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블랙아웃 1~2 세트 - 전2권 옥스퍼드 시간 여행 시리즈
코니 윌리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아작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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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둠즈데이북] 으로부터 몇년 뒤. 2060년 4월 옥스퍼드 베일리얼 칼리지.

네트 전문가인 바드리는 여전히 바쁘게 학생들의 강하작업을 계산하고 있고, 던워디 교수는 보다 활발해진 역사학도들의 강하를 관리, 감독하며 "과잉보호" 라는 소리를 듣고 있으며, [둠즈데이북] 으로 10대때 불법적인 첫 강하를 경험했던 콜린은 지겹도록 던워디 교수를 쫓아다니며 다음 강하를 졸라왔고, 부외자는 절대 강하할 수 없다는 던워디 교수의 룰에 의해 번번히 쫓겨났다. 그리고, 아마도 그 와중에 학부생인 폴리를 만나, 짝사랑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폴리를 비롯해, 베일리얼 칼리지의 역사학부생인 메로피, 마이클, 이 세 청춘이 이번 작품의 주인공들이다.

메로피는 에일린이란 이름으로 1940년 3월 런던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인 워릭셔에서 귀족인 케롤라인 부인의 하녀로, 마이클은 마이크라는 이름으로 1940년 5월 도버항에서 멀지 않은 작은 부둣가 마을 살트램-온 시에서 미국 출신 기자로, 폴리는 성만 바꾼 본인의 이름 그대로 1940년 9월의 런던에 백화점 직원으로, 메리는 1944년 덜위치의 응급 간호사 부대 지부로 파견된 중위로 분해 역사학 과제를 수행중이거나, 막 수행하기 위해 도착했다.    


이야기는 시작부터 엄청나게 어수선하다.

1980년대부터 이 이야기를 구상한 코니 윌리스가 상상한 2060년은 스마트폰도, 랩탑도 충분히 개발되기 전이라 시간여행까지는 도달했어도, 휴대용 기기까지 도달하지는 못했다.

책 속 등장인물들은 임플란트 시술을 통해 사전 하나 분량의 지식을 머리 속에 담을 수 있고, 세포강화를 통해 각종 질병에 대한 면역력을 증진시킬 수 있으며, 억양, 말투 등 조건반사적 행동까지도 조정할 수 있으나, 휴대폰이 없고, 인터넷도 와이파이도, 랩탑도 없다. 

때문에, [둠즈데이북] 에서도 등장했던 엇갈림이 수두룩하게 등장한다.

과제 종료를 일주일 앞둔 메로피는 정기적으로 열리는 강하지점을 통해 일단 1940년에서 2060년으로 복귀한다. 

2060년의 옥스퍼드 베일리얼 칼리지에서는 던워디 교수가 강하 예정인 학생들의 스케줄을 급히 변경시킨 탓에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갑자기 스케줄이 앞당겨진 폴리는 1940년의 의복을 찾기위해 동분서주 하고 있었고, 마이클 역시 강하 순서가 변경되어 새로운 정보를 습득해야 했다. 에일린은 2060년에 하루 머무르고, 다시 1940년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그 사이에 1940년식 자동차의 운전법을 배워야 했다.

1940년의 하녀는 운전할 줄 몰랐지만, 때는 전시. 여차할 때 응급차를 몰아야 했기 때문에, 에일린은 시간여행의 장점을 이용해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들은 각자 자신만의 이유로 던워디 교수를 만나러 왔다가, 만나게 되어 환담을 나누고, 결국 던워디 교수와는 만나지도 못한채 각자의 슨케줄로 돌아간다.

이 초반 도입부가 진짜 정신없다.

휴대폰 하나만 있었으면 모든게 해결될 것 같았던 에피소드들이 정신없이 겹쳐있을 뿐 아니라, 시간여행에 대한 다양한 정보들이 산발적으로 흩어져있다.

[둠즈데이북] 에서도 드러났던 어수선하고 산만하지만, 꽤 재미있는 좌충우돌 도입부는 이 시리즈의 트레이드 마크일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임무를 앞둔, 그리고 그 임무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가득한, 더불어, 자칫하면 강하가 취소될 수도 있다는 불안함들이 엉키고 설켜 깊은 몰입도를 준다.



에일린은 이미 강하지점이 활성화되어 있는 상태이기에, 적당히 "외출 정도의 시간" 에 맞춰 돌아갔으나, 처음 강하지점으로 도착한 폴리와 마이클은 그렇지 않았다.

강하의 오차범위는 최소 몇시간에서 최대 2~3일 정도, 그리고 반경 몇 킬로미터 내외였을텐데, 오차범위 두시간 예상이었던 에일린은 무려 나흘 반 늦게, 마이클은 예정보다 사흘 늦게, 게다가 임무지에서 무려 10km떨어진 곳에 도착하게 된다. 

예상과 다른 시간대, 장소에 도착한 이들의 황망함 역시 매우 잘 그려져 있다.


1944년의 메리와 1944년의 어니스트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역사학자 등 정상적으로 도착해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가 떡밥처럼 툭툭 흐트러진 가운데 메로피 , 폴리, 마이클의 이야기가 중심적으로 진행된다.

강하 지점은 시간여행자들이 들킬 수 없는 지역에 만들어져서, 시간여행자들은 정기적으로 현재로 돌아와 보고를 해야 했다.

바드리는 시간여행자들의 스케줄에 따라 정기적으로 강하지점을 열어서 보고를 듣고, 상황에 따라서는 일시적으로 귀환을 시키거나, 과제를 종료시키기도 한다.


4주동안 런던 교외의 시골 귀족의 저택에서 피난민 아이들을 돌보며 지칠대로 지친 에일린은 목이 빠지게 기다렸던 과제 종료일을 맞이했으나, 아이들 사이에 홍역이 돌면서 저택이 격리되고 만다. 

면역 강화 시술을 받은지라 홍역에 걸릴 위험은 없었지만, 몇주 더 발이 묶이고, 그 뒤엔 저택이 군인들의 사격 연습장 베이스로 지정되며 강하지점이 활성화 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

누구에게든 현 시간대의 사람에게 노출될 가능성이 있다면, 네트는 그 강하지점을 결코 다시 열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과제 종료일이 5월이었으나 10월까지 이 시대에 붙잡혀 있던 에일린은 폴리가 1940년의 런던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런던으로 가 폴리의 강하지점을 사용할 계획을 잡는다.


한편, 1940년 5월에 도착한 폴리는 등화관제로 칠흑처럼 새까만 런던 시내 어딘가에서 필사적으로 주변의 지형지물을 살피고 있었다.

강하지점을 기억해야만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 터였다. 가까스로 어둠에 적응해 몇몇 표식을 기억하고, 전시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으로 가까운 교회 지하에 마련된 방공호에 도착한 폴리는 생각보다 익숙하게 대피해서 나름대로 빈 시간을 활용하고 있는 시민들을 보며 자신이 의도했던 시기보다 며칠 뒤의 시간대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들에게 며칠의 시간은 치명적으로 아까운 시간이었다. 2~4주 정도의 기간만 머물 수 있기에, 관찰할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폴리는 독일 간첩으로 오해받지 않도록, 그리고 시간여행자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며 사람들을 관찰하고, 런던에서의 일상생활을 위해 거처와 직업을 찾아 동분서주한다.

수많은 지식과 정보들을 머릿속에 심은 폴리였지만, 실제로 머리 위로 폭탄이 떨어지고, 어제와 오늘 건물의 모습이 달라지고, 배려와 감시가 엇갈리는 전시 대도시의 생활은 녹록찮았다.

원래는 사는 곳과 직업을 구한 뒤 즉시 강하장소를 통해 현실로 귀환해 보고해야 했으나, 폴리는 첫번째 정기강하를 놓치고, 다음 정기강하때 강하장소를 찾아간다.

하지만, 강하지의 옆 건물이 폭격으로 무너지며, 강하지까지 여파가 있었는지, 정기 강하 시간에 되어도 네트는 열리지 않았다.


1940년 8월에 살트렘-온 시에 도착한 마이클은 등화관제로 칠흑처럼 시커먼 해변가에 도착한다.

마이클은 폴리와 달리 도와줄 사람도 없었고, 도버해협의 깎아지는듯한 절벽들을 떠올리며 별 수 없이 동 틀 때까지 해변가에 앉아있어야 했다. 

네트는 시간여행자들을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도 있는 '분기점'으로 결코 보내지 않았다. 이는 '네트' 의 성격에 기인한다.

작품 안에서 시간여행은 인간들이 만든 특수한 기술이라기보다, 사람을 과거로 보낼 수 있는 특정한 "현상" 을 발견했고, 그 현상을 이용하는 개념에 가깝다. "네트" 는 인간들이 만들었다기보다, 이러한 "현상" 그 자체를 이야기하는 절대적인 "룰" 이다.

인간은 이 현상을 이용해 과거로 강하할 수 있었고, 이러한 과거의 시간대를 조정하는 기술까지는 개발할 수 있었지만, 아직 모든 변수들을 예측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기에, 수많은 오류들이 발생했고, 어떠한 방법을 써도 절대로 갈 수 없는 시간대와 장소가 존재했는데, 그걸 "분기점이기 때문' 이리고 예상하고, "네트" 라는 존재가 그걸 막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

그리고, 1940년 8월의 됭케르크는 바로 그런 곳이었다.

현지인들에게 들킬 수도 있는 시간과 지점에도 네트는 결코 열리지 않았고, 8월의 됭케르크는 전체가 다 불가능한 장소였다.

그래서, 마이클은 도버 해협에서 이 구출과정을 관찰하고  기록할 예정이었으나, 뜻밖의 사건으로 인해 됭케르크에서 영국군들을 구출하는 행위에 참여하게 된다. 

그 와중에 심각한 다리부상까지 입게 되고, 몇주간이나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몇달 뒤에나 퇴원해서 강하 장소로 가보는데, 자신의 네트가 열릴 공간에 영국군의 방공포가 자리잡고 있었다.

결코 이 공간에 다시 네트가 열릴 일은 없을터였다. 전쟁이 끝나 방공포대가 해체되기 전까진.

1940년의 영국 런던에 강하하는 역사학자들에 대해 알고 있는 마이클은 런던으로 향한다.


폴리는 1940년의 런던에 적응하면서 시간 날 때마다 강하장소에 가보지만, 네트는 감감무소식이다.

심지어, 과제 종료일이 지나도 귀환하지 않는 여행자들을 위한 구조대조차도 파견되지 않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역사적 기록과 현실은 조금씩 오차가 있었고, 몇차례 공습 가까이에 휘말리면서 죽음의 위기까지 넘기면서 2060년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미래는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렇게 10월이 되어, 폴리는 에일린, 마이클과 극적으로 재회한다.

하지만, 그 시점이 바로 셋 모두의 강하지점이 모두 먹통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블랙아웃" 의 순간이었다.

자신이 됭케르크에서 군인들을 구함으로써 역사에 큰 변화가 일어났을 것이라 생각한 마이클은 자책감에 못이겨 공황에 빠지고, 1940년에 가장 오래 있었던 에일린은 정신적인 피로감에 심하게 지쳐있었다. 폴리는 마이클이 역사에 큰 분기를 건드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었지만, 그 역시 그런 모든 것들을 다 챙길 수 있는 정신상태가 아니었다.

그 역시 옥스퍼드가 구조대를 파견할 수 없는 상황 - 이 모든 강하계획 스케줄을 조정한 던워디 교수의 죽음이라거나, 자신들을 타임라인에서 잃어버려서 어느 시점으로 구조대를 파견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 등을 떠올리고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가고 있었다.

그리고, 전작인 [둠즈데이북] 을 읽은 독자라면, 옥스퍼드의 네트 시스템이 얼마나 외부 환경에 취약한지 잘 알고 있을터다.


그리고, 1940년 9월에 런던에 도착한 또다른 시간여행자의 모습과 함께 [블랙아웃]1,2권은 마무리된다. 


진짜 미치도록 재밌어서, 2권은 밤새 읽어버렸다.

시간여행에 대한 개념은 [둠즈데이북] 에서보다 더 많이 구체화되고, 개념정리를 할 수 있을 요소들이 많이 등장한다.

특히, 시간여행이 개발된 것이 고작 40년 전이라는 사실과, 유태계 과학자의 발견이었다는 점 등이 스쳐 지나간다.

이렇게 시간여행이 "기술" 보다는 "현상" 에 가깝다는 점과, 노하우가 쌓인지 얼마 안되었다는 점을 종합해보면, 등장인물들의 시간여행이 꼼꼼하지 않고, 대부분 급박하고 허술하게 이뤄진다는 사실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다.


이번 작품에서는 다양한 화자들을 통해 전시 런던 곳곳의 모습을 상세하게 그려내는데, 특히 당대의 시대정신에 걸맞는 군상극을 매우 잘 그려내고 있다.

인류 문명사를 통틀어, 여성'들' 이 역사의 전면에 올라서기 시작한 것은 1차 세계대전 직후부터다.

제 1차 세계대전은 "전쟁이 끝난 이유는 전쟁터에 나갈 남자가 없어져서" 라는 해석이 있을정도로 유럽 전역에서 엄청나게 많은 남자들이 죽어나갔다. 당연히 여성들이 산업현장에 뛰어들어야 했고, 남자들의 역할을 대신해야 했다.

바야흐로 노동인권과 여성인권이 혼합되는 시기다.

공고했던 계급, 신분제 사회가 무너지고, 그보다 조금 느린 속도로 여성 인권이 떠올랐고, 아동 인권, 흑인 인권은 아직도 요원한 문제였다.

이 작품은 죽음이 일상화된 혼돈의 시기, 변화가 시작된 전시 런던의 도가니를 매우 훌륭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간 세계대전을 다룬 작품들이 대부분 "군인" 혹은 "전쟁 난민" 의 입장을 그려왔던 것과 대단히 다른 접근이다.

런던 교외의 귀족층부터 그 하인들, 지방 공동체를 단단히 붙잡아주던 교회와 성당의 사제들, 폭격 하의 도심지에서 아이들만을 피난시키고, 어떻게든 일자리를 받아 돈을 벌어야 했던 수많은 엄마들, 등화관제를 관리하며 방공호로 사람들을 안내하던 자원봉사자들, 평범한 백화점 직원들, 노인들  


현대의 관점으로 과거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의미한 것인지, 역시 다시 한번 섬세하게 조망한다.

종이 위에 텍스트로 기록된 과거의 사람이 아니라, 그 시대에 살아 숨쉬던 "사람" 들이 만들어낸 진짜 역사.

인류의 문명이란, 그리고 역사란 무엇인지 다시한번 깊이 새길만한 장면들이 여기저기서 툭툭 튀어나온다.

      

등장인물들이 뜻밖의 사건을 대하는 자세들, 그로 인해 변화하는 심경들과 전시 하의 런던에 적응하는 과정들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처음 주인공들이 임무를 맡았을 때는 다들 자신만만했다.

이들은 자기가 가서 생활할 2주, 길게는 4주간 일어날 일들을 촘촘하게 '다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신문, 잡지, 수기, 기밀로 묶여있던 전시 공식 기록들도 철저히 검토했을 뿐 아니라, 유전자 조작을 통해 각종 질병에 대한 몇배의 면역력까지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외과적 수술을 통해 백과사전 몇권 분량의 지식을 잠재기억속에 인위적으로 삽입하기도 했다.

게다가 그들은 과거에 도착해서도 현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을 터였다. 네트는 정기적으로 열렸고, 한번 임무가 시작되면, 현재로 돌아와 하루이틀 시간을 보내고, 다시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정도의 정교함도 기대할 수 있었다. 만약 사고가 생기면, 그 땐 현재에서 구조팀이 급파될 것이고, 자신들은 무사히 안전한 현재의 시간대로 되돌아올 수 있을테니 말이다. 

특히, 작품 초반, 총 4주간의 임무를 받아 이미 2주간 수행중이던 에일린은 전쟁과 다소 떨어져 있는 런던 교외에서 피난온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었으므로 전시의 혼란함보다 임무의 고단함이 더 심했다. 

이랬던 이들이 오차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 시간대에 떨어지면서 미리 준비했던 지식과 정보들이 쓸모없어지고 현재로 돌아갈 네트조차 열리지 않는 상황에 직면하면서 멘탈이 서서히 부서져 가는 과정들이 세련되고 예민하게 묘사되고 있다.      

코니 윌리스의 옥스퍼드 시간여행 시리즈가 흥미로운 지점이 바로 이런 부분이다.

현대인들은 무심코 과거시대가 지금보다 뒤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과학과 의학 등 사회 문화적 수준이 지금보다 낮은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 시대의 사람들의 지적수준이나 의식수준까지 낮은 건 결코 아니다. 인간 개개인의 신체적 조건이나 지성은 크게 변화가 없다.

인간 개개인에게 있어 축적된 지식이나 정보 따위는 큰 무기가 되지 않는 것이다.

과거에서 다소 '우월' 하리라고 여겨졌던 그러한 '미래적' 무기들은 모든 연결고리가 끊어지는 순간 등화관제로 칠흙같이 어두운 도버 해협의 자갈 해변 어딘가에 떨어진 마이클처럼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다. 

여타의 시간여행물과 코니 윌리스의 그것이 다른 결정적인 차이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블랙아웃]의 최대 단점은 이 책이 애초에 2부작으로 구성된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올클리어]와 이어진다.

수많은 떡밥들이 흩뿌려진 채로, 그리고 마지막까지 큰 떡밥을 하나 던지면서 끝난다.

나는 이 시리즈가 모두 발간된 뒤에 읽기 시작했기에 망정이지...


아, 지식과 정보를 미리 알고 있다면, 이런 점은 확실히 유리하구나.

이 책을 실시간으로 접한 과거의 사람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표한다.

[올클리어] 나올 때 까지 얼마나 기다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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둠즈데이북 1 옥스퍼드 시간 여행 시리즈
코니 윌리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아작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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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에 발표된 [둠즈데이북] 은 옥스퍼드 시간여행 연작 중 [화재감시원]의 뒤를 잇는 두번째 작품이자 첫 장편이라고 할 수 있다. 

데뷔작인 [화재감시원]으로부터 정확히 10년 뒤에 발표된 작품으로, 코니 윌리스의 작품세계 안에서는 비교적 초기작이라 할 수 있지만, [화재감시원]으로 씨를 뿌린 아이디어가 구체화되고, 작가로서의 역량도 농익으면서 "옥스퍼드 시간여행" 연작의 초석을 다졌다. 물론 어마어마하게 많이 읽혔다.

  

 서기 2040년대의 잉글랜드.  

시간여행 기술, "네트"가 개발되고, 몇차례의 실험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면서, 초기 데이터들이 수합되고 있었다.

그 중 옥스퍼드 베일리얼 칼리지에서는 네트 기술을 역사학부와 연계시켰다. 역사학 교수와 학부생들은 시간대를 쪼개 위험도를 체크, 상대적으로 위험도가 낮은 시간대를 골라 강하를 시도해 실제 중세를 체험하고, 역사적 기록과 가설을 크로스 체크할 수 있었다. 네트의 정밀한 시스템은 현대인들이 과거의 타임라인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범위를 산정했고, 과거와 현재가 서로 간섭되지 않도록 제어했다.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분기" 로는 강하가 결코 열리지 않았다.

 아직 이 기술이 완벽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정확한 계산은 너무나 어려웠고, 강하 장소를 골라 네트를 여는 것 조차 계산대로 되지 않았다. 

아니, '네트' 는 시간여행의 "기술" 이 아니라, 시간을 넘나들 수 있는 특별한 "현상" 을 "발견" 해서 응용하는 것에 가까웠다.

예를들어, 1380년 7월 1일로 가고싶다고, 무조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먼저 타겟을 설정하고, 그 타겟을 중심으로 강하 지점이 열리는 지점을 계산하고, 또 계산해야 했으며, 그렇게 계산해서 강하 지점을 찾아도, 적게는 수시간에서, 많게는 수일, 가깝게는 수킬로미터에서 멀게는 수십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강하하기도 했다.  


연말까지 이어지는 크리스마스 연휴의 초입, 역사학과장이 장기 휴가를 떠나 대행을 맡게된 길크리스트 교수는 진취적이고 도전정신 강한 역사학부생 키브린을 1300년대로 강하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다.

키브린의 집요한 요구가 줄기차게 이어졌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차기 학과장을 노리는 길크리스트도 이 기회에 성공적인 강하 기록을 한 줄 채워넣고 싶었던 것이다. 

"강하" 의 1세대라 봐도 무방한 던워디 교수만이 이번 강하를 반대하고 있었지만, 길크리스트는 자신의 큰그림을 가로막는 그가 눈엣가시일 뿐이었다. 던워디 교수의 의견을 묵살하며, 길크리스트는 연휴에 소집한 수석연구원 바드리와 함께 키브린을 1320년의 옥스퍼드로 강하시킨다. 2주라는 기간동안 각종 병의 면역력 강화 시술을 받은 키브린은 흑사병이 유행하기 28년 전의 잉글랜드에서 중세인의 삶에 대한 생생한 자료들을 남길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강하 직후, 키브린의 강하를 담당했던 네트 기술자 바드리는 "계산이 뭔가 잘못됐다" 는 메시지를 남기고 이유를 알 수 없는 고열로 쓰러지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전염병으로 판단되어 옥스퍼드 전체가 셧다운 되고 만다. 던워디는 당장 네트를 다시 열고 키브린을 데려오고자 하지만, 길크리스트는 던워디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앞길을 막는다는 위기감에 네트 연구동을 폐쇄하고, 뒤이어 "전염병의 근원지가 과거, 즉 바이러스가 네트를 통해 넘어왔다" 는 낭설까지 퍼지게 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던워디는 오랜 친구이자 의과 교수인 아렌스를 도와 옥스퍼드에 퍼진 전염병과 사투를 벌이게 된다.


 한편, 중세 잉글랜드로 강하한 키브린은 각종 병에 대한 예방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드리와 같은 증상을 보이고, 열악한 중세 환경 속에서 로슈 신부의 도움을 받아 기욤 경의 장원에서 몸을 추스리게 된다.

병에 걸린 키브린을 돌봐준건 재판을 받기 위해 수도로 떠난 기욤경의 가솔들이었다. 기욤경의 아내인 엘로이즈, 큰 딸 로즈먼드와, 작은 딸 아그네스, 그리고 기욤 경의 어머니이자 엘로이즈의 시어머니인 이메인 부인과 함께 중세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야기는 이렇게, 현대(미래) 잉글랜드와 중세 잉글랜드가 끊임없이 교차되며 진행된다. 

[화재감시원] 에서 주인공 바솔로뮤의 동기이자 담당 교수인 '키브린' 과 '던워디 교수' 가 본격적으로 활약하는 시기로, 그 이야기보다는 앞선 시간대를 다룬다. 즉, [화재감시원]의 프리퀄인 셈이다. 


[둠즈데이북]은 이야기의 시작부터 두개의 미스테리를 툭, 던져놓는다.

1. 키브린은 왜 계산과 크게 동떨어진 시간대에 떨어졌는가?

2. 과연 던워디 교수는 키브린을 구하러 갈 수 있을까?


첫번째 미스테리는 이 다음, 다음 시리즈를 위한 떡밥으로 작품 안에서 던워디 교수는 계산이 정확했으리라 믿으면서도, 끊임없이 의심을 하며 이야기의 현실 파트가 과거 파트와 유리되지 않는 강력한 접착제로 사용된다. 두번째 미스테리는 이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서스펜스의 핵심이다. 모든 장치가 구조들이 흠 잡을 곳 없이 자리잡고 있다.


이 작품이 그리는 것은 시간여행자의 스펙터클이나 새로운 모험의 즐거움 따위가 아니다.

그것보다는 보다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중세 체험" 을 위해 시간여행이라는 장르를 사용한 것에 가까워보인다.

시간여행자가 과거에서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거나 새로운 정신, 생각을 전파시킨다는 등의 허무맹랑한 전개는 결코 없다.

나 역시 클리셰에 쪄들어서, 등장인물 중 시간대에 고립된 인물을 찾는다던지, 키브린이 짠 하고 미래의 기술을 선보이는 장면들을 기대했으나, 결코, 없었다.

아무리 미래의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있어도, 단 한 사람의 인간이 완전히 다른 시간대와 세상에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순히 텍스트가 아닌,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과 공간 속에서.

그 끔찍한 냄새와, 낙후된 의료기술, 위생관념, 인권의 도가니 안에서, 키브린은 크게 다르지 않은 한명의 여성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러한 지옥의 도가니는 2040년대의 옥스퍼드에서도 똑같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인플루엔자가 옥스퍼드를 덮쳤고, 사람들은 쓰러졌다.

철저한 위생관념과 훌륭한 의료체계가 있었지만말이다.

2040년대의 지식으로 무장한 키브린이 장원의 가족들이 흑사병으로 쓰러져 가는 것을 막지 못했듯이, 2040년대의 사람들도 인플루엔자로 쓰러져간다.

심지어, "이 병이 네트를 통해 과거에서 왔다" 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기까지 하며.


이 작품이 그리고 있는 전염병의 양상은 새삼, 코비드-19가 덮친 현대의 지구촌을 떠올리게 한다.

격리를 거부하는 사람들과, 병마와 싸우기 위해 하루종일 방호복을 입고 있는 의료진들. 이기적인 사람들과, 헌신적인 사람들.

사랑스러운 사람들과, 짜증나는 사람들. 

그리고, 지옥처럼 덮쳐오는 병마와,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노는 우연과 타이밍의 악마들. 

이 작품이 1992년에 발표된 것을 떠올려보면, 팬더믹을 그려낸 코니 윌리스의 통찰력엔 감탄하고 또 감탄할 따름이다.


중세를 그려낸 작품들은 아주 많고, 나는 역사소설을 아주 좋아하기 때문에, 정말 많이 읽어왔지만, 이 작품만큼 생생한 중세를 그려낸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너무나 입체적이고, 전형적으로 보이는 인물들 모두가 아주 설득력이 있어서 쉽게 공감된다.

인물들을 포함한 소설적 장치들이 모두 적재적소에서 뚜렷한 목적성을 가지고 사용된다. 

역사는, 과거는 단지 텍스트가 아니고, 모두가 살아 숨쉬던 사람 한명 한명의 숨길임을 설파하듯.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스토리텔링도 정말 놀랍고 탁월하다.

"수다SF"라는 장르의 창시자라는 위명이 허명이 아님을 증명하듯, 맺고, 끊고, 모으고, 터뜨리고, 뻥치고, 살살 달래고. 

아주 농락당하는 느낌으로,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

그리고, 아마도 나는 더 농락당할 것이 분명하다.

이 시리즈는 아직 두 편이 남았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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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감시원 - 개정판 코니 윌리스 걸작선 1
코니 윌리스 지음, 김세경 외 옮김 / 아작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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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에겐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SF-판타지 장르에서 코니 윌리스는 명실상부, 80년대를 통째로 집어삼킨 작가이다.

지금 우리가 테드 창에 열광하듯, 80년대는 오롯하게 코니 윌리스 여사의 시대였다. 특히, 과작-그것도 단편-인 테드 창에 비해 코니 윌리스는 성실하고 부지런한 작가로, 80년대에 펴낸 책들은 대부분 장편이고, 대부분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받았다. 휴고상은 전문 심사위원들이, 네뷸러는 팬 심사위원들이 주를 이루는 것을 떠올려보면, 평단과 독자 모두에게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는 증거다.

그 중 "옥스퍼드 시간여행" 연작은 코니 윌리스의 대표적인 시리즈이자 시간여행 소설들이 가져왔던 클리셰들을 산산히 부숴버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코니 윌리스의 10번째 작품이자 이 작품집의 표제작인 [화재감시원] 은 1982년에 발표되어 1983년, 휴고상과 네뷸라상을 수상하면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첫 단편이다. 이후 독자들에게 "옥스퍼드 시간여행 시리즈" 라 불리며 큰 사랑을 받게 될 장대한 시리즈의 효시가 된 작품이다. 여러모로 '코니 윌리스' 라는 작품 세계에서 가장 상징적인 작품으로, [둠즈데이북] 으로 이 세계에 발을 디딘 나로서는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이 작품집엔 총 다섯편의 작품이 실려있고, "코니 윌리스 걸작선" 이라는 이름에 맞게 유려한 중단편들만 모여있지만, 이 공간에는 "화재감시원" 만 기록하기로 하겠다.


이야기는 1940년 9월 20일, 바솔로뮤가 세인트폴 대성당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웨일즈에서 파견나온 사제로서, 바솔로뮤는 화재감시원으로 자원봉사를 나온 것으로 '설정' 되어있었다. 

바솔로뮤는 2060년대에서 1940년대로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역사학도로서 역사에 아무런 간섭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전쟁통의 사람들과 약 두달간 뒤엉키게 된다.


이야기는 수기와 같은 기록 형식으로 서술되고 있으며,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런던이 공습당할때 평범한 사람들이 겪은 일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제 아무리 철저한 준비를 했다지만, 과거에서 상상치 못한 일들을 맞닥뜨린 바솔로뮤의 황망함과 전시의 혼란스러움, 그 안에서 역사학도이자 미래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전시 공동체 일원으로서의 정체성의 충돌, 그리고 과거인들과의 갈등 등 다양한 내러티브들이 겹겹이 포개져있다.


이 작품은 "시간여행" 을 다룬 작품이지만, 그동안 수많은 시간여행 작품에서 등장한 클리셰들이 하나도 없다.

대신, 엄청나게 공들인 고증이 자리잡고 있다.

코니 윌리스가 시간여행을 소재로 삼은 이유는 "과거를 직시" 하는 자세다.

바솔로뮤는 런던 대공습이 시작된 1940년 대성당에서 나치의 스파이를 감시하는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미래에서 온 인물" 로 보이지 않고 자연스레 녹아들어 2주라는 짧은 시간동안 매일 밤 대성당 지붕위에 떨어지는 소이탄들을 수거하고, 모래로 덮는 "화재감시원" 자원봉사를 하며 장구하게 흐르는 시간 앞에 한명의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지 뼈저리게 깨닫는다.

최대한 방관자의 입장에서, "이미 죽은" 사람들을 바라보려 하지만, 그 전쟁 난리통 속에서 오직 살아남기 위해 함께 발버둥치다보면, 결코 방관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바솔로뮤는 미래에서 온 인물로, 그가 함께 숨쉬며 발버둥치는 그 사람들은 바솔로뮤의 입장에선 이미 모두 죽은 사람들인 것이다. 

바솔로뮤는 자신에게 호감을 표했던 상냥한 아가씨 앞에서 그 사실만을 절절하게 깨달을 뿐이었다.

오늘 밤 폭격당할 지하철 역에서 잠자리에 들 그들을 구할 방법은 없다는 사실.

그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며, 그 모든 사건들은 이미 일어난 사건들이라는 사실.


아주 단순한 플롯이지만, 내러티브들이 차곡차곡 포개지며, 깊이있는 울림이 여기저기서 푹푹 솟아나온다. 얼핏, "이 이야기는 대체 왜 있는거야? " 싶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상황들조차 결국엔 몇배의 울림으로 수렴된다. 특히, 인물간의 구성을 통한 이야기의 연출이 대단히 세련되서, 충분히 연구를 해봐도 좋을 법한 기술을 선보이고 있다.

모든 인물과 소품, 장소와 고양이까지 적재적소에서 자신의 역할을 120% 수행해낸다. 군더더기란 1도 볼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한 전개가 돋보이고, 위에서 잠깐 언급했던 "고증" 에 대한 부분을 얼마나 많이 신경썼는지 알 수 있는 대목들이 곳곳에 포진해있다.

이 단편집에 실린 작품들은 대부분 코니 윌리스의 초기 단편들이고, 여러 상을 휩쓴 "걸작선" 이라곤 하지만, 사실 작품마다 퀄리티의 편차가 좀 있다. 

그러나, [화재감시원] 이 단편만큼은 작가로서의 재능과 이야기를 구축해내는 그만의 센스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고, "클래식" 으로 인정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데에 주저없이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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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bash 입문
조우노세.카도마루 츠부라 지음, 김재훈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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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립스튜디오 네이버 카페 "코믹스튜디오-디지털 만화제작을 배워보자!" 카페의 이벤트를 통해 경품으로 받은 책입니다.




일러스트나 만화나 대부분의 배경작업은 사진을 레퍼런스로 해서 작업한다.

과거, 종이에 펜으로 그림을 그리던 시절엔, 라이트 박스 위에 사진과 종이를 겹쳐서 배경을 따는 작업을 했다.

해서, 디지털 카메라가 나오기 전 시절엔 배경 사진만 전문으로 모아 파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고, 프로 만화가들은 작품 들어가기 전에 며칠씩 배경사진을 찍으러 다녀야 했다.  

코미카 같은 아마추어 만화동아리 행사를 가보면, 지금은 굿즈나 동인지를 주로 팔지만, 그 당시엔 자료로 쓸 수 있는 사진들을 모아 파는 친구들도 있을 정도였다. 

필름값도, 카메라도 고가이던 시기였다. 

라이트박스도, 카메라도 없던 나는 청계천 헌책방거리에서 구입한 잡지에 실린 흑백 사진들을 보고 배경을 그렸던 기억이 난다.

원하는 구도나 각도가 나오지 않을 경우엔 여러 사진을 부분부분, 참조해서 그리기도 했다.

실제로 많은 프로 작가들이 그런 방법을 활용하곤 했다.

자신이 예전에 그렸던 배경들을 다시 가져오는 경우도 있었고, 복사기를 이용하기도 했다.

정말, 철저히 노동 집약적인 직업이 만화가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약 20년 사이에 빠르게 사라졌다.

지금은 잉크와 펜, 원고지 대신, 타블렛과 모니터, 키보드를 활용하는 작가들이 다수가 됐다.

배경 작업의 레퍼런스로 삼을 사진들은 인터넷에 가득하고, 화소가 높은 카메라가 달린 스마트폰 덕분에, 트레이싱을 할 사진을 찍기도 쉬워졌다.

이 책에 실려있는 기술들은 생각보다, 이렇게 전통과 역사가 꽤 깊은 기술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산업 디자인 쪽에서는 매트 페인트, 만화 쪽에서는 배경 작업에서 말이다.


'포토배쉬' 란 사진으로 찍은 오브젝트들을 레퍼런스 삼아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내는 기술을 뜻한다.

그렇다고, 꼴라쥬처럼 사진을 그대로 잘라다 붙이는 건 아니고, 리터칭을 통해 상당히 크게 변화시킨다. 차용보다는 응용, 트레이싱보다는 레퍼런스에 가까운 방법이다. 

사실 이런 기법은 '코렐' 사에서 나온 '페인터' 라는 소프트웨어가 아주 특화되어 있었다.

수백개에 달하는 브러시와 함께 엄청나게 유명한 기능이었는데, 덕분에 프로 매트 페인트 작가들에게 사랑받으며 널리 퍼지기도 했다.

지금도 사진 편집 소프트웨어의 최강자는 '어도비' 사의 포토샵이지만, 일러스트쪽에서는 아직도 페인터가 최고다.


'클립 스튜디오' 는 "선" 을 중심으로 표현되는 만화쪽에서 단단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다.

불과 몇년 전까지는 사진 가공 툴이 부족해서, 선은 클립에서, 마무리는 포토샵에서 하는 경우가 많았고,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최근 버전의 클립 스튜디오는 오히려 사진을 선화 느낌으로 가공하는 툴들을 발전시켜서 그럴 필요가 거의 없어졌다.

이 책은 이렇게 "사진을 가공하는 툴" 을 이용해 일러스트를 완성시키는 과정들을 꼼꼼히 소개해 주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웹툰 열풍이 불면서 작가 지망생들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기본기가 부족해도 사진을 가공한 배경을 여기저기 붙여 놓으면, 작품의 퀄리티가 훌쩍 높아지는 느낌이 든다.

게다가 손바닥만한 스마트폰 액정에서 확인해보면 훨씬, 훨씬 더 훌륭해 보이기도 한다.

작화와 스토리, 퀄리티와 개성의 중요성에 대한 논쟁은 디지털화가 진행되기 전부터 일었던 논쟁이지만, 그건 온전히 만화가와 만화 독자라는 특정한 계층의 문제였다.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슬램덩크를 그리면서 NBA 잡지의 사진들을 트레이싱 한 사건이 일본 만화가들과 만화계에 한정된 문제였듯이 말이다.

하지만, 웹툰이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그 대중 중 많은 수가 웹툰 지망생이 되면서 이러한 논쟁들은 보다 폭넓은 계층을 아우르게 되었다.

배경에 사진을 잘 활용하는 방법에 대한 교과서적인 작가들은 크게 셋을 뽑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미생' 의 윤태호 작가님이다.

윤태호 작가님은 디지털을 아날로그처럼 활용하시는 분이다. 그 분은 직접 찍은 사진들을 밑에 깔고, 외곽선부터 보도블럭까지 꼼꼼하게 다시 자신의 선으로 덧입히는 방식을 사용한다. 마치, 라이트 박스 위에 사진을 올리고, 그 위에 종이를 올린 뒤 펜과 잉크로 따라가는 방식이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예전 "무한도전" 에 작업 과정이 직접 나온 적도 있다. 미생을 위해 직접 찍으신 사진들이 폴더에 가득했던 기억이 난다.

('뷰티풀 군바리' 도 이런 방식이다.)


다음은 '닥터 프로스트' 의 이종범 작가님이다.

이종범 작가님은 디지털의 최전선에 계신 분이다. 이 분은 사진 뿐 아니라, '스케치업' 이라는 3D 프로그램을 아주 잘 활용하신다. 만화진흥원의 스케치업 강좌에 출강하실 정도의 실력이신데, 3D프로그램 특유의 이질감을 죽이는 다양한 방법들을 활용하신다.

('테러맨' 의 고진호 작가님도 빼놓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프리드로우' 의 전선욱 작가님의 방식이 '포토배쉬' 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콘티에 맞춰 직접 찍은 사진들을 리터칭해서 활용하신다. 네이버 인터뷰였나...어디에서 작업과정이 공개된 적이 있었다. 고대비를 조정하고, 경계나 색감이 불명확한 부분들에 터치를 해서 활용한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사진이고,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리터칭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기술적 완성도를 보여준다. 


이분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그림체와 이질감이 없는 배경을 그려낸다는 점이다.

사진을 사용하는 작가들의 가장 큰 고민은 자신의 그림체, 혹은 캐릭터와의 이질감이다.

나는 사진을 아무리 잘 합성해도 이 이질감을 극복할 수 없어서, 리터칭 하는 방식을 택한다. 어지간하면 그냥 그린다. 

물론 스케치업과 사진의 도움을 받지만, 특정 부분에서만 활용하고, 대부분은 그냥 그리려고 한다. 

배경을 위한 만화가 아니라, 인물을 위한 배경인 것이다.


이 책에 실린 예제들은 이렇게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배경 만드는 기술에 대한 책이다.

다만, 내가 들었던 예시와 달리, 스토리나 캐릭터가 아니라 오로지 배경을 위한, 배경에 의한, 배경 그리는 예제들이 한가득 실려져 있고, 사진을 일러스트의 느낌으로 보이게 할 수 있는 다양한 예제들이 아주 세분화되어 잘 설명되고 있다.

즉, 이 책은 초보자들보다는 고급자, 그것도 연재를 염두에 둔 프로 지망, 게다가 그림체가 실사와 잘 어울리는 층에게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 아, 내가 너무 만화, 웹툰에 치우친 관점을 갖고 있는걸까.... 

여튼, 배경작업에 힘을 주실 분들 중 클립 스튜디오 유저라면, 처음에 집어들기 좋은 책이다.

당연히 주호민 작가님의 '신과 함께' 나 난다 작가님의 '어쿠스틱 라이프' 같은 그림체라면, 이런 사진을 활용한 배경이 전혀 필요 없을테니까. 아니, 이것도 고정관념인가.... 필요할 수도, 있으려나. ㅋㅋ 

사진을 활용해 소스를 만들고, 사진으로 부족한 부분들을 채우는 방법, 사진의 고대비와 밝기를 조정해 일러스트의 느낌을 내는 방법 등 사진을 가공하는 방법들도 메뉴 하나, 툴 하나, 레이어 속성 하나까지 속속들이 예제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중간중간, 실제 사진을 작품에 활용하는 노하우나 온라인 저작권에 따른 "웹에 게시된 사진의 사용범위" 에 대한 법적 설명도 들어있다.


자신의 그림체에 맞는, 그리고 매트 페인팅의 기초를 다지고 싶은 '배경'작업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강추할 수 있는 책!! 





이렇게 기초적인 사진 합성부터 



배경을 흥미롭게 구성할 수 있는 팁은 물론,



클립 스튜디오의 주요한 툴들을 응용하는 방법은 물론


 

직접찍은 사진에서 텍스처를 추출해 활용하는 꽤 난이도 높은 응용방법까지 성실히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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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로 하여금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
편혜영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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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병원은 이인시里仁市에 존재하는 단 두개의 종합병원 중 하나였다. 이인시는 한때 거대한 조선 단지가 조성되어 있던 곳으로 조선 사업의 위기와 함께 빠르게 해체되었다. 선도병원 역시 조선소와 명운을 함께 할 수 밖에 없는 사이. 조선소가 가동 중단을 결정하고, 근처의 산업 단지들이 폐업하고, 외지에서 온 근로자들이 도시를 떠나고, 노동자들의 숙소였던 원룸 주택단지는 거대한 공동이 되었다. 호황시에 불야성을 이루었던 상가들은 무덤처럼 조용해졌고, 고작 1년사이에 벌어진 이 쇠락을 '이석' 은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을까.

 이인시에서 70여년을 살아온 이석은 선도병원의 터줏대감 같은 이였다. 간호조무사부터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 관리직까지 두루 섭렵한 이석에겐 불치병에 걸린 아들이 있었다. 가장 먼저 병원에 출근해서, 가장 늦게 병원을 떠나는 이석의 모든 삶은 서울 대형병원에서 실낱같은 희망과 함께 아들의 숨줄을 붙들기 위해 소비되고 있었다. 그의 부인마저도. 

 '무주' 는 서울의 한 종합병원 직원이었으나, 병원에서 일어난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함께 일했던 과장의 소개로 도망치듯 이인시 선도병원 관리부로 일자리를 옮겼다. 이석은 무주를 곧잘 챙겨주었다. 그 덕에 무주는 빠르게 선도병원의 일에 적응해서, 맡은 바 역할을 잘 해내고 있었다. 더불어, 서울에서 잘 다니던 출판사도 그만두고 자신을 따라 이인시로 함께 와 준 아내의 임신 소식도 전해진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무주는 너무나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PIN시리즈는 얼마전 이영도 작가님의 신작 [시하와 칸타의 장-마트퀸 이야기] 를 통해 알게 되었다.

세로가 좀 더 길쭉한 문고본 같은 특이한 판형에, 공들인 티가 역력한 하드커버는 6편씩 묶인 작가진을 보면 시리즈의 야심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6권씩 묶여있다는게 재미있는 포인트다. 맨 뒷커버의 안쪽에 적혀있는 PIN시리즈 설명에는 "여기에 선보이는 단행본들은 개별 작품임과 동시에 여섯 명이 '한 시리즈' 로 큐레이션된 것이다." 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시리즈의 1번인 [죽은 자로 하여금] 은 이후, 출간된 [당신의 노후(박형서)], [거울 보는 남자(김경욱)],[첫 문장(윤성희)],[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욥기43장(이기호)], 6번인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정이현)] 과 한 시리즈라는 뜻이다.


나는 이 시리즈의 최근간인 25번 [시하와 칸타의 장-마트퀸 이야기(이영도)] 와 26번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었다(듀나)] 를 먼저 읽고, 시리즈 전체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서 이렇게 1번부터 찾아보기 시작했다.

[아오이 가든] 부터 꾸준히 팔로우 하는, 내겐 몇 안되는 케이스의 작가이긴 하지만, 새삼스럽게도, 편혜영 작가의 장편과는 첫 만남이다. 편혜영 작가의 작품은 최근 몇년동안 최소한 1년에 한편 정도는 어떤 식으로든 만났던 것 같다. [몬순] 이후 다양한 문학상을 받아오기도 했고, 매년 이렇게든 저렇게든 그런 작품들이 묶인 소설집들이 다양하게 출간되기도 했으므로. 하지만, 희안하게도 장편은 만날 기회가 없었다.      


편혜영 작가의 글은 언제나 서늘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냉정하리만큼 관조적인 시점에서 등장인물들의 폐부를 가차없이 찌른다. 그 찔림은 오롯히 독자인 나에게 작용한다. 

수족 중 어딘가를 잃은 인물들에게도 냉정하고, 모든걸 다 가진 것 같은 인물들에게도 냉정하다. 그의 묘사는 언제나 적확하고 명료하다. 내가 주로 읽었던 작품들은 대부분 단편이었으므로 그런 장점들이 뚜렷하게 도드라질 수 밖에 없었다. 그로테스크하고 우중충한 세계관이 단숨에 다가오고, 진흙같은 삶 속에서 허우적대는 인물들의 감정 또한 순식간에 덮친다. 


핀 시리즈의 소설들은 장편이라지만, 분량으로 따지면 중편과의 사이 그 어딘가에 있기에 이번 작품에서도 그런 장점들은 여지없이 도드라진다. 

이 작품이 취하고 있는 소재-대형 병원의 비리라는 그 자체는 그다지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일어나는 사건들도 뉴스 언저리에서 들었을만한 일들이고, 등장인물들이 처한 상황들도 평범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렇기때문에 등장인물들의 선택과 감정선이 진득하게 달라붙는다. 

등장인물에 이입되어 읽다보면, 작가의 서늘한 시선이 느껴진다.

'아니, 이거 왜 이러셔, 작가 당신이 나한테 이런걸 시킨거잖아!!! 근데 왜 그런 눈으로 바라보셔!!!!'

랄까. ㅋㅋㅋㅋㅋ 


등장인물들은 독자인 나의 예상대로 흘러간다. 그도 그럴것이, 작가는 냉정하고 명료한 단어로 외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줄줄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피할 수 없는 그 순간에 도달하고, 그제서야 큰 한숨을 몰아쉬게 된다. 


솔직히, 편혜영 작가 특유의 그로테스크하게 비틀린 세계관을 좋아했던 나에겐 [몬순] 즈음부터 시작된 현실과의 융합이 마뜩찮았다. 이처럼 독특하고 신선한 장르적 감각을 지닌 작가가 결국은 그 세계를 버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나의 오해였고, 착각이었다.

단지 이제는 그러한 그로테스크하게 비틀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장르적 눈이 확장되어, 현실과 마주했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바를 가장 압축해서 설명하자면, 한때 조직의 생리 안에서 상사의 비리를 보위하기 위해 동조자가 되었던 젊은 직원이 조직 전체의 비리를 축소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쓰여 한직으로 밀려났고, 그 밀려난 공간 안에서 자신과 비슷한 비리를 저지르고 있는 터줏대감을 발견한다는 내용이다. 

자신이 꿰어차 들어앉은 그 자리는, 그 비리와 함께 하지 못해 잘려나간 인물의 빈자리였던 것이고. 

내용 자체만 보면, [하얀 거탑] 같은 드라마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그런 엘리트 계층이 아니라, 그 아래. 종합병원의 행정을 관리하는 소위 "원무과" 의 비리라는, 보다 익숙한 소재가 등장한다는 점이 다를터다. 


우리의 삶 속에서 가장 부조리하고, 가장 불합리한 건 무엇일까?

인간관계? 사건, 사고? 불치병? 자연재해? 

다 맞다. 

우리의 인생 자체가 원래 부조리하고, 불합리하며, 비이성적인 것이다.

많은 작가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이 점을 설파해왔고, 편혜영 작가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그 점을 설파해왔는데, 현실과 몽상의 경계에서 초월적 공포를 통해 그려냈던 방식에서 살짝 내려와, 현실에 안착했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쉽다.

나는 편혜영 작가가 한국의 스티븐 킹, 나아가 러브 크래프트가 될 수도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더 섬뜩하고, 더 현실적이며, 더 우주적인.

아직도 나는 믿는다.

이 작품의 끈적한 클라이맥스 때문이다.

무주는 결국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기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결말을 택한 편혜영작가의 결단에 박수를 보낸다. 아마 어떤 사람들을 욕할지도 모르겠다. 이게 뭐냐고.

하지만, 원래 무주는 그런 사람이다. 자신의 비리를 온통 자신에게 덮어 씌우고 "한직에  가서 고생하고 와. 나중에 진정되면 불러줄게 (나 대신 몇년 빵에 갔다오라, 는 조폭 같은) " 라고 했던 전 상사를 찾아가고, 왕따시키는 팀원들에게 "내가 더 큰거 다 알고 있어" 라고 오히려 목소리를 높이는 점이나, 결국 그 발언 때문에 궁지에 몰리는데, 그걸 겨우 허장성세였다고 고백하고, 이석의 아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끝끝내 확인하고 마는, 그리고 그 결과에 그렇게 반응하는, 그런.

순수하고, 순박해서 여기저기 휘둘릴 수 밖에 없는, 그야말로 소시민. 
평범한 당신과, 나같은 사람.

우리들에게 진정한 코즈믹 호러는 우주에 있지 않다.

내 옆에 있지. 

편혜영 작가는 그걸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의 글이 무섭다. 무섭지만 재밌지. 어쨌든 나는 주인공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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