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F/B1 일층, 지하 일층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장편 소설과 대하 소설만 주구장창 읽어대던 시절이 있었다. 

마치 널바나나 쥬다스 프리스트, 아이언 메이든이나 메가데쓰등의 헤비메탈만 주구장창 들으며, 메탈리카는 이제 변절해서 팝에 가까워졌다느니, 본 조비는 락을 오염시킨 장본인이라느니, 가요는 동요수준이라느니 씹어대던 그 시절처럼 말이다. 

5권 이하의 책은 상종도 안했고, 한권짜리가 왜 장편이야? 하던 시절이었다. 


대학에 들어가서 졸업작품이나 공모전 제출용 단편 만화 시나리오를 짜면서 생전 처음으로 편두통이란 걸 경험했다. 명징한 주제, 입체적인 캐릭터, 발랄한 상상력. 무엇보다 고통스러웠던 것은 '한정된 지면' 이었다.  어떤 유명한 위인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 기억엔 강철왕 카네기. 확실치는 않다.)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풀어내는 것은 평범한 재능이다.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진정 뛰어난 재능이다.' 이 말 역시 확실치는 않지만 의미는 맞을 것이다. 

단편 만화 시나리오를 짜면서 수많은 단편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카프카, 카버, 이상, 김영하... 물론 이분들은 리얼리즘의 화신 같은 분들이라 내가 만화 시나리오를 짜는데 직접적으로는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았지만, '끝난 것 같지만 끝난게 아닌, 그러니까, 완결은 되었고, 결국 완성도란 것이 반드시 이야기 자체가 종결되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 라는 점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 와중에 김중혁의 [펭귄뉴스] 라는 단편을 접했더랬다. 비슷한 시기에 신처럼 모시던 필립 K 딕과 러브 크래프트, 로저 젤라즈니 같은 기라성 같은 SF작가의 단편들을 읽고 있었는데, 뭐지, 이 김중혁이라는 사람은... 신처럼 모시던 작가들에 대한 신앙심을 잃게 만든 것이다. 특히, 펭귄뉴스의 그 음울한 디스토피아적 상상력과 리얼리즘의 묘한 조화. 같은 제목의 작품집에 있던 [무용지물 박물관] [발명가 이눅씨의 설계도] [바나나 주식회사] 등에도 깊은 감명을 받았고, 다음 단편집인 [악기들의 도서관] 의 작품들을 통해서도 깊은 인상을 받았더랬다. 단순히 발랄한 아이디어를 글로 옮기는 것 뿐 아니라, 대단한 작품성과 문학성까지 함께 녹여낼 수 있는 작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나는 내 만화 시나리오는 전혀 상관없는 액션 무협으로 짜서 공모전에서는 보기좋게 떨어졌지만, (여전히 그런곳에서는 죽죽 떨어지는 중이긴 하지만) '장편 소설만 주구장창 읽어대던 시절' 에는 확실히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작가의 역량이나 재능, 그리고 문학적 정수는 단편에서 읽어낼 수 있다.  


 김중혁 작가의 작품은 책으로 묶여 나온 것은 대부분 다 읽었다. [악기들의 도서관] 뒤에 장편이 두권 나왔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단편보다 별로였다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이야기의 구조도 좋고, 완성도도 좋았지만, 내가 '김중혁' 이라는 '브랜드'에 바라는 컨텐츠에 비해서 좀 평범한 느낌이었다. 그러한 아쉬움을 한방에 깨뜨려 준 작품이 바로 이번 신작 [1F/B1] 이다. 


 [ C1+Y=:[8]:] 이라는 읽기도 버거운 첫 작품부터 마지막 [크랴샤] 라는 작품까지 총 일곱 작품이 꽉꽉 들어차 있다. 

이번 작품집의 작품들은 모두 '도시' 를 연상시키는 소재들이 등장하는데, 마치 연작소설집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먼저 첫작품인[ C1+Y=:[8]:] 은 제목부터 풀어보자면 'CITY = :[8]:' 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8]: 은 스케이트보드를 위에서 바라본 모양을 기호와 숫자로 표현한 것이다. 즉, [도시 = 스케이트보드] 라는 제목인 것이다. 제목부터 기똥차기 짝이없다. 작품 말미에나 등장하는 화자의 친절한 해설을 듣고보니 너무나 그럴싸하다. 도심 곳곳을 가로지르는 발랄한 스케이트 보더들. 그리고 그 뒤를 쫓으며 도시와 정글의 상관관계를 떠올리는 '도시 연구가' 인 화자 '나' 의 이야기가 경쾌하게 굴러간다. 


두번째 작품인 [냇가로 나와]는 '뗏목'과 '강' 이라는 소재가 등장한다. 뗏목과 강은 얼핏 생각하면 도시와 큰 관련이 없는 것 같지만, 전통적으로 큰 도시들은 대부분 물길을 주요 교통로로 삼기도 했다. 강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조금 좁은듯도 한 '천천' 과 뗏목의 주인 '통나무 김씨' 그리고 전설적인 고등학생 '하마까' 에 대한 회상이 주 내용이다. 


 세번째 작품인 [바질] 은 도시 한구석 공터에 아무렇게나 자라난 수풀을 떠올리게 한다. 나도 어린 시절, 연립빌라 한켠에 무성하게 자라있던 수풀들을 기억한다. 아주 작은 동산에 어디선가 날아온 씨앗들이 모여들어 생명력 강한 잡초들이 군락을 이루었다. 빳빳하고 질긴 생명들이 촘촘하게 얽혀있는 모습은 경이롭고 공포스러웠다. 그러한 감성이 작품안에 잘 스며들어있다. 김중혁 작가의 작품 최초로 '연인' 이 등장하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실상은..... 


 네번째 작품인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 우주와 우주킬러가 등장하는 스페이스 오페라를 연상케 한다. 개인적으로는 배명훈 작가가 많이 떠올랐다.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큰 숫자가 등장하는 점이나 사람을 죽이는 행위에 대한 무미건조한 묘사가 배명훈 작품의 특징과 비슷했지만, 이야기 전반에 흐르는 감성은 완전히 다르다. 특히, 엔딩이 특히 마음에 들었는데, 작품의 세계관이나 인물들을 장편으로 만나고 싶었던 작품이었다. 


 다섯번째 작품이 이 작품집의 제목이기도 한  [F1/B1] 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 작품 역시 배명훈 작가가 아주 많이 떠올랐다. 전작까지는 몰랐는데, 김중혁 작가와 배명훈 작가가 여러 점에서 상당히 많이 닮아있다고 느꼈다. 특히나, 이 작품은 완벽히 독립된 하나의 국가로 작용하는 한 채의 거대한 빌딩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려낸 배명훈 작가의 연작 [타워] 시리즈가 떠올랐다. 김중혁 작가의 [1F/B1] 은 그런 거대한 빌딩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주 활동무대가 되는 '네오타운' 이라는 빌딩의 이름만 들어봐도 주상복합적인 빌딩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작고 소소한 발상을 거대 담론처럼 표현하는 방식도 상당히 닮아있다. 사실 김중혁과 배명훈. 배명훈과 김중혁 이 두 작가의 작품세계는 상당히 닮아있는데, 언젠가 신경써서 다뤄봐도 재미있을 듯 싶다. 

[ F1/B1]은 '건물 관리자 연합' 의 이야기이다. 이름 그대로 빌딩을 관리하는 관리자의 이야기인데, 빌딩들이 무려 지하통로로 연결되어있다는 설정이다. 전에 팟캐스트 방송을 통해 '사라진 직업들' 에 대한 책을 소개해준 적이 있는데, 그 책에 등장했던 지하 우편 배달 통로 시스템의 아이디어를 차용했다는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이 아니었을까 싶다. 상자갑 같은 빌딩 속에서, 상자갑 같은 사무실 안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삶이 우화적으로 표현된 듯 하다. 


 [유리의 도시] 는 미스테리 스릴러이다. 건물들이 모여있는 강남 테헤란로나 종로타워등을 보면 건물 전체가 유리로 뒤덮인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저 엄청난 높이에서, 저 엄청난 바람을, 기압을 유리들이 정말 잘 이겨낼 수 있을까? 하기사, 총도 폭탄도 막는 유리도 있으니까. 만약 그런 유리가 어느날 갑자기 떨어져서 지나가는 행인을 덮친다면 어떨까?? 그런 끔찍한 상상으로 점철된 이 작품은 시체와 죽음이 즐비하게 깔려있다. 


 작품집의 대미를 장식하는 [크랴샤] 는 내가 읽은 모든 김중혁 작가의 작품들 중 가장 좋아하는 순위 맨 위에 올릴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특히 작품집의 마지막에 배치한 편집자의 센스가 탁월했다. 만약 이 작품이 맨 앞이나 중간 즈음에 실렸다면 이만한 감동을 이끌어낼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는 어떤 책이건 앉은자리에 한번에 다 읽어치우는 성격이 아니어서 그게 무슨 상관이랴, 할 수도 있었지만, 분명  [크랴샤] 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을 매조지하는 느낌이 있다. 현실과 회상, 도전과 좌절, 늙음과 젊음이 조화롭게 모여있는 이 작품이 김중혁 작가의 작품세계에 일종의 전환점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김중혁 작가의 작품들은 '재기발랄함' 이라는 단어로 가려지지만, 실제로는 우리 사회의 가장 '마이너리티'한 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잘 담아내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연애도 제대로 못하는 싱글. 솔로남들도 마이너리티 일 수 있겠고. ^^) 이 작품 안에서도 도시를 떠도는 어린 스케이트 보더들, 냇가에 오두막을 짓고 뗏목으로 내를 건너는 일을 주업으로 삼는 사람, 건물 관리자, 목공사, 마술사 지망생 등. 그의 단편들에서는 언제나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재기발랄한 소재와 어우러져 따뜻한 세계를 만들어낸다.

 특히 이번 단편들은 보다 깊어진 느낌이다. 


이 작품의 리뷰를 하기 전에 2008년 4월경에 쓴 [악기들의 도서관] 리뷰를 다시 찾아봤다.

'8편의 사랑스러운 단편들이 아글아글 모여있는....' 로 시작되는 서두를 그대로 다시 가져와서 이 긴 감상문의 마무리로 써도 될 것 같다.

 

7편의 사랑스러운 단편들이 아글아글 모여있는, 누구에게든 선물하고 싶고, 몇번이라도 보고 싶은. 

듣고 듣고 또 들어도 듣고싶은 음반같은 책. 







"사흘이 지나자 어딘가 아파왔다.

아프긴 했지만 상처를 집어낼 수는 없었다. 

살을 파고 뼈를 헤집어 상처를 들어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상처는 계속 이동했다.

때로는 무릎에 아팠고, 때로는 등이 아팠고, 때로는 발뒤꿈치가 아팠다.

마음이 아플 줄 알았는데 몸이 아팠다.

모든 고통을 이별로부터 왔다. "

p. 89 [바질]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어요.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헤어진 사람.

그 중에서 제일 피해야 할 사람이 헤어진 사람이에요."

p. 114 [바질] 


"네 개의 벽이 방을 둘러싸고 있지만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때, 그 벽은 무의미해진다. 

벽이 사라지면 우주 전체가 너무 크게 느껴지고 자신이 너무 작게 느껴져서, 몸이 수축되는 느낌을 받기도 하는데, 그 때문인지 윤정우는 어두운 방에서 자신이 점점 줄어들어 작은 모래 알갱이가 되는 꿈을 자주 꾸었다. "

p. 179 [1F/B1]


"모든 통로가 이어져 있다는 것은 얼마나 위로가 되는가.

윤정우는 가끔 어두운 통로에다 머리를 들이밀고 소리를 질러보기도 했다.

"아" 하고 소리를 지르면 어디선가 "아" 하는 소리가 들렸다." 

p.204 [1F/B1]


"모든 정황을 종합해 봤을 때 유리의 자살로 마무리 지을 수 있지 않을까요?

여기 벽에 붙어 있다가 너무 힘들어서 아래로 뛰어내린 거죠.

그늘이 없어서 너무 힘들어요, 그러면서, 사무실 안녕, 하면서 말예요."

p. 209~210 [유리의 도시] 


"그러나 나는 분명히 안다. 

소멸된 것들은 되살아날 수 없다. 그리고 찢어진 것들은 절대 다시 붙지 않는다.

나는 삶과 마술을 때때로 바꾸고 싶어진다.

화장지가 붙는 대신 어머니가 되살아나는 장면을, 스카프가 비둘기로 변하는 대신 돈으로 변하는 장면을, 꿈꾼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p. 273. [크라샤] 


"그 자리에는 이미 거대한 쇼핑몰이 들어섰는데, 내게는 가끔 운조빌딩이 보인다.

바깥으로 툭 튀어나온 책상 같던 운조빌딩이 나타난다.

고개를 젓고 눈을 깜빡여본다.

환각은 금방 사라진다.

동그란 가로등 불빛이 수십 개 눈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눈이 침침하다.도시는 절대 낡지 않는다.

나만 낡아갈 뿐이다.

p. 274 [크라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