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 창비시선 385
문인수 지음 / 창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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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은 절대로 눈앞에 다가오지 않고, 오지 않는 것만이 그리움”

밤 깊은 시간엔 창을 열고 하염없더라.
오늘도 저 혼자 기운 달아
기러기 앞서가는 만리 꿈길에
너를 만나 기뻐 웃고
너를 잃고 슬피 울던
등 굽은 그 적막에 봄날은 간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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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
김금숙 지음, 박완서 원작 / 한겨레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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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가, 가장 밤이 긴 그날이 한 해의 시작이라고도 한다
모든 삶을 끔찍하게 만든 전쟁통에도
젊음은 방황하고 사랑도 왔다 간다
아 그러나 밤이 온통 길다
봄이 되면 되살아나는 나무와는 같을 수 없다
전쟁을 저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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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들무렵
정양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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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오
절기에 기대
자연과 사람들을 버무렸다.
웃음과 그리움과 야함마저 가득하다.
담백과 능청이 조화롭다.

우수(雨水)

강물 풀린다는 소문
잠결에 들어
솜털이 몰라보게 부푼
버들강아지더러
눈치도 없이 김칫국부터 마실 참이냐고
이마빡에 등짝에 흰 눈을 이고
먼 산들이 시샘하듯
능청을 떤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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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만이라도 문학과지성 시인선 548
황동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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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쇠나
막 나온 강철이나
젊다고 씩씩대는 자나
하는 말마다 유언일지 모르는 때인 자나
태양 앞에서는?
아득한 우주에서는?

죽음아 너 어딨어?

아파트 낡으면서 사람도 낡아
엘리베이터에서 오래된 이웃 만나면
언제부터 우리 이렇게 됐지?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러나 잠깐, 지금도
마음 홀리는 와인 한 병 잡으려
주머니 사정 살펴가며 마트의 와인 부스를 뒤지고
늦저녁 전철에서 빈자리 놔둔 채 꼭 껴안고 서 있는
젊은 남녀를 멍하니 바라보기도 한다.

죽음이 없다면
세상의 모든 꽃들이 가화가 되는 건 맞다.

꽃들이 죽는 이 세상에는
덮어씌운 눈 간질간질 녹이다가
살짝 웃음 띠고 얼굴 내미는
복수초의 샛노란 황홀이 있고,
해진 줄 모르고
독서 안경 끼고도 잘 안 뵈는 잔글씨를
죽음아 너 어딨어? 하듯
읽을 수 있는 마지막 글자까지 읽어내는 인간이 있다.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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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2-12-03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윽. 황 선생의 시가 이렇게 변했군요. 문지시선 1번에 빛나는 시인답게 모더니즘의 기치를 휘날리더니, 급 관심! ^^

dalgial 2022-12-03 18:24   좋아요 0 | URL
네, 읽어 보셔요~
의연하고 자연스러운 노년이더군요.
 
코끼리가 쏟아진다 창비시선 484
이대흠 지음 / 창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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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시집을 선물하는 일이 드물다.
하지만, 이 시집은 썸타는 이나 사랑하는 이에게 선물하면 좋겠다.
시인이 “바깥으로 향했던 시선을 내 안으로 돌렸습니다.”라더니 특히 3부에서 화자가 당신이라는 청자를 갈구하는, 그 서정시들이 많다. 사뭇 말랑말랑한 표현도 시집 여기저기서 만날 수 있고.

그보다는 신선한 문장들이 좋았다.

채찍 같은 세월을 견디고 싶어서 우리는 명랑을 개발합니다 -21쪽

문득 마주친다면 나는 심심한 면발처럼 웃을 것입니다 -24쪽

연습하지 않아도 우리는 절망을 치러야 합니다 -28


또, 이런 충고는 얼마나 값진가.

한 정서에 오래 매달려 있는 사람에게서는 오랫동안 옷을 갈아입지 않은 것 같은 냄새가 납니다 슬픔이건 기쁨이건 갈아입어야 합니다
… 대개의 행복은 복고풍이고 괴로움은 지나치게 유행을 탑니다
오만의 속옷은 감추어도 드러나며 비굴의 외투는 몸을 옥죄어 숨통으로 파고들 것입니다 … 가끔은 명랑의 손수건도 나쁘지 않겠군요 근엄의 넥타이를 매셨다면 넥타이의 무게에 무너지지는 마십시오 -46


시인의 장흥 살이가 묻어 나오는 시를 참 좋아하는데, 구순 노인들의 다시 없을 독백인 듯한 대화 말고는 몇 없어서 아쉬웠다.
누구에게 선물할까 가만히 벗들을 불러 본다.
아래에 적는 시가 이 시집에서 나는 제일 좋았다.

구름의 망명지

고향을 적을 수 있다면 당신은 구름의 망명지로 갈 수가 없습니다 구름의 거처에는 주소지가 없으니까요 구름에겐 이력서도 없습니다 기록하는 것은 구름의 일이 아닙니다 구름은 언제든 자기로부터 벗어납니다

당신은 한번도 당신을 벗어난 적이 없군요

구름이 되려면 머무르지 마십시오 아무리 아픈 곳, 아무리 아름다운 곳이더라도 지나쳐야 합니다 뜨거움과 차가움도 당신의 이름이 아닙니다 여기가 아니라 저기가 집입니다 주어가 사라진 문장처럼 가벼워져야 합니다

있다와 하다의 사이를 지나 구름의 망명지로 갑시다 죽은 별이 자신의 궤도를 내려놓는 곳입니다 그곳에서는 당신의 안전이 당신을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공기처럼 당신은 당신을 벗을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서 달아난 당신만이 도착할 것입니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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