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불과 피 세트 - 전2권 - 얼음과 불의 노래 외전 얼음과 불의 노래
조지 R. R. 마틴 지음, 김영하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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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테로스 타르가르옌 왕조의 역사'
 '얼음과 불의 노래' 의 원작의 대장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드라마는 끝이 났다.
마틴옹은 본편을 이어나가기보다, 드라마의 팬들을 위해 세계관을 한번 정리할 필요를 느꼈던 것 같다.
'이 시점에 대체 왜??' 라고 생각했으나, 막 드라마판 '얼음과 불의 노래' 인 [왕좌의 게임] 8시즌 6화를 보고 나니, 마틴옹의 기획이 대단히 탁월했음을 알게됐다.
마틴옹은 아마 8시즌의 프리프로덕션부터 지켜봤을 것이다.
아니, 마지막까지 검수에는 관여한 것으로 알고 있으니, 대본을 미리 받아봤을 가능성이 높다.
드라마는 시즌6 후반부부터 원작과 다른 길을 걷게 된다. 8시즌에서 마무리가 되는 것으로 결정이 나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드라마 제작사는 7,8 시즌을 독자적으로 끌고가기로 결정했고, 그에 동의한 마틴옹은 아무리 원작자라도 드라마 작가들이 만들어놓은 디테일을 일일히 간섭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드라마 7,8 시즌은 앞 시즌들에 비해 내러티브가 상당히 부족하다.
부족한 내러티브는 자연스럽게 개연성의 부족으로 귀결됐다. 훌륭한 캐릭터들은 좌절하고 절망하고 어영부영하다가 어처구니 없는 결정을 내린다. 대너리스의 선택도 내러티브만 충분했으면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텐데, 너무 많은 부분들을 지나치게 생략했다.
8시즌의 호흡을 생각하면, 7시즌의 홧수들이 아까울 정도다. 

에소스 대륙에 있던 발리리아의 파멸과 함께 웨스테로스로 날아온 드래곤의 혈통 타르가르옌 가문과 그 기수가문이었던 바라테온 가문은 드래곤 스톤에 자리를 잡았다. '드래곤의 군주' 혈족이었던 아에곤 타르가르옌은 비세니아와 라에니스,두 누이와 함께였는데, 이 말인 즉슨 드래곤 세마리와 함께 도착했다는 의미. 혈통이 중요한 타르가르옌은 근친혼이 특별한 일이 아니었기에, 아에곤의 두 누이는 두 아내이기도 했다. 발리리아산 강철로 만든 검과 드래곤을 앞세운 침략자들은 주변을 차근차근 정복해 나간다. 
 [불과 피]는 이렇게 웨스테로스 대륙에 처음 발을 디딘 '정복자' 아에곤 1세부터 '미친왕' 아에리스 2세까지 약 280여년의 타르가르옌 통치기를 다룬다.
재미있는 점은 각 권 말미에 타르가르옌 가문의 연보가 실려있는데, 아에곤1세를 끝으로 '드래곤 왕가의 계보는 끊겼다' 고 단언한 점이다. 이는 마침 드라마의 엔딩과도 어느정도 접점이 있어서, 이 기획이 드라마와 무관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준다.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의 오랜 팬이라면 흥미로울 부분이 무척 많고, 드라마의 팬들에게도 충분히 어필할 부분들이 있다.
  
하렌홀이 드라마상에서 거대한 폐허와도 같은 모습인 이유, 협해에 위치한 요새인 드래곤 스톤의 홀에 있던 웨스테로스의 지도가 정교하게 조각된 거대한 테이블인 '채색 탁자'의 유래, 바라테온이 스톰스엔드를 근거지로 삼게된 과정, 도르네를 근거지로 삼고 있는 마르텔 가문이 왕가에 복속되지 않았던 과정, 왕의 직속 보좌관을 '핸드' 라고 칭하게 된 계기, 강철군도의 '그레이 조이' 가문이 스타크가문의 기수가 된 역사, 킹스랜딩에 레드킵이 건설되는 과정, 일곱개의 얼굴이 있는 유일신을 믿는 종단의 위세, 그리고 정복전쟁중에 입수한 적의 칼을 녹여 만들어진 철왕좌. 

나는 드라마가 제작되기 훨씬 전부터 이 시리즈를 팔로우하고 있던 오랜 팬으로써 너무너무 의미가 깊은 책이었다.
다만, 팬이 아니라면, 서술 형식이 실제 역사학자의 그것처럼 왕을 중심으로 사건들이 나열되어 있는 방식이라, 소설처럼 강력한 흡인력을 전혀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게다가 대너리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드래곤의 파워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와는 달리, 드래곤을 앞세워 주변 세력들을 복속시키는 아에곤의 행보는 지나치게 판타지스러워서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드라마판 얼불노,[왕좌의 게임] 은 8시즌을 끝으로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나 역시 다른 팬들과 마찬가지로 큰 실망과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그나마, 이 책 [불과 피] 가 부족한 개연성에 어느정도 땜질을 해줄 수 있었지만, 원작 팬들이 이십년간 기다렸던 '겨울' 과 백귀들의 침탈, 서세이와의 갈등, 대너리스와 존의 결말을 그런 식으로 매듭지어서는 안됐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5분의 장면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시리즈의 완결이라는 느낌은 충분히 들었다.)

[불과 피] 마지막권의 역자의 말을 보니, HBO는 이미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의 프리퀄 드라마 제작을 확정지었다고 한다.
'얼음과 불의 노래' 세계관의 단편집인 '세븐킹덤의 기사' 에 나온 내용들이나 '불과 피' 의 내용은 물론, 더 과거의 역사까지 폭넓게 접근하고 있는 듯 하다. 어쩌면 발리리아 왕국의 최초의 드래곤 군주들의 이야기나, 웨스테로스의 처음 터를 잡은 '퍼스트맨' 들의 이야기가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드라마는 끝났지만, 원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역시, 역자의 말을 빌려보면, 2016년 마틴옹은 [겨울의 바람]이 큰 난관에 봉착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지금이 2019년이지만, 아직도 출간소식이 없는 것을 보니, 그 난관에서 무사히 빠져나오지 못한 것일수도.... 
  
[불과 피] 는 원작 팬들에겐 더없이 소중한 텍스트가 될 것이다.
다만, 이제 막 얼음과 불의 노래에 입문한 독자들이라면, 가급적 한참 뒤에 읽으라고 조언하고 싶다.
적어도, 드라마 정도는 마지막편까지 정주행 하고 시작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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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멘타 하인학교 (무선) - 야콥 폰 군텐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
로베르트 발저 지음, 홍길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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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배우는 것이 거의 없다. 가르치는 교사들도 없다. 우리들, 벤야멘타 학원의 생도들에게 배움 따위는 어차피 아무 쓸모도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훗날 아주 미미한 존재, 누군가에게 예속된 존재로 살아갈 거라는 뜻이다. 우리가 받는 수업은 우리에게 인내와 복종을 각인시키는 데 가장 큰 의의를 둔다. " 

p.7


첫 문장이 아주 강렬했다. 너무나 신랄하고 발랄하게 자신이 몸담고 있는 상황을 '까는' 이 문장에 실제로 소리내서 웃으며 크게 공감했다. '벤야멘타 학원' 자리에, 내가 나온 학교들을 넣어도 될 것 같았다. 거의 100여년 전에 쓰여진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주 재미난 풍자소설임을 짐작케 했다. 원 제목이자 작중 화자인'야콥 폰 군텐'은 유력한 집안의 자식이다. 대대로 공직을 맡아온 귀족 가문 태생이다. 하지만, 야콥은 큰 돈을 내면서 '하인학교' 에 입학했다. 벤야멘타 남매가 운영하는 이 하인학교는 원생 수도 얼마 없는데다가 가르치는 것도 거의 없는, 직업 훈련소라고 부르기에도 미미한 학교다. 


비교적 흥미로운 도입부와는 달리, 읽을수록 지쳐갔다. 하인학교의 동료들인 하인리히, 샤흐트, 크라우스와 학교의 원장인 미스터 엔 미스 벤야멘타에 관한 다소 장황한 인평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화자의 심리가 두서없이 나열되기 때문이다. 특정한 사건도 없고, 일관되기 주지되는 메시지도 없다. 

그야말로 의식의 흐름이랄까. 중심된 이야기가 없이, 화자의 일상과 의식의 흐름을 따라간다. 큰 흐름 없이 시종일관 주변의 소소한 일상과 주변인물들과 나눈 이야기들이 가득한 이 작품은 소설의 형식을 빌린 일기와도 같다. 

주인공의 심리는 일관성 없이 수시로 바뀌고, 그 변화에 개연성이란 없다.


사람의 감정은 불안정하다. 인간이 사고활동을 시작했을 때 부터,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불안정함은 즉 감정의 동요, 이것은 종교와 예술의 기반이 된다. 때문에, 시시각각 이유없이 변화하는 화자 야콥은 무척이나 인간적인 캐릭터지만, '소설의 화자' 로서는 좋은 역할을 하고 있지는 않다.

작품을 읽다보면 수많은 '왜?? ' '읭?!' 같은 감탄사가 끊이질 않는데, 이 작품은 수많은 '왜?' 를 던져주지만, 그 대답은 '그게 왜 궁금해?' 라는 답으로 돌아오는 것 같다. 

그래서 '읭?!' 하게 되는 것.


개인적으로 독서는 일종의 체험이라고 생각한다. '간접경험' 이라는 용어로 종종 표현되어 왔는데, 글자를 읽으며 펑펑 울고, 크게 웃는다면 이미 그것은 '간접' 보다는 더 직접적인, 체험의 일종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은 내게 꽤나 신선한, 그리고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체험이었다. 

야콥이 학교 안에서 만나는 주변 인물들; 벤야멘타  원장과 부원장 남매와 몇분의 선생님들, 다섯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소수의 동료들, 그리고 예술가인 형 요한- 과 만나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그 이야기에 대한 야콥의 심상들이 장황하게 나열된다. 

그리고, 그게 계속 반복된다. 

야콥이 주변인들과 나누는 이야기들은 -비록 통찰력은 느껴지지만- 통일성도, 일관성도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소소한' 이야기들. 그러다 갑자기 벤야멘타양과 동화에서나 나올법한; 현실인지 몽상인지 구분할 수 없는 기묘한 일을 겪게 되고, 학교의 부원장인 벤탸멘타 양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학교가 사실상 폐쇄되고, 야콥은 벤야멘타 원장과 사막으로 떠나면서 소설이 끝나버린다.


 이렇게 한번 읽고 나서부터 이 책을 조금 다르게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소설은 당대를 주름잡던 모든 주류를 비트는 소설이다.

과거엔 지주였고, 현재엔 시의원을 지낸 유서깊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야콥은 자신의 신분을 버리고 가장 '미미한 존재' 가 되고자 하인학교에 들어갔다. 기본적으로 '하인' 의 일을 '배우는' 학교라는 장소부터가 지독한 역설이다. 유럽사회에서 학교는 크게 두 부류였다. 지금도 그런식으로 운영되는데, 한 갈래는 학문을 위한 기초를 닦는 방향이고, 다른 한 방향은 직업 기술을 익히는 방향이다. 애초에 학교라는 것이 국가의 공공정책으로 발전하기 전, 산업혁명 이후 공장에서 순종적으로 반복노동을 하는 직원들을 교육하기 위해 생겨났다. 우리나라에서도 공장에 딸린 기숙식 고등학교가 많았던 이유다. 책의 첫 문장에 쓰인것처럼 학교에서 행하는 교육이란 자신의 계급과 신분에 맞는 역할을 주입시키기 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태생에 따라 가늠되는 전통적 계급과 신분의 차이가 명징하고, 거기에 자본주의의 새로운 신분-부르주아와 프롤레타이아-까지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계급과 신분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런 부조리를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적응해서 어떻게든 살아냈지만, 또 많은 사람들은 부조리를 깨닫고,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을 것이다. 체념과 욕망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시기. 


 야콥이 원했던 '미미한 존재' 는 사실 그 사회의 가장 다수를 차지하며, 사회라는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굴러가게 하는 기반이다. 하지만, 사회의 시스템의 보호에서 가장 먼 계층이기도 하다. 야콥은 어머니와 하녀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기화로 사회의 부조리를 깨닫는다. 그 순간은 마치 번개처럼, 번득하는 순간이었다. 왕자였던 싯달타가 그 이후 가장 낮은 자들 사이에서 고행하며 구도자의 길을 걸어 열반에 올랐듯, 예수가 문둥병자와 교회 밖에서 구걸하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듯, 야콥은 하인학교에 들어간다.

 

 사실 그 이후 야콥의 생활은 싯달타나 예수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아마 저자인 로베르트 발저는 자신의 페르소나인 야콥을 당대의 평범한 보통 사람들로 치환시켰던 듯 하다.

사회의 부조리를 알아챘으나, 깨달음이나 구원과는 거리가 먼 보통 사람. 

그럼에도 야콥은 그의 형인 요한에 비해 '행동하는' 사람이긴 했다. 요한은 자신의 모든 것을 마음껏 누리면서 동생인 야콥에게는 제법 훌륭하게 들리는 조언을 건넨다. 예술과 대중, 부유함과 근검함, 자유와 자본주의에 대해. 요한의 말은 마치 중근세의 귀족층들이, 나아가 근현대 부르주아들이 서발턴(어제 배운 단어를 이렇게 써먹어본다)에게 강요했던 의식들과 일맥상통한다. 단지 그들을 '제어' 하고 '다스리기' 위한 공허한 가치들. 


 이 작품 전체를 당시의 시대와 사회에 저항했던, 일종의 '반감' 을 의식의 흐름대로 서술한 글이라고 이해하면 작품 전반에 느껴지는 유머러스함과 다소 히스테릭한 감정변화가 어느정도 이해된다. (특히, 로베르트 발저의 연보를 읽고 나니, 조금 더 이해되는 면이 있다.)

마치 매일매일의 일기 같은 형식의 짧은 내러티브들이 정신없이 나열된다. 

때로는 시간을 넘나들고, 몽상과 환상의 세계를 넘나들기도 하기때문에, 벤야멘타 하인학교의 원장, 부원장과 여러 친구들이 혹시 발터의 상상 속 인물은 아닐까? 아니면, 벤야멘타 하인학교가 아니라, 사실은 벤야멘타 정신병원은 아닐까? 벤야멘타 원장과 부원장 남매는 의사들, 여러 친구들은 발터와 함께 입원한 환자들은 아니었을까?


 매일매일의 감정과 일과가 모여 일주일이 되고, 한달이 되고, 일생을 이룬다. 

한 인간의 삶은 그가 태어난 혈통과 교육받은것들로부터 골격을 이룬다. 우리 사회의 시스템은 오직 그것만을 바탕으로 구별되고, 차별된다. 혈통은 선택할 수 없고, 바꿀 수도 없지만, 교육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유서깊은 귀족가문의 아들이었던 발터는 과연 하인학교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이뤄낼 것인가?

아니, 아마도 발터는 아무것도 배우지 않기 위해 하인학교에 갔을터다. 아무것도 이루지 않기 위해 사막으로 떠났을터다.

삶은 그저, 매일매일이 모인 것에 불과하니까. 

그리 대단한 것도, 의미있는 것도 아니며, 그리 대단할 이유도, 의미있을 이유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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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주르 한국 건축 - 프랑스 건축가 25인의 한국 현대건축 여행
강민희 지음, 안청 그림 / 아트북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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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공부하고 파리에서 건축사무소를 운영중인 저자가 '일드프랑스 건축협회' 라는 곳의 지원을 받아 한국으로 건축답사를 떠나는 내용의 책이다. 대상자가 현대의 건축가들이라 전통 양식의 건물들은 가급적 배제하고, 현대 건축가들의 건물들을 주요 답사지로 선정했다.


아무래도, 나 역시 만화를 하는 사람으로 무협,사극에 대한 꿈이 있는지라 한국의 전통 가옥이나 건물에 대한 책들은 화집으로도 많이 가지고 있는데, 국내에 있는 현대 건축물만을 찾아다녔다는 점이 생소하면서도 흥미로웠다.

사실 건축이라는 장르에 문외한이라 안도 다다오나 DDP로 처음 알게 된 자하 하디드 정도의 이름만 알고 있을 뿐, 그들의 작품을 눈으로 확인해 본 적은 없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들의 건물이 꽤 있다는 사실조차 이번에 처음 알았다. 

어떤 작품들은 제주도의 모 리조트 한 면을 다 차지하고 있고, 서울 중심부엔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들이 상상 초월의 공법을 사용해 만든 건물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고, 가끔 파주 출판단지에 가면 신기하게 바라보는 미메시스 아트뮤지엄도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는 건축가의 작품이라는 사실도 다 처음 알았다. @.@ 

그리고, 국내에도 세계적인 수준의 건축가들이 꽤 많다는 사실도.    


건물은 단지 우리가 몸을 누이고 잠자는 공간이 아니다.

도시에 살고 있는 나는 삶의 99.999999%를 건축물에 둘러쌓인 채 살다 죽을 것이다.

그 규모나 재료가 뭐든간에, 네모난 공간에서, 네모난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의 연속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이동하는 길이나 지하도도 모두 건축의 일부분이다. 

이런 생각은 비단 현대인들 만의 것은 아니다.

이미 수세기 전, 기원전 시대의 사람들조차 그 사실을 알고, 인지했다.

습기와 병충해, 맹수들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기면서 인간의 삶이 바뀌었다.

'생존하는 삶' 에서 안락함을 '누리는 삶' 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생존은 기본이고, 생존의 내용이 중요해진 것이다.

나아가, 건축물은 인간보다 오랜 시간을 이겨내는 예술품으로서의 가치도 획득한다.

게다가 2020년이 코앞인 현대에는 도시 '생태계' 를 이루는 나무나 산과 같다. 

우리 조상들은 풍수지리를 철칙처럼 믿으며 자연과 병존하는 건축을 추구했다. 외려 근현대에 접어들어 자연을 마구 훼손하는 건축을 추구했다가, 요즘은 다시 자연과 병존하는 방식을 고민중이다. 도시는 더이상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게 된 것이다.



이 책 안에는 우리나라의 수많은 건물들을 답사한 건축가들의 감상이 적혀있다.

특히 DDP를 다룬 대목이 눈에 간다.

이 거대한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얼마나 많은 말들이 오갔는지 확실히 기억한다.

정쟁의 요소로 쓰이기도 했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한국 건축가들에게 조언을 구할 때마다 답사 목록에 외국인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이 왜 이렇게 많으냐는 질문을 받았다. MA(일드프랑스 건축협회)와 프로그램을 상의할 때는 그것이 전혀 중요한 이슈가 아니었는데, 한국 사람들은 열이면 열 고궁이나 절 등 좀더 한국적인 건축물을 답사 프로그램에 넣고 한국인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을 더 많이 소개하라는 얘기를 했다. 그 점에 대한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생각이 달랐을 뿐이다. "


 사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기껏 외국 건축가들을 한국에 초청해서, 왜 그 나라 건축가들의 작품을 보여줘?? 

외국인들이 한국의 절과 고궁을 보면서, '우와 조선 쩔어, 고려 쩔어' 하는거 보고싶어!!! 


"어떤 이가 설계를 했는지 상관없이 지금 서울을 구성하고 있는 현대 건축물 중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들을 살펴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여겼고 그것을 이 여행의 원칙으로 삼았다." 


그렇지, 어차피 이 사람들은 건축을 '업' 으로 삼은 사람들이다.

'지금도 활발히' 새로운 건물을 짓고 있는 사람들이다. 다양한 '현대' 의 환경 안에서 현대의 건축물들이 어떠한 모양으로, 어떠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건축엔 국적도, 인종도, 성별도 없다.


"파리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루브르 박물관 앞의 유리 피라미드는 중국계 미국인 L.M 페이가 설계했고, 퐁피두 센터는 영국과 이탈리아 건축가의 합작품이다. 라데팡스의 신개선문은 덴마크의 건축가 요한 오토 폰 스프레켈센이 디자인했다. 다른 나라 출신의 건축가들이 작업을 이끌었지만, 이것들은 엄연히 파리의 것이며 파리 시민의 자산이다."


"도시는 거대한 유기체다. 무엇이 어떻게 뒤섞일지 알 수 없는 용광로다. 

설계자가 다른 나라 사람이라고 해서 서울의 건축이 서울의 것이 아니라는 시선은 버려야 한다.

DDP도 마찬가지다. 이 낯선 공간도 결국 우리의 것이란 이야기다."

 p. 107  



문득, 어떤 건축가분이 조선총독부를 헐어버린 일을 아쉬워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나 쉽게, 민족의 자긍심에 상처를 낸다는 이유 하나로 우리 도시의 중요한 역사 하나를 없애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나는 조선 총독부 건물이 국립 중앙 박물관이던 시절 정말 많이 갔었고, 아주 많이 봤더랬지만, 우리 이후의 세대들은 그런 건축물이 있었는지도 모를 것이다. 

민족적 자긍심은 그런 것으로 쉽게 무너지지도, 세워지지도 않는 것인데.


이 책은 DDP가 완공되기 전, 천문학적 건설비용과 그 기묘한 외관에 비판적인 기사들이 매우 많은 시기에 쓰여진 책이다.

저자는 그런 반발들을 이해하면서도 아쉬워했다. 그 와중에도, DDP안에 유적들을 보존하려는 모습들을 인상적으로 본 외국 동료들의 이야기를 싣기도 했다. 

이 뿐 아니라, 가깝게는 인사동 쌈지길과 복개된 청계천, 이화여대 서울캠퍼스부터 멀게는 한탄강 전곡선사박물관과 바다건너 제주도 돌 박물관까지 수많은 현대적인 건축들이 우리 땅 위에서 살아 움트는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 땅 위에서, 내 땅에서 나는 재료로 만들어진 건축물조차도 외국인이 설계한 건물, 한국인이 설계한 건물을 나누고 있었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외국 설계사가 설계했다고, 그걸 그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뚝딱뚝딱 망치질 하는게 아니다.

외국 건축 사무소와 국내 건축 사무소가 긴밀한 파트너쉽 아래서 작업을 한다.

토질, 주변환경, 재료수급 등 실제로 '짓는' 일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했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인부 한명까지 다 우리나라 사람일 수 밖에 없다.


아니, 그리고 누가와서 누가 지었던들.

그 곳에 살고 있는 내가 주인이고, 내 삶의 공간인데.

이미 만들고 떠난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내가 알게 뭐람!!!

게다가 수년, 수십년 전 사람인데!!! 


다만, 이 집을 지은 사람의 마음 정도는 알아볼 수 있다.

어떤 마음으로 이 방향에 창을 냈고, 어떤 마음으로 이 기둥을 세웠고, 어떤 마음으로 이벽을 발랐을지.

그 어떤 창보다 많은 햇살이 들어오길, 그 어떤 기둥보다 튼튼하길, 그 어떤 벽보다 단단하게 버텨주길. 

건축들은 그래서, 우리 삶의 일부분일 수 밖에 없다.

그 어떤 생태계보다, 도시 생태계가 우리와 밀접한 이유다.


[휴먼 에이지] 에서 저자인 다이앤 애커먼은 '인류세'  인류sms '도시종' 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인류의 절반이 넘는 35억명이 도시에 몰려 있다. 2050년이면 도시가 세계 인구의 70퍼센트를 홀리리라고 내다본다. 이 추세는 밤하늘의 달처럼 엄연하고 산사태처럼 막기 힘들다. 2005년에서 2013년 사이에 중국의 도시 인구는 13퍼센트에서 40퍼센트로 치솟았다.(...) 이 추세라면 2030년에는 중국 국민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서 살 것이다. 

(...) 

영국은 1950년 무렵에는 바둑판처럼 배열된 도시들이 인구의 79퍼센트를 품게 되었다. 도시 거주자 비율이 92퍼센트에 달할 2030년이면 영국은 진정한 도시형 국가가 되어, 그보다 할 발 앞서 그렇게 변한 다른 나라들의 대열에 합류할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이미 인구의 90퍼센트가 도시에서 살고, 독일은 88퍼센트가, 프랑스는 78퍼센트가,'


이 줄줄이 통계의 바로 다음에 한국이 나온다.


'한국은 80퍼센트가 그렇다.' 

([휴먼 에이지] p.105)


우리나라는 이미 80퍼센트가 도시에 산다!!

이제 지구는 오직 자연의 법칙으로 움직이는 자연 생태계 뿐 아니라, 자연을 인간의 생활권 안으로 끌어들인 도시와 병존하고있다. 바야흐로 도시 생태계의 정착이다.  

그 중심에는 당연히 건축이 있다. 건물이 있다.

이러한 고민은 문명을 선도하는 소위 '선진국' 에서는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전용되고 있다.

지하도를 오가는 사람들의 움직임(운동에너지)과 발산하는 열에너지로부터 전기를 생산하는 건물이 있고, 그 어떤 에어 컨디셔너 없이 오직 건물의 구조만으로 공기의 흐름을 조정해서 쾌적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는 건물들도 있다. 건물의 외장재 대신 거대한 수풀을 옷처럼 둘러입은 건물들은 도시 생태계의 중요한 테마다. 태양에너지와 바람에너지는 이미 정착되어 있는 발상이다! 

건축가들은 오직 예술적인, 또는 기능적인 면만 보지 않는다.

예술적인 아름다움과 기능적인 효율성은 물론, 도시의 역사성과 도시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습관은 물론, 도시 생태계의 원활한 사이클을 살핀다. 

 

참 절묘한 타이밍에 두 책이 얽혔다.

거의 두달간 천천히 곱씹으며 읽고 있는 '휴먼 에이지' 에 끼어든 [봉주르 한국 건축].

[봉주르 한국 건축] 에서 소개하는 우리나라의 건축물 중 한국인이 설계한 건축물은 몇 안된다.

하지만, 모든 건축물은 한국에서 건설되었고, 거의 모든 재료들은 한국에서 나왔고, 거의 모든 건축자들은 한국인이었을 것이다. '거의'의 나머지는 외국인 노동자겠지. 그럼, 외국인 노동자의 비율이 높으면, 그건 외국인이 지은 건물일까? 

'쌈지길' 을 품고 있는 인사동 거리 재정비 사업, 서울 한복판을 흐르는 청계천 정비 공사, 동대문 운동장 터에 내려앉은 번득이는 곡선의 DDP. 우리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공공 건축들은 과연 서울의 도시 생태계를 어떤 모습으로 변화시키고 있는가? 


'건축물'


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진만 보아도, 이 거대한 예술품에 정신을 내려놓을 곳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자연을 이기고도 살아남을 우리의 흔적. 문명의 조각. 그 안에 녹여내는 작가의 메시지.


아, 그러고보니, '러브*데스*로봇' 이라는 넷플릭스의 단편 애니메이션 모둠에 비슷한 작품이 있었다.

지구를 넘어 대기권도 넘는 행성급 규모의 설치미술!! 지구만한 캔버스라면, 그것은 회화일까, 건축일까??  


단순히 상상만을 넘어 공학적 설계를 하고,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반드시 협업을 할 수 밖에 없는 장르.

건축. 


새삼, 건축의 예술성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더불어, 여행이라곤 1도 관심없는 내가 이 책을 한 권 들고 우리나라 각지를 여행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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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 조각가
박화영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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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화장실 가이드, 자살 관광특구, 벽, 무정란 도시, 악몽 조각가, 공터, 혀, 골목의 이면, 주  이렇게 총 9편의 작품이 실려있다.

제목만 보면, 모두 익숙한 단어들이다.

헌데, 약간 미묘한 조합들이 눈에 띈다. 화장실 가이드, 자살 관광특구, 악몽 조각가... 

익숙한 것들의 신선한 조합. 

이 인상이 이 작품집 전체의 인상과 같다.


잘 알려진 소설 기법 중,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기' 가 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는 방법과 정도의 차이가 때로는 순수소설과 장르소설의 경계가 되기도 한다.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눈이 멀게 되면 순수소설이 될 수 있지만, 외계의 존재가 이상한 공격을 해서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의 눈이 멀게 되면 장르소설이 되곤 한다. 지성을 가진 바퀴벌레들이 인간들을 공격하면 장르소설이 되겠지만, 평범한 어떤 사람이 할루아침에 갑자기 벌레가 되버리면 순수소설이 된다. 

개인적으로는 장르를 불문하고 모든 이야기를 좋아하는지라 이런 구별이 무슨 의미 있을까 싶지만, 학문적으로 파고들기 위해서는 세세한 카테고리의 분류가 필요하긴 할터다. 

이 작품에 실려있는 아홉편의 작품들은 이런 관점에서 카테고리의 경계를 절묘하게 넘나든다고 볼 수 있다. 


박화영 작가의 작품은 이 작품집으로 처음 접하는데, 익숙한 것에 익숙한 것을 덧붙여 낯설게 만드는 감각이 탁월한 것 같다.

살짝 배명훈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배명훈 작가는 그 출생부터 'SF' 라는 장르이고, 그 꼬리표 덕분에 보다 과감한 '덧붙이기' 가 가능했다. 박화영 작가의 아이디어 역시 상당히 과감하다. 이야기의 중심축을 살짝만 옮기면 장르소설에 들어갈 수도 있을 정도로 기발한 것들이 눈에 띄었다. 


이 작품집에 실린 단편들 모두를 충실히 기억하고 싶지만, 몇 작품의 감상만 이 공간에 기록하려 한다. 


먼저 작품집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화장실 가이드] 는 제목처럼 화장실을 전문으로 안내하는 가이드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이디어도 무척 과감하지만, 작품의 구성도 무척 대담하다. '매년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사람들이 100만명 중 0.5명 꼴로 존재한다' 는 전혀 없을 것 같지 않은 이야기로 운을 띄운 [화장실 가이드] 는 화자의 개인사와 '화장실 가이드' 를 하며 만난 사람들의 사례가 교차로 진행된다. 여러 이유로 '특별한' 화장실을 찾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을 위해 그런 특별한 화장실- 특정 오피스텔의 화장실이나 군대 막사 건물의 화장실, 외딴 공원의 공중 화장실, 학교의 화장실 등- 을 찾아서 안내해주는 일이 바로 화장실 가이드의 일이다.

화자가 화장실 가이드를 하는 이유는 복잡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단순하지도 않다. 화장실에서 태어나서, 화장실에 버려진 화자. 그렇게 노숙자에게 발견된 화자는 고아원에서 자랐고, 친구가 술집 화장실에 갔다가 그대로 사라져 영영 연락이 끊기는 일이 발생한다.

정말 '화장실에 갔다가 사라졌다' 고 할 수 밖에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화장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의 화자는 결국 화장실 가이드가 된다. 

굉장히 짧은 소설인데, 작품 전반에 흐르는 묘한 위화감은 과하지 않은 유머로 적절히 누르고, 과감한 생략과 시간과 공간에 구애됨 없는 전개로 내러티브를 굉장히 풍성하게 만든다. 훌륭한 아이디어에 과감한 연출, 그야말로 완벽한 서사가 돋보인다. 


'화장실'

인류 문명에 있어 더없이 중요하지만, 더없이 숨기고 싶은 곳이 바로 화장실일 것이다. 세계에서 공신력 있는 잡지나 일간지에서 인간의 삶을 바꾼 n대 발명품을 뽑으면 횃불, 화살 등과 함께 수위를 다투는 것이 바로 수세식 변기다. 배변활동은 섭식만큼 중요한 일이지만, 그 뒷처리는 인류 문명에 있어 아주 큰 숙제였다. 인간의 변은 그야말로 세균과 바이러스 덩어리다. 제 1차 세계대전은 총과 대포보다 참호 안에서 더 많은 젊은이들이 수인성 전염병으로 죽어갔는데, 그 이유는 수만명의 대소변이 섞인 진창 속에 발을 담구고 몸을 구르고 음식을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직도 수인성 질병의 대부분은 인간의 대소변을 타고 퍼져나간다. 이때문일까? 

군대를 다녀온 대한민국 남자들이라면 알거다. 군대에서 화장실 청결에 얼마나 큰 신경을 쓰는지. 언제나 치약이나 락스냄새가 나는 군대 화장실은 개인활동이 제한된 군대라는 집단 안에서 유일하게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이다. 언제, 어떤 시간에 가도 화장실 한칸은 잠겨있다. 언제나 누군가는 그 안에서 편지를 읽거나 쓰고, 초코파이 같은 간식을 몰래 먹기도 하며, 책을 읽기도 하고, 공부를 하기도 하며, 풀 수 없는 성욕을 다스리기도 한다.

단순한 배변공간이 아니라, 유일한 개인공간인 것이다. 


"화장실만큼 혼자 울기에 적합한 장소도 드물죠."

p.15 


이런 공간성은 결혼해서 한 집안의 가장이 될 때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특히 남자들은은 본능적으로 자신만의 동굴을 찾곤 하는데, 집 안에서 아내와 아이들의 눈을 완벽히 피할 수 있는 공간, 화장실은 그야말로 완벽한 동굴이다. 

남녀노소가 따로 있을까.

회사에서 상사에게 핀잔을 들은 여직원이 눈물을 삼키고 번진 화장을 고치는 곳도 화장실이고, 바지의 한가운데 민망한 부위에 국물을 쏟은 남직원이 곤란해 하는 곳도 화장실이다. 

누구에게나 평등한 은밀한 공간. 

작가는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사라지는' 현상을 이야기함으로 이 공간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린다. 

실제로 우리는 가끔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라고 말하고 사라지는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나에게도 몇번이나 있었다. 특히 여럿이서 함께 모이는 술자리에선 매우 잦다. 술자리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화장실 핑계로 자리를 피하기도 하고, 눈맞은 커플들이 일행의 눈을 피해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차례로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를 대기도 한다. 화장실에 갔다가 절친한 한두명에게 '나 갈게. 말 좀 잘 해줘' 같은 톡을 보내고 귀가하기도 하고, 술에 취해 화장실에 갔다가 귀가본능을 발동시키는 사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크게 머릿속에 연상되는 것은 '강남역 살인사건' 일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유명 연예인의 섹스 스캔들과 관련된 커다란 화장실 사건도 있었고, 탄핵당한 전대통령의 화장실 일화도 있었지만, '화장실' 이라는 공간이 누구에게나 평등한 은밀한 공간에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공포의 공간이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화장실 100배 가중처벌법이 필요한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여성혐오' 라는 이슈를 촉발시켰던 이 사건은 남성 중심의 우리 공동체에 경종을 울린 사건임은 분명하다. 

 26쪽에 불과한 이 작품을 덮었을 때 나는 강남역 살인사건이 떠올랐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읽어보니, 이 작품은 살해당한 여성과 연인을 잃어버린 남성을 위한 추모와 위로의 소설로도 읽혔다.

이 작품 안에는 화자와 화자에게 가이드를 의뢰한 사람들 외에 화장실을 통해 평행우주를 여행한다고 주장하는 남고생도 등장하는데, 이 장치가 화장실에 들어갔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돌아올 수 없는, 돌아오지 않는, 돌아오지 않을 이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에 대한 위로와 희망의 메타포로 읽힌 이유다.


공중 화장실에서 태어나, 공중 화장실 그 자리에 버려진 사람이 있다. 바로 '나' 다. 

화장실에 들어온 노숙자에게 발견되어 고아원에서 자랐다. 그리고 나름 친한 친구가 있었다.

단둘이 마주앉아 술 한잔 하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

'나' 에겐 그런 친구가 몇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성이라면 더 없었을 것이다. 

감정적으로 아쉬운 이야기가 오고갔고, 나에게 '나쁜 놈' 이라며 나쁜 기억을 쏟고 오겠다며 화장실에 간다던 친구가 갑자기 사라졌다. 


"아무리 불러도 인기척이 없자 그제야 나는 조금 당황하고는 주인을 부른다. 주인은 화장실 문이 잠겨 있는 걸 확인하고 열쇠를 가지러 갔다가 다시 돌아온다. 그런 다음 화장실 문을 열고는 아무도 없는 화장실 안을 내게 보여준다. 영원히 화장실 주변을 멤도는 나쁜 놈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p. 32   

     

이 작품은 명백히 '상실' 에 관한 이야기다. 

화장실을 '버리는 공간' 이다. 우리는 당연스럽게 버릴 것을 버리러 화장실에 가지만, 이 작품은 버리면 안되는 것을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버리면 안되는 것, 버릴 수 없는 것을 버렸다. 그런 것들을 우리는 '잃었다' 고 한다. 상실이다. 잃으면 안되지만, 잃지 않을 수 없는 것들. 반드시 잃고야 마는 것들. 

그런 것들이 뭐가 있을까? 

반려동물, 부모님, 친구들, 수많은 기회들, 우리의 수명. 지금 이 순간에도 매시간 매초 흘려보내는 이 세상에서 남은 각자의 시간들. 생명. 삶.

얻었다면, 그 다음 스텝은 '반드시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그게 무엇이건.


화자는 화장실에서 태어났지만, 버려짐으로써 화장실에서 부모를 잃었다.

이후 화자는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올때, 다른 평행우주로 이동한다고 믿는 고등학생을 알게 된다. 

결국 화자는 이 학생을 통해 자신의 친구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자신의 방식으로 납득하고 받아들인다.

상실에 대한 화자의 대응인 것이다. 이것을 체념이라고 하면 체념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작가는 '또다른 시작'이라고 이야기한다. 

결말로 향하는 이 개연성이 나는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우울을 먹고 희망을 쌌다고 할 정도의 결말도 좋았다.

26쪽 안에 캐릭터를 완벽히 구축하고, 설정을 명확히 드러냈다. 세계관을 명징하게 표현했다. 


이 작품집에 실려있는 작품들의 아이디어가 너무 기발하고, 서사의 만듦새도 탄탄하다.

모두 바로 만화나 드라마의 시나리오로 각색해도 덜거나 더할 곳이 없을 정도이다.

특히 작품집에 머리에 자리잡고 있는 이 작품은 캐릭터성과 서사의 완성도, 발상이 너무나 흥미로워서 솔직히 뒷 작품들이 얼마간 맘에 안 찰 정도였다.

'화장실 가이드' 라는 이 직업은 배명훈 작가의 '고고심령학자' 에 맞먹을 정도로 머리를 딩~ 울렸다.

고고심령학자처럼 응용범위가 너무 넓어보이지만 적어!!!! 


많은 작가들이 단편의 아이디어를 장편으로 확장시키기도 하는데, '화장실 가이드' 는 정말이지 언젠가 꼭 장편으로 만나보고싶다.  



[혀] 역시 무척 직관적이면서도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주인공은 무슨이유에선지 수면제를 잔뜩 먹었다가 그걸 모두 토해내면서 자신의 '혀' 를 잃어버린다.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목구멍 안쪽으로 들어가버린 것이다. 

평범한-지않은- 회사원이었던 화자는 하루아침에 갑자기 말을 할 수 없게 되면서, 주변 모든 사람들과 소통이 불편하게 된다. 특히 지금 회사에서는 화자의 상관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사건으로 인해 들쑤셔진 상태였고, 화자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사이에 있는 주요한 관계자였기에 입장은 더욱 곤란해졌다. 게다가 여자친구와의 갈등도 있는 상태라 사태는 악화일로로 치닫는다.

그러다 갑자기 몸 안쪽으로 넘어간 혀에게서 '맛' 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폐, 위, 간, 쓸개는 물론, 허리, 엉덩이, 종아리 등의 진피층까지.

특히, '고통스럽거나 후회스러운 기억과 연관된' 맛은 아주 짜고 씁쓸했는데, 어느순간 혀가 그런 곳만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 기억들은 대부분 타인의 폭력에 의해 굴복한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화자는 지금 그런 순간에 놓여있었다. 

온 몸의 맛을 다 보고 온 혀는 어느순간 제자리로 돌아온다.

화자의 선택만이 남은, 그 순간. 


작품집 전체를 통틀어 '화장실 가이드' 와 함께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몇번이나 다시 읽었고, 그 때마다 좋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변신' 이 떠오르는 카프카의 변주처럼 느껴졌는데, 담고있는 메시지와 소재가 참 좋았다. 

평생 타의에 의해, 폭력에 의해 억압받아온 화자가 스스로의 상처를 되짚으며 현실의 억압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는 주제는 지나치게 교훈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 작품 자체가 일종의 우화처럼 읽혀서 주제의식을 살리기엔 이런 직접적인 방식이 안성맞춤이었다. 작가의 의도가 행간과 구조에서 명확히 드러나는데, 작품집의 작품들을 차근차근 읽어나가다 보면 직구과 변화구에 모두 능숙한 유형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반면, [골목의 이면] 은 다 읽고 나서도, 이게 뭔소린가, 싶을 정도였다.

[악몽 조각가]에 등장해야 하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몽환적인 작품이다. 모든 등장인물의 방위와 거리를 숫자로 명확하게 표현하지만, 그래서 더 이해하기 어려운, 독특한 작품이다.

이야기의 구조도 서사적이고, 형식도 명료하며, 사건도 뚜렷하지만 핵심이 잘 짚어지지 않는다.

진짜 기묘한 체험이었다.


책의 마지막에 자리잡고 있는 [주] 라는 작품은 형식면에서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무슨 사전'  시리즈가 떠올랐던 작품이다. 의도적으로 책의 말미에 배치한 것으로 보이는데, 아주 잠깐동안은 정말 책의 각주를 모아놓은 것인 줄 알았다가, 단편집에 각주가 십수페이지나 될 리 없지, 하며 헛웃



음을 짓기도했다. 물론, 문장에 아주 작은 숫자가 찍혀있는 모양을 본 기억도 없었고.

'각주' 의 형식을 띈 소설이었다. 아이디어는 위에 언급했던 베르나르에게서 본 적이 있지만, 이 작품은 각주의 형식을 통해 한편의 서사를 충실히 완성한다. 이런 경우는 정말이지 처음 보았던 것 같다.

특히 작품에 등장하지 않는 또다른 텍스트 ;각주니까, 그 주가 달렸을 문장을 상상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야말로 독자를 참여시키는 작품이랄까. 

아마 주가 달린 원전 텍스트는 어떠한 '기둥' 에 관한 것인 듯 하다. 저자가 작중에서 언급하듯 러브 크래프트가 떠오르는 초고대의 신화적 존재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모노리스가 연상되기도 했다. 물론, 아이디어는 발표되는 순간 공공재와 같은 것이라서 아서 클라크, 러브 크래프트, 스탠리 큐브릭 모두 영향을 주고 받았을 수 있다. 박화영 작가 역시 그 세례를 받았을 수 있고.)

나 역시 책을 오랫동안, 각종 망상과 공상을 섞으며 천천히 읽는 편이라, 이 형식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특히 '체험' 으로서의 독서로 굉장히 좋아하는지라, 더더욱. 이 기둥과 주석에 등장하는 각종 전문가들, 전문 집단들 모두 기발하고 흥미로워서 아주 즐거웠다. 

작가가 머릿속에 담고 있는 세계관을 상세히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는데, 조만간 이 작품도 장편으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아마 그 세계에는 화장실 가이드도 있고, 평행우주를 넘나드는 사람도 있으며, 악몽 조각가와 주석만 읽는 사람들도 충분히 존재할 것 같다.


전체적인 감상은 '정말 기발하다' 였다.

익숙한 것을 비트는 각종 스킬들이 총 출동하는 그야말로 경계선을 시험하는 작품집이었다.

현실세계의 우울을 찾아내는 주의력과 관찰력도 돋보였고, 어떻게든 치유하고, 위로하고 싶어하는 작가의 낙천성과 따뜻함도 읽혔다. 

일종의 '기담' 으로 묶는 듯 한데, 박화영 작가가 그렇게 딱 잘라 정의하는 듯한 표현을 좋아할지는 잘 모르겠다. 

비틀고, 꼬고, 변형하고, 파괴하고, 다시 조립하는 그런 작업을 좋아하는 것 처럼 보여서.

장편이 참 기대된다.

어떤 신묘한 세계가 등장할까?

그 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또 어떤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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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 가야 한다
정명섭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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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 위조' 라는 소재는 이야기의 역사 안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소재이다.

멀리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는 신들이 툭하면 신분을 위장해 인간들을 곤경에 빠뜨렸고, 수많은 구전 동화 속에서도 얼굴이 비슷한 인물들이 서로의 신분을 바꿔치기 하거나, 신통력을 가진 동물이나 사람들이 신분이 다른 누군가의 모습으로 변신해 그 집 안방을 차지하곤 한다. 기독교가 탄생한 중동 지방에서는 선하거나 악한 신이 여행자나 가족, 친지의 모습으로 공동체를 시험한다는 이야기가 넘치고 넘친다.

이런 류의 이야기들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왕자와 거지' 일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 문명의 초기부터 이러한 소재가 쓰인 이유는 명확하다. 

두 말 할 필요 없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의 신분 정보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너는 누구냐?" 는 말은 곧, "적이냐 아군이냐?" 와 같은 질문이다. 

타인에 대한 정보. 신분 정보를 통한 '피아식별'은 생존을 위해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행위였다.

신분 확인이 중요했던 이유는, 신분 정보를 위조하는 일이 대단히 쉬웠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종족에게 동족간의 생존 경쟁은 필요불가결한 일이었다. 인간은 모든 '호모' 동족들이 멸종하고, '호모 사피엔스' 한 종만이 살아남았건만, 제한된 자원 속에서 더 나은 번성을 위해 서로를 죽여야만 했다. 다른 그 어떤 종족보다 동족들이 가장 위험하다는 사실을 아는 우리는 본능적으로 타인을 의심하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 
결국, 한 사람의 정체성은 그 사람 혼자 만들고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 사람 주변의 '다른 사람들' 로부터의 공증이 필요하다. 가족, 이웃, 지역 공동체, 국가. 신분을 위조한다는 것은 결국 주변의 모두를 속여야 한다는 것. 우리 공동체 안에, 나와, 우리 모두를 속이는 '신분을 알 수 없는 자' 가 있다. 그 사람이 그런 행위를 하는 이유가 좋은 것일 확률은 대단히 낮다.

우리가 리더로 따르는 '왕' 의 자식, 나아가 다음 리더로 따라야 하는 왕자가 아니라, 길거리를 떠돌던 '거지' 일수도 있다. 공동체원 전체를 속이는 리더. '왕자와 거지' 플롯의 핵심은 이 미스테리인 것이다.    


 '왕자와 거지' 의 이 플롯을 모태로 비틀리고, 무너지고 뒤집히고, 다른 플롯들과 유기적으로 섞여가며 놀라운 이야기들이 태어났다.  화자가 신분을 감추고 살아가는 동안 생기는 불안감과 주변 사람들을 속이는 과정 속에서 생겨나는 갈등이 조마조마한 서스펜스를 이끌어내고,  신분을 속여야 했던 이유와 개연성이 충분한 신분 공개의 과정이 드러나면 강렬한 카타르시스가 생겨난다. 이는 야깃꾼들이 결코 놓칠 수 없는 먹잇감이다.

하지만, 주요 인물들의 신분을 감추거나 뒤바꾸기 위한 설정들을 과도하게 하다 보면 작위성을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고, 이 설정을 헐겁게 하면 도입부부터 설득력을 상실해버리고, 이야기는 그 순간 끝이다. 

 '왕자와 거지' 이야기도 차근차근 따지면서 들어보면 설득되기가 쉽지 않다.

역사에 근거한 이야기일수록 고증이 중요해지는 이유다. 

 '왕자와 거지가 길에서 마주쳤다고? 그 자리에서 옷을 바꿔입는다구?? 어느시대, 어느 국가의 어느 왕인데? 왕자가 수행원도 없이 나갔어? 그것도 아주 어린 꼬마가? 어느 시대가 그렇게 허술했지?? ' 

 이러한 초반 설득을 잘 한 작품이 "광해: 왕이 된 남자" 일 것이다.

궁정 암투로 혼수 상태에 빠진 왕을 대신한 광대의 이야기. 한낱 천민이었던 광대가 궁정 생활을 하며 매화틀이나 수라상을 돌보는 나인이나 기미상궁, 중전과의 이야기를 통해 조선시대 임금의 일상을 비교적 세밀하게 고증함으로써 도입부의 설득력을 높였다. 물론,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서스펜스를 대부분 코미디로 활용했기에, 클라이막스의 카타르시스는 다른 방향에서 찾았다.

불안감을 고조시키다 마지막에 그 불안감을 일거에 해갈하는 것이 카타르시스의 기본이다. 애초에 [광해: 왕이 된 남자] 는 그러한 반응을 기대하고 만든 작품 자체가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동화'판 '왕자와 거지' 의 조선식 변주였다.


[살아서 가야 한다] 는 그 플롯에서 서스펜스를 극대화 시킨 작품이다.

서두에 장황하게 별 상관도 없는 영화 이야기를 갖다붙인 이유는, 이 작품 역시 고증이 대단히 잘 된 역사물이기 때문이다. 

초반에 등장하는 양반과 평민의 생활상의 차이에서부터 말습관, 소소한 예법까지 세밀하게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도입부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한 용도인 동시에, 후반부를 위한 치밀한 복선들이기도 하다.

초반부부터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장치들을 배치하고, 그 대부분이 중~후반에 효과적으로 활용된다. 

인물 한 명, 대사 한 줄, 소품 하나까지 적절하다. 마치 그 시대에 와 있는 듯, 간명한 묘사들이 쏙쏙 와서 박혔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황천도가 오랜 세월이라곤 하나 말투와 어법, 예법, 행동거지들을 단지 '들은 것' 만으로 익혔다는 것이 지나치게 과한 설정이었다고 비판할 수는 있을 것이나, 그것이 불가능하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여겨 볼 부분들은 서스펜스와 그것들을 위한 장치이기도 하지만, 명나라로부터 출병 요청을 받은 조선과, 그것을 거부할 수 없었던 단시 조선의 조정, 그리고 먼 요동 지역으로 원정길을 떠난 조선 군인들의 안타까운 결말도 외면할 수는 없다.

저자 역시, 그 지점에서부터 이 이야기를 구상했을 것이다. 신분이나 태생, 출생 등이 아무렇지 않게 전복될 수 있는 상황.

작품 안에서 가장 튀는 존재인 강은태의 부인 역시, 그러한 특수한 상황 속에서 역사의 고증 안에 스며든다.

모든 인물들이 이름이 명확히 등장하지만, 강은태의 부인은 '부인' 또는 '며느리' 로만 등장한다.

사실상 은태의 집안을 일으켜 세운 건 그녀였지만, 당시 역사적 고증에 따른다면 그것이 맞다. 

이야기는 황천도의 시점에서 흘러가고, 명백히 그의 사고방식을 좇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당대의 여성이라면 '유씨 댁 맏딸' 그리고 강철견댁 며느리, 강은태의 부인에서 머물렀을 것이다. 이러한 세세한 설정들이 조금은 작위적일 수 있는 설정들을 미묘하게 피할 수 있게 하는 역사물로써의 리얼리티를 제공한다. 


당시 사회는 엄연한 계급사회였다.

양반은 언제나 평민, 천민에 우선했다. 그것은 여성도 변함없었다.

양반가 여성은 언제나 평민, 천민 출신 남성보다 우선했으나, 관념적 차이가 있었다. 여성과 노비는 그 집안의 '재산' 이었던 것이다.

노비와 여성, 아이는 집안의 소유였고, 집안은 가문의 소유였으며, 가문은 임금의 소유였다. 국가 경영은 임금의 재산을 경영하는 일이었다. 양반들은 왕의 집사들이었고, 평민들은 양반의 집사들이었으며, 노비는 단순한 재물이었다.

이 구도는 국가와 국가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은 '사대' 의 나라였다.

임금과 신하, 양반과 천민이 나뉘어 있듯, 국가간에도 신분의 차이와 그에 따른 질서가 있다고 믿었다.

조선은 명나라를 그렇게 여겼고, 명나라 역시 조선을 그렇게 여겼기에 조선의 번듯한 양반가 출신 무인들은 명나라의 군인들에게 칼보다도, 창보다도 쓸 모 없는 '것' 들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버려지고, 방치되었고, 결국 모두가 똑같은 청나라의 '포로' 상태가 된다.

그런 시대였고, 이 작품은 아주 세세한 곳에서까지 그런 관념들을 잘 녹여내고 있기 때문에, 작품속 인물인 황천도와 강은태의 심경이 개연성을 얻는다. 

개념까지 고증해 내는 일관된 흐름이 자못 억지스러울 수 있는 설정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역사를 활용하는 장르물들이 고증을 소흘히 하면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류 문명에 '자유' 와 '평등' 이라는 개념이 자리잡은 것은 채 300년도 되지 않았다.

조선땅에 그런 '단어' 자체가 처음 등장한 건 고작 200여년 전, 동학농민혁명에 이르러서다. 아마 그 당시 그 단어를 외쳤던 사람들도, 결국엔 '나랏님' 을 위해 칼과 죽창을 바닥에 버렸다. 이러한 신분 차별은 근대까지 이어졌다. 일제 식민 치하까지도 우리 민족은 개화하지 못했다. 그토록 무능했던 고종이었지만, 초기 독립군들은 '나라를 왕에게 돌려드리자' 는 마음으로 전투에 임했다고 한다. 평등에 대한 구체적인 개념은 요동 일대에서 중국과 러시아 공산당과 연합했던 독립군들을 통해 비로소 들어왔고, 신분제는 왕정은 미군정에 의해 해체되면서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중'이다. 


이렇듯 섬세한 고증과, 오직 서스펜스를 위해 쌓아올린 장작들, 그리고 그것들을 한방에 후루룩 태워버리는 짜릿한 카타르시스.

그리고 끈적한 마무리까지.

간만에 접한 깔끔한 장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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