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 문학동네 시집 53
김영무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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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생전의 마지막 시집이다. 김영무(1944-2001)
책은 2001년 봄에 나왔고, 시인은 그해 가을에 가셨다.
암과 싸우며 때로 의연하고 때로 약해지는 모습을 시에 담았다.

그는 ‘오늘날의 예언자’, ‘광야에서 외치는 선지자’가 암환자들이라 선포하고, 자본주의의 병폐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우울한 그들의 지배를 예언한다. 20여 년 뒤를 훤히 내다보고 있었다. 깜깜하다.

지구온난화방지협정이건
생물종다양성보전협정이건
소득증대에 장애가 된다면 폐기해도 좋다
무시해버려라, 레스트럭처링하여
즉각 퇴출 킥아웃시켜라,
단 돈벌이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 장려지원독려권장한다.
황공하옵게도 지당마땅하옵신 초강대시장
즉 슈퍼마켓(Supermarket) 님의 신성한 헌법이
천하만방에 꽝꽝꽝공포되어 돈벌이 재간 없는
순진한 사람들의 여린 마음,
공포로 꽁꽁꽁 얼어붙었는데,
경제성장을 이루어내지 못하면
독재정권이든 민주정권이든
무차별적으로 자리를 보존키 어려울 터
모든 것이 경제의 이름으로 금지되고 허용되느니,
200개 남짓한 세계대자본회사의 이익을
과학적으로 객관적으로 거시경제적으로
미시경제적으로 재정금융적으로 대변하는
극소수 정치경제 엘리트들이 작성한
WTO 무역협정이 우리의 삶을 주물럭주물럭
말아먹고 삶아먹는 세계화 체제에서는
우리의 손으로 어떤 국회의원을 떨어뜨리고
어떤 정치꾼을 대통령후보명단에서 퇴출시키건
커다란 뜻이 별로 없으렷다
어허, 민망한 일이로고. - P108

아따, 그러니께, 세계화라는 싸가지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놈이 무엇이냐 하면
천하잡것 이 세상의 모든 잘난 놀부놈들,
성장만이 살길이다, 파헤치고 또 파헤쳐
너는 잘먹고 잘살고, 나는 인류 위해 좋은 일 하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그럴듯한 속임수 구호 내걸고,
흙이 죽건 물이 썩건, 열대우림 사라져
지구가 망하건 말건, 태연자약, 제 욕심 맘놓고
채워보자는 헛수작인 모양인디,
그러코럼 앞뒤양옆이 명약관화
등잔 밑처럼 환하디 훤한디
어찌하여 성님들 동생님들 교수님들 박사님들
높으신 장관님네들 우리 모두 세계화의 길로
일로매진 각개약진 하라고 자꾸 졸라쌓는감
알 것 같다가도 도통 모를 일일세. - P111

가상현실


암선고를 받은 순간부터
(암은 언제나 진단이 아니라 선고다)
너의 세상은 환해진다
컴퓨터 화면 위를 떠도는 창문처럼
기억들이 날아다닌다
.원시의 잠재의식도 살아나서
뚜벅뚜벅 걸어오고, 저 우주에 있는 너의 미래의
별똥들이 쏟아진다
어둠은 추방되고, 명함도 무늬도 사라진,
두께도 깊이도 무게도 지워진,
노숙과 밥굶기와 편안한 잠과 따뜻한 한끼의
경계가 무너지고, 모든 칸막이가 허물어진
환하디 환한 나라
시간의 뿌리와 공간의 돌쩌귀가
뽑혀나간 너의 현실은 안과 밖 따로 없이
무한복제로 자기증식하는
아, 디지털 테크놀로지 최첨단
암세포들의 세상
지독한 오염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미국자리공, 황소개구리, 실지렁이, 거머리가 못 되어
시름시름 힘을 잃고 약자로 전락한 어느 순간부터
경쟁력 없는 자 솎아버리는 구조조정의
덫에 걸린 너의 삶은
순백색 빛의 나라, 가상현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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