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로 하여금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
편혜영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선도병원은 이인시里仁市에 존재하는 단 두개의 종합병원 중 하나였다. 이인시는 한때 거대한 조선 단지가 조성되어 있던 곳으로 조선 사업의 위기와 함께 빠르게 해체되었다. 선도병원 역시 조선소와 명운을 함께 할 수 밖에 없는 사이. 조선소가 가동 중단을 결정하고, 근처의 산업 단지들이 폐업하고, 외지에서 온 근로자들이 도시를 떠나고, 노동자들의 숙소였던 원룸 주택단지는 거대한 공동이 되었다. 호황시에 불야성을 이루었던 상가들은 무덤처럼 조용해졌고, 고작 1년사이에 벌어진 이 쇠락을 '이석' 은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을까.

 이인시에서 70여년을 살아온 이석은 선도병원의 터줏대감 같은 이였다. 간호조무사부터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 관리직까지 두루 섭렵한 이석에겐 불치병에 걸린 아들이 있었다. 가장 먼저 병원에 출근해서, 가장 늦게 병원을 떠나는 이석의 모든 삶은 서울 대형병원에서 실낱같은 희망과 함께 아들의 숨줄을 붙들기 위해 소비되고 있었다. 그의 부인마저도. 

 '무주' 는 서울의 한 종합병원 직원이었으나, 병원에서 일어난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함께 일했던 과장의 소개로 도망치듯 이인시 선도병원 관리부로 일자리를 옮겼다. 이석은 무주를 곧잘 챙겨주었다. 그 덕에 무주는 빠르게 선도병원의 일에 적응해서, 맡은 바 역할을 잘 해내고 있었다. 더불어, 서울에서 잘 다니던 출판사도 그만두고 자신을 따라 이인시로 함께 와 준 아내의 임신 소식도 전해진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무주는 너무나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PIN시리즈는 얼마전 이영도 작가님의 신작 [시하와 칸타의 장-마트퀸 이야기] 를 통해 알게 되었다.

세로가 좀 더 길쭉한 문고본 같은 특이한 판형에, 공들인 티가 역력한 하드커버는 6편씩 묶인 작가진을 보면 시리즈의 야심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6권씩 묶여있다는게 재미있는 포인트다. 맨 뒷커버의 안쪽에 적혀있는 PIN시리즈 설명에는 "여기에 선보이는 단행본들은 개별 작품임과 동시에 여섯 명이 '한 시리즈' 로 큐레이션된 것이다." 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시리즈의 1번인 [죽은 자로 하여금] 은 이후, 출간된 [당신의 노후(박형서)], [거울 보는 남자(김경욱)],[첫 문장(윤성희)],[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욥기43장(이기호)], 6번인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정이현)] 과 한 시리즈라는 뜻이다.


나는 이 시리즈의 최근간인 25번 [시하와 칸타의 장-마트퀸 이야기(이영도)] 와 26번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었다(듀나)] 를 먼저 읽고, 시리즈 전체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서 이렇게 1번부터 찾아보기 시작했다.

[아오이 가든] 부터 꾸준히 팔로우 하는, 내겐 몇 안되는 케이스의 작가이긴 하지만, 새삼스럽게도, 편혜영 작가의 장편과는 첫 만남이다. 편혜영 작가의 작품은 최근 몇년동안 최소한 1년에 한편 정도는 어떤 식으로든 만났던 것 같다. [몬순] 이후 다양한 문학상을 받아오기도 했고, 매년 이렇게든 저렇게든 그런 작품들이 묶인 소설집들이 다양하게 출간되기도 했으므로. 하지만, 희안하게도 장편은 만날 기회가 없었다.      


편혜영 작가의 글은 언제나 서늘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냉정하리만큼 관조적인 시점에서 등장인물들의 폐부를 가차없이 찌른다. 그 찔림은 오롯히 독자인 나에게 작용한다. 

수족 중 어딘가를 잃은 인물들에게도 냉정하고, 모든걸 다 가진 것 같은 인물들에게도 냉정하다. 그의 묘사는 언제나 적확하고 명료하다. 내가 주로 읽었던 작품들은 대부분 단편이었으므로 그런 장점들이 뚜렷하게 도드라질 수 밖에 없었다. 그로테스크하고 우중충한 세계관이 단숨에 다가오고, 진흙같은 삶 속에서 허우적대는 인물들의 감정 또한 순식간에 덮친다. 


핀 시리즈의 소설들은 장편이라지만, 분량으로 따지면 중편과의 사이 그 어딘가에 있기에 이번 작품에서도 그런 장점들은 여지없이 도드라진다. 

이 작품이 취하고 있는 소재-대형 병원의 비리라는 그 자체는 그다지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일어나는 사건들도 뉴스 언저리에서 들었을만한 일들이고, 등장인물들이 처한 상황들도 평범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렇기때문에 등장인물들의 선택과 감정선이 진득하게 달라붙는다. 

등장인물에 이입되어 읽다보면, 작가의 서늘한 시선이 느껴진다.

'아니, 이거 왜 이러셔, 작가 당신이 나한테 이런걸 시킨거잖아!!! 근데 왜 그런 눈으로 바라보셔!!!!'

랄까. ㅋㅋㅋㅋㅋ 


등장인물들은 독자인 나의 예상대로 흘러간다. 그도 그럴것이, 작가는 냉정하고 명료한 단어로 외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줄줄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피할 수 없는 그 순간에 도달하고, 그제서야 큰 한숨을 몰아쉬게 된다. 


솔직히, 편혜영 작가 특유의 그로테스크하게 비틀린 세계관을 좋아했던 나에겐 [몬순] 즈음부터 시작된 현실과의 융합이 마뜩찮았다. 이처럼 독특하고 신선한 장르적 감각을 지닌 작가가 결국은 그 세계를 버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나의 오해였고, 착각이었다.

단지 이제는 그러한 그로테스크하게 비틀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장르적 눈이 확장되어, 현실과 마주했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바를 가장 압축해서 설명하자면, 한때 조직의 생리 안에서 상사의 비리를 보위하기 위해 동조자가 되었던 젊은 직원이 조직 전체의 비리를 축소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쓰여 한직으로 밀려났고, 그 밀려난 공간 안에서 자신과 비슷한 비리를 저지르고 있는 터줏대감을 발견한다는 내용이다. 

자신이 꿰어차 들어앉은 그 자리는, 그 비리와 함께 하지 못해 잘려나간 인물의 빈자리였던 것이고. 

내용 자체만 보면, [하얀 거탑] 같은 드라마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그런 엘리트 계층이 아니라, 그 아래. 종합병원의 행정을 관리하는 소위 "원무과" 의 비리라는, 보다 익숙한 소재가 등장한다는 점이 다를터다. 


우리의 삶 속에서 가장 부조리하고, 가장 불합리한 건 무엇일까?

인간관계? 사건, 사고? 불치병? 자연재해? 

다 맞다. 

우리의 인생 자체가 원래 부조리하고, 불합리하며, 비이성적인 것이다.

많은 작가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이 점을 설파해왔고, 편혜영 작가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그 점을 설파해왔는데, 현실과 몽상의 경계에서 초월적 공포를 통해 그려냈던 방식에서 살짝 내려와, 현실에 안착했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쉽다.

나는 편혜영 작가가 한국의 스티븐 킹, 나아가 러브 크래프트가 될 수도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더 섬뜩하고, 더 현실적이며, 더 우주적인.

아직도 나는 믿는다.

이 작품의 끈적한 클라이맥스 때문이다.

무주는 결국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기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결말을 택한 편혜영작가의 결단에 박수를 보낸다. 아마 어떤 사람들을 욕할지도 모르겠다. 이게 뭐냐고.

하지만, 원래 무주는 그런 사람이다. 자신의 비리를 온통 자신에게 덮어 씌우고 "한직에  가서 고생하고 와. 나중에 진정되면 불러줄게 (나 대신 몇년 빵에 갔다오라, 는 조폭 같은) " 라고 했던 전 상사를 찾아가고, 왕따시키는 팀원들에게 "내가 더 큰거 다 알고 있어" 라고 오히려 목소리를 높이는 점이나, 결국 그 발언 때문에 궁지에 몰리는데, 그걸 겨우 허장성세였다고 고백하고, 이석의 아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끝끝내 확인하고 마는, 그리고 그 결과에 그렇게 반응하는, 그런.

순수하고, 순박해서 여기저기 휘둘릴 수 밖에 없는, 그야말로 소시민. 
평범한 당신과, 나같은 사람.

우리들에게 진정한 코즈믹 호러는 우주에 있지 않다.

내 옆에 있지. 

편혜영 작가는 그걸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의 글이 무섭다. 무섭지만 재밌지. 어쨌든 나는 주인공은 아니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