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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가 쏟아진다 ㅣ 창비시선 484
이대흠 지음 / 창비 / 2022년 11월
평점 :
요즘엔 시집을 선물하는 일이 드물다.
하지만, 이 시집은 썸타는 이나 사랑하는 이에게 선물하면 좋겠다.
시인이 “바깥으로 향했던 시선을 내 안으로 돌렸습니다.”라더니 특히 3부에서 화자가 당신이라는 청자를 갈구하는, 그 서정시들이 많다. 사뭇 말랑말랑한 표현도 시집 여기저기서 만날 수 있고.
그보다는 신선한 문장들이 좋았다.
채찍 같은 세월을 견디고 싶어서 우리는 명랑을 개발합니다 -21쪽
문득 마주친다면 나는 심심한 면발처럼 웃을 것입니다 -24쪽
연습하지 않아도 우리는 절망을 치러야 합니다 -28
또, 이런 충고는 얼마나 값진가.
한 정서에 오래 매달려 있는 사람에게서는 오랫동안 옷을 갈아입지 않은 것 같은 냄새가 납니다 슬픔이건 기쁨이건 갈아입어야 합니다
… 대개의 행복은 복고풍이고 괴로움은 지나치게 유행을 탑니다
오만의 속옷은 감추어도 드러나며 비굴의 외투는 몸을 옥죄어 숨통으로 파고들 것입니다 … 가끔은 명랑의 손수건도 나쁘지 않겠군요 근엄의 넥타이를 매셨다면 넥타이의 무게에 무너지지는 마십시오 -46
시인의 장흥 살이가 묻어 나오는 시를 참 좋아하는데, 구순 노인들의 다시 없을 독백인 듯한 대화 말고는 몇 없어서 아쉬웠다.
누구에게 선물할까 가만히 벗들을 불러 본다.
아래에 적는 시가 이 시집에서 나는 제일 좋았다.
구름의 망명지
고향을 적을 수 있다면 당신은 구름의 망명지로 갈 수가 없습니다 구름의 거처에는 주소지가 없으니까요 구름에겐 이력서도 없습니다 기록하는 것은 구름의 일이 아닙니다 구름은 언제든 자기로부터 벗어납니다
당신은 한번도 당신을 벗어난 적이 없군요
구름이 되려면 머무르지 마십시오 아무리 아픈 곳, 아무리 아름다운 곳이더라도 지나쳐야 합니다 뜨거움과 차가움도 당신의 이름이 아닙니다 여기가 아니라 저기가 집입니다 주어가 사라진 문장처럼 가벼워져야 합니다
있다와 하다의 사이를 지나 구름의 망명지로 갑시다 죽은 별이 자신의 궤도를 내려놓는 곳입니다 그곳에서는 당신의 안전이 당신을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공기처럼 당신은 당신을 벗을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서 달아난 당신만이 도착할 것입니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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