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진행이 빠르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88
김명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룩. 시집에 3번 얼룩이 진하게 졌다.

첫 번째 얼룩. 화자는 5월에 ‘그대’를 잃은 ’10년 하고도 몇 해‘의 삶이 ‘그림자 끌며 흘러왔다는 생각’을 하며 덩굴장미 꽃을 보고 ‘쓸쓸해진다’ 그러고는

“젊음은 소란스럽지, 예전처럼 늙어서
노회한 시의 가슴을 더듬을 때
만져지는 것은 몰라보게 접질린 주름들,
저 불꽃장미 또한 지상의 꽃이니
며칠만 타올랐다 스러지는 것을
나는, 여한 없이 바라본다, 저버린
약속이 없었음을 시간은 일러주리라
며칠 내 물음처럼 맴돌던
언덕 위 아카시아 향기도 어느새 지워졌다
낙화의 뒤끝으로 오는 신생이란
이렇게 얼룩지기도 하는 후일담인 것을,” 17. 지상의 꽃

이라고 한다. 물음은 지워지고, 향기도 지워졌는데, 그렇게 잃어버린 것들 곧 낙화의 뒤에 새로 생겨나는 것이 바로 ‘얼룩지기도 하는 후일담’이라는 것이다. 다만, 그 정체를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쓸쓸하지만, 여한 없음 정도나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저버린 약속이 없었음을‘ 시간이 일러줄까. 그대는 여기 없다. 이 세상에 없다. 죽었다. 시간이 흘러 그대가 지금 있는 ’그쪽‘ 저승에 가면, 곧 화자도 죽으면, 이쪽에서 저버린 약속을 그제서야 지킬 수가 있어서일 것이다. 여기서 못 지켰으나 거기까지 넣어 보면, 저버린 약속이 없는 것. 그렇게 삶과 죽음의 거리를 무화시키는 시간, 누구나 무엇이나 사라지는 그것이 바로 얼룩진 후일담인 것이다. 태어난 것들의 후일담은 다 시간으로 얼룩진다.

두 번째 얼룩. 화자는 40년 살던 집을 두고 새집으로 이사를 했다. ”집착은 아니지만 생각해보니 달팽이처럼 나도 내 집을 껴입었던 사람이다“라고 한다. 그래서 한 해 뒤에 옛집에 가 본다.

“새집 줄게 헌 집 다오
이웃사촌인 양 누군가 내게 속삭였던가?
뼈 묻는 심정으로 문패를 내다 걸고
마흔 해를 달려왔지만
잔정도 찌들면 얼룩이라는 걸
모른 체하는 고집을 내가 지녔던가?
갠 날들 우겨대지 않았지만
우산인 줄 굳게 믿으면
지붕 위로 머뭇거리다 돌아가던 우기들
마당에 홀로 서서 한참을 되새긴다” 72. 헌 집 새집

여기서 얼룩은 얼룩 그 자체다. 옛집에 대한 잔정이 오래 되어 찌들면 말 그대로 지워야하는 얼룩이 된다는 것이다. 불교의 수행자마냥 마음을 거울 닦듯 수양하는 도학자처럼 없애야 할 대상으로 얼룩을 그렸다. 비록 정이 쌓여 생겨났더라도 그것은 ‘찌든’, 그래서 지워야할 얼룩이다.

세 번째 얼룩
“복안이 있느냐고 네가 물었을 때
나는 머뭇거렸다, 벗겨내기 어려운 얼룩이
간유리 저쪽에서 어른거렸다
두근거림이 가슴 밑바닥에서 차올랐다

한순간의 결심이 일생의 포부가 되듯
누구에게든 나름의 요량은 있다
이룰지 말지 장담 못 하는 다짐들이
형언할 수 없는 욕망으로 꿈틀거리기도 한다

쫓기듯 사는 것도 아닌데 너무 작고 볼품이 없어
이것이 내 것일까, 소용에 닿지 않는
목록을 뒤적거릴 때
겹쳐져 어른거리는 배경으로는
어떤 의지라도 두서없는 것,

살아지는 대로 살려고 드는 내게
간추릴 복안이 없는 것이다”

복안은 속에 있는 생각이다. 속배포. 누군가 시인에게 물었나 보다. 앞으로 어떻게 무얼 하며 살 것인가? 올해 들었다면, 세는나이 78의 시인에게. 시인은 그 말을 듣고 두근거린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형언할 수 없는 것들이 차올랐다. 비록 두서없고, 볼품도 없고, 이룰지 말지 장담할 수도 없는 것들이라도. 그것들이 벗겨내기 어려운 얼룩이다. 빛나는 생이다.
종종 간추려져 시의 모습으로 만나 보기를 고대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