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은 책상이다
페터 빅셀 지음, 이용숙 옮김 / 예담 / 200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인터넷 팟캐스트 방송에서 우연히 듣고 흥미가 생겨서 구입했다. 판형도 작고, 페이지도 100페이지가 책 되지 않는 얇디 얇은 책이다. 가격도 6800원. 2001년 10월에 초판 1쇄가 발행되었고, 내가 산 책은 2012년 3월 초판 35쇄째이다. 척박한 우리나라의 출판환경에서 10년이 넘게 꾸준히 초판이 판매되는 책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첫 페이지를 넘겼다. 얇고, 작고, 싸지만 튼튼한 하드커버로 되어있다. (커버의 폰트를 비롯한 전체적인 디자인이 '어린이 명심보감' 느낌이라 조금 아쉬웠지만,) 

이 작고 단단한 책 안에는 총 7편의 작품들이 들어있다. '지구는 둥글다' 라는 작품부터 시작되는데, 일곱편의 이야기가 모두 구조도 비슷하고, 느낌도 비슷하다.


 먼저 [지구는 둥글다] 는 지구가 둥글다는 확신을 갖기 위해 무조건 앞으로 쭉 걸어갈 계획을 세운 노인의 이야기이다. 지구가 둥글다면, 앞으로 쭉 걸어가면 그자리로 돌아올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노인. 앞으로 걸어가려 하자 바로 집 앞에 다른 집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빙 돌아가다간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노인. 노인은 사다리를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 집 뒤에는 숲도 있고, 산도 있고, 강도 있고, 호수도 있고, 바다도 있다. 노인은 자신의 계획을 실행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 첫 작품을 읽자마자, 난 이 작품집에 매료되었다.

7페이지에서 시작되어 21페이지에서 끝나는 15페이지도 되지 않는 짧은 작품. 안에는 삽화도 큼직하게 몇 점이나 들어있고, 폰트 크기도 크고 여백도 많다. 너무너무 짧은 이 작품을 읽으며, 탁상행정을 일삼는 무능력한 공무원들이나, 실컷 계획만 세워놓고 정작 하나도 행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이나, 지나치게 생각을 많이 해서 항상 부정적인 결론에 도달하고 마는 주변 사람들과 나 자신이 떠올랐다. 


 두번째 작품 [책상은 책상이다] 는, 무료한 일상에 지쳐 '달라져야 한다!' 고 생각하는 나이많은 남자가 등장한다. 그는 하루하루 달라지기 위해 사물들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한다. 침대를 사진이라고 부르고, 책상을 양탄자라고 부르고, 의자를 시계라고 부르고, 양탄자는 옷장이라고 부르는 등, 근처의 사물들을 다 자기 맘대로 이름을 바꿔서 부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남자는 아침에 의자가 울리는 소리에 사진에서 일어나 양탄자 위에 올라서게 된다. 


"어째서 침대를 사진이라고 부르지 않느냔 말야."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 다음 웃음을 터뜨렸는데, 이웃들이 벽을 두드리며 '조용히 합시다' 하고 고함 지를 때까지 그는 웃고 또 웃었다.

"이제 달라질 거야."

그는 이렇게 외치면서 그는 이제부터 침대를 '사진' 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피곤하군, 사진 속으로 들어가야겠어."

p. 26~27


 이 작품 역시 손뼉을 탁 칠 수 밖에 없었다.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혀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없게 된 사람들이나, 압축어와 신조어로 자기들만의 언어를 만들어내는 신세대의 언어습관등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아예 그들의 단어를 공부해야 할 정도에 이르지 않았던가?? 사람을 앞에 두고도 스마트폰 안에 빠져들어 자기만의 세계에 쳐박히는 사람들의 모습도 함께 떠올랐다. 


이런 식으로 작품마다 독특한 생각을 하기 시작하는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웃기지 못하지만 착하고 순수한 광대 '콜롬빈' 이 등장하는 [아메리카는 없다] 라는 작품에서는 미소가 지어지게 하는 따뜻하지만, 엄청난 스케일의 음모론이 등장한다.


[발명가] 라는 작품에서는 오랫동안 연구실에 쳐박혀서 뭔가를 발명해낸 발명가가 등장한다. 그가 드디어 자신의 발명품을 가지고 세상에 나오는데, 그가 발명한 것들은 이미 다 발명되어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었다. 


[기억력이 좋은 남자] 는 제목처럼 엄청나게 기억력이 좋은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기차역에 거의 살듯이 하면서 모든 배차시간과 역들을 기억하는 남자는, 하지만 사람들이 왜 기차를 타서 그곳으로 가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요도크 아저씨의 안부 인사] 는 '요도크' 라는 가상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셨던 할아버지에 대한 회상이다. 아주 따뜻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작품이다. 나이먹음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아무것도 더 알고 싶지 않았던 남자]  역시 제목처럼 더 이상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은 남자의 이야기이다. 남자는 오늘의 날씨도 알고싶지 않고, 시간도 알고싶지 않았고, 아무것도 알고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윽고 자신이 뭘 알고싶지 않은건지 알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품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작품은 마치 종교적인 선문답과 같은 내용이었다.


"코뿔소는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언제나 신이 나서 앞으로 달려나가지만, 우리 안을 두어 바퀴 돌고 나서는 방금 떠오른 생각을 잊어버리고 다시 오래오래 한 자리에 서 있는 것이었다. 한 시간도 좋고 두 시간도 좋았다. 그러다가 뭔가 생각이 떠오르면 다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제나 너무 일찍 달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사실 코뿔소에게는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p.94

ㅋㅋㅋㅋ 이 문장을 읽고는 너무 웃겼지만, 한편으로 참 공감도 되서 무릎을 치기도 했다. 

사람은 때론 지나치게 생각이 많다. 달리기 시작하면 다 까먹을텐데.  


모든 작품들에 기발한 상상력과 평범하고 따뜻한 일화들이 들어있지만, 그 깊이는 상당하다.

다 좋았지만, 특히 마지막 작품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우리는 얼핏, 참 쓸모 없는 것 같은 일들을 아주아주 많이많이 한다. 쓸모없는 생각도 아주아주 많이 한다.  아주 단적으로, 예술. 이 얼마나 쓸모 없는 짓인가? 예술이 밥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병을 치료해주는 것도 아니잖은가? 오히려 굶어죽기 딱 좋은게 예술을 업으로 삼는 일 아니던가. 


인간과 동물의 가장 큰 차이가 바로 그것 아닐까?

생존에 전혀 관계가 없는. 정말 쓸모없는 짓을 아주아주아주아주 많이 한다는 것.

우리의 삶이란 그런 쓸모없는 것들이 모여서 이뤄지게 된다. 엄청나고 거창한 것이 떡 하니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작고 가볍고 하찮고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쓸모없는 것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쌓여 삶을 빚어낸다. 

그리고 그 쓸모 없는 것들이, 우리의 삶을 조금은 더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아, 이런. 내 감상의 마무리도 너무 '어린이 명심보감' 스럽구나.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알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알려고 했던 사실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예전과 다름없이 자기 삶을 꾸려갔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는 중국어를 할 수 있다는 것뿐이다."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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