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야 창비시선 30
이성부 지음 / 창비 / 1981년 12월
평점 :
품절


뭐랄까
섬세한데
굳세다.
감성적인 호연지기랄까.

스스로 목매 달아 죽은 혼백이
저승집 찾아 길 떠날 줄을 모르누나.
밤하늘 외진 데만 골라 어물거리다가
잡신들 틈에도 끼이지 못한 신세가 되어
우리나라 산간벽지 어디서 숨어 지내다가
오늘은 더 견디기가 어려워
서해 온 바다를 미친듯 출렁거리게 하누나.
스스로 갈기갈기 찢긴 얼굴이 되어
두리번거려도 어디 무슨 잡아먹을 것이 있느냐.
무너질 것은 무너뜨리지 못하고
휩쓸어갈것은 더 큰 바람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이 졸장부 거지발싸개 귀신아.
기껏해야 뭍으로 기어올라 와서는
가난한 집 수수깡 울타리나 자빠뜨려 놓고
조약돌 핥으며 올라와서는
천년 묵은 석탑이나 무너지게 하누나.
가거라 가거라 어서 길 찾아 떠나거라. - P16

아니오

저절로 흐르는 것을 따라
우리네 사랑 막혀 있음 어찌 틀 수 있으라.
저절로 넘치는 것들만을 따라
우리 키가 커버린 절망의 담벼락
어찌 넘을 수가 있으랴.
그냥 흐르는 물로 어찌 이길 수가 있으랴.

뒤돌아보면 어지러운 발자국
눈 들어 앞을 보면 철벽 산성
그래도 어찌 이대로 주저앉을 수가 있으랴.
우리를 그냥 우리 아닌 동네에
어찌 내맡겨 버릴 수가 있으랴.
서 있는 장승으로 어찌 못박힐 수 있으랴. - P39

빈속에 술


그리움에 가슴 여윈 이에게
허깨비를 보라고 내세우며
할 말이 막힌 입들에게
더 큰 벙어리를 짝지어 주도다.
뜨거움에 스스로 터지는 종로 네거리 아스팔트를
어디 火星에서 온 칼날 하나
깊은 속살까지 베어 버리누나.

이 한국의 돌이킬 수 없는 個性,
짐승으로도 가지 못하는 들판,
이미 헝클어진 것은 더 헝클어진 것이 되고 싶고
흩어진 사금파리 같은 마음들
더 으깨지고 싶은,
이 나라의 속 빈 술 퍼마시도다.
마실수록 목마른 술을 마시도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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