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워홀의 생각 세계사 시인선 124
이규리 지음 / 세계사 / 2004년 4월
평점 :
품절


첫 시집이 이렇게 탄탄할 수가 있나.

보랏빛이라는 것

왜 미안하다고 말했을까. 네가 맥문동과 나란하다. 달빛 아래서 맥문동을 보면 결핵 빛깔이다. 세계를 투정하고 세상을 밀어 내던 내가 꽃보다 오래 산다는 건 미안하다. 맥문동은 흔들리면서 생을 완성한다. 너는 외대에 닿는 흰 바람조차 붙들고 싶었던가. 일획 단정한 잎들이 단명과 유사하다면 맥문동은 네 기침이 피우는 꽃. 비 오는 날은 더욱 자지러진다. 생이 기우뚱 풍경들을 놓칠 때 왜 보랏빛일까. 너무 큰 신발을 신고 숨차 오르던 여름 내내 돌아보면 굽이마다 맥문동 보였다. 보랏빛 네 단명 앞에 탕진하듯 내 살아 있음 이 미안했던 걸까. - P81

뿌우연 김 서리듯 나를 다 보여주지 않는다고
누군가 불평을 했지만
하루 또 하루 스쳐 가는 날이란 서로의 등을 보며
슬픔으로 문질러 슬픔을 씻는 것 - P71

사막 편지 4

사막 온도계가 섭씨 41도를 가리킨다고 이미 말했다 내 몸을 41도에 맞추기 위해 저쪽 세상에서 배웠던 비웃음과 질투와 우월감을 지워야 했다 쓰라리고 따가웠다 내가 바싹 마른 몸으로 누군가를 비웃던 것이 견딤이었다는 걸 사막은 쉬 용서하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더 야위게 되리라 모래밭에 발을 묻고 두 개의 기둥을 가진 멕시코 선인장으로 독하게 섰다. 오늘은 서쪽에서 바람이 불어왔고 모래 무덤이 몇 차례 체위를 바꿨다 사소함 때문에 기뻤고 사소함 때문에 절망했던 마음들이 저기 한참 섞이고 있다 - P5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들의 양식 민음 오늘의 시인 총서 10
이성부 지음 / 민음사 / 1974년 9월
평점 :
품절


산을 좋아한다.
오르막이 싫지 않다.
정상은 가도 그만, 고집하지 않는다.
산에 있다는 게, 걷고 있다는 것이, 그저 그런 듯 늘 특별한 푸나무들과 그 풍경들, 길로 떨어지는 햇살과, 온생애를 훑고 가는 바람이 좋다.

그렇게 우뚝하구나
이성부

시간은, 시간을 낳고 있었다.
어둠이 깨우치는 것도 어둠,
불행은 끝끝내
나의 마지막 의지까지 내리 눌렀다. - P82

밤이 마지막으로 키워주는 것은 사랑이다.
끝없는 형벌 가운데서도
우리는 아직 든든하게 결합되어 있다.
쉽사리 죽음으로 가면 안 된다. 아직은 저렇게
사랑을 보듬고 울고 있는 사람들, 한 하늘과
한 세상의 목마름을 나누어 지니면서
저렇게 저렇게 용감한 사람들, 가는 사람들,
아직은 똑똑히 우리도 보고 있어야 한다. - P54

계절은 몰래 와서 잠자고, 미움의 짙은 때가 쌓이고
돌아볼 아무런 역사마저 사라진다.
담배를 피워 물고 뿔뿔이 헤어지는
저 떨리는 민주의 일부, 시민의 일부.
우리들은 모두 저렇게 어디론가 떨어져 간다. - P11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밤에 핀 벚꽃 - 고바야시 잇사의 하이쿠선집, 문학의 창 10
고바야시 잇사 지음, 최충희 옮김, 한다운 그림 / 태학사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가을, 겨울에 이어 봄, 여름을 마저 읽었다.
싱그럽고 따뜻하구나.
백석처럼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아갔다.
자주 읊조리겠구나.

신록

철벅거리며
하이얀 벽을 씻는
신록이로다 - P100

메꽃

메꽃이로다
활활 타는 돌멩이
틈새 사이로 - P104

밤에 핀 벚꽃

밤에 핀 벚꽃
오늘 또한 옛날이
되어버렸네 - P64

봄이 가다

살랑거리며
봄이 떠나가누나
들풀들이여 - P68

개구리

야윈 개구리
지지 마라 잇사가
여기에 있다 - P24

여름 나무숲

탑만 보이네
여름나무 무성한
명사찰 도지 - P72

푸르른 논

아버지 함께
새벽녘 보고 싶네
푸르른 논을 - P8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야 창비시선 30
이성부 지음 / 창비 / 1981년 12월
평점 :
품절


뭐랄까
섬세한데
굳세다.
감성적인 호연지기랄까.

스스로 목매 달아 죽은 혼백이
저승집 찾아 길 떠날 줄을 모르누나.
밤하늘 외진 데만 골라 어물거리다가
잡신들 틈에도 끼이지 못한 신세가 되어
우리나라 산간벽지 어디서 숨어 지내다가
오늘은 더 견디기가 어려워
서해 온 바다를 미친듯 출렁거리게 하누나.
스스로 갈기갈기 찢긴 얼굴이 되어
두리번거려도 어디 무슨 잡아먹을 것이 있느냐.
무너질 것은 무너뜨리지 못하고
휩쓸어갈것은 더 큰 바람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이 졸장부 거지발싸개 귀신아.
기껏해야 뭍으로 기어올라 와서는
가난한 집 수수깡 울타리나 자빠뜨려 놓고
조약돌 핥으며 올라와서는
천년 묵은 석탑이나 무너지게 하누나.
가거라 가거라 어서 길 찾아 떠나거라. - P16

아니오

저절로 흐르는 것을 따라
우리네 사랑 막혀 있음 어찌 틀 수 있으라.
저절로 넘치는 것들만을 따라
우리 키가 커버린 절망의 담벼락
어찌 넘을 수가 있으랴.
그냥 흐르는 물로 어찌 이길 수가 있으랴.

뒤돌아보면 어지러운 발자국
눈 들어 앞을 보면 철벽 산성
그래도 어찌 이대로 주저앉을 수가 있으랴.
우리를 그냥 우리 아닌 동네에
어찌 내맡겨 버릴 수가 있으랴.
서 있는 장승으로 어찌 못박힐 수 있으랴. - P39

빈속에 술


그리움에 가슴 여윈 이에게
허깨비를 보라고 내세우며
할 말이 막힌 입들에게
더 큰 벙어리를 짝지어 주도다.
뜨거움에 스스로 터지는 종로 네거리 아스팔트를
어디 火星에서 온 칼날 하나
깊은 속살까지 베어 버리누나.

이 한국의 돌이킬 수 없는 個性,
짐승으로도 가지 못하는 들판,
이미 헝클어진 것은 더 헝클어진 것이 되고 싶고
흩어진 사금파리 같은 마음들
더 으깨지고 싶은,
이 나라의 속 빈 술 퍼마시도다.
마실수록 목마른 술을 마시도다. - P6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씨의 옆 얼굴 문학과지성 시인선 35
이하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4년 10월
평점 :
품절


1984년.
이럴 수가 있나 싶게
냉철하다.
뜨겁지 않을 수 없는 시절.
불타는 분노와 좌절과 절망을
지독하게 차갑게 읊조린다.

“찬 바람 앞에
고개 수그린다, 불꽃 이글거리는
눈만 차갑게 치껴뜬 채.” 99

우리는 돌아선다. 거리는 차들이 매캐한 연기를 내며
달리고 사람들이 술집에 쏟아져 들어간다. 우리는
묵묵하게 그 속에 섞인다. 살아온 삶의 역정도
새로운 생계의 걱정도 달작지근한 꿈도 갑자기 막연해지고
우리는 어떤 힘에 막연히 떠밀리며 새로운 건물 안의
새 주인 앞에 세워질 것이다. 세찬 바람이 우리를 후려치고
우리는 울음이 터지려는 걸 억지로 참으며 막연히, 막연하게
막연히 떠돌고 태연한 척한다. 누구든 함부로
울 수는 없다. 거대한, 정체모를 그 힘이 우리의 가슴까지
빗장을 지를지도 모른다. - P74

우리는 갈라져 있지 않지. 얽혀 있지.
서로 증오하고 폭탄을 던지면서
욕설을 퍼부으면서 서로 간첩을 침투시키면서
그런 식으로 서로 그리워하면서
더럽게 사랑하면서.

아무도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지. - P98

흐름만이 우리를 가득하게 해
어디로 흐르지?
아무 곳으로나 그냥 흐를 뿐이지
장난꾸러기 같으니
누가? 내가? 이 물이?
우리들 모두가 말이야
그럼? - P106

누구지?우린왜이렇듯가볍고아득하기만해?언제나공허하고외롭고달작지근하며그냥아득하기만해?끊임없이가벼운것들스스로의속에서생겨나폴폴날고그것들속에결국은우리가묻힐뿐?누구지우린?우린도대체뭐지? - P10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