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01 : 주홍글씨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
배민기 그림, 김세라 글, 손영운 기획, 너대니얼 호손 원작 / 채우리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서울대선정 인문고전 60권>을 일찌감치 눈여겨 보고 있던 참에 눈에 들어온 책이 있었으니 <서울대선정 문학고전 43권>이었다. 하지만 오래도록 눈독만 들여놓고 있다가 새해 들어서 드뎌 읽기 시작했다. 도합 100권이 훌쩍 넘지만 올해를 넘기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시작해보련다.

 

  일찍이 '7차 교육과정'이 개편되면서 교과과목 간 '통합'이 주요관심을 쏟을 때쯤, '논술'이라는 것이 한창 인기를 끌고 있었다. 비록 수능시험에는 출제되지 않지만, '정시'와 '수시' 모집에서 논술이 입시결과를 좌지우지했었기에 '독서'가 학생과 학부모 들 사이에서 크게 관심을 모았었다. 허나 막상 책을 읽으려니, '무슨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할 뿐이어서 모두가 오리무중이던 때에, 서울대에서 마침맞게 '서울대선정 필독서 목록'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발표한 뒤에 '논란'이 크게 일었다. 왜냐면 그 '목록'에 이름을 올린 도서들이 하나같이 대한민국 초중고 학생들이 읽기에 너무나 부담이 되는 '어려운 책'들이었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읽기에도 난감하고 막막하고, '두껍기' 그지 없는 책들을 학부모들은 너나할 것 없이 사모으기 붐이 벌어졌지만, 변변한 '주석서'나 '해설집'도 없이 그 어려운 책을 읽은 학생들은 물론이고, 한 가닥 한다는 '논술선생님'들조차 난색을 표하긴 매한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도' 해석되고, '저렇게도' 해석되는 <고전>을 두고 학생들의 눈높이에 알맞은 수준으로 '낮추어'서 모범답안을 제시하는 일이 만만찮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사자인 학생들은 '모범답안'을 달달 외우는 것에 길들여져 있던 탓에 용감하게(?) '자유로운 해석'을 시도해볼 생각도 없을 정도로 막연하고 막막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울대에서는 부랴부랴 '필독서'도 아니고, '정시, 수시'에도 출제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내놓고, 도서목록은 그저 '입학하고 난 뒤'에 틈틈이 읽으라는 발표했을 뿐이고, 서울대학생이 '문제 푸는 기계'로 전락하지 않도록 권장한 도서목록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 당시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라는 책이 화재가 되면서 '서울대생'도 대학생으로서 상식적인 지식을 갖추지 못한 것은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자, 서둘러 발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암튼, 지적교양을 쌓기 위해서는 '이 정도' 책은 읽고 나름의 생각을 주장할 수 있을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투로 '도서목록'이 발표되었으니 알아서들 하라는 식의 무책임한 면도 없지 않았다.

 

  그러자 발빠른 '출판시장'에서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서울대선정...>이란 제목을 달고 나온 책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물론, 적절한 '주석'과 '해석'을 달고서 말이다. 자, 문제는 지금부터다. 과연 이 책들에 실린 '주석'과 '해석'이 모범답안이 될 수 있을까? 물론이다. 대한민국에서 내노라하는 '석학'들이 풀어놓은 해답이니 충분한 자격을 갖춘 믿을만한 정답이 아닐 턱이 없다. 그러나 과연 그런 '정답'만을 달달 외우라고 주석과 해석을 달아놓은 것일까? 아니, 좀더 심층적으로 물음을 바꾸어서 '<고전>에 정답이 있는걸까?'라고 물으면 어떨까? 자신있게 "네"라고 대답할 수 있겠는가?

 

  안타깝게도 <고전>에는 '정답'이 있을 수 없다. 그저 수많은 '해석'만 있을 뿐이다.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내놓은 해석이 있기에 그것을 '정답'이라고 말할 순 있겠지만, 그 해석도 시대가 바뀌면 달라지기 마련이다. 이처럼 '새로운 해석'이 기존의 해석을 뒤엎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 '새로운 해석'조차 '또 다른 해석'에게 자리를 내주게 되는 일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러니 끊임없이 고뇌하고 사색하는 일만이 유일한 정답인 셈이다.

 

  하지만 중고등학생들이 <고전>을 처음 접할 땐 '길라잡이'가 필요한 법이다. 아무리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위대한 존재라 하더라도 처음 시작은 '모방'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베끼고 따라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만의 가치관'을 갖춰나간 뒤에야 비로소 '독특한 해석'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청소년을 위한 '주석서'와 '해설집'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본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더구나 '어려운 책'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만화형식'으로 출간되어 읽기에 부담은 줄이고, 이해는 머리에 쏙쏙 되는 훌륭한 '길라잡이'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단순암기'에서 그치고 만다면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렇기에 '독서토론'이란 과정이 필요한 법이다. 길라잡이로 대충 감을 잡았으니 '자기만의 안목'을 발휘해서 '나름의 해석'을 내놓는 경험을 많이 쌓아야 한다. 그렇게 경험을 쌓고 난 뒤에는 '원작'을 다시 읽어야만 제대로 된 독서가 될 것이다. 왜냐면 '가치관'이란 물길처럼 한 번 흘러간 자국을 따라 계속 흘러가는 경향을 띠기 때문이다. 이를 '수로화'라고 표현하는데, 만화책만 즐겨 읽다보면 이런 경향을 쉽게 띠게 된다. 만화책에는 '인물의 표정'이 획일화 되어 있고, '배경묘사'에도 이미 만화가의 경향이 반영되었기에 '독자의 상상력'을 크게 위축시켜버리기 때문이다. 이래서는 제대로 된 독서를 했다고 할 수 없다. 물론, 만화책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가치관 형성'이 완성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만화책>만 너무 즐겨 읽다보면 '수로화의 문제'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할 수 있으니 충분히 경계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정반대의 긍정적인 효과도 분명히 있다. 청소년들이 '원작'을 읽다보면 '시대배경'도 '공간배경'도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경험'이나 '이해'가 부족하기에 생기는 문제점이다. 이럴 때엔 '상상과 경험의 씨앗'이 필요한데, <만화책>이 그 씨앗이 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화책>을 고를 때에는 '만화가의 뛰어난 실력'을 고려해야만 한다. 뛰어난 만화가는 '확실하고 탁월한 고증'을 바탕으로 '원작의 맛'을 제대로 살려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 <서울대선정 문학고전>이 그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듯 싶어 권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첫 번째 책이 <주홍글자>다. 이 책을 벌써 몇 번에 걸쳐 리뷰를 올리고 있는데, 마침맞게 이 책이 첫 번째 책이라 개인적으론 반갑기 그지 없으면서 '또 다른 리뷰'를 써야 하는 부담감이 있었다. 하지만 고전의 장점은 읽을 때마나 '그 느낌'이 확연히 달라지기에 간략히 써내려가보려 한다. 먼저 책 제목은 <주홍글씨>인데, 근래에는 '글자'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는 견해가 많다. 왜냐면 '글씨'는 모양을 나타내고, '글자'는 문자, 그 자체를 가리키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글자'와 '글씨'는 서로 '비슷한 말'인 관계로 무엇으로 쓰든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다고 본다. 개인적으론 어릴 적부터 불러서 익숙한 '주홍글씨'가 편하긴 하다.

 

  암튼, 이 책의 주제는 '죄의식과 구원'이라는 그리스도교적인 해석이 중론이다. 특히, 그리스도교에서는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를 지었다는 '원죄'를 중하게 다루기 때문에, 청교도들이 이주해서 세운 초기 미국사회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이 책을 '죄의식과 구원'이라는 주제로 다루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책속 주인공들도 하나같이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인공인 헤스터 프린은 '간통'이라는 죄를 짓고, '죄값'을 치르기 위해 가슴에 A라는 글자를 화려하게 수놓고서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깊이 반성을 한다. 아서 딤스데일도 차마 '스스로' 죄인이라 밝히지는 못했지만 가슴에 A라는 글자를 '직접' 새겨놓고 저지른 죄에 대한 죄의식을 털어버리기 위해 깊은 고뇌에 빠져버린다. 한편, 칠링워스라는 헤스터의 남편은 자신이 저지른 '죄의식'도 없이 오로지 '복수심'만을 불태우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진정한 구원을 받은 이는 헤스터 뿐이다.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죄를 수치스러워하기보다 '당연히 받아야 할 죄값'으로 여겨, 그 죄값을 다할 때까지 반성과 선행을 꾸준히 행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죄값의 끝' 따위는 없다는 것을 헤스터 스스로 잘 알고 있기에 그녀의 반성과 선행이 더욱 빛이 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헤스터는 '죄 없이 벌만 받은 듯' 살아가는 당시의 여성들의 삶에 당당히 맞서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여성들이 죄인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는 까닭도 남성중심적인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경제적 독립'을 이루지 못한 탓이라며, 불우한 이웃을 도우면서도 스스로 '경제적 독립'을 이룬, 다시 말해, 남편 없이도 여자 혼자 아이를 키우는 일에 성공을 한 자신의 '존재감'을 널리 보여줌으로써 확고한 '여권신장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딤스데일은 '죄의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자기 자신을 더욱 채찍질하는 것으로 스스로 벌을 받고 있지만, '구원'을 받지는 못한다. 심지어 자신이 저지른 죄악을 대중들 앞에서 '고백'하지만, 목사라는 '사회적 지위'에 가려져 죄의 고백이 오히려 '사회지도층의 겸양'으로 비춰져 더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딤스데일은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자 스스로 '위선자'라는 죄의식까지 더해져서 더욱더 고통스런 나날을 보낼 뿐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딤스데일은 헤스터가 부러울 따름이다. 일찌감치 '죄값'을 치룬 덕분에 치욕스런 삶을 살고 있지만 '죄의식'은 한층 가벼워져서 아낌없이 선행을 하며 '구원의 길'에 한발짝 더 나아간 듯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은 '죄악'을 밝힐 기회도 잃어버리고, 따라서 '구원'도 받지 못하는 괴로움에 영혼이 죽어감을 깨닫게 된다. 비록 육신은 멀쩡해서 의사도 치료할 것이 없을 지경이지만 말이다.

 

  '그 의사', 다름 아닌 칠링워스는 스스로 '죄의식'을 깨닫고 '구원의 길'을 가기는커녕 '복수심'만 불태우며 헤스터와 딤스데일의 '죄값'을 들춰내며 괴롭히는 '악마의 역할'을 충실히 할 뿐이다. 그로 인해 칠링워스의 외모는 나날이 추해질 뿐이다. 결국 복수의 대상이었던 딤스데일이 만천하에 자신이 저지른 죄를 밝히고 죽은 뒤에 시름시름 앓다 죽고 말았다. 딤스데일은 죽음의 문턱에서 '죄의 고백'을 함으로써 영혼의 구원을 받게 되었지만, 칠링워스는 자기 스스로 지은 죄가 무엇인지도 인식하지 못한 채, '죄의식'도 없고, '반성'도 하지 않아 '구원'도 받지 못하고 만다.

 

  한편, 헤스터의 딸, 펄은 '살아있는 주홍글자'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펄은 헤스터의 가슴에 수놓인 A에 집착하는 말과 행동을 끊임없이 하면서 헤스터를 당혹스럽게 만들곤 하지만, 그로 인해 헤스터는 '죄값'을 잊어버리는 해이한 상황에 처하지 않을 수 있었고, '죄의식'에 대한 반성 또한 철저히 하는 '구원의 지름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헤스터가 자신의 딸을 '구차한 생의 혹'으로 여겼다면 절대로 갈 수 없었던 길이다. 사랑스런 딸이 내뱉는 '날카로운 비수' 같은 말과 행동으로 헤스터는 한시도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반성을 늦출 수 없었던 셈이다. 심지어 헤스터가 딤스데일과 '새 출발'을 약속하며 떼어낸 A 글자를 다시 주워와 엄마의 가슴에 다시 달게 만드는 장면은 '펄의 역할'이 주홍글자였음을 다시 확인하게 해준다.

 

  이처럼 그리스도교적인 관념이 물씬 드러난 <주홍글자>가 '종교적인 주제'를 뛰어넘어 인류 모두의 '문제의식'을 다루는 고전으로 분류될 수 있었던 것일까? 그건 '죄의식과 구원'이라는 주제가 우리 사회의 '윤리도덕의 문제'로 읽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이나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그때마다 '죄의식'에 사로잡혀 침잠해버리고 만다면 살아남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잘못과 실수를 '바로 잡을 방법'을 제시하고, 오히려 그 방법을 통해 더 큰 꿈을 이루는 멋진 삶을 살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을 것이다. 아니, 인간은 잘못을 저지름으로써 더 큰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고, 시련을 극복한 사람만이 더욱 단단해질 수 있다는 '만고의 진리'를 설파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나 죄를 '인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그 죄값을 당당히 치루고 '죄의식의 극복'으로 더 큰 깨달음을 얻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바로 이런 깨달음을 일깨워주기 때문에 이 책, <주홍글자>가 고전이라 불리는 것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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