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시묵직한 울림
통화중그곳은 비 온다고?이곳은 화창하다.그대 슬픔 조금, 조금씩 마른다.나는, 천천히 젖는다. - P20
어느 봄날언덕 아래, 무심코 오줌을 누다가이런, 매화 만발한 소리를 들었다. - P14
미완이다어딜 멀리 갔다가 되돌아가는 길인가 보다.인각사 돌부처 한 분이 천 년 비바람에 많이 닳았다.거의, 한 덩어리 바위에 가깝다.그 앞에서 찍은 내 독사진이 있다.왕복 어디쯤서 만나 잠시 겹친 것일까, 들여다보니 둘 다 미완이다. 지쳐돌아가는 길이 함께 적적, 막막할 뿐이다. - P58
위도 떠나며멀어지는 것은 모두 날 붙드는 일말의 힘이 있다. 나는 왜, 뱃전 꽁무니에 붙어 까치발 드나 안 보이는 쪽으로 길게 목을 빼나 멀어지는 것은 모두 내가 놓쳐버리는 간발의 손끝이 있다. - P63
위악도가난도방황도치기도적절하다. 첫 시집답다.
스무 살, 마음속에 품은 지도 한 장내가 가진 것의 전부였다네발 디디면 어디나 길이 되었고,가지 못할 길은 없었으므로 - P60
나는 뒤돌아보지 못하는 한 마리 사과벌레,청춘을 갉아먹으며 - P58
어디에서 떠내려왔을까도랑을 따라 흘러가는 사내들,굵고 단단한 어깨에 새겨진 문신참을 인 자는 지키지 못할 각서 같은 것어차피 참는 자에게 복은 없었다 - P56
도시가 팽창을 멈추는 날은오지 않을 것이다 불러오는 풍선의 표면에 들러붙은 티끌처럼우리는 점점 서로에게서 멀어져가고, - P12
검은 장화 속 같은 날들이었다. 들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가 장화를 벗으면, 퉁퉁 불어터진 발가락들이 꽈배기처럼 꼬여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 P74
나는 열아홉 살, 역 광장 앞 음악다방에서 해진 백판 재킷과 함께 너무 빨리 늙어갔다. 어린 창녀들과 비틀스를 들으며 낮술을 마셨고, 저탄장에서 날아온 탄가루가 내 몸을 더럽혔다. 취한 날엔 화물열차에 실린 미제 야포의 무늬처럼, 둥근 소매가 핏자국으로 얼룩지기도 했다. - P75
눈이 그칠 것 같지 않던 겨울이었고 - P19
시인 50대 중반에 나온 시집이다.아흔이 넘은 모친을 두고 큰누나가 가시고여러 죽음이 나온다.슬퍼하되 우뚝하다.가장 인상적인 것은 현재형 문장이 대부분이라는 것.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쿵 하고 망연해지는 시구가 많다. 4부가 압권.
바로 지금 눈앞의 당신, 나는 자주 굿모닝! 그런다. - P39
그 어떤 절망에게도 배꼽이 있구나.그 어떤 희망에게도 말 걸지 않은 세월이 부지기수다. - P47
죽음은 그 어떤 삶도 놓치지 않고 깨끗하게 챙긴다. - P79
지금은 쓸쓸한 춘궁, 그래도 봄날은 올 것이며씹어먹어도 먹어도굽은 등 떠밀며 또 봄날은 갈 것이다. - P87
인생이 참 새삼 구석구석 확실하게 만져질 때가 있다. - P90
내가 한쪽으로 기우뚱, 할 때가 있다.부음을 듣는 순간 더러 그렇다.그에게 내가 지긋이 기대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그가 갑자기밑돌처럼 빠져나갔다. 나는 지금오랜 세월 낡은 읍성 같다.…도대체, 인생이 어디 있나, 있긴 있었나 싶을 때가 있다.나 허물어지는 중에 장난치듯한 죽음이 오히려 생생할 때 그렇다. - P91
상사화 잎은 광분하듯 무성하게 솟구친다.빈 손아귀, 어느날 또 흔적없이 사라져버린다.봄날의 한복판을,뒷덜미를 덮쳤다, 놓친다. - P94
과거지사란 남몰래 버티는 것, 대답하지 않는다. - P103
의문과 의혹이 많이 생겼으니 문제작.어쩌다 문명이 망했는지 호수 바닥에서 떠오른 시체들의 뒤로 묶인 손에서 다양한 추측이 나올 수 있고,아버지는 왜 서사 중 주적인 피코 신도들의 존재를 아들들에게 가르치지 않았는가? 그 디스토피아에선 사랑 등의 감정이나 글자도 필요 없다고 생략하고선 짐승을 잡으면 내장부터 가르라는 등의 생존 방법만을 가르쳤다면서.‘마녀’가 자꾸 말하는 버섯이 무엇인지도 궁금하다. 생존의 실마리가 될 생명줄인지 쌍둥이처럼 만들 오염된 것일지.결말에서 작가가 제시한, 종말 이후 펼쳐질 ‘아들의 땅’이 암수 서로 정답기만 한, 글자 모르는 세상인 것이 산뜻한지도 의문.충분한 정보를 주지 않고, 열린 결말이라는 점에서 이것저것 생각해 볼 수 있으니 역시 ‘기가’ 문제작.그러나, 추천하기는 어려운.
번역하기는 수월할, 불분명한 시공간의 해괴한 이야기들. 종잡을 수도 없고, 그래서 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있기나 한지 알아내기 어렵다.그런 속에서도 뜬금없이 한두 줄 현실을 건드리는 구절이 있어 “아무리 빨리 달려도속력은 부자와 가난뱅이를 뒤바꾸진 않네”“해고된 후 오랫동안 잠만 잤지요“”부자들은 구름 위에서 내려오질 않는다“”경찰 국가에선 무엇이건 보호받는다“현실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알 수 있다.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구체를 없애고 괴기와 환상을 선택한 것일까?중고등학교 어느 문학 교과서에 실린 듯 입시현장에서 간혹 보이는 <구두>의 ”한때는 속박이었고 또 한때는 제멋대로였던 삶의 한켠“에 대한 성찰을 우의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 이질적일 만큼 이 시집에는 괴이한 시들이 가득하고, 그 시들은 끌림이 없다.<다시, 문 앞에서>와 <별은 멀리서 빛나고>는 읽을 만하였다. 그래서, 송찬호를 더 읽게 되었다.
무제 3 누가 이 촛불을 켤 수 있었을까 식물은 유리 속에 잠들어 있고 화약은 아직 격발을 몰랐을 때, 결혼식은 성대하였다 초대받은 不在者들, 헤아려진 돈, 편력 없는 구두, 10년 동안의 빈 의자, 퍼뜨려진 전염병 그리고 휴일마다 반복되는 지상과 교회와의 굳건한 결혼식, 결혼식은 끝났다 정육점도 공장들도 훌륭히 완성되었다 이제 다시 신부를 데리고 隊商은 먼 나라로 결혼식을 이끌어가리라 ...... 나의 신부여, 내게도 이 결혼식을 준비해다오 이 빛, 굽은 술잔을 네게 기울여 흘러가고 이 몸, 유리처럼 차디찬 바닥에 굴러떨어지리니 - P36
아가야, 골목을 흐르는저 독경 소리마저네겐 자장가로 들리니?칭얼대다가도 때가 되면 너는잠들 줄 알고홀연히 깨어나면돌아누운 고단한 내 등뒤에서 너는남남으로 헤어질 줄 알아길 찾아 헤매다 보면 거북등처럼 터진골목 밖은 아득한 서역떠나가도 가도출가의 길은 더욱더 멀고문득 돌아보면인연은 길 옆에 비껴선 무심한 돌부처인데헤어져 만리 길우리는 어인 업으로 다시 만나내 병든 얼굴,너의 눈물꿰어 내 목에 걸어주고한 자락 바람처럼 - P66
꽃이 꽃씨를 떨구듯아픈 상처의 딱지가 떨어지듯어둡던 몸 속으로 떨어지는별 하나,잠시 아픔도 잊고 환해지는 몸지금 그 별은 멀리서 빛나고 있지만 누구나 별처럼 빛나는아름다운 상처를 가지고 산다 - P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