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 58 : 원효 대승기신론소 NEW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 58
서기남 글, 박수로 그림, 손영운 기획 / 주니어김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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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 가운데 명백히 '우리 것'도 있는데, 실로 '우리 고전'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낮은 것은 정말 아쉬운 일이다. 물론 학문의 경계가 따로 없고 '내것'과 '네것'으로 나눌 수도 없는 것이 '고전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분명 '우리 고전'에는 한국적인 정신이 오롯이 새겨져 있는데, '그것'을 헤아려 오늘에 맞게 되살리려는 노력이 부족한 듯 하여 아쉽다는 것이다.

 

  딴에는 '서양의 학문'이 체계적인 듯 싶고, 서양과 쌍벽을 이룬 듯한 '동양의 학문'은 대개 고대 중국과 인도에서 비롯한 것이 많다하여 '한국적인 것'을 따로 찾아내기 힘들다고 토로하는 이들도 있기는 하다. 허나 이웃한 '일본의 학문'은 그 뿌리가 조악하다 못해 베꼈다는 것이 명확한데도 '일본의 것'이라 당당히 밝히고 있는데 반해, 우리는 이렇다 할 것을 내세우지도 못하고 '한국적인 무엇'을 내세우기 앞서 대개 '중국에서 유래한 것'을 우리의 형편에 맞게 '독자성'을 내세워 고쳐쓴다며 당당히 '원조'를 내세우지 않고 그저 '외래에서 흘러온 것'을 우리의 정서와 형편에 맞게 '고쳐쓴 것'이라며 애써 '겸손'을 떨고 있지 않은가 싶을 정도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느끼고 있다. '우리의 독자성'을 내세우지는 않지만, 일단 '외래의 것'이 우리의 품안에 들어오면 '원래의 것'과는 사뭇 다른 '우리 것'으로 변화하여 '원래의 것'보다 훨씬 좋은 '한국적인 것'으로 탈바꿈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바로 이런 '한국적인 것'이 바로 '우리 것'이고, '우리 고전'인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우리 고전'에 대한 자긍심을 드높이고, '원래의 것'보다 더 좋은 '한국의 것'을 바로 세우려는 노력을 등한시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여기 원효가 쓴 <대승기신론소>도 마찬가지다. 불교의 창시자는 인도의 왕자 싯다르타(부처)라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불교가 '인도의 것'은 절대 아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인도에서 유래한 불교는 '현지의 사정'에 알맞게 변해 왔고, 인도의 승려 마명이 쓴 <대승기신론>에 덧붙여 중국에 전래된 불교가 '대승불교'로 모습을 바꾸었고 '대승불교적 관점'이 우리에게 전해지면서 신라의 원효에 의해 석가여래의 말씀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독자적 해석'을 담은 책이 바로 원효가 쓴 <대승기신론소>이다. 허나 1900여 년전에 마명이 산스크리트어로 썼다는 <대승기신론>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고, 현재는 6세기 중국 양나라 승려 진제와 당나라 승려 살치난타가 쓴 책만 전해지고 있을 뿐이고, <대승기신론>을 해석한 <대승기신론소>도 수나라 혜원, 신라 원효, 당나라 법장의 해석이 담긴 책을 으뜸으로 치고 있다고 한다.

 

  헌데, 사실 <대승기신론>은 매우 짧은 책인데 반해 이에 대한 '해석'을 담은 <대승기신론소>는 두껍고 방대하기로 유명하다. 왜 그럴까? 그건 '불교 경전의 핵심'만 담아 놓은 <대승기신론>을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라서 그렇다. 아무런 주석도 달아놓지 않고 '경전의 핵심'만 간추려서 '불교란 이런 것이다'라고 써놓았는데, 그 핵심적인 내용이 석가모니가 살아있을 당시, '붓다의 말씀'을 거의 직접적으로 옮겨놓다시피 했으니 담긴 내용이 얼마나 '함축적'일지 가늠조차 하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어떤이는 '천재들만 이해할 수 있는 경전'이라 불리는 간편한(?) 책, <대승기신론>에 일일이 해석을 달아놓았으니, 누구라도 한 번 읽으면 단박에 이해가 될 정도로 쉽고 재밌는 책(?)이라 불리는 <대승기신론소>가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불교의 경전은 크게 세 가지로 '경', '율', '논'로 나뉜단다. 경은 석가모니의 '말씀'을 모아놓은 책이고, 율은 불교 교단에서 지켜야 할 계율을 모은 책이다. 그리고 논은 위대한 스승들이 경과 율을 해석한 것을 모아놓은 책이란다.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하자면, 경은 '교과서', 율은 '교칙', 논은 '참고서'인 셈이다. 이렇게 경장, 율장, 논장, 셋을 함께 이르는 말이 바로 '삼장'인데, <서유기>에 등장하는 '삼장법사'는 바로 이 세 가지에 통달한 위대한 스승이란 뜻이다. 수천 권에 달하는 '불교경전'을 통달했으니 '삼장법사'란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대단한 칭송인 셈이다. 쉽게 비유하자면 '팔만대장경'이 불교경전을 압축해서 '팔만 개 이상의 목판'에 새겨넣은 것인데, 그걸 달달 외울 정도의 실력자(?)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따라서 <대승기신론소>는 '논'이란 글자가 보이니 불교의 위대한 스승들의 '해석'을 보다 쉽게 풀어놓은 해설집인 셈이다.

 

  그렇다면 <대승기신론소>의 핵심 내용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깨달음'에 대한 해설집이다. 인간의 마음에 깃들어 있는 '고통', 그리고 연속적인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참고서, 달리 표현하자면, '안내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자기개발서쯤으로 이해해도 좋을 듯 싶다. 그런데 그런 좋은 안내서가 너무 방대한 것이 탈이다. 그리고 쉽게 설명했다고 하지만 너무 오랜 옛이야기라서 '현대적 가치관'에서 보기에는 사뭇 이치에 맞지 않은 설명도 곳곳에 눈에 띄어서 오히려 읽기에 따분한 책이 되어 버린 듯도 싶다. 하지만 원효의 사상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 것일 뿐이다)'에 함축되어 있기에 원효가 지은 <대승기신론소>의 핵심도 '원효 사상'에 입각해서 이해를 하면 그닥 어렵지 않을 것이다.

 

  원효의 대표적 사상인 '일체유심조'는 해골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일찍이 불교의 가르침을 깊이 이해하고자 중국(당) 유학을 결심한 원효과 의상은 함께 중국으로 가려고 했지만, 가던 도중에 천재지변으로 인해 급히 몸만 피해 동굴에 들어갔을 때였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잠에서 깬 원효는 깜깜한 암흑속에서 '물바가지'를 찾아 맛있게 해갈을 하고 다시 잠에 들었는데, 날이 밝아 깨어보니 동굴이라 여겼던 것은 '무덤속'이었고, 맛있게 마셨던 물은 시체가 썩어 만들어진 '뇌수'였던 것이다. 한참을 역겨움을 느끼며 구역질을 하던 원효는 문득 어젯밤에 마셨던 맛있는 물과 시체의 썩은 물이 '똑같은 물'일진데, 어찌하여 '그때'는 맛있었고, '지금'은 역겨워 뱃속을 뒤집어 놓은 것인가 의문을 품은 끝에 세상 만사 '고통'이라 불리는 것도 오직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다. 이렇게 단박에 큰 깨달음을 얻은 원효는 중국 유학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가 '유심종(마음먹기에 달렸다)'을 널리 퍼뜨렸으며, 의상은 계획대로 당 유학을 마치고 '화엄종(華嚴宗: 엄격함에서 빛이 남)'을 개창했으니 반듯한 의상대사의 인품이 더해져 '해동화엄종'을 널리 퍼뜨렸다. 암튼, 이런 원효가 쓴 <대승기신론소>가 어떤 깨달음을 담았는지 대충이라도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는 달리 '전지전능한 신'이 등장하지 않는다. 누구나 도를 닦아 마음으로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칠 뿐이다. 물론 누구나 '부처'가 될 수는 없다. 해탈의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선 끝없는 고통과 욕심을 끊어버리는 '무아(無我)의 경지'에 다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도 '무아'의 경지에 다다르지 못하고 고작 '또다른나(異之我)'를 만들어 온갖 번민에서 달아날 궁리만 하고 있을 뿐이다. 문제해결을 위해선 '회피'가 아니라 당당히 '맞서야함'을 잘 알고 있지만 말이다. 허나 나를 대신해서 '대신' 두들겨 맞으며 온갖 역경을 이겨낸 '또다른나'는 대단히 맷집이 단련되었다. 그렇게 '무아'의 경지에 아직 도달하진 못했지만 '이지아'의 경지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나'는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을 따름이다.

 

  암튼,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교도 석가모니 때에는 '누구나' 될 수 없었고, 오직 석가모니만이 유일한 '붓다'였을 뿐이다. 이런 불교의 교리가 중국에 전래되었을 땐, 대승(큰수레)적인 가르침으로 새롭게 바뀌었다. 마치 유대의 하느님이 유대인만을 '선택'하였는데, 하느님의 아들 예수의 제자들이 '온인류'에게 사랑을 전파하면서 그리스도교로 바뀐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우리 나라에 전래된 '대승불교'는 누구나 가르침을 받아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해석'을 이어받아 원효대사는 세상만사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으니 신분의 높고 낮음과는 아무런 상관 없이 누구나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하여 '불교의 대중화'에 큰 기여를 하였다. 비록 원효의 <대승기신론소>가 읽기에 부담스런 책일지는 몰라도 원효대사가 남긴 가장 한국적인 정서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정신을 되살려 읽어내면 한국의 고전을 읽는 맛도 색다르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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