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 54 : 칼 융 심리학과 종교 NEW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 54
최현석 지음, 주경훈 그림, 손영운 기획 / 주니어김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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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리학은 사람의 마음을 '과학적인 자세'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심리학자는 '객관적인 관점'으로 인간의 정신과 사람의 마음을 파헤쳐야만 한다. 하지만 정신과 마음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관계로 심리학자는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다른 것'을 통해서 연구를 해야만 했다. 이를 테면, 사람의 '행동'이 생각이나 마음과 연관이 있다고 보고, 행동을 통해서 심리를 연구하는 '행동 심리학'이 발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특정한 행동이 늘 같은 '심리상태'에서 비롯되었다는 증거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반기를 든 심리학자가 바로 '칼 구스타프 융'이다.

 

  융은 인간의 심리는 '무의식'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면서, '무의식의 세계'를 연구한 대표적인 심리학자다. 이를 두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비슷하다거나, 혹은 함께 연구했던 시절이 있었던 탓에 프로이트의 '제자'라고 곧잘 설명하곤 하지만, 이 책에 따르면, 그건 아니란다. 칼 융의 '분석 심리학'은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무의식의 세계'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정신분석학'이 성도착증을 예로 들면서 인간의 욕망 가운데 하나인 '성욕'을 무의식의 원천으로 삼은 것에 반해, '분석 심리학'은 신경증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을 예로 들면서 '종교'를 중심적으로 분석하며 설명한 것으로 보아, 둘의 연구는 사뭇 다른 점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실제로 프로이트와 융은 '공동연구'를 진행하면서 서로 의견이 맞지 않은 탓에 융이 자발적으로 학회를 떠나버리고 말았다. 학자로서 '공동연구의 장'을 박차고 나온 것은 서로 연구하는 내용이 '다르다'는 명백한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암튼, 칼 융은 프로이트의 '야한(?) 분석'에 심히 반감을 보이며, 독특한 연구를 진행했는데, 다름 아니라 '종교'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이었다. 그것도 주류 종교보다 비주류에 속한 '무속신앙'이나 '연금술' 등에 걸쳐 다방면의 연구를 하였으며, 자신의 연구를 보다 '객관성'을 띄게 하기 위해 '무신론적인 서술'까지 서슴지 않아 종교계의 지탄을 받기도 했었단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은 융은 끝까지 소신을 지키며 내린 결론은 '나, 자신'이 곧 '신'이 될 수 있다는 자존감이었다. 다시 말해, 현대인이 신경증과 같은 심적 고통을 받는 까닭은 '구시대로부터 답습한 도그마(독단적 억압)'를 타파하지 못한 경향이 크다면서, 신경증과 같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특정 종교에 심취하라는 조언 대신에 '고통의 원인'이 되는 '무의식 세계'속의 '자기(Self)'를 마주할 용기가 핵심이라면서 자존감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을 제안했던 것이다.

 

  이에 말을 덧붙인, 칼 융은 심적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환자들에게 '천편일률적인 치료법'을 제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사람들마다 '무의식'을 형성한 '원형'이 서로 제각각일텐데 어떻게 이를 일률적으로 묶어서 '똑같은 치료법'을 제시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그러니 환자가 자각하고 있는 '의식의 세계'를 통해서 고통을 호소하는 경향은 비슷할지라도, 그 고통의 원인이 되는 '무의식의 세계'는 제삼자가 알 수 있는데 한계가 있으므로 환자가 떠올려 말하는 '꿈에 대한 이야기'를 면밀히 살펴서 알맞은 치료법을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꿈의 해석'이 매우 중요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성도착적인 성욕을 '무의식의 핵심'으로 보았던 프로이트와는 달리 칼 융은 매우 '종교적인 분석적 방법'으로 꿈을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여기서 몇 가지 핵심적인 점만 소개하자면, '콤플렉스'와 '사위일체'다. 먼저 '콤플렉스'는 복잡하다는 뜻이지만, 심리학적인 뜻은 '마음속의 응어리'로 이해하면 좋을 듯 싶다. 융은 겉으로는 멀쩡하고 완벽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내면속에 간직한 콤플렉스가 있을 수 있다면서, 콤플렉스는 누구나 지니고 있다고 단정지었다. 또한, 콤플렉스는 의식적인 것보다 무의식적인 경우에 더 심각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처럼 성적으로 불완전할 때 정신병을 초래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칼 융은 이와 달리 타고난 소질과 경험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수많은 나'로 콤플렉스가 드러난다면서, 심적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은 이렇게나 많고 독립적인 '콤플렉스' 때문에 증세가 나타나게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사위일체'에 대해 설명한 부분이 눈에 띄었는데, 흔히 알고 있는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을 일컫는 '삼위일체'에 또 하나를 더한 '사위일체'를 칼 융이 말한 내용이다. 말 그대로 '성스런 아버지', '성스런 아들', '성스런 영혼'을 하나로 뭉뚱그린 '삼위일체'는 온통 '남성성'만 가득하기 때문에 완전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로 인해 과거에 큰 힘을 발휘했던 '기독교'가 오늘날에 와서는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까닭은 바로 '여성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란다. 달리 해석하면, 성부와 성자, 성령은 '선한 존재'만을 가리키고 있어, 한쪽으로 치우친 경향 때문에 불완전하다고 말한다. 그 때문에 중세인들은 고해성사나 고행을 통해서 어찌어찌 경건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을지 몰라도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착하게 살라'고만 말하는 교회나 교리를 통해서 평안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한다. 왜냐면 바로 '우리 맘속의 악마'를 부정하고 없애기만을 바라고 있기에 계속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게 뭔 소린고 하면, 남성의 내면에는 '여성적인 면'을 갖추고 있기에 '의식적'으로는 남성성이 도드라지게 드러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감춰진 여성성이 드러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를 두고 융은 '아니마(여성성)'라고 지칭했다. 반대로 여성의 내면에도 무의적인 남성성을 갖추고 있으며 '아니무스(남성성)'라고 가리켰다. 그런데 삼위일체를 내세운 기독교적인 교리속에선 '성부, 성자, 성령'이 모두 '남성성'만을 드러내고 있으니, 여기에 '성모 마리아'를 집어넣어 '여성성'을 갖춘 '사위일체'를 말한 것이다. 또 다른 해석으론 우리의 내면에는 '선한 마음'도 있지만 '악한 마음'도 갖고 있기 마련이라면서 과거처럼 종교적인 교리를 앞세워 '내 안의 악마'를 꾹꾹 누르기만 해서는 현대인이 가진 복잡한 고민을 해결할 수 없다고 융은 말했다. 그럴 바에는 '내 안의 악마'를 인정하고 '악한 마음'마저 적절히 다스릴 수만 있다면 선과 악의 균형을 찾아 정신적인 평온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를 두고 '성부, 성자, 성령, 그리고 악마'를 넣어 균형잡힌 영혼을 가지게 될 때 심적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평온과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논란과 비난이 많을 수밖에 없는 연구내용도 담겨 있었지만, 개인적으론 칼 융의 '연구방식'이 퍽 맘에 들었다. 무엇보다 획일적인 만병통치약을 만들기보다 '개별적인 치료법'을 제시한 점이 학자로서 꽤나 '열린 자세'를 갖추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콤플렉스나 사위일체 연구에서도 복잡하기만 한 콤플렉스를 획일적으로 뭉뚱그리지 아니하고 '자율성'을 부여하고 '독립적인 개체'로 인정해 수없이 많은 '나'를 만나게 된다는 얘기나, '삼위일체'의 완벽성을 고집하지 않고 '부족함'을 드러내면서 채워넣어야만 할 '무엇'을 첨가한 점도 매우 참신했더랬다. 비록 그 무엇을 '여성성'과 '악마성'이라고 덧붙이긴 했지만, 칼 융이 꼭 그렇게 단정지은 것만은 절대 아니다. <심리학과 종교>라는 책에서 비유한 내용이 그렇다는 얘기지, 그 무엇이 꼭 '무엇'이어야만 한다고 단정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훗날 연구를 이어나갈 이의 몫이기도 하고, 현재 마음속의 고통으로 아파하는 이들이 채워넣어야할 몫이기도 하다.

 

  암튼, 학자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끝없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자신의 학업적 성과를 자랑하거나, 자신의 방식만이 옳다고 강요하는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권위적인 자세'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낮은 자세에서 옳다고 믿는 것을 흔들리지 않고 연구한 칼 구스타프 융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그의 서적만을 읽고서는 알 수 없었던 점인데, 이 책을 읽으니 문득 깨닫게 된 점이었다. 종교를 연구했음에도 '신'을 찬양하기보다 '신을 닮으려 애쓰는 인간'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얻어낸 것도 흠족하기 이를 데 없는 점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실수'를 했더라도 크게 개의치 말고 거듭거듭 실수를 해도 좋다고 말했다. 사람은 흔히 실수를 통해 진리에 도달하는 법이라면서 말이다. 정말 멋진 말 아닌가. 누구나 자기 '내면의 신'을 일깨우는 순간,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비록 신을 일깨우지 못했더라도 신을 닮아가려 애쓰는 모든 순간이 행복해지려는 노력을 한 것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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