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사파리 - 하층계급은 왜 분노하는가
대런 맥가비 지음, 김영선 옮김 / 돌베개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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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마다 연말 이맘 때쯤이 되면 양로원과 고아원을 찾는 이들이 많다. 도움의 손길이 절실한 불우이웃을 돕겠다는 고마운 이들이다. 그런데 정작 도움을 받는 이들은 '그들'이 찾아오는 것을 그닥 달가워하는 표정이 아닐 때가 많다. 우리가 흔히 보는 영화나 드라마, 소설에서도 그런 장면을 참 많이 다루고 있기 때문에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인 셈이다. 도대체 왜 그럴까? '그들'에게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구호물품'을 배경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정치인을 비롯한 유명인사들의 환한 표정에서 '진정성'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렇게 찍은 사진들은 주로 '언론사'에 배포되어 자신들의 치적(?)으로 이용될 뿐이라는 것을 양로원과 고아원에 머무는 사람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년에 딱 한 번 찾아오는 그들을 반갑게 맞아줄 수밖에 없는 '절실함'이 겨우 미소를 짓게 만들 뿐, 그들이 떠나고 난 자리에 따스함은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정녕 '가난한 이들'을 도와줄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은 없는 걸까? 이 방법을 찾기 전에 '가난'에 빠지게 되는 원인 분석부터 해야 할 것이다. 가난해지는 원인을 보통 '두 가지'로 보고 있다. 하나는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문제'로 보는 견해다. 먼 옛날부터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할 수 없다면서 '개인의 문제'로 취급하곤 했다. 그러다가 근대화 이후에는 사회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개인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푸념하곤 했다. 가난한 이들 가운데 '성공의 문턱'을 넘은 사례들을 살펴보면, 두 가지 원인이 모두 맞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특별한 사례일 뿐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누구나 같은 방법으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우선 '인식'해야 할 것은 바로 우리가 가난을 바라보는 '시선'부터 바꾸는 것일테다. 우리는 모두 교통사고를 당하면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는 '예비 장애인'인 것처럼 '가난'도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보편적인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금수저'는 영원히 금수저일 것처럼, '흙수저'는 아무리 노력해도 대를 이어 흙수저일 것처럼 '부의 계급화'를 견고하게 쌓고 있다. 마치 '한 번 부자는 영원한 부자다'라는 믿음처럼 굳어져 버렸다. 하긴 아주 틀린 말처럼 들리지 않기도 하다.


  그런데 왜 이런 생각을 '견고하게' 만들고 부수려 하지 않는 것인가? 그닥 훌륭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것 같은데 말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노력을 하면 그 대가를 반드시 보상받는 사회가 더 아름답지 않은가? 또한, 부자를 존경하고, 그들이 쌓은 부로 우리 사회를 더욱 행복하고 즐겁게 만드는 고민을 하려는 시도는 왜 하지 않으려 하는가?


  이 책은 <가난 사파리>라는 제목을 달았다. '사파리'라는 말의 뜻이 자동차를 타고서 야생동물을 구경한다는 것인데, 주로 맹수들을 풀어놓은 동물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 '가난'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으니 '가난한 이들'을 마치 동물원의 위험한 동물, 또는 통제가 불가능한 무능력자들을 '구경'하기 위해서 부자들이 안전한 차량 안에서 지나가는 장면이 연상된다. 하지만 책 내용은 저자의 '불우한 경험담'이 대부분이다. 하층 계급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험난한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회 고위층에 있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를 분석해서 가난에 쪄든 이들을 '구제'하려 들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행복할까? 중산층인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하며 '가난한 이들'이 왜 노력을 하지 않는지, 불우한 환경을 왜 개선하려 하지 않는지 '지적질'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하층 계급의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나도 비슷한 처지였어"라고 자조적인 말투로 공감을 표시할 것 같다.


  저자가 표현하듯이 '하층 계급'이 가난한 까닭은 여러 가지다. 개인적인 노력을 최선으로 하지 않고, 불우한 환경을 탓하며, 사회나 국가가 자신들을 돕지 않는다고 불평불만만 늘어놓기 일쑤라고 말이다. 그런데 가난한 이들이 하소연을 할 때 들어주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당장 가난한 이들이 부자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면 반갑게 맞아줄까? 국가에 청원을 하면 가난을 극복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적극적으로 도와줄까? 전혀 그렇지 않다. 가난한 이들을 벌레 보듯 불쾌해하며 적절한 도움을 주기는커녕 내몰아서 '격리(?)'시키기 바쁘다. 사회복지센터나 은행을 찾아가서 '가난 극복 프로그램'이 있는지 물으면 적절한 대답을 해줄까? 그렇지 않다.


  그러면서도 '가난한 이들'이 나태하고 게을러서 그들을 도와주고 싶어도 도울 수가 없다는 헛소리나 지껄이기 일쑤다. '기부'를 통해서 도움을 주고 있지 않느냐고 항변할지도 모르겠다. 거액의 '성금'을 모아서 해마다 도와주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가난한 이들에게 물어보라. 그렇게 '기부'와 '성금'으로 도움 받은 것이 정말로 '가난 극복'을 할 수 있는 희망이 되고 있는지 말이다.


  가난을 극복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누구나 아무런 조건도 없이 연봉 3000만 원 정도를 받고 살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아무런 조건도 없이'라는 문구가 거슬린다면, 적당한 일자리를 마련해주면 될 것이다. 그런데 마련해준 일자리라는 것들이 '연봉 3000만 원'과는 거리가 멀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연봉 3000짜리' 직장을 구하기 너무 힘들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이 계속 발생하는 것이다. 정말로 정신 못차리고 헤롱헤롱 사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까지 구제해달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성실함'과 '정직함'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마저 가난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만들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고 해도 '있는 사람들'만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이 아니라 '노력하는 사람들'이라면 가난에 빠지지 않게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구조적인 문제점'도 해결하려 최선을 다해야 하고, '개인적인 문제점' 따위는 기본적으로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할 것이다. 가정이 불우하다면 '불우한 원인'을 파악해서 적극적으로 국가와 이웃이 개입해서 개선하도록 도와줘야 한다. 마약이나 범죄와 같은 '잘못된 길'로 빠졌다면 엄벌과 함께 '갱생'할 수 있는 기회를 체계적으로 마련해야 할 것이다. 물론 '부적응자'로 판명되면 영원히 격리시키는 방안도 필요하고 말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인생을 살다가 '실패'를 했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줘야 한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소리'하지 말라는 비판도 할 수 있겠다. 적절한 비판일 수도 있겠지만 '단 한 번의 실패'로 인생이 망가지게 냅두는 사회는 참으로 불행한 사회라는 점을 상기했으면 좋겠다.


  저자는 '랩 가사'를 쓰는 워크숍을 통해서 가난한 이들이나 불우 청소년들에게 나름의 희망을 심어주는 일을 했다. 그 희망이란 '자기 목소리'를 마음껏, 그리고 당당하게 외치라는 것이었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은 '행복한 사회'는 다름 아니라 가난한 이들이, 또는 불우한 이들이 직접 만들어나가야 한다. 국가시스템이나 사회고위층이 가난한 이들의 입맛에 딱맞게 세상을 바꿔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말한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지지만 '하층 계급의 분노'가 역사를 바꾼다고 말이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라면 꼭 분노가 아니어도 충분히 바뀔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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