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파운데이션 1 : 파운데이션 파운데이션 시리즈 Foundation Series 1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김옥수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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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리역사학' 이란 단어를 들어본 적 있는가?

만약 들어봤다면, 당신은 상당한 SF문학 애호가; 특히 SF의 고전/클래식 까지도 폭넓게 접해온 독서가일 것이다. '심리역사학' 이란 '로봇' 이란 개념의 창조자로 유명한 'SF의 3대 거장' 중 한명인 아이작 아시모프가 창조해낸 여러 개념들 중 하나이다. 한마디로 '영어사전에도 나올 정도' 라고 설명하면 이해할 수 있을까??  아이작 아시모프가 창조해낸 '로봇' 과 로봇 3원칙이 실제 로봇공학으로 발전했고, 심리역사학도 하나의 체계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SF 문학에 익숙치 않은 국내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일본의 유명한 만화인 '아톰' 이나 '건담 시리즈' 들이 일본의 로봇공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지나친 확대해석이라고 비난받을까?   

 그렇다면, 인간의 문명은 상상력을 통해 발전했다고 주장한다면 어떨까? 

 잠수함이 처음 등장한 쥘 베른의 [해저 2만리]나 외계인과의 전쟁을 처음 그린 H.G웰즈의 [우주전쟁]과 시간여행이라는 개념을 선보였던 [타임머신] 으로 인해 파생된 수많은 가설들과 담론들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손에 편하게 들고 다니는 통신기기나 허공에 떠있는 영상 출력기기를 상상했던 필립 K딕도 있다.  그로 인해 파생된 수많은 발명과 발견까지 언급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SF 스러운' 허무맹랑한 상상력이 폭넓은 공감대를 얻고, 실무에서 활용되며, 현실에 구현되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SF 스러운 일' 이 아닐 수 없다. 

 

 국내에서는 장르문학 자체가 폭넓게 무시당하고 있지만, 유럽과 영미권에서 'SF작가' 는 '미래학자' 라는 용어로 대체되기도 한다.(물론 국내에서 장르문학이 무시당하는 건 시장과 시스템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국내 SF작가들 중에도 '미래학자' 라고 부를만한 작가들이 소수 존재한다.) 실제로 스티븐 벡스터 같은 작가는 수십종의 저서들이 'SF장르' 와  '인문/사회학' 을 오가곤 한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대표적인 장편인 '파운데이션' 시리즈는 '심리역사학' 이라는 가상의 학문이 주가 되는 작품으로, 결국 '심리역사학' 을 가상에서 현실로 이끌어낸 작품이기도 하다. 

 

 작품은 거대한 은하계가 하나의 중앙집권체제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전제로 시작한다. 

중세시대 장원처럼 각종 성역星驛에는 가장 문명이 발달한 수도성의 총독이 지배체계를 갖추고 있었고, 총독들은 트랜터라는 행성을 수도로 삼고 있는 제국에 충성하고 있었다. 행성 전체가 하나의 도시나 다름없는 트랜터는 은하제국의 중심지로 수많은 인종과 물산의 중심지였고, 제국의 중심지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심리역사학이란 일종의 사회 통계학, 혹은 역사 통계학과 비슷한 학문으로 축적해온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학문이었다. 가장 뛰어난 심리역사학자였던 해리 셀던은 제국의 멸망과 그 뒤에 찾아올 범 우주적인 인류 문명의 몰락과 혼란을 예측해낸다. 그와 함께 제국 멸망 후 혼란의 시간이 약 3만년에 달할 것이라는 절망적인 예측을 내놓는다. 해리 셀던의 지상과제는 이 혼란의 시간을 최소화하고 제국 멸망 후 인류 문명의 재구축을 앞당기기 위해 인류의 지식을 집대성하는 '파운데이션' 이라는 일종의 백과사전을 집필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해리 셀던은 일련의 계획을 통해 당대의 뛰어난 학자들을 모두 모아 은하제국 외곽 성역의 불모지 행성 터미너스에 정착하여 본격적인 백과사전 편찬 작업에 돌입하게 된다. 

 

 '스타워즈'나 '스타트렉' 등을 기대하는 독자라면, 사실 많이 실망스러울 작품이 이 [파운데이션] 이다. 

우주선이 날아다니고, 가끔 레이져 총을 빵빵 쏴대기도 하지만, 사실 이 작품에는 우주선이 없어도, 레이져 총이 굳이 등장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판타스틱한' 공학적인 상상력이 발휘된 아이템들이 크게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작품엔 컴퓨터나 인공지능 같은 개념도 등장하지 않고, 심지어 본인이 직접 개념을 창조해 냈던 로봇 같은 것도 등장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게 무슨 SF야?'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작품 안에서는 '지식과 기술' 그 자체를 다룬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왜 SF의 3대 거장 중 한명인지, [파운데이션] 이 왜 SF의 고전 걸작인지에 대한 의문에 대한 해답은 바로 여기에 있다.

SF란 단어 그대로 '과학 상상력에 기반한' 장르이다. 과학이란 단순히 공학만을 일컫는 개념이 아니다. 사회학이나 통계학도 과학의 영역에 넣을 수 있다. 인문학과 공학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공학으로 인해 바뀌는 패러다임은 인문학을 변화시키고, 인문학으로 인해 바뀌는 패러다임 역시 공학의 방향을 변화시킨다. 지동설 전후의 세계와, 산업혁명 전후의 세상, 생명존중 사상과 생명공학의 관계 등등만 생각해 봐도 그 유기적인 관계를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걸작 SF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이러한 유기적인 관계를 학자적, 작가적인 통찰력으로 논리적으로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워프나 우주선의 존재 유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로 인해 지금의 모습과 다를 인류 문명과 사회 구조가 설득력이 있느냐는 점이다. 말에서 자동차로, 자동차에서 기차로, 배에서 비행기로 교통수단이 변해가고 편지에서 전화로, 전화에서 휴대전화로 통신수단이 변해가면서 생겨난 수많은 변화들이 우주선으로 변화했을 때 생겨날 변화들 말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심리역사학' 이라는 부분이다.

거대한 제국의 쇠퇴기, 과학과 인문학이 가장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심리역사학이 주인공이다. 과연 심리역사학은 자신의 우수성으로 인류 문명의 재건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인 것이다. 때문에 작품 내에서 중요한 활약을 하는 인간들은 수시로 교체된다. 한 페이지 사이에 수십년이 훌쩍 넘어간다. 전 페이지에서만 해도 주도적으로 사건을 이끌던 인물은 다음 페이지에서는 어느새 옛 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묘사된다. 인물 자체에 집중하는 독서법으로는 [파운데이션] 의 거대한 세계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사건의 흐름과 인과관계들에 집중해야 보다 흥미롭게 이 세계에 빠져들 수 있다. 

뒷부분으로 갈수록 흥미로운 사건들이 펼쳐지며 거대한 스케일을 짐작케 한다. 이제 겨우 1권이다. 과연 어떤 사건속에서 거대 제국이 무너지며, 심리역사학은 어떤 역할로 인류 문명의 최후의 보루가 될 수 있을까??   '얼음과 불의 노래' 라는 대 서사시를 5부까지 읽고 나서야 흥미가 크게 떨어진 요즘 그를 대체할 좋은 작품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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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울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2
메도루마 슌 지음, 유은경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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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이 지명을 들으면, 나는 어렸을 때 봤던 만화의 영향으로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 남국의 풍경이 먼저 떠오르고, 그 다음 거대한 부지를 차지하고 있을 미군기지가 떠오른다. 그와 함께 수년 전, 평택에서 있었던 미군기지 확대.이전 반대 시위도 떠오른다. 개간지 사이로 난 너른 길 주변으로, 벽면에 페인트로 '미군 기지 이전 반대' 등의 문구가 휘갈겨져 있는 주인 잃은 주택들이 드문드문 터를잡고 있었고, '미군기지 이전 부지' 라는 팻말이 붙은 철조망 또한 단단히 자리잡고 있던 그 날의 그 텅 빈 거리. 그 동네 주민 몇분과 몇몇 교회 청년부가 연합해 유인물을 나누고 깃발을 높이 들었지만, 그 소리를 듣는 사람도 우리 뿐이었고, 유인물을 읽는 사람도 우리 뿐이었으며, 거리를 걷는 사람도 우리 뿐이었다. 오키나와. 일본 제일의 휴양지이지만, 원자폭탄이 떨어진 나가사키와 히로시마만큼 큰 아픔을 지닌 지역. 

 우리 역사에 크나큰 고통의 이름인 일본이라는 나라에 속한 오키나와이지만, 오키나와는 사실 우리나라와 무척이나 닮아있다. 오키나와는 사실 메이지 유신 전까지 독립된 국가였다. 예전 모 신문을 통해 일본의 영토 분쟁과 함께 오키나와의 역사에 대해 읽었던 적이 있다. '류쿠' 라는 이름으로 중국 대륙과 일본 본토를 잇던 해상 무역국가로 시작해서, 메이지 유신때 일본군에 의해 겪었던 참혹한 학살 장면으로 전환되고,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군과의 격렬한 육상전과 해상포격, 자살 특공대의 참상으로 이어지다가,  2차 세계대전 패망 이후 겪었던 미군정, 그 이후 여지없이 무너져내렸던 일본으로부터의 독립 계획으로 마무리되는 길고도 참혹한 기획 연재물이었다.

 때문에, [물방울] 이라는 작품집이 오롯하게 '오키나와' 라는 공간에 천착할 수 밖에 없었던, 오키나와 출신 작가의 대표작 모둠이라는 사실에 강하게 이끌렸더랬다. 

 

 인간은 망각의 존재라고 하지만, 아무리 잊으려해도 잊을 수 없는 일도 무수히 많다.

이 적당한 두께의 작품집 안에는 총 세편의 단편작품이 자리잡고 있다. 작품집의 제목을 맡을 [물방울] 과 [바람 소리] 그리고, 가상의 책 리뷰 형식을 빌린 [오키나와 북 리뷰] 이다. 

[물방울]과 [바람소리]는 비슷한 주제의식을 갖고 있는 작품이다. 두 작품이 함께 대를 이어 연결되는 기억의 되물림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고, [바람 소리]의 경우에서는 부자세대의 이야기를 펼쳐냄으로써 그 느낌이 더 강하게 완성되기도 한다. 이 두 작품이 가지고 있는 주인공들의 기억과 정서가 오키나와의 전쟁 세대 전체를 아우르는 것으로 보인다. 성급한 일반화가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걸 인정받았으니 일본 전체에서 큰 사랑을 받았을 것이고, 문학작품에 주는 상도 여럿 받았을터다. 

평화로운 섬 안에서 각자의 꿈과 희망을 갖고 삶을 영위하던 평범한 소년, 소녀, 고등학생, 대학생, 혹은 농부들. 전쟁이란 이들은 순식간에 다른 세계로 이끌고 간다. 포탄을 피해 도망온 어두운 동굴 안에서 죽어가는 고향 친구를 버려야 하며, 친구들과 함께 수류탄으로 자결을 해야 하기도 한다. 폭탄을 실은 비행기를 조종해서 미군 군함에 돌격하는 임무를 위한 훈련을 받아야 하기도 한다.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의 경계 또한 모호해진다. 이러한 경계를 드나든 사람의 삶은 과연 어떻게 될까? 

'외상후 스트레스' 라는 단어의 의미가 지극히 협소하게 느껴질 만큼, 엄청난 내상을 입은 사람들이 돌아간 '일상' 이란 얼마나 끈적일까. 시커멓게 진득이는 타르처럼 늘러붙은 전쟁의 기억들을 안고,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아낼 것인가? 

 

 하지만, 메도루마 슈운이 그려내는 오키나와의 전쟁세대의 일상은 그렇게 불쾌하지만은 않다. 

[물방울]의 도쿠쇼는 진득이는 과거의 내상들을 깨끗하게 흘려버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바람 소리]의 세이키치 역시 비일상의 기억들을 아들인 아키라를 보며 씻어낸다. 아마도 이 작품들을 통해 일본의 수많은 전쟁세대들은 크나큰 위로를 얻었을 터다.

전설과 요괴 이야기의 왕국인 일본 작가답게 만화적인 상상력이 현실과 절묘하게 이뤄내는 균형추가 주사 역할을 하며 사람들의 마음속에 따뜻한 치유의 약물을 밀어 넣는다. 게다가 [오키나와 북 리뷰]라는 작품은 풍자와 해학으로 가득 차있다. 끊임없이 키득거리며 읽어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괴롭고 힘들었던 기억들을 깊이 묻으려 한다. 기억을 퍼올리는 순간, 당시에 느꼈던 고통과 공포가 고스란히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뇌는 방어적으로 가장 깊숙한 곳에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묻고 몇 겹 콘트리트를 부어 덮어낸다. 역사란, 우리의 부모님과 조부모님들이 겪었던 시대에 대한 기억이다. 우리 민족은 유난히 괴롭고 힘든 역사를 지니고 있다. 끊임없었던 외세의 침략, 일제 강점기와 미군정을 거쳐, 한국전쟁과 민주화 투쟁, 군사 쿠데타와 군부 독재시대까지.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역사를 다루는 문학가들은 지나치게 엄숙하다. 그도 그럴것이, 아직 그 고통의 기억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마 일본에서도 오키나와나 나가사키, 히로시마등을 다룰 때는 비슷한 정서가 공유될 것이다. 

 하지만, 메도루마 슈운은 그 고통의 기억들을 수면위로 끌어 올리되, 그 고통스러운 감정들을 기발한 상상력으로 상쇄시켜낸다. 사건들을 객관적이고도 담담하게 그려내되, 만화적이고 설화적인 소재를 차용하여 정서의 분위기를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생생한 등장인물들의 섬세한 감정묘사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단편이라는 제한된 지면 안에서 간결하면서도 섬세하게 표현된 인물들이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낸다. 

 

 서두에 언급했듯, 오키나와의 역사는 일본 역사와 별개로 본다면 우리 민족의 역사와 굉장히 닮아있다.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속에서 어이없이 바스라져간 수많은 생명들이 참 덧없게 느껴진다. 그때도, 지금도 힘없는 민초들은 누군가의 제물이 되어 덧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하지만, 살아있는 한,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밝은 햇볕 위로 끌어올려 바라보고, 받아들이고, 느끼고, 생각해야 한다.

억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일으켜야 하고, 절벽 위에 뚫린 새까만 공간으로 바득바득 기어 올라가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는 삶 속에서 새까만 죽음의 그림자를 밀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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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의 미, 칠월의 솔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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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외국 소설만 주구장창 읽어대던 내가 김연수 작가를 만난건, 정말 우연이었다.

내가 읽어대던 책들의 비율은 외국소설이 8 정도면, 국내소설은 2 정도였는데, 그 2는 이상문학상 수상집이나,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품 정도였다. 

그러던 중, 어떤 인터넷 서점에서 '한국문학 브랜드전' 같은 기획행사를 하고 있었고, 문학동네가 주축이 되어 있었다. 그 행사 페이지에서 눈에 띄인 천명관 작가의 [고래] 와 다른 책들 몇권을 장바구니와 담아 결제했었고, [고래]를 읽고 한동안 그 놀라운 이야기의 힘에 허우적 대다가, 장거리 대중교통을 이용할 일이 있어 가볍게 집어든 책이 결제한 줄도 까맣게 잊고 있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이었다.

그렇게 김연수 작가를 만나, [밤은 노래한다] [꾿빠이 이상] [청춘의 문장들] 을 부랴부랴 사읽었고, 그 뒤로도  [7번국도 REVISITED], [세상의 끝 여자친구]  [원더보이]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까지 빠짐없이 챙겨보게 되었다.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은, 언젠가 김연수 라는 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정리할때 전-후반의 과도기를 느끼게 해줄만한 작품집이 아닐까 싶다. 2009년, 제 33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명실상부 한국 문학계의 '어지간한' 문학상을 모조리 휩쓸게 해준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을 포함해 2008년부터 2013년까지 각종 문예지에 기고했던 11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 작품이다. 

작품을 하나하나 읽어나가다 보니, 마치 김연수 작가의 처음 작품부터 [원더보이] 까지의 장편들을 모아놓은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꾿빠이 이상]이 떠오르는 작품도 있었고, [7번 국도] 와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이 떠오르는 작품도 있었다. 물론 [원더보이] 와 비슷한 마음으로 쓰셨을 것 같아 보이는 작품들도 있었고.

지난 작품집인 [세상의 끝 여자친구](2009)가 좀 더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느낌이 있었다면, 이번 작품집은 정석적이고 차분한 느낌이 많았다. 우선 책의 앞장부터 차근차근 읽었다가, 발표된 연도별로 다시 재독했다. 이미 충분히 성숙한 경지에 오른 김연수 라는 작가가 더욱 원숙해져가는 모습을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자음과모음, 2008 가을_제33회 이상문학상 수상작

깊은 밤, 기린의 말‥‥‥문학의문학, 2010 가을

사월의 미, 칠월의 솔‥‥‥자음과모음, 2010 겨울 

일기예보의 기법‥‥‥문학동네, 2010 겨울 

인구가 나다‥‥‥현대문학, 2011 2월 

주쌩뚜디피니를 듣던 터널의 밤‥‥‥세계의문학, 2012 봄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문학과사회, 2012 여름

동욱‥‥‥실천문학, 2013 봄

우는 시늉을 하네‥‥‥문예중앙 2013 봄

파주로‥‥‥21세기문학, 2013 여름

벚꽃 새해‥‥‥창작과비평, 2013 여름 

 

이런 순서가 될까??

 

 이번 작품집은 정말, 정말 다양한 상황에 처한 여러 직업군의 수많은 사람들의 색다른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특히, 많은 김연수 팬분들께서 발견하셨듯, 말기 암에 걸린 환자가 등장하는 이야기가 세편이나 있기도 하다. 

모든 작품들이 완연한 '김연수' 만의 냄새를 충분히 뿜어내고 있었다. 

[일기예보의 기법] 같은 경우엔 조금은 생소한 직업인 바닷가 지역의 기상관측소 직원에 대한 충분한 취재가 돋보이기도 했고, 특히 날씨에 대한 묘사가 생생해서 몇몇 장면에서는 콧속으로 축축한 바닷내음이 밀려드는 것만 같았다. 

언제나 느끼는거지만, 김연수 작가의 서사를 통해 사람의 마음을 툭 하고 건드리는 기술은 정말 대단하다. 

'이걸로 대체 뭘 어찌하려는 거지?' 라고 생각하며 무심하게 종잇장을 넘기다 보면, 여지없이 툭 건드려진 작고 섬세한 터치가 동심원을 그리며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 즈음엔 마음 전체에 퍼져 흔들린다. 

 

 이번 작품집에는 말기암으로 죽어가는 사람들도 많이 등장하지만, 쑥쑥 자라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도 많이 등장한다.

사람은 죽음을 직시하면 삶에 대한 인식이 바뀐다. 

누군가는 지극한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하고, 누군가는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때로는 드라마틱한 경험을 통해 죽음을 직시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삶 속에서 죽음을 곁눈질로 바라보곤 한다. 

삶과 죽음은 맞닿아있다. 우리는 매순간 죽을 확률을 극복하고 살아가며, 머지않은 미래에 반드시 죽는다. 

반드시 사라지고 말 것, 이라면, 그것은 얼마나 무의미하며, 또 얼마나 의미가 있는가.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 은 암 선고를 받고 항암이라는 지난한 싸움에 돌입한 작가와 말기암 판정을 받고 죽음의 문턱에 한 발을 이미 올려놓은 작가의 관계를 통해 그것을 보여준다.

어찌보면, 반드시 없어지고 말 이 생에,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자랄 수 있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최고로 유의미한 행동이 아닐까 싶지만, 아이란 사실, 나와 동일시 할 수 없는 독립된 개체이다. 부모로서 최소한의 역할만이 가능하거나, 혹은 불가할 뿐. 그들에겐 각자의 삶이 있고, 각자의 죽음이 생긴다. 그들의 삶에 대한 의미와 무의미는 각자의 몫이 된다. 

 

 연도별로 작품들을 되읽어 봤지만, 사실 나는 한 작가의 원숙함을 읽어낼 깜냥이 되지는 않는다. 

그냥, 혹시,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ㅋㅋㅋ ^^;;

그런건. 그냥. 평론가라는 멋진 전문 직업인들이 계시니 거기에 맡기고.

아마 김연수 작가님도 내 의견에 동의해 주지 않으실까?? ㅋㅋ  

 

할 수 있는 모든것을 아둥바둥 해보면서, 그 안에서 작은 즐거움들을 느끼는 것. 

그것이 삶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싶다.

그러다 보면, 가슴을 꾹 누르고 있는 '코끼리의 발' 같은 죽음은 그렇게, 삶 속에서 희미해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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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Sunny 1
마츠모토 타이요 지음, 오주원 옮김 / 애니북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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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은, 특히나 천재가 많이 나오는 나라이다.

일본의 각종 매체들은 뻑하면 '천재가 나타났다' 며 호들갑을 떨고, 언론의 스폿라이트를 받던 어린 천재들은 어른이 되기도 전에 재능을 소모하며 둔재로 잊혀져간다. 그들이 정말로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고,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일본 매체들은 지나치게 가볍게 '천재' 라는 호칭을 붙이곤 한다. 하지만, 그런 일본에서도 '천재' 라는 호칭을 붙이기 주저하는 장르가 있으니, 바로 '만화' 이다. 일본에서는 축구나 야구, 피겨 같은 스포츠 종목에서는 일년에 두세명씩 꼬박꼬박 천재들이 출몰하는데 반해, 만화에서는 10년에 한명 나올까 말까 하다. 일본 만화의 신, 데츠카 오사무 이래로 '천재' 라고 불리웠던 만화가는 토리야마 아키라, 우라사와 나오키, 마츠모토 타이요와 국내에서는 우익작가로 폄하되고 있지만 이사야마 하지메 정도가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작가로 평가된다. 일본 만화계에서 '천재' 라는 호칭는 귀재나 명인, 장인과는 다른 의미로 신인시절부터  '번득이는 무언가' 가 있는 작가들에게 붙게되고, 실제로 이들은 일본 만화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곤 한다. 

 이들 '천재' 작가들의 공통점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재능이 빛을 발한다는 데에 있다.(몇몇 반대의견이 있을수도 있지만)

'진짜' 천재 작가는 작품과 함께 연륜을 쌓아내 이윽고 그것들을 종이위에 녹여내는 경지에 다다른다. 그러한 경지에 이른 작가들은 그야말로 영혼을 뽑아 종이위에 그려낸다. 

 

 마츠모토 타이요가 진정한 천재로 불리는 이유들 중 하나는 현실과 공상을 넘나드는 묘한 경계를 굉장히 드라마틱하면서도 만화답게 표현해낸다는 데에 있다. 대중과 예술의 경계선에 걸쳐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그는 독창적인 필치로 극사실주의와 표현주의를 찰흙처럼 주무르며 판타지를 그려낸다. 때문에 현실도, 환상도 아닌 대단히 묘한 느낌이 난다. 

이런 묘한 느낌이 드는 데에는 마츠모토 타이요만이 갖고 있는 절묘한 표현력과 연출력에 독특한 그림체가 이뤄내는 조화 덕분이기도 하다. 얼핏 보면 개발괴발, 초등학생이 그린 어설픈 그림 같지만, 꼼꼼히 뜯어보면 인체와 배경, 앵글의 어우러짐이 절묘하다. 인체와 공간에 대한 이해력이 범상치 않음을 알 수 있고, 무엇보다 일관된 작화력을 유지해낸다는 점 역시 마츠모토 타이요라는 작가가 절대 그림을 못그리는 작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작품의 배경은 [별 아이 학원] 이라는 일종의 민간 보육시설이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Sunny 는 보육원 아이들의 놀이터인 버려진 자동차 Sunny 1200 모델을 말한다. 일본의 유수의 자동차 업체인 Nissan의 1970년대 모델인 이 노란 자동차를 보아,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1970년대 중~ 후반이 아닐까 싶다. 다양한 연령층과 성별의 아이들이 각자의 사연을 안고 올망졸망 모여있는 이 [별 아이 학원]에 세이라는 아이가 새로 들어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첫 권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하얀 머리의 하루오, 약간 지능이 떨어져 보이는 아프로 머리의 준스케와 동갑인 세이는 이들과 거리를 두고 싶지만, 어쨌든 같이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된다. 그 밖에 메구무, 키이코 등 동갑내기 여학생부터  중학생인 켄지와 고등학생인 아사코 , 보육원의 선생님 역할을 하는 아다치와 미츠코, 쇼스케와 같은 3~4살 무렵의 아이들과 재미난 감초 역할을 하는 쌍둥이 자매 등 가지 각색의 아이들이 잔뜩 등장한다. 이런 여러 색깔의 아이들을 등장시키면서도 마츠모토 타이요만의 고요한 분위기를 내고, 그 분위기에 상반되는 역동적인 느낌의 연출은 여전하다. 정중동. 그의 작품은 그 아이러니한 이미지를 완벽하게 형상화해낸다.

 책을 덮는 순간, 레이몬드 카버의 말년의 단편들과 아사다 지로의 최근 단편들을 덮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밀려왔다. 스스로의 삶과 세상을 동일시하며, 동시에 보다 객관적으로 관조할 수 있는 경지. 세상은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모든 것이기도 하며, 어떠한 기적도 일어나지 않는 정적인 세계임은 동시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는 동적인 세계라는 사실을 관조하며 표현해낼 수 있는 경지. 

마음을 크게 때리며 뒤흔들지는 않지만, 가슴 깊숙히 심겨있는 심지를 살짝 흔든 느낌.

가장 깊숙히에 있는 심지가 흔들리니, 그 파동이 점점 커져 가슴을 둥 하고 울리는 느낌.

 

 마츠모토 타이요는 유독 성장기에 천착하는 작가이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철콘 근크리트] 를 시작으로 [핑퐁] , [하나오] 등 그가 재능을 화려하게 꽃피운 작품들은 거의 다 성장의 플롯을 가지고 있다. 누구나 성장통을 겪기에 성장기 플롯은 가장 검증받은 플롯인 동시에, 반대로 가장 어려운 플롯이기도 하다. 플롯을 그대로 따라가면 1차원적이고 빈약한 작품이 되는 반면, 지나치에 내러티브를 우겨넣으면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장르가 되어버리고 만다. [철콘 근크리트] 와 [핑퐁] 같은 작품은 성장기의 플롯에 판타지와 조폭 스토리, 스포츠 등을 활용한 작품으로 장르간의 장점을 취합하여 이야기의 균형을 절묘하게 이뤄낸 작품으로 손꼽힌다. 이렇게 특징이 뚜렷한 하위 장르의 장점만을 취합하는 센스야말로 타고나지 않으면 획득할 수 없는 부분이기에, 마츠모토 타이요가 '천재' 로 손꼽히는 가장 대표적인 재능이라고 말할 수 있다.

[GoGO 몬스터] 를 통해 현실의 교육환경을 그려냈던 마츠모토 타이요는 만화의 모든 대가들이 최후의 최후의 최후; 스스로가 기량의 정점에 올랐다고 판단될 때 손을 댄다는 최후의 '밑천'- 자전적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싶다. 만화에서 자전적 이야기는 가장 어려운 소재로 손꼽힌다. 실제로 자전적 이야기는 만화가 지망생들이 수련 초기에 가장 많이 되풀이하는 것 중 하나로, 나만의 이야기를 남들에게 공감되게, 게다가 재미있게, 거기에 진정성까지 덧붙일 수 있어야 가능한 소재이다. 단편으로는 가능할 지 몰라도, 장편으로는 정말 어려운 소재인 반면, 기량만 원숙하다면 가장 안정적인 소재이기도 하다. 

 [Sunny]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이 작가가 실제 겪었던 일인지, 아닌지는 크게 중요치 않다. 사실 마츠모토 타이요가 그려온 모든 성장담이 자전적 이야기였을 수도 있을터이다.  아니다, 누구나 성장기는 있고, 누구나 성장통은 있다.  단순히 '나' 만의 성장기와 성장통이 아니라, '타인' 의 성장기와 성장통을 섬세하게 잡아서 재미있게 그려내는 그 능력이야말로 '천재' 만이 할 수 있는 과업일 터다. 이제, 그 첫 권이 등장했다. 과연 이 작품이 마츠모토 타이요라는 희대의 천재에게 어떤 지표가 될까.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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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전날
호즈미 지음 / 애니북스 / 2013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일본의 여성만화를 보다보면, 종종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이야기들을 만나게 된다. 

 개인적으로 일본 만화의 흐름에 아주 빠삭한 것은 아니지만, 일본 만화가 '캐릭터 중심' 으로 이야기를 확장시켜 나가는 데에 특장점을 지니고 있다는 점 정도는 알고 있다. 캐릭터를 먼저 만들고, 매력을 충분히 설정한 뒤에 그를 중심으로 세계관을 확장시켜 나가는 방식에 능숙하다는 것이다. 예컨데, A와 B라는 두 인물을 축으로 그 인물들이 매력을 발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설계해 나가는 방식이다. 무척이나 효과적일 수 밖에 없고, 대중성을 획득할 수 밖에 없다. 캐릭터의 매력이 이미 명료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사건의 흐름을 어느정도 예측할 수 있고, 그런 독자들의 예측 - 혹은 니즈를 정확히 파악해 그대로 그려주는 것이 작가의 역할이 된다. 캐릭터가 독자들의 예측을 벗어날 수 있는 범위를 주도면밀하게 계산해야 하고, 사건들은 정확히 계산된대로 진행되야 한다. 캐릭터의 매력은 파생상품이 남기는 이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인기 캐릭터를 창조해낸 만화가에게 여러명의 담당자가 붙어 시장상황과 대중의 니즈를 예측하고 충족시킬 방법을 강구한다. 

때문에 신인 만화가를 등단시킬때에도 단편에서 '이 인물들의 앞으로의 이야기를 보고싶다.' 는 느낌을 중요시 한다. 

매력적인 캐릭터는 분명 힘이 있다. 토끼와 거북이과 같은 단순하고 명료한 플롯이라도 원피스의 루피와 나루토가 들어가면 독자들의 반응은 달라진다. 이 안에 독자들의 예측과 니즈가 포함되면 단순한 플롯 안에서도 어마어마하게 폭넓은 내러티브가 형성된다. 

 때문에, 평범한 인물로 평범하지만 매력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들은 두각을 드러내기 쉽지 않지만, 일단 등장하면 엄청난 수준의 실력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평범한 인물로 매력적인 인물을 이겨내려면 그보다 훨씬 대단한 이야기나 놀라운 소재를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이 모두를 갖춘 경우가 있는데, 그런 작가들은 대부분 '천재' 혹은 '귀재' 소리를 듣곤 한다.)

 

 지인들의 호평속에 당연스레 만나보게 된 [결혼식 전날]. 

6편의 단편속엔 매력적인 인물이나 놀라운 소재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평범한 인물과 자연스러운 소재들을 조합하여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각 단편들은 테마가 되는 감정들이 있다.

우애, 부父정, 모정, 고독 등이다.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럽지만, 억지로 그려내려 하면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호즈미 작가는 이런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 자체에 매우매우매우매우 능숙한 느낌이랄까. '모았다 터뜨리는' 호흡이 절묘하고, 독자들의 뒷통수를 칠 줄 안다. 타고난 감각이 아니라면, 충분한 훈련을 거쳤다는 느낌이다. 아니, 능숙을 넘어, 원숙에 가까운 느낌이랄까. 

6편 모두 마음을 어루만지는 이야기의 힘이 있었다. 작가가 던지고자 하는 따뜻한 메시지가 깊숙히 파고들어왔다. 뭔가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싶은데,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큰 실례가 될 것 같아 도저히 못 붙이겠다. 일단은 작품 속 단편들 중 [아즈사 2호로 재회] 와 [꿈꾸는 허수아비]후편이 특히 좋았다. 애묘인으로써 [그후] 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고. 

 

무엇보다 '플롯' 자체에 대한 이해가 매우 뛰어나다. 많은 작가들이 플롯에 대한 공부를 소흘히 하는 경우가 많은데, 플롯은 정해진 틀이 아니다. 오히려 정해진 틀을 뒤집고 엎고 비틀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되게 하는 일종의 공식이다. 3차 함수와 방정식을 이용해 입체를 만들어내고 세상에 구현시켜 내듯 플롯을 잘 활용하면 평면적인 이야기도 입체감을 얻고, 전형적인 인물도 변화무쌍한 인물로 변모한다. 인위를 작위로 만들지 않는 능력이 플롯에 존재한다.

이 작품은 사실 연출도 단조로운 편이고, 작화도 화려한 편은 아니지만, 호즈미 작가가 구사하는 이야기의 기술은 눈에 띄는 모든 단점(일 수도 있는 부분)을 완벽한 장점으로 바꾸어 버린다. 개인적으로 화면 연출이 지나치게 평면적이라는 느낌이 있지만(사실 일본의 여성만화가 전반적으로 갖고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이마저도 고개를 끄덕거리고 넘어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은 호즈미 작가가 매우 원숙하게 활용해내는 플롯의 힘이 아닐까 싶다. 앞뒤를 뒤엎고, 생략과 압축을 매우 잘 활용하고,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변화를 적절히 활용해낸다. 

아마 위에 언급한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도, 호즈미 작가가 하면 가슴을 등~ 하고 울리는 반전을 만들어줄 것 같다.  매력적인 캐릭터의 특별한 소재를 둘러싼 화려한 이야기도 물론 대단하지만, 호즈미 작가는 전형적인 캐릭터의 평범한 소재를 묵지근하게 녹여낼 줄 아는 것 같다. 


 

이런 이야기 중심의 작가는 장편에 능하지 못하다는 통설이 있다.

만화는 매체의 특성상 장편이 아니면 크게 어필하기 힘들다. 대부분의 단편은 장편을 위한 훈련의 일환으로 사용된다. 

호즈미 작가가 갖고 있는 플롯의 이해, 활용도와 스토리 텔링에 대한 장점은 단편이기 때문에 도드라지는 것일 뿐, 장편에서는 어떻게 활용될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개인적으로는 에피소드 중심의 드라마가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한데, 과연 여러 군상들이 어우러지는 긴 호흡의 연재물에서는 어떤 재능이 발휘될지 무척이나 기대된다. 아니, 이런 작가가 마음먹고 매력적인 캐릭터를 그려내면 어떨까 기대가 되기도 한다. 간단한 예로 우루시바라 유키는 단편집 [필라멘트] 에서는 탄탄한 이야기 중심의 작품들을 뽐냈었고, 히트작인 [충사] 역시 에피소드 중심의 옴니버스식 장편이지만, 깅코와 단유같은 중심 캐릭터의 매력 또한 어마어마했더랬다. 

작가의 필모를 보니 장편연재중인 듯 하다니, 언젠가 만나볼 수 있겠지.

잊지 말고 기억해둘 작가로 콕 박아 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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