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익은 세상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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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시절의 기억을 파헤치다 보면 어렴풋히 한 장면이 떠오른다.

거대하고 광활한 허연 동산. 그래, 딱 책의 표지와 같은, 허연 덩어리의 거대한 군락이 멀찌감치 보이고, 흔들거림과 버스냄새 사이로 어른들은 재빨리 창문을 닫는다. 창문을 닫았어도 시큼하고 지독한 쓰레기 썪는 냄새는 어디선가 스며들어왔고, 내 멀미는 지독하게 심해졌더랬다. 엄마는 거기가 바로 '난지도' 라고 말해주었고, 난지도가 어떤 동네인지는 조금더 후에 '난지도 아이들' 같은 제목을 가지고 있던 청소년 문고를 통해 알게 되었다. 스치기만 해도 치명적인 병에 걸린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난지도 동네 사람들. 어마어마한 쓰레기 동네 난지도. 지금은 거대한 인공 산으로 덮여있고, 콘크리트와 벽돌을 부어 만든 커다란 축구 경기장과 보기 좋은 공원들, 빌딩등지가 들어서 있는 그 곳은 이제 그 이름 '난지도' 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공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우리는 당연하게 그 곳이 서울과 수도권의 각종 쓰레기들이 모여들던 초대형 쓰레기통이었다는 사실을 잊어갔다. 당연히, 그 곳에서 살던 사람들도 잊혀져 갔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무렵, 책 좀 읽는다는 문학소년들 사이에서 황석영 작가는 빨갱이라더라~ 는 소문을 주워들었다. 당시에는 진보와 보수의 명확한 의미조차 알지 못했고,  황석영 작가가 법을 어기고 북한에 갔던건 사실이었으니까, '아, 정말 그런가보다, 황석영 작가의 책은 읽으면 안되나보다...' 라고 막연하게 받아들였다.  북한에서 김일성이랑 건배를 하고 왔다더라, 만세를 부르고 왔다더라, 김일성 찬양을 하고 왔다더라 라는 소문들이 바로 그 근원지였다. 황석영 작가가 평양을 방문했던 일은 내가 '국민'학생 시절이였지만, 10여년이 지난 그 시점까지도 정말 그런 행동들이 무시무시한 - 그래, 거의 반역에 가까운 끔찍한 행동이라고 받아들였다. 난 얼마나 생각없는 고교생이었단 말인가. 무튼, 그런 편견은 대학 들어가서, 황석영 작가의 [오래된 정원] 을 읽고 나서야 깰 수 있었으니, 언론의 세뇌란, 그리고 획일적 교육이란 이렇듯 무서운 법이다.

 

 황석영 작가의 작품은 언제나 잊어버렸던 것들을 떠오르게 하는 힘이 있다.

 그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깊은 곳의 무언가를 꿰뚫는 통찰력이 있었다. 때로는 자연히 잊힌 것들이, 때로는 억지로 기억의 저편으로 묻어버린 것들 말이다. 인간은 좋은 것만 기억하고 받아들이려 한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습성이다. 언제나 우리가 지난날을 추억하며, '아 그 땐 좋았지' 라고 말하지 않는가? 분명 그때나 지금이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들, 행복하고 기쁜 것들의 총 합은 비슷 할 터인데, 희안하게 추억은 언제나 아름답기만 하다. 당연하다. 추한 것들은 자연스러운 방어기제로 인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르륵 지워져 버리고 만다. 하지만, 황석영 작가의 작품들은 가장 깊숙한 곳, 이중 삼중으로 콘크리트를 덮고 덮은 그 안의 것들을 퍼올린다.

 

 [바리데기] 를 읽으면서는, '아, 맞다. 북한 주민들도 우리 동포들이었지. 저 흙파먹고 살고, 풀 뜯어먹고 사는 사람들. 다 우리 동족이었지.' 같은 것들이 불쑥 불쑥 솟아올랐다. 솔직히 잊고있었다. 군대에서 배운, 북한은 그냥 적敵이었으니까, 고통받는 북한 주민들의 일 따윈 빨리 잊어버려야 했다. 전쟁이 나면 우리가 총칼을 겨눠야 할 북한 군인들의 부모들, 자녀들, 자식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만 기억해야 했다. [오래된 정원] 에서는 어땠는가. 자유를 위해 투쟁했던 소위 '민주투사' 들. 일부는 변절에 변절을 거듭하며 정치인으로 나서기도 하지만, 전과자라는 이름으로 사회의 변두리에서 떠돌다가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개밥바라기 별] 에서는 누구나 한번쯤 겪었던 길거나 짧은 방황의 터널. 내가 언제 그런 시절이 있었어? 라며 살고 있고, 자녀들에게 혹은 아랫세대들을 조소의 눈길로 바라보지만, 누구에게나 그런 시절이 있지 않았는가? 마치 없었던 일처럼 잊어버린. 잊혀버린. 잊으려고 잊으려고 애썼던 것들. '향수' 라는 단어로 포장하기엔 좀 더 과격하고, 고통스러우며, 처절하고, 더러운 것들.

 [장길산] 같은 대하 역사소설이나 [강남몽] 등 다른 작품들을 더 예로 삼지 않아도, 황석영 작가는 언제나 우리 사회의 치부를 향해 비수를 던져왔다. 근대화의 과정속에, 국가의 경제성장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그늘 아래, 애국심이라는 이름 안에 가리운 수많은 고난들, 고통들, 핍박들. 그것들을 마치 눈 앞에 그려내듯 생생하게 펼쳐낸다. 그가 그려내는 사건와 인간 군상들은 지나칠정도로 리얼하다. 

 그의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그 리얼리즘으로 인해 대부분의 독자들은 불편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찬탄해 마지 않을 수 없었을 터다.

그의 비수는 언제나 잔뜩 벼려져 있었고, 그 시퍼런 비수의 끝이 향하는 곳은 언제나 정확했으니까.

 

 몇 년 전,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형과 점심을 먹은 적이 있다. 또 하나의 미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 곳은 모든 음식들이 많고 컸다. 1인분이라고 믿겨지지 않은 만큼 엄청난 크기의 스테이크와 피자, 그리고 감자튀김들. 난 먹다 먹다 남아서 어떻게든 포장해서 가지고 가려 했지만, 그 곳에서는 남는 음식을 포장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조금 주위를 둘러보니, 수많은 미군들, 혹은 그의 미국인 가족들은 남은 음식들은 아낌없이 버리고 있었다. 형은 그것이 바로 '미국식 소비문화' 라고 했다.

 우리의 조상들은, 아니 부모님들만 해도 물건이란 최대한 오래 쓰는 것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옷 한 자락, 소쿠리 하나까지도 정성들여 만들고, 알뜰하게 사용했다. 대를 이어 넘겨받을 정도로. 돌리고 돌려서 사용하고, 수명이 다 해도 그 재료를 다시 사용할 수 있을정도로. 하지만, 최근의 우리는 어떠한가?? 가장 빠른 속도로 버려지는 것들 중 대표적인 물건을 꼽으라면 휴대폰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내 서랍 안에도 네대의 휴대폰이 잠자고 있다. 2000년에 처음 손에 쥐었던 핸드폰. 군대 다녀와서 바꾼 휴대폰, 그 뒤에 바꾼 휴대폰을 잃어버려서, 바로 구입한 중고 휴대폰. 여자친구랑 헤어지고 번호와 통신사를 옮기기 위해 해지한 휴대폰. 잃어버린 폰까지 결과적으로는 5대의 휴대폰을 10년 남짓한 시간동안 소비해버린 셈이다. 군대에 있던 시절엔 휴대폰을 쓰지 않았으니, 휴대폰 한대당 2년도 채 쓰지 못했다. 

 연간 음식물 쓰레기 양도 어마어마하다. 뿐인가, 컴퓨터, TV, MP3 플레이어, 전자수첩, PMP 등 엄청난 전자기기들이 수명을 반도 채우지 못한채 '쓰레기' 라는 딱지를 붙이고 쏟아져 나온다. 하루 석유 소비량은 또 얼마나 대단할까? 사람들은 일신의 편함을 위해 수많은 것들을 소비하고 있다. 바야흐로, 진정한 소비사회. 바로 자본주의의 화신이자, 분신이자, 본질이다.

 

 [낯익은 세상] 은 그 모든 불편한 진실들을 떠오르게 만든다.

열네살이지만 열여섯이라고 나이를 불려 말해도 통할법한 덩치에, 말썽꾸러기이기도 해서 경찰서를 드나들면서 별명을 얻은 '딱부리' 는 엄마와 함께 '꽃섬' 이라고 불리우는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된다.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남편을 둔 홀어머니의 생존을 위한 당연한 선택이다. 어느 국가, 어느 시대건 머리가 굵기 시작한 아들을 엄마 혼자 키우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딱부리의 엄마는 무슨 일이든 해야 했고,  딱부리가 '아수라 반장' 이라고 부르는 옛 동무의 제안은 달콤했을터다. 아수라 반장을 따라 둥지를 틀게 된 '꽃섬' 은 다름아닌 거대 쓰레기 매립지였다. '분리수거' 라는 개념이 아예 없던 시절. 정확히 어느 지역에 있었던 매립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각종 산업 폐기물과 공업 폐기물이 함께 흘러드는 거대한 쓰레기 매립장 꽃섬'. 그 쓰레기 더미 위에 삶의 터전을 세우고, 쓰레기를 뒤지는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생존해 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쓰레기를 뒤지는 권리조차 돈으로 사고팔던 시절, 아수라 반장은 제법 큰 구역을 가지고 있는 조폭의 보스같은 '반장' 이었고, 그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딱부리의 엄마는 어렵지 않게 꽃섬에 터를 틀게 된다. 아수라 반장에게는 아들이 한 명 있었다. 머리에 화상을 입어 쭈글쭈글한 흉터가 있는 열한살의 아이는 약간 모자라 보였고, 이름은 '땜통' 이라고 했다. 아수라 반장의 아내는 땜통을 낳고, 결국 그들과 꽃섬을 버리고 어디론가 도망갔다.

 그리고, 그 자리는 딱부리의 엄마가 차지하게 되었고, 딱부리와 땜통은 형제처럼 어울리게 된다.

 

 '꽃섬' 은 '난지도' 와 닮아있다. 수많은 쓰레기들이 무차별적으로 매립되던 곳이라는 점도 그렇고, 쓰레기가 쌓이기 전에는 무척 아름다운 곳이었다는 점도 그렇다. 꽃섬은 지금은 어마어마한 쓰레기로 뒤덮인 쓰레기 산이지만, 그 전에는 강이 흐르고 모래밭 포구와 한들거리는 수수밭, 줄지어 서있는 버드나무들이 있었고, 풀꽃이 가득 피어난 강가에는 어미소와 송아지들이 풀을 뜯고, 오리가 날아앉거나 물장구를 치는 모습들이 익숙한 아름다운 동네였다. 필경, 그러한 아름답던 광경들이 악취가 진동하는 쓰레기들로 뒤덮인 것은 부근에 생긴 도심 때문일 터다. 건물들을 세우며 생기는 수많은 건축 폐기물들을 도시 변두리 강 건너편으로 밀어내고, 그 자리에 도시에서 나오는 각종 생활 폐기물들을 쌓아내기 시작했을터다. 

 작품 안에서 꽃섬과 연결되는 공간은 바로 근처 도시의 '백화점' 이다. 백화점은 자본주의 소비지향의 상징과도 같다. 욕망을 자극하는 곳인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곳. 매대에 진열되어있는 수많은 '소비재' 들. 백화점 직원들은 '맛깔나게' 상품을 진열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보석은 더욱 반짝거리게, 옷은 더욱 아름답게, 음식은 더욱 맛있어 보이게. 가라앉아 있던 온갖 욕구를 퍼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욕구를 충족시킨 소비재들은 당연하게도 쓰레기가 되어 꽃섬으로 향한다. 도시 사람들의 뒷간인 셈이다.

 그리고, 백화점에서 욕구를 충족시킬 능력이 없는 사람들. 도시 안에서 치열한 돈의 경쟁을 이겨낼 수 없는 사람들. 그들 또한 필연적으로 도시의 변두리로 밀려나고, 살아남기 위해, 살아내기 위해 꽃섬으로 향한다. 그들이 먹고 사는 것은 쓰레기가 아닌, 충족되고 버려진 욕망의 찌꺼기이다.

 

 [낯익은 세상] 속에 등장하는 '쓰레기' 는 바로 '욕구' 의 메타포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욕구'란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기반 에너지이다.  인간의 욕구란 그 포장을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쓰고 나면 더럽고 추해진다. 악취를 풍기고, 모든 사람들이 기피하게 되는 쓰레기가 된다. 자본주의는 자유주의와 맞물리며 인류에게 최악의 결과물을 끊임없이 내보이고 있다. 그렇다, 바로 '쓰레기' 이다. 인간들은 결국은 쓰레기가 되어버릴 것들을 위해 아둥바둥 거리며 삶을 소비하고 있다. 자연을 파괴하고, 우리 스스로가 지켜내야 할 존엄성과 인간성을 부숴버리고 있는 셈이다. 작품 안에 등장하는 꽃섬의 사람들 역시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한 단상이다. 욕구 충족을 위한 끊임없는 경쟁. 그 안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동물과도 같은 삶을 살게 된다. 꽃섬의 사람들은 결혼의 개념도 없고, 정조나 의리의 개념도 없다. 딱부리의 엄마와 아수라 반장처럼 꽃섬 안의 남녀들은 쉽게 파트너를 바꿔가며 욕망의 한 부분을 채워가며, 쓰레기를 뒤적이는 삶을 산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욕구의 충족을 위해 자연을 파괴할 것은 물론, 인류가 소중하게 간직해 오던 전통 가치관의 파괴 또한 종용한다. 자본주의는 욕망의 불꽃을 부채질 하는 사회적 시스템이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살 수 있다고 광고한다. 백화점에 진열되어있는 상품들처럼, 여성을 진열하고, 남성을 진열한다. 사랑을 팔아 욕구를 충족시키라고 한다. 우정을 팔아 욕구를 충족시키라고 한다. 윤리를 팔아 욕구를 충족시키라고 한다. 그렇다. 욕구, 욕망을 위해 인간성을 팔라고 종용한다. 결국은 쓰레기가 되어버릴 것들을 사기 위해 모든 것을 팔아버리라고 강요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팔지 않고 지키려는 사람들은 도태되고 밀려난다. 마치 작품속에 등장하는 신들린 여자 '빼빼엄마' 처럼 정신병원으로 끌려간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밀려가 버리는 것이다. 지금은 도깨비가 되어버린 꽃섬의 원래 주민들처럼, 어디론가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쫓겨나고 만다. 작품속에 등장하는 도깨비들. 그것은 우리가 이 알량한 소비사회, 욕구충족이 최우선인 세상속에서 밀어내고 지워내고 무시하고 묻어버린 수 많은 우리의 전통 가치관과 윤리의식들이다.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그것들을 묻어버렸다는 사실까지 잊고자 한다. 마치 처음부터 우리에게 그런것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수 많은 자연들을 파괴하고 건설한 도시들은 마치 자기들이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는 듯이 위용을 뽐내며 서있다.

 

 이 작품을 읽고 났을때 동일본 대지진의 여파를 입었던 후쿠시마 원전이 멜트다운에 가까워 졌다는 기사가 나왔었다. 응용화학을 공부하고 지금은 담수 프로젝트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절친이 멜트다운의 위험성을 간단히 설명해 주었었다. 아주 간단히, 동북아 멸망에 가까운 시나리오였다. 인류는 물론 자연까지 엄청난 방사능 피해를 입히며 절대 예측이 불가능한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방사능은 인간은 물론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의 유전자를 변형시키는 무시무시한 독성 물질이다.

 작품 말미에 황석영 작가는 덧붙이는 말을 통해 "도깨비가 사라진 것은 전기가 들어오면서 부터" 라는 문구가 있다. 인류가 무한한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발견과 발명은 바로 '전기' 일 터. 그리고 원자력 발전은 인류가 가장 높은 효율로 '전기' 를 양껏 취할 수 있는 가장 혁신적인 발견이자 발명이 아닌가? 인류 역사상 무시무시한 원자력 사고들이 있어왔지만, 원자력 발전소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에너지를 마음껏,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은 그리 쉽사리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닐터다. 지금 내가 이렇게 책을 읽을 수 있는것, 그리고 그 리뷰를 적을 수 있는 것 모두 전기 덕 아니던가?  전기를 마음껏 쓸 수 없다면, 우린 엄청나게 많은 욕구 충족의 기회를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자본주의 세상의 원동력이 욕구라면, 전기는 욕구의 원동력이나 다름없다. 엄청난 위험을 안고 있으며, 얻기위해 많은 것들을 파괴해야 하는 '에너지'.

 

 자본주의는 아마 인류의 멸망, 그 순간까지 유지될 것이다.

욕구충족이라는 달콤한 맛을 본 인류는 이 위대한 체제를 결코 포기하지 못할 것이다. 다시, 황석영 작가가 덧붙임을 통해 쓴 문구처럼, 우리는 호랑이 꼬리를 잡고 달리는 소금장수 신세인 것이다. 꿈 같은 인생이고, 돌고 도는 인생이다. 자본주의는 모두에게 평등한 욕구충족의 기회를 제공한다지만, 그것은 그 시작부터 궤변이었다. 자본주의에서 욕구충족은 자본의 우위에 있는 자들만이 가능하고, 자본주의라는 이념의 시작은 자본의 우위에 있는 자들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이다. 딱부리와 딱부리의 엄마가 결국은 꽃섬으로 되돌아 갔듯, 한 번 밀려난 자들은 다시 되돌아갈 수 없으리라.

 

씁쓸하고, 안타깝지만, 지금 이곳이 바로 그곳이다.

꽃섬. 그럼에도, 우리는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남들처럼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 역시 자라서,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낳을터다.

사람이 사는 곳은 그 어디든 그럴터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 사람이 살아가는 한, 모든 곳은 낯익은 세상이다.

모두 보듬어야 할 '우리들'이다.

 

"또한 언제나 그랬듯이 들판의 타버린 잿더미를 뚫고 온갖 풀꽃들이 솟아나 바람에 한들거리고,

그을린 나뭇가지 위의 여린 새잎도 억새의 새싹도 다시 돋아나게 될 것이다."

p.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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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게모노 1
야마다 요시히로 지음, 김완 옮김 / 애니북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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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을 탐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일까?

누구나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가늠하는 기준이 있는데, 때로 그것은 학습 없이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는 듯 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기준에 맞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면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결국엔 간절히 소유하고 싶어한다. 때론 그것을 소유하는데 모든 인생을 걸기도 한다. 아름다움의 소유. 그것은 결국엔 늙고 추해져가는 육체를 지닌 것에 대한 반동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빼어난 외형만을 지닌다고, 그것으로 아름다움의 조건이 충족되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외형에 걸맞는 깊이있는 '히스토리'. 그리고 희소가치. 그것들이 모여서 궁극의 아름다움을 빚어낸다.

 

그리고, 여기 이 남자.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내 나이 서른 넷,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난세에 태어나 오다 노부나가라는 희대의 리더를 군주로 삼고있는 자. 사무라이!!  

그 이름 '후루타 사스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지만, 이런 와중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다. ;;;

그것도 노부나가의 가신들이 모인 큰 회의. 일종의 어전회의에서 말이다.

그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오다 노부나가의 작전계획이 아니라, 그가 걸치고 있는 옷이다.

그리고 오다 노부나가가 천왕에게 하사받은 '명품' . 갖고싶어하고 있다!!!

그러면서, 회의에 참석한 다른 무사들이 입고있는 갑옷을 평가하고 있다!!!

 

그렇다. 이 엄숙하고 중차대한 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심미안을 통해 자신의 주군과 그 부하들의 패션을 체크하고 있는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가 활약하던 일본의 전국시대. 이 후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거쳐 막부시대, 메이지 유신등 일본 근대시대로 접어들게 되는 격변기의 첫 장이기도 하기에, 이야깃거리가 정말 풍성한 시기이다.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의 전란기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한 다이묘로써 일본 통일의 기치를 내걸은 희대의 무장이기도 하지만, 대단한 심미안을 바탕으로 수많은 명품들을 수집한 풍류를 아는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무장이라고 하면, 삶의 대부분을 검에 바치는 부류이다. 수많은 음모가 난무하고 하극상이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던 시대, 수많은 가신과 영지를 거느리고 있는 다이묘가 풍류에까지 정력을 쏟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일 터, 작은 벼슬인 '다이칸'에 지나지 않는 후루타 사스케로서는 그런 오다 노부나가의 그릇에 감복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남자로서, 무인으로서 전란의 시기에 주군으로 섬기고 있는 오다 노부나가의 눈에 들만한 공을 세워 출세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의 눈은 언제나 아름다운 명품을 향하고 있다. 특히 작품 안에서는 주로 '다기茶器' 가 많이 다뤄지고 있는데, 일본의 '다도茶道' 문화와 관련되어 있다.

 동양에는 어느 국가든지 차에 대한 예법이 있다. 찻잎을 오랜시간 우려내는 과정을 일종의 마음 수련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중국은 물론이고, 신라 화랑들에게도 다도법이 있었으며, 일본의 다도는 종교와 만나 조금은 독특한 방향으로 발전되었다. 하지만, 전국시대, 오다 노부나가는 다도회를 금하고, 일부 충실한 가신들에게만 다도회를 여는 것을 허락함으로서 다도회는 일종의 포상과 같은 개념이 되었다. 필연적으로 다도회 자체가 횟수가 줄어서 그 자체에 대한 희소성이 생겨났고, 양민들은 제대로 먹고 살기도 힘든 전란의 시대에 소비조차 많지 않은 다기를 양산할 필요 자체가 없었다. 특히 고려나 조선에 비해 도예陶藝 의 수준 자체가 떨어졌던 일본에서 고려나 명나라 자기에 맞먹는 다기는 구경 자체가 힘들었을 것이다.

 

 주인공 후루타 사스케는 바로 그런 명품 자기에 집착하는, 일종의 명품 매니아였던 것이다.

 



 

군주의 명을 받들어 적장과 협상을 하러 간 자리에서도 명품에 눈이 뙇~!!!!

하지만 그렇다고 사스케가 명품으로 호사를 부리고 위세를 부리려는 된장남은 아니었다. 

사스케는 명품을 알아보는 '눈' 즉 심미안도 타고난 자였다!! 진정 명품을 '즐길 줄 아는' 자였다. 이것을 '풍류' 라고 한다.

사스케는 뛰어난 안목을 가진 진정한 풍류객이었던 것이다.

 

 돼지목에 진주라고, 제아무리 아름다운 보물이라도 그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자의 손에 들어가야 보물인 것이다.

나같은 사람에게 샤넬 백을 쥐어줘 봤자, 돌체 엔 가바나 셔츠따위를 줘봤자, 난 모른다~! ㅋㅋㅋㅋ

난 아마도 그 백을 들고있을 여성이나(므흣~), 셔츠 밑에 있을 오랜 운동으로 다져진 단단한 근육에서 더 아름다움을 느낄터다. 당연히 단단한 근육이 없으면 쳐다도 안 볼 테고. 난 샤넬 백이 왜 그렇게 비싼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 백이 가지고 있는 디자이너의 이름, 그 브랜드가 가지고 있는 희소성과 가치, 그 백을 만드는데 들어간 각종 재료의 가치, 그리고 그 백이 상징하는 사회적인 위상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로고만 안다고 보는 눈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바느질 자리가 어떻고, 손잡이 고리가 어떤 식으로 매듭져있고, 그런것 따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그런 '명품을 보는 눈' 이 있는, 풍류를 아는 사스케의 이야기와 함께, '시대의 큰 흐름을 보는 눈' 이 있는 희대의 무장 오다 노부나가와 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되는 하시바 히데요시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즉, 명품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사스케의 욕구와 나라와 권력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하시바 히데요시를 대칭점에 두고 '전국시대' 라는 굵은 이야기의 흐름을 좇아간다.

 

 이야기는 사스케의 시점에서 전개되어진다. 주변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는 사스케의 눈과 입을 통해 나오지만, 1권의 마지막부분, 하시바 히데요시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의 흐름이 둘로 나뉠 것임을 보여준다.

"사루(원숭이)"라는 조롱을 받으면서도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그 밑에서 온 몸을 납작 업드려 자신의 때를 기다렸던 인물, 하시바 히데요시는 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되는데, 히데요시는 특히 야심과 탐욕이 남달랐던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에겐 임진왜란을 일으켜서 우리 민족에게 큰 고통을 준 인물로 유명하다. 이런 히데요시와 사스케를 대칭점에 놓음으로서 달라보이면서도 닮아있는 두 소유욕에 대해 풀어낼 듯 하다. 그리고 1권 중반에 나오는 아케치 미츠히데 또한 이야기의 큰 흐름이 될 듯 하다. 특히 사스케와 아케치 미츠히데가 함께 등장하는 에피소드에서 복선을 드러내는데, 일본에서 아케치 미츠히데는 오다 노부나가를 배신한 하극상의 아이콘과도 같은 인물이다. 하시바 히데요시와 아케치 미츠히데의 묘한 기류, 그리고 그에 비해 너무나 소박한 욕심을 갖고 있는 후루타 사스케.

 

  이 작품은 단순히 아름다움에 대한 소유욕을 가지고 있는 전국시대 한 무장의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의 전국시대는 현대로 따지면 거대 기업안의 파벌싸움과 비슷하다. 일본의 수많은 경영법과 관리법, 게다가 처세술까지 전국시대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그 뒤에 등장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저서나 인물 평전들을 기반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현대 일본 사회의 뿌리라고도 할 수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른 시각에서 풀어내고 있는 뛰어난 역사 만화인 것이다.

 그 시대의 남자라면, 그리고 무인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었을 출세욕. 하지만, 주인공인 후루타 사스케는 그 흐름과 다른 소박한 수집욕을 갖고 있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출세하지 못하면 자신의 소집욕을 충족시킬 수 없다.

 

결국 다시 첫 페이지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나 후루타 사스케.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무공武功에 집중할 것인가, 풍류객으로 머물다 갈 것인가??

전란의 시대, 이름을 떨치고는 싶고, 아름다운 물건들을 더 보고, 더 보고 싶다!!

작중 등장인물 중 하나인 '아라키 무라시게' 가 이렇게 말했다.

"설령 가족을 희생시킨다 해도 더 보고 싶다, 더 가지고 싶다는 욕심에 살고자 하고 강해지지."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결국 사스케는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

초반에 만나게 되는 '마츠나가 히사히데' 는 이런 말을 한다.

"언젠가 너도 선택할 날이 올 테니.

압도적인 힘을 가진 자가 나타났을때 내 길을 선택할 것인지, 포기하는 길을 선택할 것인지를 말이다."

아마도 후루타에게 이 압도적인 힘을 지닌 자는 아케치 미츠히데와 하시바 히데요시가 될 확률이 많다.

하지만 후루타는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말이 이렇게 들렸을 터다. 

'충의'냐 '힘'이냐.... 가 아닌,

'출세'냐, '풍류'냐!!!!! 를 말이다.  

 

 결국 후루타 사스케는 풍류를 즐기는 필부로써 앞으로 오다 노부나가를 둘러싸고 벌어질 거대한 흐름, 즉, 하시바 히데요시와 아케치 미츠히데가 일으키는 풍랑을 거스르지 못할 것이다. 이런 급박하고 어두운 정세를 심미안과 물욕을 가지고 있는 후루타 사스케의 가벼움으로 유쾌하게 풀어내는, '의도적인 감량' 이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가장 큰 무기일 터다. 정말 세련된 스토리 텔링이 아닐 수 없다.

 고증에 철저한 의복이나 스타일의 재현도 놀랍다. 실제로 오다 노부나가는 아방가르드 한 면이 있는 대단한 패셔니스타였다고 전해진다.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에서 들여온 갑옷을 입고 투구와 가면을 쓰고 최전방에 나섰던 아방가르드 그 자체, 전위예술가였던 것이다. 그러한 점에 착안한 작가의 발상과 그것을 유연하게 풀어내는 역량이 놀랍고 부러울 따름이다.

 

이런 철저한 고증의 재현과 맞물려, 주인공 후루타 사스케의 우스꽝스러운 표정 연출, 명품을 봤을때 '꿍덩' 하는 느낌을 받는다거나, '하냐앙~' 같은 느낌을 받는다는 언어유희가 절묘하게 뒤섞여 대단히 수준높은 즐거움을 선사한다.

대단히 리얼하지만, 만화스러움을 결코 잃지 않는 엄청난 센스.

일본 역사만화라는 장르에 있어서 하나의 교과서가 될 듯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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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버스괴담
이재익 지음 / 황소북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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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산부터 서울까지 가로지르는 직통버스. 지금은 광역버스라고 부르는 이 버스는 꽤나 깊은 밤까지 운행하곤 했다. 난 일산에 살아본 적이 없어서 이 버스를 이용해본 적은 없지만, 친구들이 아주 유용하게 이용하던 기억이 난다. 술에 취한 손님들을 태우고, 야근에 지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손님들을 태우고, 늦은 시간에 몸을 뉘일 곳으로 향하는 각자 사연이 있는 사람들을 태운 심야의 직행버스. 대체로 손님들이 버스 안에서 목적지에 도착할 때 까지 휴식을 취하기 때문에 이 버스는 차내 불을 꺼주는 경우가 많고, 손님들고 그것을 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적막한 버스 안에서, 한 취객이 난동을 피우기 시작한다.

 아, 버스 노선은 조금 다르다. 내가 언급한 버스는 일산과 서울이었지만, 작품 안에 등장하는 버스는 분당 - 서울 강남을 오가는 시외직행버스였다. 그리고 준호가 본 장면은 쉰살쯤 된 취객이 버스기사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서울에서 시외로 빠져나가는 자동차 전용도로는 고속도로와 비슷하다. 자동차 전용도로는 자동차만 다닐 수 있는 도로이기 때문에 러시 아워가 아닐땐 제한속도 가까이까지 엑셀을 꾹꾹 밟아댈 수 있고, 심야 시간대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런 와중에 버스 기사를 집적대기 시작하는 취객. 버스 안에는 준호를 포함해 중년 남성 한명과 여대생으로 보이는 여성과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소녀, 중년의 여성이 있었다.

 위기를 느낀 준호는 취객을 말리기 시작했고, 중년 여성과 여대생이 합세하고, 그 와중에 뜻밖의 사고로 취객이 사망하고 만다.

 

 2000년에 출간되었던 '200X 살인사건' 의 개정판인 이 작품은 당시엔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재익 작가의 유명세도 유명세였지만, 당시 이런 류의 장르소설이 지금만큼 널리 읽히지 않을 때였기 때문일터다. 이야기의 흐름은 빠르고 막히는 곳 없이 시원시원하게 뻥뻥 뚫린다. 이재익 작가는 '속필' 로 유명한데, 그의 그런 스타일과 기술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인물 위주로 주요한 포인트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사건들을 연달아 빠르게 터뜨린다. 200여 페이지도 채 되지 않는 이야기가 순식간에 종장을 향해 치닫고, 조금은 뻔한 반전이 있지만, 꽤나 충격적인 결말을 보여준다. 이 작품의 미덕은 역시, 군더더기가 없다는 점일터다. 이재익 작가가 그려내는 평범하고 단조로운 캐릭터들이 한가지 의도를 담은 속도감 있는 이야기의 전개에는 더욱 도움이 된다. 개인적으로는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가 보다 농밀했다면, 좀 더 디테일했다면 어땠을까 싶다. 두께가 얇은 감도 없지 않지만, 이야기의 전개가 지나치게 빠르고 생략적이어서 꽤나 아쉽다. 그 밖에도 말이 안되는 부분들이 여럿 띄긴 하지만, 즐기기 위한 소설로서는 크게 부족하지 않다.

 

 한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많은 사건과, 선택의 순간들이 있을까? 아마,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때론 삶의 방향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사건들과 선택의 순간들이 있을테지만, 때론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사건과 선택의 순간들이 있을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건과 그런 순간들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의도치 않은 방향에서 다가오는 경우가 대부분일터다. 우리 조상들은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라고 했다. 작품속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갑자기 찾아든 사건 앞에서 이성을 잃고 결국 그것이 그릇된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릇된 선택의 대가는 생각보다 참혹하고 끔찍했으며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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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대중문화>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스트릿 패션들이 주목받기 시작한건 언제부터였을까? 패션잡지 안의 작은 코너였던 스트릿 패션. 스트릿 패션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다름아닌 페이스북을 필두로 한 소셜 네트워크 덕분일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스트릿 패션 프리 저널리스트가 될 수 있는 시대. 인터렉티브하고 광활하게 뚫려있는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세계 곳곳의 스트릿 패션들이 광범위하게 공유되었고, 그 안에 나름의 이야기를 담아낼 줄 아는 블로거들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릴수 있게 되었다. 이반 로딕은 그런 부류의 블로거이다. 이제는 사진작가라고 불러야 할까, 패션 칼럼니스트라고 불러야 할까. 아니, 어쩌면 스토리 텔러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시대의 흐름을 절묘하게 타고난, 그리고 그 흐름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뚜렷하게 구축한 그의 첫번째 사진+에세이집. 기대된다. 

 

 

 

 그래. 서양미술사만 공부하는게 능사는 아니었다. 고흐가 어떻고 고갱이 어떻고, 르네상스가 어떻고, 인상주의가 어떻고. 그렇게 별 입에 붙지도 않는 외래어들을 딸딸 외울때, 정작 우리 미술의 역사는 어찌 흘러갔는지. 김홍도, 신윤복. 그들 말고 더 누구를 주어섬길 수 있을까나. 우리의 미술사는 중국의 미술사와 그 궤를 달리한다. 바다와 거대한 강, 험준한 산맥과 냉혹한 고원지대 때문에 중국대륙과 달리 독자적인 문명을 찬란하게 꽃피워왔더랬다. 과연 우리 미술의 흐름은 어찌했던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이 정도는 알아주어야 하지 않을까?  

 

  

 화려한 한국 미술의 정점. 궁궐의 장식들. 아름다운 단청부터 석조건물 하나까지. 실용적이면서도 단아한 아름다움이 있는 우리의 미술 중에도 가장 화려하고 눈에 띄는 카테고리. 궁궐장식. 왕의 위엄과 기상을 동시에 드러내는 우리 미술 장식요소의 극치가 담겨있을터!!! 보고싶다!!!! 

 

 

 

 

 바야흐로 컬러의 시대이다. 단색에 익숙해져있던 나의 눈이 어찌할 바를 모른다. 심지어 만화마저 죄다 컬러풀하다. 컬러는 파동이다. 빛의 파동이 눈을 통해 뇌 안으로 들어온다. 어떤 사람은 그래서 컬러를 구별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 파동을 캐치할 능력이 없는것이다. 컬러는 사람의 마음을 좌지우지 하기도 한다. 그 오묘한 빛의 떨림. 과연 그 비밀은 어디에 있고, 과연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수많은 컬러차트에 대한 책들이 있지만, 우리의 눈에 맞는 우리의 색감. 이 책으로 찾아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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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길의 아폴론 1
코다마 유키 글.그림, 이정원 옮김 / 애니북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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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도 소싯적엔 순정만화 꽤 봤다. '만화' 라는 매체를 처음 접했던 건, '국민학교' 시절 까치가 형을 위해 권투를 하는,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이현세 작가의 처절한 복싱만화였지만, 생일 선물로 받은 돈으로 난생 처음 손에 쥐었던 책은 이케다 리요코의 걸작 '베르사이유의 장미' 였다. 그 뒤로, '불새의 늪' , '굿바이 미스터 블랙', '레드문' 등 대하 서사물에 강했던 황미나 작가의 작품을 탐독했고, 신일숙 작가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 , '리니지' , '파라오의 연인' 등을 접했다. 물론 순정만화의 대명사인 '캔디, 캔디' 나 '유리 가면' 도 빼놓을 수 없다. 당연히 나의 취미는 4살 터울의 여동생이 물려받았고, 우리는 서로 만화책을 권하며 자랐고, 덕택에 나 역시 꾸준히 오랫동안 여중생들이 즐겨보는 순정만화를 함께 즐기게 되었더랬다.(내 동생이 여고생일때 난 대학과 군대에 있었더랬다.) 그 시절부터 어렴풋이 '순정만화 그려보고 싶다!' 는 생각을 갖고 있긴 했지만, 순정만화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섬세한 심리묘사를 내가 능란하게 해 낼 자신은 별로 없었다. 
 

 가깝고도 먼 나라. 만화의 천국인 일본에서는 '순정만화' 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순정만화 라는 용어는 한국에만 있다. 일본은 만화의 천국답게 구분이 훨씬 세분화 되어있다. 우리가 말하는 순정만화의 원류는 일본의 '소녀만화' 이다. 내가 접했던 많은 순정만화들 중, 소녀만화에 가까웠던 작품은 이미라 작가나 천계영 작가의 작품들이었을 터다. 내가 접했던 황미나 작가나 신일숙 작가의 작품들은 대하 서사물이 주를 이루고 있었기에 엄밀히 따지면 소녀만화와는 거리가 먼 감성의 작품들이었던 것이다. 굳이 '순정만화' 라는 타이틀을 대체하자면 '대하만화' 가 맞을 것이다. 그런 작품들을 보며 '순정만화를 그려보고 싶다!' 라는 어렴풋한 꿈을 꾸었으니, 애초에 난 방향을 잘못 잡았을 터다. 

 초기의 '소녀만화' 는 '캔디캔디' 처럼 여자 주인공이 환상적인 남자 주인공들과 로맨틱한 경험들을 나누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주인공은 언제나 독자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였고, 독자들을 쉽게 이입시켰다. 언제나 배경은 중세인지 근대인지 애매모호한 서양풍에 주인공의 이름은 외국이름이었다. 당연히 소녀가 만나는 남성들은 모든 여성들의 영원한 로망인 멋진 귀족이나, 왕자등이 주를 이뤘다. (이런 취향은 한국 순정만화에서도 거의 동일하게 흘러갔다.) 그러다가 점점 배경이 현대가 되면서, 여자 주인공이 상대하는 남성들은 멋진 재벌이나 재벌 2세, 연예인 등으로 변하였고, 역시 꾸준하게 '여성들의 로망' 의 왕좌를 쥐고 있는 외국의 귀족들이나 왕족들 또한 간헐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약간 다른 흐름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소녀 만화의 주인공은  언제나 '소녀' 여야 했다. 소녀만화가 아닌, 여성을 타깃으로 한 만화라면 응당 그래야 했다. 성인 여성 타겟의 작품들도 대부분 '여성' 들이 주인공이어야 했고, 그들은 독자들의 아바타가 되어 그녀들이 꿈꾸는 환상적인 로맨스를 나눠야 했는데, '남성' 이 주인공인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야기의 주 화자가 '남성' 이 되어버린 '소녀만화' . 독자들은 작품의 주인공이 되어 로맨스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속에 등장하는 남성들의 이야기를 감상하는 위치로 옮겨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독자들의 감정이입을 완전히 배재할 수는 없다. 필연적으로 '소녀만화' 의 주인공 '남성' 들은 굉장히 소녀틱한 감성을 갖게 된다. 그러한 캐릭터를 부각시키고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 이런 작품의 배경은 대부분 고등학교가 된다. 주인공 '남성' 은 아직 '소년'. 정체성과 자아가 확립되기 이전이므로 여성스러운 소년들의 이야기는 어느정도 설득력을 얻게 된다. 이런 류의 작품들은 주인공 소년보다 그 주위의 인물들이 더욱 매력적인 경우가 많다. 주인공 소년은 말 그대로 이야기의 '화자話者'가 되고, 진짜 이야기의 '주인공' 은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는 절친한 친구나 선배, 후배가 된다. 작가가 여자인 경우, 이야기를 전달하는 화자는 성별을 불문하고 당연히 작가의 성별인 '여성'의 시각으로 친구를 바라보게 된다. 이 때문에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작품 전반에 '야오이' 풍, 혹은 'BL' 의 색채가 짙게 묻어나는 경우가 많다.  

 코다마 유키의 두번째 장편 연재작인 [언덕길의 아폴론] 은 니시미 카오루와 '카와부치 센타로' 라는 두 주인공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학원물로서, 1960년대 일본의 지방 소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외딴 시골 학교에 전학온 '차도남' 의 적응기라는 전형적인 오프닝으로 시작되지만, '재즈' 라는 음악과 '1960년대' 라는  시기를 만나 복고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게 해준다. 물론 코다마 유키의 조금은 투박한 터치도 굉장히 잘 어우러진다. 위 단락에 언급한 부분 때문에 이 작품은 이야기의 화자인 카오루와 이야기 자체의 주인공인 센타로 사이에 미묘한 야오이의 아우라가 깔린다. 게다가 화자인 카오루는 여성스러운 외모와 예민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여성스러운 남자아이이고, 여성적인 악기인 피아노를 연주하기까지 하는 등, 여러가지 부분들이 센타로와 대비되며 동성 친구라기 보다는 이성친구에 가까운 포지션에 자리잡는다. 이러한 동성애 코드를 작가가 의도했는지는 알 방법이 없는 건 사실이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이런 미묘한 시각을 처음부터 꾸준하게 유지하지만, 그렇다고 이야기 전반에 노골적으로 동성애 코드를 깔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이러한 미묘한 코드가 지나치리만치 평범하고 담담한 에피소드와 전형적인 성격의 주인공들 사이에 묘한 긴장감을 불어넣으며 이야기 자체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있다. 

 카오루는 엄마 없이 외항 선원인 아빠 손에서 자란 결손 가정의 소년이다. 엄마가 남편과 아이를 버리고 간 이유는 한두가지가 아니겠지만, 외항 선원이라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더 많은 아빠의 직업이 한 몫 했을터이고, 그 때문에 카오루는 거의 고아처럼 혼자 지냈을터다. 어린 아이에게 부모는 세상 그 자체. 세상을 상실하는 경험을 가져본 카오루가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자랐을리는 없다. 게다가 아빠의 직업 탓에 전학도 자주 다녀야 했을테고, 결국 삼촌 손에 맡겨지고 만다. 외로움이 몸에 벤 아이. 하지만, 음악을 통해 감수성 만큼은 날카롭게 벼려온 아이. 결국 카오루의 외로움과 감수성은 예민한 신경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었을 터다.
 그리고, 성장기의 정점에서 만난 센타로와 센타로의 소꿉친구인 무카에 리츠코. 불량기가 있지만, 비뚫어지지 않은 센타로와, 그런 센타로에게 나침반이 되어주었을 것 같은 쾌활하고 발랄한 소녀 리츠코. 이들과의 만남은 분명 카오루의 인생에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 분명하다.    
 

 남자로서, 여 작가가 그려내는 남고생에 대한 로망이 살짝 거슬리기도 하지만, 잔잔하고 담백한 우정과 로맨스 등 충분히 공감할만한 요소가 가득한 수작임은 틀림없다.  카오루와 센타로가 앞으로 겪게 될 일들이 기대된다.
청춘은, 그래. 언제나 즐거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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