다!

"놀랍지만 늘 벌어지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자주 망각했고 또다시 처음처럼 경악했다. 그렇기에 이것은 새로워도 낡은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그들의 이야기도, 전부 똑같거나 혹은 전부 달랐다." - 2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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