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래할 리 없는 미래에 관한 이야기,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내가 쓰는 이야기는 대부분 의도적으로, 그것도 아주 적극적으로, '도래할 리 없는' 미래에 관한 것들이다. (p.7, 저자 머리말)
얼마전까지만 해도, SF 소설은 미래를 예측하는 이야기, '공상과학' 소설이라 생각했었다.
최근 그 생각을 바꾸었다. SF에 관한 책들을 몇 권 읽으며, SF란 장르가 그런 몇 개의 단어만으로 규정지을 수 없음을 알았다. 장르의 폭이 훨씬 넓다는 것을 알았다. 많은 SF 작품들이 미래를 이야기하지만 다루는 문제는 '현실'에 깊게 연결되어 있다.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의 머리말에서 저자도 이야기한다. 이 소설은 미래를 예견하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의 현실에 확대경을 가져다 대는 것'이라고. 그러니 이 책을 읽으며 내 머릿속에 가장 크게 자리한 관점은 '현실 반영'이었다.
있을 법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종종 들었던 건 아마도 이 때문이리라.
그러니 내용이 디스토피아로 다가가는 게 느껴지면 계속 속으로 되뇌었다. 이 이야기들은 절대, '도래할 리 없는' 미래에 관한 것들이라고. 작가가 인증했다고.
어쩌면 나는 '뒤에 남은 사람들'의 화자와 비슷한 인간이다. 우리가 물질 세계를 벗어나, 죽음도 초월해 한낱(너무 단정적인, 과격한 표현일지도 모른다고 한편으로는 생각하면서) 전기 신호가 되어 살아가다니, 아니 그걸 '살아있다'고 규정할 수 있는건가? 그러니 이 이야기들은 결코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어야만 한다.
세계 곳곳에서 삶이 영원히 이어졌지만, 사람들은 전보다 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함께 나이 들지 않았다. 함께 성숙하지도 않았다. 아내와 남편은 결혼식 때 한 선서를 지키지 않았고, 이제 그들을 갈라놓는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권태였다. (p.59, 호)
어째서 과학이 발달한 미래의 이야기는 디스토피아로 흐르는 것 같을까?
우리가 '현재'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다면, 다른 것을 잃을 수밖에 없는 걸까. 마치 물물교환처럼.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건네야 하는.
첫번째 에피소드였던 '호'에서는 아주 오랜 시간 살아가고 있는 여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녀가 살아온 세계는, 현재 우리가 원하는 생명 연장의 꿈을 현실로 이뤄냈다. 죽음을 초월한 영원한 삶. 신체적인 문제를 해결하자 정신적인 문제들이 생겨났다. 인간 대 인간의 교류는 죽음, 그러니까 '예기치 못한 이별'이라는 선택지가 사라지자 지극히 단조로워졌다.
"만약에." 나는 적당한 표현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우리가 단지 하루하루 어떤 알고리즘을 따르는 것뿐이라면? 우리 뇌세포가 단지 어떤 신호를 받아서 다른 신호를 찾을 뿐이라면? 우리가 생각이란 것 자체를 안 한다면? 내가 지금 당신한테 들려주는 이야기가 단지 미리 정해진 반응일 뿐이라면, 의식이 개입되지 않은 물리 법칙의 결과라면?" (p.160~161, 사랑의 알고리즘)
'사랑의 알고리즘'에서 주인공은 알고리즘을 만들어 마치 인간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작동하는 로봇들을 만들어내다 결국 인간들도 똑같이 알고리즘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의식'은, '자유의지'는 허상일 뿐인걸까? 이 이야기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오랜 논쟁을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스스로는 그게 진짜가 아닌 걸 알잖아." 엄마가 생각한다. "바로 그것 때문에 모든 게 완전히 달라지는 거야." (p.259,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떼가)
몇몇 이야기에서 스스로 '인식'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어떤 것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느냐에 따라, 믿고 믿지 않느냐에 따라 세계를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게 된다.
"거짓말이라고는 안 했는데. 이야기란 건 말이지, 어떤 이야기든 간에, 네가 진실이라고 믿을 때에만 진실인 법이야." (p.286, 달을 향하여)
이 인식의 문제에 관한 것을 '달의 향하여'에서 더 진하게 느낄 수 있다.
옛 우화의 느낌이 나는 이야기와, 현실의 어떤 상황을 그려내는 듯한 이야기가 교차로 이어진다. 옛 우화 이야기는 현실의 이야기를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현실의 인물은 진실에 거짓을 섞여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 이야기가 정말 진실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를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지을 상대가 '진실'이라고 믿을 수 있어야 할 이야기여야 하니까.
'달의 향하여'는 좀더 현실적인 배경을 지니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더 '도래할 리 없다'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어쩌면 실제로 '있었을 법한'이야기였기에. 이야기 속에 액자 형식으로 들어간 우화는 오히려 액자 밖 이야기가 진실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이야기의 주제는 독자에게 충분히 전해진 것이 아닌가 싶다. 분명 지어낸(거짓된) 이야기일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일순간 진실을 담아낸 건 아닐까 생각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결국 누구도 아닌 자기만의 이야기를 쓴다. 이로써 우리는 자기 운명의 저자가 된다. (p.11, 저자 머리말)
책 속의 모든 이야기는 1인칭 화자도 있고, 3인칭으로 서술하기도 했지만 결국 중심 인물들의 '자기만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긴 삶을 보여주기도 하고, 삶에 있어 중요한 영향을 미쳤을 한 순간을 그려내기도 했다. SF란 장르가 다른 일반 소설과 거리감 있지 않음을 생각하게 했다. 결국 이 장르도 소설이고, 이야기다. 현실의 어떤 부분들을 확대해 깊게 들여다보고, 풀어내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