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 아래서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06
헤르만 헤세 지음, 송영택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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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 친숙한 헤르만 헤세의 소설 가운데 가장 널리 읽힌 것은 <데미안>일 것이다. 하지만 보다 친숙한 작품을 꼽으라면 <수레바퀴 아래서>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건 아마도, 그의 소설이 유독 '청소년 독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고, 이 책의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가 딱 그 시기의 꿈 많은 소년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데미안>속 주인공 '싱클레어'도 소년의 모습을 엿보여주기는 하지만, 그는 유년기를 거쳐 성인으로까지 성장하고 말지만, '기벤라트'는 안타깝게도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넘지 못하고 꿈이 좌절되는 경험이 적나라하게 보여지기 때문이다.

 

  방황하는 청소년의 속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이야기가 전개된 까닭은 작가인 '헤세'가 그런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도 부모님과 주변 어른들이 바라는대로 '자신의 꿈'을 접고 맹목적인 엘리트 코스(출세길)를 따라가다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자살'을 시도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작가로 크게 성공한 뒤에 '자전적인 소설'인 <수레바퀴 아래서>를 집필했고, 이 책을 통해서 어린 시절에 겪었던 아픔을 정화시킬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렇기에 이 소설을 접한 수많은 청소년들도 은연중에 '공감'을 하게 되었고, 그런 이유로 이 책이 오래도록 사랑받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자살이 '선진국 중, 1위'라는 비극적인 현실속에서 이 책은 분명 달리 읽혀야 마땅하다고 보여진다.

 

  책의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시골마을에 살던 한스는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었다. 그러자 마을의 어른들은 한스를 자랑거리로 삼았고, 그가 '엘리트 코스(졸업 후, 교회 목사가 될 수 있는 명문학교에 진학)'를 밟아 훌륭한 어른이 될 것이라 기대했다. 당연히 한스의 아버지도 한스가 몰락한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이미 정해진 출세길을 따라 얌전히 순응하기만 하면 큰 어려움 없이 승승장구할 것이라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기대와 믿음이 어린 한스에게는 부담스럽기만 했다. 분명 '목사'가 되는 것은 영광스런 일이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운 삶을 보장받을 것이며, 주위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멋진 삶일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 세상에 대해 이제 겨우 눈을 뜬 어린 학생으로서 진정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옳은 길'인지 자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저 어른들의 말씀에 따라 한걸음씩 걷다 보면 답을 찾을지도 모른다고 자신을 채찍질하며 '하라는 공부'만 묵묵히 할 뿐이다. 정작 한스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낚시를 하고 또래 친구들과 수영을 하며 어울리는 일이었는데도 말이다. 물론, 성적이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 공부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루일과의 거의 대부분을 '공부'에만 쏟는 생활에 지쳐가는 평범한 청소년이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여유를 즐기지 못하고 긴장된 하루하루를 보내다 입학하게된 '신학교에서 지내는 삶'은 엄격함, 그 자체였다. 그래서 한스는 자주 두통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한스는 '헤르만 하일러'라는 친구와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된다. 갑갑하고 답답한 신학교에서 보내는 나날들 가운데 '유일한 탈출구'이기도 했던 소중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일러는 좀 색다른 친구였다. 물론 어려운 입학시험을 치루고 들어올 수 있는 명문학교였기에 하일러도 수재임에 틀림없었지만, 하일러는 억압적이고 복종만을 강요하는 학교의 규율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는 시인이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하일러의 성적은 곤두박질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학교측에서는 하일러를 '문제학생'으로 낙인 찍고 아무도 그와 어울리지 못하게 조치를 취한다. 이는 한스에겐 끔찍한 형벌이었다. 가장 친한 친구가 '문제아'라면서 어울리지 못하게하다니 말이다.

 

  결국, 하일러는 학교의 규칙을 밥 먹듯이 어기다 퇴학을 당하게 된다. 하지만 한스는 차마 그러지 못한다. 왜냐면 아버지와 마을 어른들의 기대가 매우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스도 결국엔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심신이 지쳐서 더는 학업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병들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스는 퇴학 아닌 퇴학을 당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고 만다. '실패자'라는 낙인을 찍고서 말이다. 이런 취급을 당한 한스의 아버지는 한스를 마을의 공장에 취직 시켜버린다. 왜냐면 집안 형편이 별로 좋지 않아서 '밥벌이'라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스는 어렵사리 취직한 공장에서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다. 공장일의 노동도 자신이 바라던 일이 절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 한스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한스는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하는 '시인'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비록 한스 스스로 '자신의 꿈'을 말한 적은 없지만, 그가 공부하면서, 학교에 다니면서, 그리고 아름다운 엠마와 잠시나마 사랑에 빠졌을 때도, 그리고 적성에 맞지도 않는 공장엘 다니면서도 한스에게 한줄기 위로를 해준 것은 한적한 시골마을을 품고 있던 자연환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무도 한스의 꿈이 무엇인지 무엇인지 물어봐주지 않았기에 한스도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스는 그렇게 아름답게 여기던 자연의 품으로 홀연히 떠나고 만다.

 

  과연 '누가' 한스를 죽음으로 내몰았던걸까? 아니면 한스는 나약한 자의 최후인 '자살'을 하고 만 것일까? 소설에서는 그의 죽음이 '타살'인지 아닌지 젼혀 알 수 없다. 하지만 한스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은 알고 있지 않을까 싶다. 자신의 꿈을 배우는 학교가 아니라 '출세(성공)'를 위해서 맹목적으로 '공부하는 기계'가 되고 마는 신세가 한스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과연 '타인의 욕망'이 아닌 '자신의 욕망'대로 하루종일 공부를 하고 있는 걸까? 왜 학교는 학생들에게 '꿈'을 가르치길 포기하고, 오직 '국영수 만점'만을 강요하는 걸까? 정작 '국영수 만점'을 달성한 뒤의 삶을 가르쳐주지는 않으면서 말이다.

 

  사람은 저마다 '개성'과 '재능'을 타고났다고들 한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가 바라는 정답은 '명문고-명문대-대기업-아파트장만-안락한노후' 뿐이다. 그토록 수많은 직업과 다양한 개성이 있는데도, 가장 바람직한 삶은 오직 '그것' 하나뿐이라는 듯이 온국민이 딱 '저것' 한가지만을 바랄 뿐이다. 과연 저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은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보장'이라도 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보기에는 대한민국 행복지수는 너무나도 형편없다. 그런데도 왜 '저런 틀에 박힌 삶'을 강요하는 걸까?

 

  이제는 달라져야만 할 것이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정도는 어린이들도 쉽게 알 수 있다. 온가족의 웃음소리가 넘쳐나야 행복하다는 가장 '보편적인 진리'를 외면한 채, 오직 '명문대 입학', '대기업 입사'만이 유일한 행복이라고 외치는 사이, 우리 사회는 어느 새 '웃음꽃'을 잃어버린 슬픈 사회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맞이한 것은 '초고령화 / 저출생 사회'가 아니냔 말이다. 행복한 아이를 낳아 기를 자신을 '잃어버린 세대들'이 아니냔 말이다. 무한 경쟁을 추구하는 이토록 슬픈 비극을 낳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분명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청소년들이 웃음을 되찾도록 해야만 할 것이다. 오직 그것만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밝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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