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 55 : 존 롤스 정의론 NEW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 55
김면수 지음, 남기영 그림, 손영운 기획 / 주니어김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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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이 열광하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돈'이다. 그렇다고 '부자'를 존경하는 것도 아니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들곤 한다. 그래서 엄청난 액수를 자랑하는 로또에 매주 빠져들고, 코인이 떡상하길 마냥 바란다. 물론 '확실한 미래'를 보장하는(?) 부동산과 주식에도 아낌없이 투자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돈을 벌어서 어따 쓰려고 그러는 것인지도 모를 정도로 몰려드는 모습에 안 쓰럽기까지하다.

 

  이토록 일확천금에 눈이 돌아가버릴 정도로 천한 민낯을 드러내긴 하지만 한국인의 가슴속엔 '공정'과 '평등'에 대한 열망도 함께 품고 있다. 그래서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는 이들에 대한 '반감'이 날로 심해지고 있으며, 그런 부정한 이들이 '사회지도층'을 장악하고 쥐고 흔드는 사회시스템에 깊은 '불만'을 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누가 뭐라해도 '평등'의 가치를 중요시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물론 '빈부의 차이'를 부정하거나 '재능과 실력의 차이'로 인한 부의 분배가 불균형을 이루는 것, 자체를 부정하며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누구라도 '노력'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는 공정한 시스템을 갖출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을 바라는 것이다. 이처럼 공정과 평등의 가치가 합리적으로 이루어진 사회를 꿈꾸는 한국인들이 '정의'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나타내는 것은 어쩜 자연스런 일일지도 모르겠다.

 

  10여년 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민국이 들썩였던 것도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은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였는데, 용두사미처럼 흐지부지 끝맺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우리가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시금 돌아볼 수 있는 '전환점'으로 삼기에 부족한 점이 없을 것이다. 물론, 흐지부지 끝낼 수밖에 없었던 원인도 밝혀내고 말이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샌델 교수가 말한 '정의'는 공리주의에 입각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을 첨가하여 존 롤스의 <정의론>으로 끝맺음을 한 것으로 풀이된다. 다시 말해, 기본적인 개론으로 시작한 학구적인 분석에 깊은 관심을 끌어내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샌델이 말한 '정의'가 곧바로 '부가 가져다주는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판면나자 우리 세대의 젊은이들이 깔끔하게 손절하고 말아버린 헤프닝이었다는 얘기다. 정리하면, '정의=부의 공평'이라는 공식과 거리감을 느끼자 공정과 평등을 갈망하던 우리 세대가 <정의론>조차 외면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특히나, '부유함'이 곧 '행복'이라는 공식조차 성립하지 않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 요즘 대한민국을 보면서, 소위 '부자'라는 것들이 저지르는 불공정과 불평등, 더 나아가 굴욕과 굴종만이 유일한 살 길이라며 대한민국의 시곗바늘을 되돌리려하는 만행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왜 다시금 '정의'에 대해 신랄하고 뼈저린 반성과 지대한 관심을 두어야 하는지 깨닫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먹고 살 걱정'을 내려놓고 소소한 여유와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 전부였는데, 애써 뽑아놓은 정부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들고 국민들을 불안에 떨게 만드는 작태를 보면서 분노를 금치 못했을 것이다. 더욱 뻔뻔한 것은 '저들'이 저지른 짓이 '무슨 잘못'인지를 인지하지 못하고 자화자찬으로 일관하며, '저들만의 천국'을 만들고서 또다시 국민 대다수의 '행복'을 담보로 삼아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다시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롤스의 <정의론>의 핵심은 '무지의 베일'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두 사람이 떡을 공평하게 나눠먹기 위해선 한 사람에겐 '칼'을 쥐어주고, 다른 한 사람에겐 '선택권'을 우선적으로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칼을 든 사람은 어느 쪽이든 '먼저' 선택할 권리가 없기 때문에 되도록 '똑같이' 나누려 노력할 것이다. 왜냐면 '선택권'이 상대방에게 있기 때문에 제 욕심을 부려 크기가 '다르게' 잘라버리면, 우선권을 가진 상대가 큰 것을 날름 가져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롤스는 바로 이러한 방법으로 '공평한 분배'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확신했다. 마찬가지로 '무지의 베일'이라는 것도 베일속에 가려진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위한 법을 제정할 때, 어느 한 쪽이 유불리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공평한 법'을 제정해야 자신에게 손해가 오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무지의 베일'이 작용하면 우리 사회는 '객관적'으로 보아도 공평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처럼 롤스는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 하나하나가 '선한 존재'라는 가정 아래 <정의론>을 집필하였다. 왜냐면 몇몇 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이 있다하더라도 대다수의 선한 마음이 스스로 정화시킬 수 있는 시스템이 작동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꽤나 낙관적인 결론이긴 하지만 크게 틀린 말도 아니다. 다만 '현실성'이 좀 떨어질 뿐이다. 이렇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까닭이 실제로 작동되고 확연히 눈에 보이는 것으로 자신의 이론을 증명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도 않고 실체도 없는 '윤리적 가치'를 앞세웠기 때문이다. 냉혹한 현실에서는 잘 통용되지도 않고 '구속력'조차 없는 윤리도덕을 앞세워 <정의론>을 펼쳐냈으니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들릴 법도 하다.

 

  허나, 우리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또한, '윤리도덕'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 안전한 치안을 자랑하고,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든 근간에는 '경제적 성장'도 한몫 했지만, 누가 뭐라해도 '선한 마음'을 바탕으로 한 '윤리도덕'을 우리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부끄러움'을 알고 잘못을 저질러도 '반성'할 줄 알며, 스스로 뉘우쳐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정의'를 말할 때 바로 이러한 '윤리도덕'이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기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양심에 찔리는 것이 있다면 감히 '정의'를 입에 올릴 수조차 없다. 설령 다른 이를 속일 수는 있어도 자기 자신까지 속일 수는 없는 법이다. 하긴, '염치'를 옆동네를 지나가던 똥강아지로 알고 허투루 여기는 못난놈들도 많긴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못난놈들도 '정의'를 운운하고 있지만, 진정한 정의로움을 위해서 반드시 솎아내야할 종자들이다.

 

  진정한 정의로움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우선적인 방법은 '선한 마음'을 지닌 이들이 '힘'을 갖는 것이다. 스스로 윤리도덕을 통달해서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다면 저들밖에 모르는 '악당'들에게 밀리지 말아야 한다. 법 없이도 살 생각을 하지 말고, 그 '법'을 만들 힘과 집행할 힘, 그리고 제대로 운영되는지 감시할 수 있는 힘까지 장악해야 한다. 그리고 착한이들이 부유해져야 한다. '돈의 속성'이 점점 악해지고 있는 까닭도 악당같은 놈들이 돈의 힘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한 마음을 지닌 이들이 부유해져야 한다. 그리고 선한 힘을 발휘해야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

 

  물론, 이 또한 비현실적일 것이다. 이미 '부의 독점'이 명백해진 시점에 부가 가져다준 '모든 혜택'을 골고루 나눠갖는 '선한 영향력'이 순순히 실행될 것이라 낙관하고 있으니 말이다. 한마디로 떡줄놈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 셈이다. 그렇다면 존 롤스의 <정의론>은 한낱 '그림속의 떡'이란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려는 롤스의 '방법론'이 현실적으로 실현가능성이 없어보일지라도 '정의, 그 잡채'를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누구라도 '정의로운 사회구현'을 말하지 않으면 권력을 가질 수도 없고, 부를 이룰 수도 없다. 정치인, 경제인, 그 누가 되었든 간에 '정의'를 참마음이 아닐지언정 입밖으로 내뱉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가 한목소리로 말해야 한다. "당장 정의를 실현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내놓고 실행하라"고 말이다. 그 말과 함께 우리는 <정의론>을 실행할 수 있게 된다. 비록 악당과 못난놈들이 실행하는 정의일지라도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선한 마음'을 그들 스스로 일구어나아가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우리 모두가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고 믿어의심치 않아야 가능한 일이다. 난 그리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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