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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안전거리
박현주 지음 / Lik-it(라이킷) / 2020년 7월
평점 :
예상보다 더 만족스러웠던 에세이, 당신과 나의 안전거리
처음에 이 책을 읽기로 마음먹게 된 건 '운전'을 소재로 했다는 소개글의 영향이었다. 운전을 배우는 과정을 삶에 빗대어 이야기를 풀어간다고 했다. 어떻게 흘러갈까 궁금했다.
읽어보니 만족스러웠다. 운전과 삶이 이야기는 의외로 잘 맞아떨어졌다. 전혀 다른 방향의 소재들도 깊게 들여다보면 공통점이 한둘은 있는게 아닐까. 그런데 사실 이 책의 만족도에 최고의 영향을 끼친 건 기대했던 운전 이야기가 아니다. 언제나 내가 가장 선호하는 주제. 그래, 책 이야기였다. 이 책, 알고보니 독서 에세이의 면모도 가지고 있었다.
에피소드마다 운전 이야기와 함께 주제에 맞아 떨어지는 책 이야기도 함께했다. 의외의 선물 같아서 좋았다. 『당신과 나의 안전거리』에 나오는 책들이 다 흥미로워 보이는 것들 뿐이어서 더 좋았다. 덕분에 또 위시리스트는 한가득 채워졌다.
무엇이 위대하고 무엇이 사소한지 말로는 쉽게 가를 수 없다. 일단은 자기가 정한 방향대로 갈 수밖에. 그러다가 언젠가 우리는 다다르게 된다. 그곳에 다다르게 될 거라는 약속이 없더라도, 사소한 삶도 결국엔 위대하다. (p.57)
일단 예상했던 운전 이야기부터. 글쓴이는 운전과 관련된 소재를 하나하나씩 차근차근 거쳐나간다. 처음 운전을 해보기로 마음먹게 된 동력에 관한 이야기, 필기시험과 실기시험, 차량을 구매하고 도로 주행을 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여러 가지 운전 형태. 함께 타는 사람과의 이야기, 운전에 큰 영향을 주는 날씨, 도로 위에서 다른 차들과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 '운전'이라는 소재가 간결해 보였는데, 많은 것들을 품고 있는 주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각 에피소드는 운전과 관련된 이야기를 충실히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삶과 연결짓는다. 운전도, 삶에 대한 이야기도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는 글이었다.
책 이야기는 더 좋았다. 『당신과 나의 안전거리』를 통해 처음 알게 된 책도 있고, 이미 알고 있던 책도 있었다. 신기한 건 이미 알고 있었는지 여부와는 관계 없이 대부분의 책들에 상당히 끌렸다는 사실. 그만큼 이 책 속에서 해당 책들이 전체 이야기와 상당히 연계가 잘 되어있는데다가 책을 소개하는 내용도 매력적이었다.
그러니 읽고 싶은 책들이 가득이다.
제니퍼 이건의 『깡패단의 방문』. 제목만 보면 취향과 거리가 있을 거 같은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깡패'가 시간을 의미하며, 왜 그런 비유를 할 수 있는지 설명하는 부분에서 끌렸다. 시간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단어인데, 설명을 보면 설득당할 수밖에 없다.
채드 하바크의 『수비의 기술』은 일단 야구 관련 소설이라는 점에서 끌렸다. 실패, 상실, 좌절을 딛고 일어나는 인물들이 나온다는 이야기에 더 읽고 싶어졌다.
그레임 심시언의 『로지 프로젝트』는 전에 다른 소개글을 보고 끌리지 않아 안 읽었던 책인데, 여기서의 소개글은 상당히 궁금하게 만들고, 읽고 싶게 만들었다.
카렐 차페크의 『초록숲 정원에서 온 편지』는 정원 손질 에세이인 점과 저자 이름 때문에 궁금해졌다.
코니 윌리스의 『크로스토크』는 소재가 흥미로웠다. SF 로맨틱 코미디란 장르도 재미있어 보였고, 무엇보다 결말이 너무너무 궁금해져서 무조건 읽어야 할 것 같다.
줌파 라히리의 『내가 있는 곳』은 '46개의 장소 스케치 같은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설명이 끌린다. 줌파 라히리 작가는 에세이만 두 편을 읽었는데, 막상 소설은 읽어야겠다는 확신이 서는 작품이 덜해서 미뤄두고 있었다. 이 책 덕분에 줌파 라히리의 소설도 조만간 읽을 것 같다.
충고에서 제일 중요한 해답은 결국 나 자신에게 있다. 어떤 결과를 맞이하더라도 내게 충고를 해준 타인을 원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즉, 내가 앤 엘리엇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충고는 타인의 판단이지만 그 판단을 따를지 말지는 나의 판단이기 때문이다. 아니, 적어도 그 판단을 따른 나와 타인을 원망하지 않는 것도 자신의 결정이다. (p.112)
제인 오스틴의 『설득』도 초반부를 읽다 만 적이 아주 많은데다 리뷰나 소개글을 읽어도 그리 끌리지 않았던 책이었다. 캐릭터의 매력이 적은 작품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앤 엘리엇'이라는 여주인공의 태도에 대해 다른 관점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고, 이 생각을 바탕으로 다시 차근차근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길게 설명할 거리도 없는 파편적 일상 같은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표면의 간결한 문장들을 깊게 파고 들어가면 그 누구도 포착할 수 없는 인간 내면에 대한 섬세한 묘사들이 있다. 우리가 놓쳐버린 기회, 앞으로 올 것만 같은 기회, 확증할 수 없는 의심, 확증하고 싶지 않은 의심, 실현할 수 없는 욕망, 기필고 저질러버린 욕망. 그리고 알지 못하는 곳으로 이끄는 열정. 어떻게든 이어져 가는 삶이 이 소설들 속에 있다. (p.141)
위에 옮겨 적은 글은 앨리스 먼로 작품에 관해 설명한 내용인데, 머리로는 생각나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그 생각을 표현해준 느낌이다! 책을 읽으면 드는 이런 느낌과 이미지 때문에 앨리스 먼로의 단편집들을 좋아해서 읽은 책들이 있었다. 여기서 소개한 『착한 여자의 사랑』은 아직 안 읽어봤으니 읽어야겠다. 단편집이라서일까? 이례적으로 각 단편 하나하나 간단하게 소개한 내용이 전체적으로 상당한 분량을 차지해서 눈에 띄었다.
나는 운전을 배워서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세상의 어떤 기술이나 경험도 마찬가지이다. 어딘가로 떠나는 여행도, 누구를 사랑하는 경험도, 책을 읽는다는 독서도 반드시 발전을 약속하진 않는다. 그렇지만 꼭 발전이 아니라도 우리는 변화만은 겪게 된다.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된다. 훌쩍 달라진다. 그렇게 인생의 지도를 그려나간다. (p.247)
운전, 삶, 그리고 책 이야기까지 모두 하나의 주제에 맞춰 잘 맞물려 있어서, 세 가지 모두 글이 '정말 좋다',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예상보다 훨씬 만족스럽게 책을 읽을 수 있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