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 아래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2
헤르만 헤세 지음, 한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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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이 소설은 '해설'이 없으면 이해하기 힘들다. 특히, 우리 나라처럼 '교육열'이 유난한 환경에서 이 소설은 자칫 '의지박약한 청소년'을 경계하라는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신동이라 불리던 한 소년이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 '명문학교'에 입학했음에도 친구를 잘못 만나서 '문제아'로 찍히게 되고, 학교생활에도 적응하지 못해 불명예스런 '휴학'을 했다가 끝내 사회에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는 줄거리로 읽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는, 제목에서 주는 '위압감' 때문에 '수레바퀴 아래' 깔리지 않으려면 '닥공(닥치고! 열심히 공부!!)'하는 학창시절을 참고 견디어야 한다는 강박감을 잘못된 선입견처럼 강제주입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수레바퀴 아래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배경지식을 갖추어야만 한다.

 

  먼저, 주인공의 이름에 주목해야 한다. 이 소설은 '성장소설'에 해당하기 때문에 어린 소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 소년 주인공이 바르게 성장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이 '주제파악'을 하기 위한 핵심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두 소년의 이름이 지니고 있는 뜻을 헤아려야 한다. 바로 '한스 기벤라트'와 '헤르만 하일너'다. 각각의 이름에 담긴 뜻은 '기벤라트(충고 좀 해줘)', '하일너(치유하다)'다. 이렇게 이름이 지니고 있는 뜻을 알고 나면 주인공 '한스'가 겪는 방황을 십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기숙사의 문제아로 낙인 찍힌 '헤르만'이 사실은 우리 사회가 지닌 병폐현상을 말끔히 '치유'할 수 있는 인재였음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사실 주인공 한스는 자기 스스로 원해서 '공부'를 한 것이 아니었다. 주위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저 어른들이 하라는대로 공부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 한스에게도 이렇게 공부하는 것이 마냥 싫은 것은 아니었다. 공부성적이 우수한 편이었기 때문에 공부를 하면 선생님을 비롯해서 동네어른들 뿐만 아니라 특히 아버지가 유독 기뻐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공부를 잘 하는 한스를 보며 기뻐한 것은 '한미한 가문'을 한스를 통해서 부와 명성을 높일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버지는 한스의 뛰어난 성적이 너무나도 자랑스러웠고, 대견해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한스는 공부가 즐겁지 않았다. 뛰어난 실력과는 별개로 점점 늘어나는 '공부분량' 때문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스는 점점 또래 친구와 어울리는 시간도 줄어들게 되었고, 스트레스를 받거나 두통에 시달릴 때마다 즐겼던 낚시와 산책도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한스는 학창시절을 '공부벌레'로만 살게 된 셈이다. 그럼에도 한스는 꾹 참고 공부에 매진한다. 아직 한스에게는 '공부'가 인생의 전부로만 보였기 때문이다. 주변의 어른들이 모두 한스에게 공부만을 권하는 분위기여서 한스는 더욱더 '다른 데' 한눈을 팔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게 바로 한스가 '신학교 합격'을 하고도 방학동안에 다른 여유를 갖지 못하고 교장과 선생과 목사에게 일주일 내내 '선행학습'을 한 까닭이다. 마치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마냥 앞만 보고 달리고 또 달리기만 했다. 합격자들 가운데 2위로 합격한 실력자가 입학과 동시에 성적이 뒤쳐지지 않도록 또 공부만 한 셈이다. 이런 한스에게 제대로 된 '충고(조언)'를 해주는 어른은 없었던 것일까? 사실 있긴 있었다. 동네에서 신발을 만드는 '가죽쟁이 아저씨'가 계셨는데, 오직 이 분만이 한스에게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절대 아니다'라고 유일하게 조언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스는 자신에게 유일하게 제대로 된 조언을 해주는 이 아저씨를 자주 찾아뵙지 않는다. 의도적이었던 것일까? 그보다는 주위에 온통 '공부하라'는 잘못된 충고를 하는 어른들 뿐이라서 제대로 된 인생조언을 듣고도 죄책감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한스의 잘못된 판단은 '문제아' 하일너를 만난 뒤에도 계속 이어진다.

 

  반면에 헤르만은 자유분방한 아이였다. 분명 36명밖에 합격하지 못하는 수재 중의 수재임에 틀림없었지만, 하일너는 '신학교'에서 고분고분하게 공부만 하다가 국가가 배출하는 '목사'가 되어 모두가 선망하는 대상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하일너는 그저 '안정된 돈벌이'나 '유망한 직장인'에 만족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자신의 내면이 하고자 하는대로 나아가고 싶은 진취적이며 자유로운 영혼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하일너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자유롭게 지껄일 수 있는, 그렇지만 한껏 절제되고 엄선된 '언어'로 더욱더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일깨워줄 수 있는 '위대한 시인'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때로는 날카로운 사회비판을 담기도 하고, 때로는 아름다움, 그 잡채를 예찬하기도 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고 싶은 간절한 이유도 역시 '이름'과 마찬가지로 '하일너(치유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반된 두 소년이 어둡고 음침한 신학교 기숙사 '같은 동아리방'에서 만나게 된다. '모범생'과 '문제아'가 만나서 벌어질 일이 무엇이었을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책제목'에서 언급하고 있는 '수레바퀴'에 대해서 조망해야만 한다. 작가 헤세는 이 소설을 '자전적인 소설'이라 말했다. 자신의 어릴 적 경험에서 비롯한 소설이 창작된 셈이다. 과연 두 소년 가운데 누가 '작가의 어린 시절 모습'이었던 걸까? 헤세도 어릴 적에 자살시도를 했던 점에 비추어보면 아마도 '한스'였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은 '헤르만'이 작가가 되고 싶었던 이상형이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헤세는 목사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운 형편속에서 '목사'가 되길 강요받았지만 병약하고 자살시도 끝에 '시인'이 되길 꿈꿨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의 두 주인공 모두가 바로 '헤세의 어린시절'을 본뜬 자화상이랄 수 있을 것이다.

 

  소설속에서 한스는 결국 죽음에 이른다. 거대한 '수레바퀴 아래서' 깔려 죽고 만 셈이다. 여기서 '수레바퀴'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괴물과 다를 바가 없다. 아직 어린아이일 뿐인데 어른들이 시키는대로 하지 않으면 가차없이 밟아버리고 말겠다는 무시무시한 괴물처럼 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거대한 괴물에 깔려죽은 아이들은 '무엇'이고, 용케 살아남은 아이들은 '누구'란 말인가? 수레바퀴 아래 깔릴 운명은 다름 아닌 '사회부적응자'들이다. 기성세대가 만든 '수레바퀴'는 잘 굴러가기 위해서 그 밑에 깔릴 수밖에 없는 사람은 가차없이 밟고 지나가버린다. 그렇다면 수레바퀴에 깔리지 않고 용케 살아남은 사람들은 '제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인가? 그건 아니다. 수레바퀴가 '왜' 굴러가는지도 모른채 그저 굴러가는대로 아무 생각도 없이 '굴려지는 도구'로 길들여졌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 수레바퀴가 멈추면 모두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만 눈치껏 알고 있을 뿐, 그 수레바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위해 굴러가는지도 모른채 그저 '굴러가는대로' 돌고 또 돌아갈 뿐이다. 그러다 그 수레바퀴에서 '낙오'라도 되면 다시 깔릴 위험도 있고, 아니면 사회에서 버림을 받을새라 허둥지둥 '그 수레바퀴'에 다시 탑승하려 애쓰는 안쓰러운 상황만 펼쳐질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네 인생은 '수레바퀴 위'에 있는 것일까? 아래에 깔리면 사회부적응자이고, 위에 탑승하면 사회적응자라고 할 때, 수레바퀴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듯이 자유롭게 제 갈길을 가는 사람은 없는 것일까? 오직 그런 사람만이 '그 수레바퀴'를 굴리기 위해 '앞만 보는 말'에게 잔인한 채찍질을 가하는 마부(기득권층)와 맞설 '위대한 주인'인 것이다. 이 소설을 읽는 어린 독자들이라면 바로 이 '위대한 주인의 실체'를 마주해야만 하는 것이다. 비록 소설속의 주인공은 비극적인 죽음을 피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우리는 현명해지기 위해 공부를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지 현명해지기는커녕 '공부벌레'가 되어버리거나 '공부하는 기계'처럼 공부하는 학생들이 되고 만다. 점점 '아는 것'이 더욱 많아질터인데 도대체 왜 그런걸까? 바로 '왜' 공부해야 하는지 '목표'를 상실한 탓이다. 공부에 '성공보장 코스'라도 있는 것처럼 '명문고-명문대-대기업'이라는 코스를 밟아야만 성공한 인생이라는, 아니 적어도 '넉넉한 삶'과 '안락한 노후'를 보장받기라도 하는 양, '닥공'하는 청소년들이 너무 많다. 그것보다는 '나는 어른이 되어서 무엇을 할 것이다'라는 구체적인 꿈을 꾸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나는 학창시절에 지겹도록 공부만 해야 했지만, 어른이 되어서 꼭 '교육부장관'이 되어서 대한민국 청소년들이 즐겁고 재미나게 공부할 수 있는 교육환경을 만들 것이며, 그렇게 공부한 대한민국 학생들이 세계최고의 인재로 발돋움해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이는 멋진 사람이 될 것이..라는 멋진 꿈을 꾸는 학생들이라면 정말 좋겠다. 그저 돈 많이 버는 부자가 되고 싶다는 '목적달성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정한 꿈'을 꾸고 실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멋진 삶'을 살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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