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은 책상이다
페터 빅셀 지음, 이용숙 옮김 / 예담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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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인터넷 팟캐스트 방송에서 우연히 듣고 흥미가 생겨서 구입했다. 판형도 작고, 페이지도 100페이지가 책 되지 않는 얇디 얇은 책이다. 가격도 6800원. 2001년 10월에 초판 1쇄가 발행되었고, 내가 산 책은 2012년 3월 초판 35쇄째이다. 척박한 우리나라의 출판환경에서 10년이 넘게 꾸준히 초판이 판매되는 책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첫 페이지를 넘겼다. 얇고, 작고, 싸지만 튼튼한 하드커버로 되어있다. (커버의 폰트를 비롯한 전체적인 디자인이 '어린이 명심보감' 느낌이라 조금 아쉬웠지만,) 

이 작고 단단한 책 안에는 총 7편의 작품들이 들어있다. '지구는 둥글다' 라는 작품부터 시작되는데, 일곱편의 이야기가 모두 구조도 비슷하고, 느낌도 비슷하다.


 먼저 [지구는 둥글다] 는 지구가 둥글다는 확신을 갖기 위해 무조건 앞으로 쭉 걸어갈 계획을 세운 노인의 이야기이다. 지구가 둥글다면, 앞으로 쭉 걸어가면 그자리로 돌아올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노인. 앞으로 걸어가려 하자 바로 집 앞에 다른 집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빙 돌아가다간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노인. 노인은 사다리를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 집 뒤에는 숲도 있고, 산도 있고, 강도 있고, 호수도 있고, 바다도 있다. 노인은 자신의 계획을 실행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 첫 작품을 읽자마자, 난 이 작품집에 매료되었다.

7페이지에서 시작되어 21페이지에서 끝나는 15페이지도 되지 않는 짧은 작품. 안에는 삽화도 큼직하게 몇 점이나 들어있고, 폰트 크기도 크고 여백도 많다. 너무너무 짧은 이 작품을 읽으며, 탁상행정을 일삼는 무능력한 공무원들이나, 실컷 계획만 세워놓고 정작 하나도 행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이나, 지나치게 생각을 많이 해서 항상 부정적인 결론에 도달하고 마는 주변 사람들과 나 자신이 떠올랐다. 


 두번째 작품 [책상은 책상이다] 는, 무료한 일상에 지쳐 '달라져야 한다!' 고 생각하는 나이많은 남자가 등장한다. 그는 하루하루 달라지기 위해 사물들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한다. 침대를 사진이라고 부르고, 책상을 양탄자라고 부르고, 의자를 시계라고 부르고, 양탄자는 옷장이라고 부르는 등, 근처의 사물들을 다 자기 맘대로 이름을 바꿔서 부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남자는 아침에 의자가 울리는 소리에 사진에서 일어나 양탄자 위에 올라서게 된다. 


"어째서 침대를 사진이라고 부르지 않느냔 말야."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 다음 웃음을 터뜨렸는데, 이웃들이 벽을 두드리며 '조용히 합시다' 하고 고함 지를 때까지 그는 웃고 또 웃었다.

"이제 달라질 거야."

그는 이렇게 외치면서 그는 이제부터 침대를 '사진' 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피곤하군, 사진 속으로 들어가야겠어."

p. 26~27


 이 작품 역시 손뼉을 탁 칠 수 밖에 없었다.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혀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없게 된 사람들이나, 압축어와 신조어로 자기들만의 언어를 만들어내는 신세대의 언어습관등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아예 그들의 단어를 공부해야 할 정도에 이르지 않았던가?? 사람을 앞에 두고도 스마트폰 안에 빠져들어 자기만의 세계에 쳐박히는 사람들의 모습도 함께 떠올랐다. 


이런 식으로 작품마다 독특한 생각을 하기 시작하는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웃기지 못하지만 착하고 순수한 광대 '콜롬빈' 이 등장하는 [아메리카는 없다] 라는 작품에서는 미소가 지어지게 하는 따뜻하지만, 엄청난 스케일의 음모론이 등장한다.


[발명가] 라는 작품에서는 오랫동안 연구실에 쳐박혀서 뭔가를 발명해낸 발명가가 등장한다. 그가 드디어 자신의 발명품을 가지고 세상에 나오는데, 그가 발명한 것들은 이미 다 발명되어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었다. 


[기억력이 좋은 남자] 는 제목처럼 엄청나게 기억력이 좋은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기차역에 거의 살듯이 하면서 모든 배차시간과 역들을 기억하는 남자는, 하지만 사람들이 왜 기차를 타서 그곳으로 가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요도크 아저씨의 안부 인사] 는 '요도크' 라는 가상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셨던 할아버지에 대한 회상이다. 아주 따뜻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작품이다. 나이먹음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아무것도 더 알고 싶지 않았던 남자]  역시 제목처럼 더 이상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은 남자의 이야기이다. 남자는 오늘의 날씨도 알고싶지 않고, 시간도 알고싶지 않았고, 아무것도 알고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윽고 자신이 뭘 알고싶지 않은건지 알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품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작품은 마치 종교적인 선문답과 같은 내용이었다.


"코뿔소는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언제나 신이 나서 앞으로 달려나가지만, 우리 안을 두어 바퀴 돌고 나서는 방금 떠오른 생각을 잊어버리고 다시 오래오래 한 자리에 서 있는 것이었다. 한 시간도 좋고 두 시간도 좋았다. 그러다가 뭔가 생각이 떠오르면 다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제나 너무 일찍 달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사실 코뿔소에게는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p.94

ㅋㅋㅋㅋ 이 문장을 읽고는 너무 웃겼지만, 한편으로 참 공감도 되서 무릎을 치기도 했다. 

사람은 때론 지나치게 생각이 많다. 달리기 시작하면 다 까먹을텐데.  


모든 작품들에 기발한 상상력과 평범하고 따뜻한 일화들이 들어있지만, 그 깊이는 상당하다.

다 좋았지만, 특히 마지막 작품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우리는 얼핏, 참 쓸모 없는 것 같은 일들을 아주아주 많이많이 한다. 쓸모없는 생각도 아주아주 많이 한다.  아주 단적으로, 예술. 이 얼마나 쓸모 없는 짓인가? 예술이 밥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병을 치료해주는 것도 아니잖은가? 오히려 굶어죽기 딱 좋은게 예술을 업으로 삼는 일 아니던가. 


인간과 동물의 가장 큰 차이가 바로 그것 아닐까?

생존에 전혀 관계가 없는. 정말 쓸모없는 짓을 아주아주아주아주 많이 한다는 것.

우리의 삶이란 그런 쓸모없는 것들이 모여서 이뤄지게 된다. 엄청나고 거창한 것이 떡 하니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작고 가볍고 하찮고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쓸모없는 것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쌓여 삶을 빚어낸다. 

그리고 그 쓸모 없는 것들이, 우리의 삶을 조금은 더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아, 이런. 내 감상의 마무리도 너무 '어린이 명심보감' 스럽구나.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알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알려고 했던 사실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예전과 다름없이 자기 삶을 꾸려갔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는 중국어를 할 수 있다는 것뿐이다."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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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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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는 아버지가 수십 년 전 초연한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 좌우명처럼 여겼던 말을 기억하고 울기 시작했다.

"현실을 다시 만들수는 없어요." 낸시는 아버지에게 그 말을 돌려주었다.

"그냥 오는대로 받아들이세요.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이세요."

p. 13



황폐한 공동묘지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총188페이지. 

200페이지도 안되는 짧은 책장 안에 한 사람의 평생의 이야기가 압축되어 들어있다.

첫 몇 페이지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무덤에 묻히는 순간을 묘사하는데 할애된다.

몇몇 회사 동료와 절친한 친형 가족. 첫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얻은 두 아들과, 두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얻은 딸, 그리고 세번째 부인도 자리하고 있다. 감정이라곤 거의 실리지 않은 듯한 절제되고 담담하며 간결한 문장들을 통해 마치 실제 장례에 참석하고 있는 느낌을 강렬하게 받을 수 있다. 엄청난 현장감. 참석자들의 의례가 끝나고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던 시절의 이야기로 되돌아간다. 


간결하고 절제된 문장은 현대 미국문학의 대표적인 특징들 중 하나이다. 특히 필립 로스는 그런 현대 미국문학의 거장 중에서도 손꼽히는 거장이다. 그의 문장들을 처음 접했을 때, 계곡만큼 주름이 깊이 패이고, 열과 빛으로 백내장이 심하며, 자기 나이만큼 오래된 흉터와 새로 생긴 화상들로 온몸이 덮인 단단한 체구의 대장장이가 끊임없이 쇠를 두드리는 장면이 떠올랐다. 

'정련'.

그의 문장은 그런 뛰어난 장인의 섬세하고도 억센 손길이 느껴졌다. 


이 작품은 그런 섬세하고 간결한 문장들로 이루어진 한 남자의 태어남과 죽음에 관한 서사시이다. 잘 나가는 광고 일러스트레이터로 풍족한 경제생활을 영위했고, 세번의 결혼을 했다. 수많은 수술을 거쳐 고비를 벗어났지만, 결국 마지막 고비는 넘어가지 못했다. 이 세상 모든 존재들을 하나로 수렴하는 그 곳. '살아있다'는 단어가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그것.  이 세상에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 카운트 다운의 종착역. 그저, 오는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살아있음의 증명과도 같은. 

'메멘토 모리'.



참 희안하게도 나에게도 2012년의 시작은 '죽음' 이었다.

아니, '나에게' 라기보다, '나의 부모님께' ...라고, 정정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2011년 12월 말에 외할아버지, 나의 어머니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그리고 8월에는 아버지께서 수십년간 이어오신 고교 동창모임-이제는 구성원을 한손으로도 다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추려지고 추려진- 의 절친한 친구분이 췌장암으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얼마 전, 아버지와 달리 학창시절부터 꾸준하게 이어온 절친은 딱 한 분 밖에 안 계셨던 우리 어머니는 바로 그 딱 한 분 밖에 안 남은 절친을 위암으로 잃으셨다.  

그런 와중에 만난 이 책은 거대한 위로이자, 또렷한 확인이기도 했다.


'누구도 예외는 없다. 너도 마찬가지다. '

나도 마찬가지다.



이 책의 초반 몇페이지는 주인공의 장례식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 부분을 몇번이고 몇번이고 되풀이해서 읽었다. 주인공의 지인들이 보내는 송사. 누군가에게는 추억속에서 간신히 끄집어 내야 할 존재이지만 - 아버지였고, 남편이었고, 어린 동생이었던 그에게 바치는 송사들. 원망을 담은, 추억을 담은, 사랑을 담은, 아쉬움을 담은, 슬픔을 담은 그들의 말들은 역설적이게도, 편안하게 다가왔다. 오히려 후반부 - 주인공이 치열한 젊음을 소비하고 상처 투성이의 노년을 보내는 장면이 끔찍하리만치 공포스럽게 다가왔다. 각종 병으로 인한 고통과, 끔찍한 외로움 속에서, 과거를 추억하고, 그 안에서 회한만 쌓아가다 쓸쓸히 죽음을 기다릴, 그 순간이 두려웠다.  



"그이는 살고 싶어했지만, 누가 무슨 일을 해도 그이를 더 살아 있게 할 수는 없었어요.

노년은 전투에요. 이런 게 아니라도, 또다른 걸로 말이에요. 가차 없는 전투죠.

하필이면 가장 약하고, 예전처럼 투지를 불태우는 게 가장 어려울 때 말이에요,"

p. 149



문득, 죽고싶다는 마음이 밀려들었다.

치열한 버둥거림을 그만두고 일찌감치 관 안에 눕고, 새까만 무無의 세상속에 들어가고 싶었다.뭔가로 환생시키거나, 어디 천국이든 지옥이든 그런데로 보낸다면 신의 모가지를 붙들고 '무無'!!!! 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로. 

결국 이 치열한 삶의 종착역은 흙이다. 지금 내가 하는 이 모든 일들은 흙으로 돌아가기 위한 것들이다.

내 모든 환희와, 내 모든 고통과, 내 모든 슬픔과, 내 모든 좌절은 결국 모두 무無를 향해 달음박치는 기차 의 탑승객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죽어버리기엔 남아있는 사람들이 눈에 밟힌다.

그렇게 삶으로 눈을 돌리면, 다시끔 욕망들이 꿈틀꿈틀 일어난다.

욕망을 연료 삼아, 삶이라는 불을 계속 피워낸다.

비록, 종착역이 무無. 무덤역이라고 할지라도.

달리는 것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면 된다. 

종착역으로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달리는 것이 목적인 것이다.

삶은 그러하다.

죽기뒤해 사는 것이 아니다.

살기위해 사는 것이다. 





"힘차게 쿵쿵거리며 밀려들어오는 어두운 바다와 별이 가득한 하늘 때문에 피비는 환희에 젖었지만 그는 겁을 먹었다.

수많은 별은 그가 죽을 운명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

그 때는 그런 것들이 한번도 조종(弔鐘)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

오랜만에 비로소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하게 내 인생의 주인이 되었다는 느낌이 드는 이 순간에 왜 내가 내 삶을 불신해야 할까?

차분하게, 똑바로 생각해보면 앞으로 훨씬 더 견실한 삶이 남아있는 것 같은데, 

왜 내가 소멸의 가장자리에 있다는 상상을 할까?

 p. 37



"종말과의 무시무시한 만남?

나는 이제 겨우 서른넷인데!

망각을 걱정하는 일은 일흔다섯에 가서 하면 돼!

그는 그렇게 혼잣말을 했다.

머나먼 미래에는 궁극적인 파국 때문에 괴로워할 시간이 남아돌거야!"

 p. 39




"그는 쓰러지는 것과는 거리가 먼, 불길한 운명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느낌으로, 

다시 충만해지기를 갈망하며 밑으로 내려갔지만, 결국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 

심장마비. 

그는 이제 없었다. 

있음에서 풀려나,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처음부터 두려워하던 바로 그대로."

p.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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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재황 옮김, 루이스 스카파티 그림 / 문학동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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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만에 다시 읽게 된 카프카의 대표작인 작품 [변신].

내용은 아주아주 간단하다. 어느날 아침, 눈을 떠보니 벌레가 되있는 평범한 남자의 이야기. 


고교 시절이었나... 처음 읽었을때의 감상이 떠올랐다. 초반 3페이지 정도만에 책을 덮고 싶을 정도로 짜증이 왈칵 치밀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그 때 즈음 주말의 명화를 통해 감상했던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영화 [플라이]가 겹쳤던 기억도 생생하다. 마치 카프카의 [변신] 에서 모티프를 얻은 듯, 영화는 끔찍할 정도로 생생하게 벌레로 변해가는 한 인간의 모습을 절묘하게 표현했었다. 특히, 이 책에도 등장하는 점액질을 묻히며 벽과 천장을 기어다니는 모습이 너무나 완벽하게 그려져 있었기에 나에게 [카프카] 는 [데이빗 크로넨버그], 그리고 [변신] 은 영화 [플라이] 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수년이 지난 지금 난, 다른 것이 보였다. 

여전히, 이 작품이 왜 그렇게 읽기에 짜증이 날 정도였냐면, '불편함' 과 '아픔' 에 대한 묘사들이 너무너무나 리얼해서였다. 그레고리라는 한 사람의 몸이 정말로 벌레가 된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는데, 그것은 제 몸을 마음대로 가눌 수 없는 '불편함' 과 시시때때로 닥쳐오는 극심한 '통증'들에 대한 세밀한 묘사 때문이었다. 그저 벌레가 되어서, 다리가 여러개 생기고, 몸이 딱딱해지고 - 그런 변화들이 '고통' 을 수반한다. 


"몸을 오른쪽으로 돌리려고 아무리 애를 써보아도 그는 번번이 등을 대고 누운 자세로 되돌아와 흔들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옆구리에서  이때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가볍고 둔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하자"

p.8 


"몸을 일으켜세우려면 팔과 손이 있어야 하는데, 이제 그런 것  대신 가는 다리들만 수없이 많이 있었다.

그 다리들은 끊임없이 제각각 움직였고 그의 뜻대로 통제할 수가 없었다.

다리 하나를 구부려보려고 애쓰면 오히려 그 다리가 먼저 쭉 펴지는 식이었다."

p. 16


"곧 화끈거리는 통증이 느껴졌고, 그 통증은 변해버린 자신의 몸에서 가장 예민한 부분이 지금으로선 하반신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p. 17


초반 몇페이지에 걸쳐 그레고리의 몸이 단순히 벌레의 모습으로 변한 것 뿐 아니라,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않을' 뿐 아니라 여기저기가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통증' 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디테일하게 설명해준다. 초반 뿐 아니라, 사실, 이야기의 대부분이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고' , '엄청나게 아프다' 는 것에 대한 묘사로 채워져 있다. 

이 작품이 묘하게 '사람이 벌레가 된다' 는 판타지적인 설정임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리얼하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바로 이 지점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아프고 고통스러운 감정들 - 편의상, '마이너한 감정'이라고 하자.- 을 훨씬 강렬하게 받아들인다. 카프카의 '변신' 은 바로 그 마이너한 감정들을 너무나 절묘하게 잡아내어 정확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문장들은 모두 낚시바늘이 되어 내 마음 속 깊숙히 묻어둔 마이너한 감정들을 '상상력' 을 통해 줄줄이 꿰어 수면 위로 올라오게 만들었다.


어제까지도 멀쩡했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몸도 마음대로 못 가누고, 온몸 여기저기에서 통증들이 비명을 질러내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설정에서 '장 도미니크 보비'의 [잠수복과 나비] 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불의의 사고로 '로크드 인 신드롬' 이라는 의학적 상태에 빠져들게 된 장 도. 정신상태와 육체상태가 너무나 멀쩡한데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 병실 창문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에 팔이 타는 듯이 따가워도, 그 고통을 그냥 그대로 느끼고 있을 따름이다. 누군가 알아채고 커튼을 쳐주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상황. 장 도는 잠수복에 갇혀 깊은 물속에 가라앉아 있다. 엄청난 절망과 공포로 인한 고통 속에서. 


[변신] 을 처음 읽었을 때 [플라이] 가 연상되었다면, 이번에는 [잠수복과 나비] 가 연상된다. 

그레고르와 장 도는 너무나 많이 닮아있다. 다른 점이라면, 그레고르는 완벽히 창조된 가상의 인물이고, 장 도는 실제로 그 일을 겪은 진짜 사람이라는 것일터다. 하지만, 카프카의 [변신] 과 장 도의 수기인 [잠수복과 나비] 는 크게 다르지 않다. 


어느날 갑자기 벌레가 되어버리는 것과, 어느날 갑자기 반신불수가 되는 것과, 어느날 갑자기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는 것과, 어느날 갑자기 절친의 부음 소식을 듣는 것과, 어느날 갑자기 전재산을 날리는 것은 토씨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우리 인생속에서 '큰일났다!' 할때의 '큰일' 이란 대부분 예고 없이 찾아온다.  '큰일났다!' 라는 생각조차 할 틈이 없을 정도로 그 큰일에 휘말려 들기도 한다. 그 안에서 우리는 팔다리를 마음대로 놀릴 수 없을 것이다. 아니, '팔 다리가 있어봤자 무에 쓸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일터다. 

굳이 그런 사건과 사고를 예로 들지 않아도, 우리는 누구나 그레고르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다.

팔 다리가 마음대로 안 움직여지고, 한번 움직일 때 마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게 되는 상황 말이다.


'노화.'

이다.

이 세상 어떤 사람이든 어느날 갑자기 침대에서 몸을 한번에 일으킬 수 없는 순간이 온다. 간신히 다리를 움직여 바닥을 디뎌도 몸을 세울 수 없는 순간이 온다. (안타깝게도 난 노화도 되지 않은 주제에 벌써 그런 일을 겪긴 했지만. ;;;)


그레고르는 그런 상황속에서도 가족의 생계를 걱정한다. 회사에서 해고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늙으신 부모님과 어린 여동생을 걱정한다. 그 대목에서는 우리 부모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퇴행성 관절염이 시작된 무릎을 치료 받고, 어깨를 치료받고, 허리를 치료받으면서도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일터로 나간다. 통증에 익숙해지고, 노안이 시작되어 희미해지는 눈을 돋보기로 적응시키고, 순간순간 뻐근해지는 근육들을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풀면서, 좁은 운전석에, 기계 앞에, 사무실 안에, 책상 속에 육체를 구겨넣는 우리 부모님들.

그리고 당연히 그 모습들은 나의 미래. 우리의 미래이다. 


늙음.

그레고르의 가족들이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를 대하는 모습에서 '덜 늙은' 사람들이 늙은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았다.

자식들이 늙은 부모님들을 대하는 모습도 보였다. 특히 가장 마지막 단락. 거기에서는 더더욱 강렬하게 보였다.


십여년전 [변신] 에서는 끔찍함과 상상력이 보였다면, 

32살의 [변신] 에서는 통증과 노화가 보였다. 

우리는 누구나, 그레고르와 같은 경험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 머지 않은 미래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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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F/B1 일층, 지하 일층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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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소설과 대하 소설만 주구장창 읽어대던 시절이 있었다. 

마치 널바나나 쥬다스 프리스트, 아이언 메이든이나 메가데쓰등의 헤비메탈만 주구장창 들으며, 메탈리카는 이제 변절해서 팝에 가까워졌다느니, 본 조비는 락을 오염시킨 장본인이라느니, 가요는 동요수준이라느니 씹어대던 그 시절처럼 말이다. 

5권 이하의 책은 상종도 안했고, 한권짜리가 왜 장편이야? 하던 시절이었다. 


대학에 들어가서 졸업작품이나 공모전 제출용 단편 만화 시나리오를 짜면서 생전 처음으로 편두통이란 걸 경험했다. 명징한 주제, 입체적인 캐릭터, 발랄한 상상력. 무엇보다 고통스러웠던 것은 '한정된 지면' 이었다.  어떤 유명한 위인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 기억엔 강철왕 카네기. 확실치는 않다.)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풀어내는 것은 평범한 재능이다.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진정 뛰어난 재능이다.' 이 말 역시 확실치는 않지만 의미는 맞을 것이다. 

단편 만화 시나리오를 짜면서 수많은 단편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카프카, 카버, 이상, 김영하... 물론 이분들은 리얼리즘의 화신 같은 분들이라 내가 만화 시나리오를 짜는데 직접적으로는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았지만, '끝난 것 같지만 끝난게 아닌, 그러니까, 완결은 되었고, 결국 완성도란 것이 반드시 이야기 자체가 종결되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 라는 점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 와중에 김중혁의 [펭귄뉴스] 라는 단편을 접했더랬다. 비슷한 시기에 신처럼 모시던 필립 K 딕과 러브 크래프트, 로저 젤라즈니 같은 기라성 같은 SF작가의 단편들을 읽고 있었는데, 뭐지, 이 김중혁이라는 사람은... 신처럼 모시던 작가들에 대한 신앙심을 잃게 만든 것이다. 특히, 펭귄뉴스의 그 음울한 디스토피아적 상상력과 리얼리즘의 묘한 조화. 같은 제목의 작품집에 있던 [무용지물 박물관] [발명가 이눅씨의 설계도] [바나나 주식회사] 등에도 깊은 감명을 받았고, 다음 단편집인 [악기들의 도서관] 의 작품들을 통해서도 깊은 인상을 받았더랬다. 단순히 발랄한 아이디어를 글로 옮기는 것 뿐 아니라, 대단한 작품성과 문학성까지 함께 녹여낼 수 있는 작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나는 내 만화 시나리오는 전혀 상관없는 액션 무협으로 짜서 공모전에서는 보기좋게 떨어졌지만, (여전히 그런곳에서는 죽죽 떨어지는 중이긴 하지만) '장편 소설만 주구장창 읽어대던 시절' 에는 확실히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작가의 역량이나 재능, 그리고 문학적 정수는 단편에서 읽어낼 수 있다.  


 김중혁 작가의 작품은 책으로 묶여 나온 것은 대부분 다 읽었다. [악기들의 도서관] 뒤에 장편이 두권 나왔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단편보다 별로였다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이야기의 구조도 좋고, 완성도도 좋았지만, 내가 '김중혁' 이라는 '브랜드'에 바라는 컨텐츠에 비해서 좀 평범한 느낌이었다. 그러한 아쉬움을 한방에 깨뜨려 준 작품이 바로 이번 신작 [1F/B1] 이다. 


 [ C1+Y=:[8]:] 이라는 읽기도 버거운 첫 작품부터 마지막 [크랴샤] 라는 작품까지 총 일곱 작품이 꽉꽉 들어차 있다. 

이번 작품집의 작품들은 모두 '도시' 를 연상시키는 소재들이 등장하는데, 마치 연작소설집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먼저 첫작품인[ C1+Y=:[8]:] 은 제목부터 풀어보자면 'CITY = :[8]:' 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8]: 은 스케이트보드를 위에서 바라본 모양을 기호와 숫자로 표현한 것이다. 즉, [도시 = 스케이트보드] 라는 제목인 것이다. 제목부터 기똥차기 짝이없다. 작품 말미에나 등장하는 화자의 친절한 해설을 듣고보니 너무나 그럴싸하다. 도심 곳곳을 가로지르는 발랄한 스케이트 보더들. 그리고 그 뒤를 쫓으며 도시와 정글의 상관관계를 떠올리는 '도시 연구가' 인 화자 '나' 의 이야기가 경쾌하게 굴러간다. 


두번째 작품인 [냇가로 나와]는 '뗏목'과 '강' 이라는 소재가 등장한다. 뗏목과 강은 얼핏 생각하면 도시와 큰 관련이 없는 것 같지만, 전통적으로 큰 도시들은 대부분 물길을 주요 교통로로 삼기도 했다. 강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조금 좁은듯도 한 '천천' 과 뗏목의 주인 '통나무 김씨' 그리고 전설적인 고등학생 '하마까' 에 대한 회상이 주 내용이다. 


 세번째 작품인 [바질] 은 도시 한구석 공터에 아무렇게나 자라난 수풀을 떠올리게 한다. 나도 어린 시절, 연립빌라 한켠에 무성하게 자라있던 수풀들을 기억한다. 아주 작은 동산에 어디선가 날아온 씨앗들이 모여들어 생명력 강한 잡초들이 군락을 이루었다. 빳빳하고 질긴 생명들이 촘촘하게 얽혀있는 모습은 경이롭고 공포스러웠다. 그러한 감성이 작품안에 잘 스며들어있다. 김중혁 작가의 작품 최초로 '연인' 이 등장하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실상은..... 


 네번째 작품인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 우주와 우주킬러가 등장하는 스페이스 오페라를 연상케 한다. 개인적으로는 배명훈 작가가 많이 떠올랐다.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큰 숫자가 등장하는 점이나 사람을 죽이는 행위에 대한 무미건조한 묘사가 배명훈 작품의 특징과 비슷했지만, 이야기 전반에 흐르는 감성은 완전히 다르다. 특히, 엔딩이 특히 마음에 들었는데, 작품의 세계관이나 인물들을 장편으로 만나고 싶었던 작품이었다. 


 다섯번째 작품이 이 작품집의 제목이기도 한  [F1/B1] 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 작품 역시 배명훈 작가가 아주 많이 떠올랐다. 전작까지는 몰랐는데, 김중혁 작가와 배명훈 작가가 여러 점에서 상당히 많이 닮아있다고 느꼈다. 특히나, 이 작품은 완벽히 독립된 하나의 국가로 작용하는 한 채의 거대한 빌딩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려낸 배명훈 작가의 연작 [타워] 시리즈가 떠올랐다. 김중혁 작가의 [1F/B1] 은 그런 거대한 빌딩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주 활동무대가 되는 '네오타운' 이라는 빌딩의 이름만 들어봐도 주상복합적인 빌딩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작고 소소한 발상을 거대 담론처럼 표현하는 방식도 상당히 닮아있다. 사실 김중혁과 배명훈. 배명훈과 김중혁 이 두 작가의 작품세계는 상당히 닮아있는데, 언젠가 신경써서 다뤄봐도 재미있을 듯 싶다. 

[ F1/B1]은 '건물 관리자 연합' 의 이야기이다. 이름 그대로 빌딩을 관리하는 관리자의 이야기인데, 빌딩들이 무려 지하통로로 연결되어있다는 설정이다. 전에 팟캐스트 방송을 통해 '사라진 직업들' 에 대한 책을 소개해준 적이 있는데, 그 책에 등장했던 지하 우편 배달 통로 시스템의 아이디어를 차용했다는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이 아니었을까 싶다. 상자갑 같은 빌딩 속에서, 상자갑 같은 사무실 안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삶이 우화적으로 표현된 듯 하다. 


 [유리의 도시] 는 미스테리 스릴러이다. 건물들이 모여있는 강남 테헤란로나 종로타워등을 보면 건물 전체가 유리로 뒤덮인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저 엄청난 높이에서, 저 엄청난 바람을, 기압을 유리들이 정말 잘 이겨낼 수 있을까? 하기사, 총도 폭탄도 막는 유리도 있으니까. 만약 그런 유리가 어느날 갑자기 떨어져서 지나가는 행인을 덮친다면 어떨까?? 그런 끔찍한 상상으로 점철된 이 작품은 시체와 죽음이 즐비하게 깔려있다. 


 작품집의 대미를 장식하는 [크랴샤] 는 내가 읽은 모든 김중혁 작가의 작품들 중 가장 좋아하는 순위 맨 위에 올릴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특히 작품집의 마지막에 배치한 편집자의 센스가 탁월했다. 만약 이 작품이 맨 앞이나 중간 즈음에 실렸다면 이만한 감동을 이끌어낼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는 어떤 책이건 앉은자리에 한번에 다 읽어치우는 성격이 아니어서 그게 무슨 상관이랴, 할 수도 있었지만, 분명  [크랴샤] 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을 매조지하는 느낌이 있다. 현실과 회상, 도전과 좌절, 늙음과 젊음이 조화롭게 모여있는 이 작품이 김중혁 작가의 작품세계에 일종의 전환점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김중혁 작가의 작품들은 '재기발랄함' 이라는 단어로 가려지지만, 실제로는 우리 사회의 가장 '마이너리티'한 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잘 담아내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연애도 제대로 못하는 싱글. 솔로남들도 마이너리티 일 수 있겠고. ^^) 이 작품 안에서도 도시를 떠도는 어린 스케이트 보더들, 냇가에 오두막을 짓고 뗏목으로 내를 건너는 일을 주업으로 삼는 사람, 건물 관리자, 목공사, 마술사 지망생 등. 그의 단편들에서는 언제나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재기발랄한 소재와 어우러져 따뜻한 세계를 만들어낸다.

 특히 이번 단편들은 보다 깊어진 느낌이다. 


이 작품의 리뷰를 하기 전에 2008년 4월경에 쓴 [악기들의 도서관] 리뷰를 다시 찾아봤다.

'8편의 사랑스러운 단편들이 아글아글 모여있는....' 로 시작되는 서두를 그대로 다시 가져와서 이 긴 감상문의 마무리로 써도 될 것 같다.

 

7편의 사랑스러운 단편들이 아글아글 모여있는, 누구에게든 선물하고 싶고, 몇번이라도 보고 싶은. 

듣고 듣고 또 들어도 듣고싶은 음반같은 책. 







"사흘이 지나자 어딘가 아파왔다.

아프긴 했지만 상처를 집어낼 수는 없었다. 

살을 파고 뼈를 헤집어 상처를 들어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상처는 계속 이동했다.

때로는 무릎에 아팠고, 때로는 등이 아팠고, 때로는 발뒤꿈치가 아팠다.

마음이 아플 줄 알았는데 몸이 아팠다.

모든 고통을 이별로부터 왔다. "

p. 89 [바질]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어요.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헤어진 사람.

그 중에서 제일 피해야 할 사람이 헤어진 사람이에요."

p. 114 [바질] 


"네 개의 벽이 방을 둘러싸고 있지만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때, 그 벽은 무의미해진다. 

벽이 사라지면 우주 전체가 너무 크게 느껴지고 자신이 너무 작게 느껴져서, 몸이 수축되는 느낌을 받기도 하는데, 그 때문인지 윤정우는 어두운 방에서 자신이 점점 줄어들어 작은 모래 알갱이가 되는 꿈을 자주 꾸었다. "

p. 179 [1F/B1]


"모든 통로가 이어져 있다는 것은 얼마나 위로가 되는가.

윤정우는 가끔 어두운 통로에다 머리를 들이밀고 소리를 질러보기도 했다.

"아" 하고 소리를 지르면 어디선가 "아" 하는 소리가 들렸다." 

p.204 [1F/B1]


"모든 정황을 종합해 봤을 때 유리의 자살로 마무리 지을 수 있지 않을까요?

여기 벽에 붙어 있다가 너무 힘들어서 아래로 뛰어내린 거죠.

그늘이 없어서 너무 힘들어요, 그러면서, 사무실 안녕, 하면서 말예요."

p. 209~210 [유리의 도시] 


"그러나 나는 분명히 안다. 

소멸된 것들은 되살아날 수 없다. 그리고 찢어진 것들은 절대 다시 붙지 않는다.

나는 삶과 마술을 때때로 바꾸고 싶어진다.

화장지가 붙는 대신 어머니가 되살아나는 장면을, 스카프가 비둘기로 변하는 대신 돈으로 변하는 장면을, 꿈꾼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p. 273. [크라샤] 


"그 자리에는 이미 거대한 쇼핑몰이 들어섰는데, 내게는 가끔 운조빌딩이 보인다.

바깥으로 툭 튀어나온 책상 같던 운조빌딩이 나타난다.

고개를 젓고 눈을 깜빡여본다.

환각은 금방 사라진다.

동그란 가로등 불빛이 수십 개 눈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눈이 침침하다.도시는 절대 낡지 않는다.

나만 낡아갈 뿐이다.

p. 274 [크라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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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그타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5
E. L. 닥터로 지음, 최용준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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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초반. 비교적 상류층 가정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잘나가는 사업체를 운영하는 아버지와 아름다운 어머니, 외삼촌과 이야기의 화자인 아들로 이루어진 백인가정. 이야기의 줄기들은 바로 이 가정을 중심으로 뻗어나간다. 당대 최고의 퍼포먼스 아티스트이자 마술사였던 후디니가 우연히 이 가정을 방문하게 된다. 그리고 외삼촌이 사랑했던 여인 에벌린 네즈빗, 에벌린 네즈빗을 사랑했던 스탠퍼드 화이트와 그를 총으로 쏘아 죽인 에벌린 네즈빗의 남편 해리 K 소. 그리고 에벌린 네즈빗이 만나게 되는 차별받는 이민자 가족인 타테와 그의 어리고 예쁜 딸. 그리고 타테가 에벌린을 이끈 모임에서 만나게 되는 무정부주의 운동가 옘마 골드만. 그리고 옘마 골드만과 만나게 되는 외삼촌. 소년의 어머니가 우연히 구해낸 산채로 땅속에 묻혀있던 유색인 갓난아기와 그 아이의 엄마였던 세라. 그리고 세라를 사랑했던 남자이자 산채로 땅속에 묻혀 죽을 뻔 했던 갈색피부 아이의 아빠인 품위있던 니그로 피아니스트 콜하우스 워커 주니어. 콜하우스 워커 주니어가 타고 다니던 포드 자동차의 주인인 헨리 포드와 그와 함께 하고싶었던 미국 금융업계의 지배자 피어폰트 모건. 


 수많은 인물들이 소년의 가족들 주변에서 점멸하고, 소년은 담담하게 인물들의 뒤를 좇는다. 얼핏, 소설이 아니라 르포같은 느낌이지만, 분명한 소설이다. 그것도 완벽한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의. 하지만, 시간과 장소의 흐름의 기준점을 이 '소년' 으로 잡음으로서 마치 소년의 입을 통해 나오는 것 처럼 느껴진다. 대단히 독특한 경험이었다. 소년의 아버지와 어머니, 외삼촌은 먼저 후디니라는 인물과 만나면서 심경에 작은 파문을 경험한다. 후디니는 미국사회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한두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탈출묘기의 명수. 미국은 물론 유럽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마술사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피어리와 함께 북극 탐험에 동행한다. 피어리 역시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북극점을 정복한 미국의 위대한 탐험가이다. 에벌린 네즈빗은 '빨강머리 앤'의 실존모델로 유명한 당대 최고의 슈퍼모델, 핀 업 걸이었다. 그녀는 강렬한 매력은 당시 브로드 웨이 무대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켜 무대의 구성과 연출을 뒤바꿀 정도였다고 한다. 옘마 골드만은  알렉산더 버크만과 함께 당대의 노동운동을 이끈 무정부주의 운동가였으며, 콜하우스 워커 주니어는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은 흑인 테러리스트였다. 이렇게 당시 미국 사회의 전반에서 큰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 한 작은 가정에 일으킨 변화를 살피는 일이 상당히 흥미롭다. 

 

 뿐만 아니라 당시 미국 사회에 나뉘어있던 계층, 앵글로 색슨 계열의 백인 가정과 유럽의 이민자, 노예에서 벗어난 흑인들, 최 상류층 은행가와 사업가, 인기 절정의 여배우와 공연가등 각계 각층의 인물들의 삶이 단편적이지만 명확하게 그리고, 빠르게 정리되어 지나간다. 현대 미국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금융과 기업,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 산업 등 문화의 시초를 잠깐씩이나마 맛볼 수 있다. 중간 중간, 미국 대륙을 횡단하는 거대한 철로와 필라델피아의 대규모 공업단지도 구경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마치 기차를 타고 지나가는 풍경을 구경하는 듯한 느낌이다. 허나, 차창을 통해 지나가는 문장의 풍경들은 그저 피상적인 '스크린' 이 아니다. 창 밖으로 거대한 역사가 도도하게 흘러간다. 미국 현대소설의 특징이랄 수 있는 부사나 형용사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 간결한 문장은 빠르고 군더더기 없는 이야기의 흐름과 어우러져 상당한 시너지를 발휘한다. 적당한 호흡으로 인물들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분절되며 시종일관 지루할 새 없이 이야기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산발적으로 흩어져있던 인물들의 점은 이야기의 중반에 등장하는 콜하우스 워커 주니어와 함께 하나의 선으로 모아진다. 역자 후기에도 등장하지만, 짧고 간결하고 빠르다고 깊이가 없고 함의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의 문장과 문장들이 모인 문단들, 심지어 문단 사이의 여백에까지도 작가의 함의가 깊이 배여있다. 당연히 그 함의를 찾아내는 것은 독자들의 몫일터다. 까메오처럼 등장하는 미국의 정치가들과 1달러지폐에 그려있는(각종 음모론의 소재가 되는) 피라미드와 눈 심볼의 기원으로 추측되는 사건, 미국 노동조합의 탄생과 여성인권운동과 아나키즘의 접목,  제1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위 계승자 프란츠 대공의 암살까지, 가볍게 넘길 문장들이 단 한 줄도 없다. '천천히 읽으라' 는 역자의 말과, 역시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맨 앞장의 인용 문구 "이 곡은 빨리 치지 말게. 래그 타임은 절대 빨리 치면 안 돼..." 라는 스콧 조플린의 문구까지, 충분히 이해된다. 

 

 문학은 독자들에게 해답을 주지 않는다.

작가는 사람들을 선도하거나 꿈과 희망을 주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건 정치가들의 몫이다. 소설가는 단지 현실을 그려낼 뿐이다. 어떤 독자들은 그 현실을 보고 해답을 찾거나, 꿈이나 희망을 얻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당연히 독자 개인의 몫이다. 당연히 작가에게는 독자를 감동시킬 의무도 없고, 깨달음을 줄 의무도 없다. 위로를 받건, 절망을 하건, 모두 독자의 몫이다. 

 이 책을 읽고 당신은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평생에 한번쯤은 일독을 해 볼 만한 작품임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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