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 머무는 느낌 간드레 시 3
이윤학 지음 / 간드레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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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와 묘사가 주를 이루며, 모호를 내세우는 시들이다.
전원에 산 지 10년쯤 되었다고 하는데, 거기 사는 사람들의 모습과 이야기를 흑백사진처럼 담는다. 대개 어둡고 추하고 서러운 모습이다.

1부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몇 소개하면,

대형견을 묻는 남자의 아이의 머리를 젖비린내 나는 품에 안고 잠이 든 여인 17

젖먹이를 둘러업고 새벽마다 엄마 산소에 다녀오는 새댁 18

죽은 사람 애를 가진 여자 22

식물인간이 된 그의 뒷전에 서서 메밀들길 걷고 싶은 외동딸 23

의처증이 심해진 풍 맞은 남편 둔 로즈가든 여사장 26

노름을 끊는다는 남편을 이번에도 물끄러미 지켜보는 사람 27

집 나간 전처의 장롱 문짝을 떼어 산촌으로 가져온 그 28

스물둘 입동에 돌무덤에 아이를 묻은 환갑이 지난 나 29

등등이다.

25쪽, 화강토 덮인 암반에 똬리 튼, 앉은키로 살아온, 가늘고 짧은 침엽 단 소나무 무리로 상징되는 존재들이다.

흑백사진이 또렷하게 형상화되기도 한다.

“비둘기 떼가 기고 있었다
버스정류장 턱밑 도로에서
뻥튀기를 수거하고 있었다
/급브레이크를 밟은 버스
앞바퀴에서 펑크가 났다
/비둘기 눈알이 날아왔다
아이의 이마에 으깨졌다” <진공상태> 108

그러나 대개 과한 모호함으로 덧칠되어 있다. 심지어 퀴즈를 낸다.

“숨넘어가는 할아버지
손목시계를 끌렀다
아버지 사타구니에
냅다 집어던졌다” <부엉이> 87

이 장면이 부엉이랑 무슨 상관이 있을까?
퀴즈 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나, 모호함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즐겁게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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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 2025-03-09 0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이번 시집에 아름다운 시들이 너무 많아서 정말 좋았습니다. 모호하기보단 오히려 더 섬세해서 잘 읽히던데요? 부엉이라는 시는 왜 부엉이인지 시계라는 의미와 연추하면 무릎을 탁 치게 만들더라고요. 특히 이윤학 시인의 시는, 제목과 시가 떼레야 뗄 수 없는 맞물림이 있어서 더 울림이 큰 시더라고요.

dalgial 2025-03-09 07:50   좋아요 0 | URL
아 정말 궁금합니다. 아름다움과 섬세함, 맞물림과 울림. 연이 닿는다면 깊게 얘기 듣고 싶네요. 제가 한문 배우는 선생님이 아주 훌륭하게 보시는 이성복을 제가 모호하다고 말했다가 들은 말이 떠오릅니다. 니가 잘 모르는 것은 아닐까? 그럴 겁니다.
그런데 ‘연추’가 사전에 없던데요, 연관하여 추론하다는 의미로 쓰신 걸까요?

어린왕자 2025-03-13 1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의 숨겨진 뜻을 찾아가는 재미도 참 즐거운 시간 같습니다. 혹시 부엉이 해석에 도움이 되실까싶어서 출판사 책소개란에 있기에 발췌해왔습니다. 아마도 이 시가 독자들에게 숨바꼭질 같을 수도 있을 듯하여 출판사에서도 서평에 친절히 넣어주신 듯해요.

숨넘어가는 할아버지/ 손목시계를 끌렀다/ 아버지 사타구니에/ 냅다 집어던졌다 -「부엉이」

당신에게 소중했을 손목시계가 혹시라도 유품이 될까 서둘러 아버지의 사타구니에 던진다는 이 시는 짧지만 강렬한 울림을 준다. 예로부터 부엉이는 부를 상징하는 새였는데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야말로 재물보다 더 값진 의미임을 한 시구로 압축하여 보여주는 탁월한 솜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사랑하는 3대 독자 아들에게 손목시계를 던져주는 아버지의 마지막 한 호흡, 그 순간에도 지나갔을 찰나의 시간은, 우리에게 남은 사랑의 순간이 이토록 간절하고도 터무니없이 짧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시는 어찌 읽는지에 따라 그 넓이도 호흡도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더 매력적인거 같습니다. 이 해석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참고는 되실 거 같아서 시 좋아하는 1인으로 댓글을 남겼습니다^^ 이성복 시인도 너무 좋아하는 시인인데 저역시 아직 완벽한 해석은 어려운 시편들도 있습니다. 좀 관념적이신 부분도 많으시고.. 그러나 지금 다가오지 못하는 게 어느날 갑자기 늦은 편지처럼 이해되는 날도 있더라고요. 그 묘미 역시 시의 즐거움인 거 같습니다. 혹여 영원히 이해되지 못해도 시는 느낌에서 주는 감성도 해석만큼이나 중요한 거 같다고 나이들수록 그리 느껴집니다. 시에 대한 대화를 나누니 뜻깊고 즐겁네요. 좋은 하루 되세요

dalgial 2025-03-13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게 읽을 수도 있군요.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이 들수록 편한 게 좋은 것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머리 안 굴리고 읽다가 스며들거나 놀라거나
하는 시들에 더 손이 갑니다.
저도 시 얘기를 나눠서 즐겁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