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 가야 한다
정명섭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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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 위조' 라는 소재는 이야기의 역사 안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소재이다.

멀리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는 신들이 툭하면 신분을 위장해 인간들을 곤경에 빠뜨렸고, 수많은 구전 동화 속에서도 얼굴이 비슷한 인물들이 서로의 신분을 바꿔치기 하거나, 신통력을 가진 동물이나 사람들이 신분이 다른 누군가의 모습으로 변신해 그 집 안방을 차지하곤 한다. 기독교가 탄생한 중동 지방에서는 선하거나 악한 신이 여행자나 가족, 친지의 모습으로 공동체를 시험한다는 이야기가 넘치고 넘친다.

이런 류의 이야기들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왕자와 거지' 일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 문명의 초기부터 이러한 소재가 쓰인 이유는 명확하다. 

두 말 할 필요 없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의 신분 정보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너는 누구냐?" 는 말은 곧, "적이냐 아군이냐?" 와 같은 질문이다. 

타인에 대한 정보. 신분 정보를 통한 '피아식별'은 생존을 위해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행위였다.

신분 확인이 중요했던 이유는, 신분 정보를 위조하는 일이 대단히 쉬웠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종족에게 동족간의 생존 경쟁은 필요불가결한 일이었다. 인간은 모든 '호모' 동족들이 멸종하고, '호모 사피엔스' 한 종만이 살아남았건만, 제한된 자원 속에서 더 나은 번성을 위해 서로를 죽여야만 했다. 다른 그 어떤 종족보다 동족들이 가장 위험하다는 사실을 아는 우리는 본능적으로 타인을 의심하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 
결국, 한 사람의 정체성은 그 사람 혼자 만들고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 사람 주변의 '다른 사람들' 로부터의 공증이 필요하다. 가족, 이웃, 지역 공동체, 국가. 신분을 위조한다는 것은 결국 주변의 모두를 속여야 한다는 것. 우리 공동체 안에, 나와, 우리 모두를 속이는 '신분을 알 수 없는 자' 가 있다. 그 사람이 그런 행위를 하는 이유가 좋은 것일 확률은 대단히 낮다.

우리가 리더로 따르는 '왕' 의 자식, 나아가 다음 리더로 따라야 하는 왕자가 아니라, 길거리를 떠돌던 '거지' 일수도 있다. 공동체원 전체를 속이는 리더. '왕자와 거지' 플롯의 핵심은 이 미스테리인 것이다.    


 '왕자와 거지' 의 이 플롯을 모태로 비틀리고, 무너지고 뒤집히고, 다른 플롯들과 유기적으로 섞여가며 놀라운 이야기들이 태어났다.  화자가 신분을 감추고 살아가는 동안 생기는 불안감과 주변 사람들을 속이는 과정 속에서 생겨나는 갈등이 조마조마한 서스펜스를 이끌어내고,  신분을 속여야 했던 이유와 개연성이 충분한 신분 공개의 과정이 드러나면 강렬한 카타르시스가 생겨난다. 이는 야깃꾼들이 결코 놓칠 수 없는 먹잇감이다.

하지만, 주요 인물들의 신분을 감추거나 뒤바꾸기 위한 설정들을 과도하게 하다 보면 작위성을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고, 이 설정을 헐겁게 하면 도입부부터 설득력을 상실해버리고, 이야기는 그 순간 끝이다. 

 '왕자와 거지' 이야기도 차근차근 따지면서 들어보면 설득되기가 쉽지 않다.

역사에 근거한 이야기일수록 고증이 중요해지는 이유다. 

 '왕자와 거지가 길에서 마주쳤다고? 그 자리에서 옷을 바꿔입는다구?? 어느시대, 어느 국가의 어느 왕인데? 왕자가 수행원도 없이 나갔어? 그것도 아주 어린 꼬마가? 어느 시대가 그렇게 허술했지?? ' 

 이러한 초반 설득을 잘 한 작품이 "광해: 왕이 된 남자" 일 것이다.

궁정 암투로 혼수 상태에 빠진 왕을 대신한 광대의 이야기. 한낱 천민이었던 광대가 궁정 생활을 하며 매화틀이나 수라상을 돌보는 나인이나 기미상궁, 중전과의 이야기를 통해 조선시대 임금의 일상을 비교적 세밀하게 고증함으로써 도입부의 설득력을 높였다. 물론,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서스펜스를 대부분 코미디로 활용했기에, 클라이막스의 카타르시스는 다른 방향에서 찾았다.

불안감을 고조시키다 마지막에 그 불안감을 일거에 해갈하는 것이 카타르시스의 기본이다. 애초에 [광해: 왕이 된 남자] 는 그러한 반응을 기대하고 만든 작품 자체가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동화'판 '왕자와 거지' 의 조선식 변주였다.


[살아서 가야 한다] 는 그 플롯에서 서스펜스를 극대화 시킨 작품이다.

서두에 장황하게 별 상관도 없는 영화 이야기를 갖다붙인 이유는, 이 작품 역시 고증이 대단히 잘 된 역사물이기 때문이다. 

초반에 등장하는 양반과 평민의 생활상의 차이에서부터 말습관, 소소한 예법까지 세밀하게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도입부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한 용도인 동시에, 후반부를 위한 치밀한 복선들이기도 하다.

초반부부터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장치들을 배치하고, 그 대부분이 중~후반에 효과적으로 활용된다. 

인물 한 명, 대사 한 줄, 소품 하나까지 적절하다. 마치 그 시대에 와 있는 듯, 간명한 묘사들이 쏙쏙 와서 박혔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황천도가 오랜 세월이라곤 하나 말투와 어법, 예법, 행동거지들을 단지 '들은 것' 만으로 익혔다는 것이 지나치게 과한 설정이었다고 비판할 수는 있을 것이나, 그것이 불가능하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여겨 볼 부분들은 서스펜스와 그것들을 위한 장치이기도 하지만, 명나라로부터 출병 요청을 받은 조선과, 그것을 거부할 수 없었던 단시 조선의 조정, 그리고 먼 요동 지역으로 원정길을 떠난 조선 군인들의 안타까운 결말도 외면할 수는 없다.

저자 역시, 그 지점에서부터 이 이야기를 구상했을 것이다. 신분이나 태생, 출생 등이 아무렇지 않게 전복될 수 있는 상황.

작품 안에서 가장 튀는 존재인 강은태의 부인 역시, 그러한 특수한 상황 속에서 역사의 고증 안에 스며든다.

모든 인물들이 이름이 명확히 등장하지만, 강은태의 부인은 '부인' 또는 '며느리' 로만 등장한다.

사실상 은태의 집안을 일으켜 세운 건 그녀였지만, 당시 역사적 고증에 따른다면 그것이 맞다. 

이야기는 황천도의 시점에서 흘러가고, 명백히 그의 사고방식을 좇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당대의 여성이라면 '유씨 댁 맏딸' 그리고 강철견댁 며느리, 강은태의 부인에서 머물렀을 것이다. 이러한 세세한 설정들이 조금은 작위적일 수 있는 설정들을 미묘하게 피할 수 있게 하는 역사물로써의 리얼리티를 제공한다. 


당시 사회는 엄연한 계급사회였다.

양반은 언제나 평민, 천민에 우선했다. 그것은 여성도 변함없었다.

양반가 여성은 언제나 평민, 천민 출신 남성보다 우선했으나, 관념적 차이가 있었다. 여성과 노비는 그 집안의 '재산' 이었던 것이다.

노비와 여성, 아이는 집안의 소유였고, 집안은 가문의 소유였으며, 가문은 임금의 소유였다. 국가 경영은 임금의 재산을 경영하는 일이었다. 양반들은 왕의 집사들이었고, 평민들은 양반의 집사들이었으며, 노비는 단순한 재물이었다.

이 구도는 국가와 국가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은 '사대' 의 나라였다.

임금과 신하, 양반과 천민이 나뉘어 있듯, 국가간에도 신분의 차이와 그에 따른 질서가 있다고 믿었다.

조선은 명나라를 그렇게 여겼고, 명나라 역시 조선을 그렇게 여겼기에 조선의 번듯한 양반가 출신 무인들은 명나라의 군인들에게 칼보다도, 창보다도 쓸 모 없는 '것' 들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버려지고, 방치되었고, 결국 모두가 똑같은 청나라의 '포로' 상태가 된다.

그런 시대였고, 이 작품은 아주 세세한 곳에서까지 그런 관념들을 잘 녹여내고 있기 때문에, 작품속 인물인 황천도와 강은태의 심경이 개연성을 얻는다. 

개념까지 고증해 내는 일관된 흐름이 자못 억지스러울 수 있는 설정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역사를 활용하는 장르물들이 고증을 소흘히 하면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류 문명에 '자유' 와 '평등' 이라는 개념이 자리잡은 것은 채 300년도 되지 않았다.

조선땅에 그런 '단어' 자체가 처음 등장한 건 고작 200여년 전, 동학농민혁명에 이르러서다. 아마 그 당시 그 단어를 외쳤던 사람들도, 결국엔 '나랏님' 을 위해 칼과 죽창을 바닥에 버렸다. 이러한 신분 차별은 근대까지 이어졌다. 일제 식민 치하까지도 우리 민족은 개화하지 못했다. 그토록 무능했던 고종이었지만, 초기 독립군들은 '나라를 왕에게 돌려드리자' 는 마음으로 전투에 임했다고 한다. 평등에 대한 구체적인 개념은 요동 일대에서 중국과 러시아 공산당과 연합했던 독립군들을 통해 비로소 들어왔고, 신분제는 왕정은 미군정에 의해 해체되면서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중'이다. 


이렇듯 섬세한 고증과, 오직 서스펜스를 위해 쌓아올린 장작들, 그리고 그것들을 한방에 후루룩 태워버리는 짜릿한 카타르시스.

그리고 끈적한 마무리까지.

간만에 접한 깔끔한 장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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