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년의 내간체 시작시인선 484
이정모 지음 / 천년의시작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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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구절들이 많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내 마음에 긴긴 문장을 쓰는지’ 모르겠다.
덜어 내고 덜 말하면 더 좋을 텐데
담고 있는 생각과
하고픈 말이
엄청 많은 시인이다.

상흔은 여기가 아니라 그때라는 것을, 공중이 소리를 받아들이듯 모셔야 하는데, - P30

바람은 길의 행방을 묻지 않는다, 길은 바람의 인연일 뿐 삶이 같이 가야 할 항로가 아닌 걸 아는 까닭이다 - P31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식물의 왕국을 좋아해서, 예컨대 기적같이 꽃가루가 도착한 암술처럼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리라 - P21

비 오는 날, 내 몸에서 삶의 흔적을 찾는 건 쉽다
몸이 뻐근하지 않으면 평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것

그 흘러간 시간도 격이 있다 그 격에 맞게
물에 젖은 것들이 흔적을 남기려 몸으로 붐비고 있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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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 랜덤 시선 19
이규리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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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시집에는 아버지가 가득했다.
이 시집이 두 번째 시집인데, 드디어 어머니가 등장한다.

어느 날, 우리를 울게 할

노인정에 모여 앉은 할머니들 뒤에서 보면
다 내 엄마 같다
무심한 곳에서 무심하게 놀다
무심하게 돌아갈,
어깨가 동그럼하고
낮게 내려앉은 등이 비슷하다
같이 모이니 생각이 같고
생각이 같으니 모습도 닮는 걸까
좋은 것도 으응
싫은 것도 으응
힘주는 일 없으니 힘드는 일도 없다
비슷해져서 잘 굴러가는 사이
비슷해져서 상하지 않는 사이
앉은 자리 그대로 올망졸망 무덤처럼
누우면 그대로 잠에 닿겠다
몸이 가벼워 거의 땅을 누르지도 않을.*
어느 날 문득 그 앞에서 우리를 울게 할
어깨가 동그럼한 어머니라는
오, 나라는 무덤


* 브레히트의 시 <나의 어머니>에서 빌려옴. - P112

서른 개의 밤과 낮
마흔 개의 골목과 골목이
하루도 쉼 없이 바닥을 지나갔을까
더러 동행이 있거나 수런거리는 잡담도 있었겠지만
결국 홀로 오르내렸던 능선과 골짜기에는
등정보다 실족의 기록 뿐이다
그래도 한번 불러보고 싶다
누구 거기 있기는 한 건지 - P36

그늘이 제 이름을 버리는 밤과 새벽이 있듯이
마음이나 그늘이나 오천 원이나,
자기도 모르게
접힌 바짓단에 숨어든 모래처럼
그렇게 들고 나는 것 - P55

간격과 소리 사이에서 잠이 툭 끊어진다
손짓 하나, 바라보는 눈짓 하나
한 꽃 피는 시간이나 따끔했던 연애도
끊어지지않는 것 어디 있더냐
유월 비도 저렇게 끊어질 듯 내려와 닿고
한 생애를 위해 수만 컷의 필름이 서로 앙물려 있을 텐데
끊어지지 않는다면
목숨인들 여기까지 어떻게 왔을 건가
앞의 빗줄기가 뒤의 비를 마중하듯이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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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다
황지우 지음 / 풀빛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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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꺼내 보았다.
살아있다.

4.

번데기야, 번데기야
죽을 육신 속에서 얼마나 괴로왔느냐. - P21

344.

내 마음의 마각이
뚜벅뚜벅 너의 가슴을
짓밟고 갔구나.
사랑해 !
라고 말하면서
나는 너를 다 갉아먹어 버렸어.
내심의 뼈만 남은 앙상한 과실
묘판에다가 너의 생을 다시 이장하련다.
사랑해! - P45

109-5.

치열하게 싸운 자는
적이 내 속에 있다는 것을 안다.
지긋지긋한 집구석.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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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진행이 빠르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88
김명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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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 시집에 3번 얼룩이 진하게 졌다.

첫 번째 얼룩. 화자는 5월에 ‘그대’를 잃은 ’10년 하고도 몇 해‘의 삶이 ‘그림자 끌며 흘러왔다는 생각’을 하며 덩굴장미 꽃을 보고 ‘쓸쓸해진다’ 그러고는

“젊음은 소란스럽지, 예전처럼 늙어서
노회한 시의 가슴을 더듬을 때
만져지는 것은 몰라보게 접질린 주름들,
저 불꽃장미 또한 지상의 꽃이니
며칠만 타올랐다 스러지는 것을
나는, 여한 없이 바라본다, 저버린
약속이 없었음을 시간은 일러주리라
며칠 내 물음처럼 맴돌던
언덕 위 아카시아 향기도 어느새 지워졌다
낙화의 뒤끝으로 오는 신생이란
이렇게 얼룩지기도 하는 후일담인 것을,” 17. 지상의 꽃

이라고 한다. 물음은 지워지고, 향기도 지워졌는데, 그렇게 잃어버린 것들 곧 낙화의 뒤에 새로 생겨나는 것이 바로 ‘얼룩지기도 하는 후일담’이라는 것이다. 다만, 그 정체를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쓸쓸하지만, 여한 없음 정도나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저버린 약속이 없었음을‘ 시간이 일러줄까. 그대는 여기 없다. 이 세상에 없다. 죽었다. 시간이 흘러 그대가 지금 있는 ’그쪽‘ 저승에 가면, 곧 화자도 죽으면, 이쪽에서 저버린 약속을 그제서야 지킬 수가 있어서일 것이다. 여기서 못 지켰으나 거기까지 넣어 보면, 저버린 약속이 없는 것. 그렇게 삶과 죽음의 거리를 무화시키는 시간, 누구나 무엇이나 사라지는 그것이 바로 얼룩진 후일담인 것이다. 태어난 것들의 후일담은 다 시간으로 얼룩진다.

두 번째 얼룩. 화자는 40년 살던 집을 두고 새집으로 이사를 했다. ”집착은 아니지만 생각해보니 달팽이처럼 나도 내 집을 껴입었던 사람이다“라고 한다. 그래서 한 해 뒤에 옛집에 가 본다.

“새집 줄게 헌 집 다오
이웃사촌인 양 누군가 내게 속삭였던가?
뼈 묻는 심정으로 문패를 내다 걸고
마흔 해를 달려왔지만
잔정도 찌들면 얼룩이라는 걸
모른 체하는 고집을 내가 지녔던가?
갠 날들 우겨대지 않았지만
우산인 줄 굳게 믿으면
지붕 위로 머뭇거리다 돌아가던 우기들
마당에 홀로 서서 한참을 되새긴다” 72. 헌 집 새집

여기서 얼룩은 얼룩 그 자체다. 옛집에 대한 잔정이 오래 되어 찌들면 말 그대로 지워야하는 얼룩이 된다는 것이다. 불교의 수행자마냥 마음을 거울 닦듯 수양하는 도학자처럼 없애야 할 대상으로 얼룩을 그렸다. 비록 정이 쌓여 생겨났더라도 그것은 ‘찌든’, 그래서 지워야할 얼룩이다.

세 번째 얼룩
“복안이 있느냐고 네가 물었을 때
나는 머뭇거렸다, 벗겨내기 어려운 얼룩이
간유리 저쪽에서 어른거렸다
두근거림이 가슴 밑바닥에서 차올랐다

한순간의 결심이 일생의 포부가 되듯
누구에게든 나름의 요량은 있다
이룰지 말지 장담 못 하는 다짐들이
형언할 수 없는 욕망으로 꿈틀거리기도 한다

쫓기듯 사는 것도 아닌데 너무 작고 볼품이 없어
이것이 내 것일까, 소용에 닿지 않는
목록을 뒤적거릴 때
겹쳐져 어른거리는 배경으로는
어떤 의지라도 두서없는 것,

살아지는 대로 살려고 드는 내게
간추릴 복안이 없는 것이다”

복안은 속에 있는 생각이다. 속배포. 누군가 시인에게 물었나 보다. 앞으로 어떻게 무얼 하며 살 것인가? 올해 들었다면, 세는나이 78의 시인에게. 시인은 그 말을 듣고 두근거린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형언할 수 없는 것들이 차올랐다. 비록 두서없고, 볼품도 없고, 이룰지 말지 장담할 수도 없는 것들이라도. 그것들이 벗겨내기 어려운 얼룩이다. 빛나는 생이다.
종종 간추려져 시의 모습으로 만나 보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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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현실 문학동네 시집 53
김영무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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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생전의 마지막 시집이다. 김영무(1944-2001)
책은 2001년 봄에 나왔고, 시인은 그해 가을에 가셨다.
암과 싸우며 때로 의연하고 때로 약해지는 모습을 시에 담았다.

그는 ‘오늘날의 예언자’, ‘광야에서 외치는 선지자’가 암환자들이라 선포하고, 자본주의의 병폐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우울한 그들의 지배를 예언한다. 20여 년 뒤를 훤히 내다보고 있었다. 깜깜하다.

지구온난화방지협정이건
생물종다양성보전협정이건
소득증대에 장애가 된다면 폐기해도 좋다
무시해버려라, 레스트럭처링하여
즉각 퇴출 킥아웃시켜라,
단 돈벌이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 장려지원독려권장한다.
황공하옵게도 지당마땅하옵신 초강대시장
즉 슈퍼마켓(Supermarket) 님의 신성한 헌법이
천하만방에 꽝꽝꽝공포되어 돈벌이 재간 없는
순진한 사람들의 여린 마음,
공포로 꽁꽁꽁 얼어붙었는데,
경제성장을 이루어내지 못하면
독재정권이든 민주정권이든
무차별적으로 자리를 보존키 어려울 터
모든 것이 경제의 이름으로 금지되고 허용되느니,
200개 남짓한 세계대자본회사의 이익을
과학적으로 객관적으로 거시경제적으로
미시경제적으로 재정금융적으로 대변하는
극소수 정치경제 엘리트들이 작성한
WTO 무역협정이 우리의 삶을 주물럭주물럭
말아먹고 삶아먹는 세계화 체제에서는
우리의 손으로 어떤 국회의원을 떨어뜨리고
어떤 정치꾼을 대통령후보명단에서 퇴출시키건
커다란 뜻이 별로 없으렷다
어허, 민망한 일이로고. - P108

아따, 그러니께, 세계화라는 싸가지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놈이 무엇이냐 하면
천하잡것 이 세상의 모든 잘난 놀부놈들,
성장만이 살길이다, 파헤치고 또 파헤쳐
너는 잘먹고 잘살고, 나는 인류 위해 좋은 일 하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그럴듯한 속임수 구호 내걸고,
흙이 죽건 물이 썩건, 열대우림 사라져
지구가 망하건 말건, 태연자약, 제 욕심 맘놓고
채워보자는 헛수작인 모양인디,
그러코럼 앞뒤양옆이 명약관화
등잔 밑처럼 환하디 훤한디
어찌하여 성님들 동생님들 교수님들 박사님들
높으신 장관님네들 우리 모두 세계화의 길로
일로매진 각개약진 하라고 자꾸 졸라쌓는감
알 것 같다가도 도통 모를 일일세. - P111

가상현실


암선고를 받은 순간부터
(암은 언제나 진단이 아니라 선고다)
너의 세상은 환해진다
컴퓨터 화면 위를 떠도는 창문처럼
기억들이 날아다닌다
.원시의 잠재의식도 살아나서
뚜벅뚜벅 걸어오고, 저 우주에 있는 너의 미래의
별똥들이 쏟아진다
어둠은 추방되고, 명함도 무늬도 사라진,
두께도 깊이도 무게도 지워진,
노숙과 밥굶기와 편안한 잠과 따뜻한 한끼의
경계가 무너지고, 모든 칸막이가 허물어진
환하디 환한 나라
시간의 뿌리와 공간의 돌쩌귀가
뽑혀나간 너의 현실은 안과 밖 따로 없이
무한복제로 자기증식하는
아, 디지털 테크놀로지 최첨단
암세포들의 세상
지독한 오염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미국자리공, 황소개구리, 실지렁이, 거머리가 못 되어
시름시름 힘을 잃고 약자로 전락한 어느 순간부터
경쟁력 없는 자 솎아버리는 구조조정의
덫에 걸린 너의 삶은
순백색 빛의 나라, 가상현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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