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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처녀들의 그늘 아래서 ㅣ 열린시학 시인선 72
오세영 지음 / 고요아침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온통 꽃이다.
시집에 실린 모든 시의 제목과 그 대상 다.
그런데, 주로 시집 제목처럼 ’처녀들‘로 대상화했다.
화자는 ’따알리아‘를 보며 ’둔부가 아름다운 여인이여‘를 읊조리며 ’내 몸에서 자꾸만 자꾸만 솟구치는 그 피가‘ 무섭다고 하는 남근.
그래서, 칸나에서 ‘初潮’(초조:첫 월경)를 보거나, 튤립을 보고는
“어젯밤의 믿을 수 없는 그
황홀함으로
그대 항상 곁에 있음을
내 이제 확인하거니
눈부시게 하얀 시트 위에 선연히 남겨준
그대 한 방울의 순결한
핏자국.“66
이라 하니 좀 징그럽다.
아마 남성 넘어 생명을 그린 것이겠지만.
그리고, 갖가지 찬탄의 정서로 다가가는 꽃들에 비해 두 꽃이 너무 억울하다.
“지난밤의 쾌락이 얼마나 달콤했기에 이처럼 기진했단 말이냐.
그래도 해가 저물면
다시 밤거리에서 배회하는 메살리네*
그대는 알리라.
밤에만 피는 꽃 월견초가
왜 푸른 초원을 버리고 이렇게 음습한
황지에 깊이
뿌리 내리는지를••••••” 38 달맞이꽃
“땅에 뿌리를 내린 것들은 결코
이 지상을 벗어날 수 없는데
너는 악착같이
위로 위로 기어오르려고만 하는구나.
상대를 제끼고, 붙들고,
올라타서 옥죄고, 딛고 일어서 마침내
높은 곳에 다다라 피워 올린
그 꽃.
사회주의 국가 영웅의 가슴에서 빛나는
훈장 같다.
아름다움이란
높은 곳에 자리한다 해서 더하지는 않는 법,
권력은 언제나 위에서 군림하지만
아름다움은 항상
낮은 곳에 선다.“ 74 등꽃
기획은 좋았으나
꽃보다 예쁜 구절도
생명만큼 감동적인 말도
없다.
해설을 쓴
정끝별은 이렇게 말했다.
“시인은 꽃을 보면서 아름다움으로서의 앎을 얻곤 한다. 안다는, 알려준다라는 술어와 현상학적으로 대립한다. 꽃들은 어떻게 자기들이 꿈꾸는 혹은 잃어버린 세계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일까? 시인이 안다라는 술어를 빈번하게 쓸수록, 꽃에 대해 잠언화된 아름다움을 명명하면 할수록, 시인의 나르시시즘은 모든 꽃을 자신의 꽃으로 변형시키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모든 꽃의 아름다움에 투사시킨다. 하여 꽃은 마치 물처럼, 시인의 나르시시즘의 훌륭한 도구가 되는 것이다. 시인은 꽃을 인간으로서 본다. 아름다움의 대상으로서 본다. 꽃이 ‘되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꽃은 일방적이다. 타자적이다. 시집을 덮으면서 나는 꽃에 대한 새로운 몽상을 시작한다. 온전히 꽃이 ‘되었을‘ 때, 꽃의 아니마를 향한 몽상은 어떠할 것인가.”
우아하고 현학적이면서 우회적으로다 깠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