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니 Sunny 1
마츠모토 타이요 지음, 오주원 옮김 / 애니북스 / 2013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일본은, 특히나 천재가 많이 나오는 나라이다.

일본의 각종 매체들은 뻑하면 '천재가 나타났다' 며 호들갑을 떨고, 언론의 스폿라이트를 받던 어린 천재들은 어른이 되기도 전에 재능을 소모하며 둔재로 잊혀져간다. 그들이 정말로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고,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일본 매체들은 지나치게 가볍게 '천재' 라는 호칭을 붙이곤 한다. 하지만, 그런 일본에서도 '천재' 라는 호칭을 붙이기 주저하는 장르가 있으니, 바로 '만화' 이다. 일본에서는 축구나 야구, 피겨 같은 스포츠 종목에서는 일년에 두세명씩 꼬박꼬박 천재들이 출몰하는데 반해, 만화에서는 10년에 한명 나올까 말까 하다. 일본 만화의 신, 데츠카 오사무 이래로 '천재' 라고 불리웠던 만화가는 토리야마 아키라, 우라사와 나오키, 마츠모토 타이요와 국내에서는 우익작가로 폄하되고 있지만 이사야마 하지메 정도가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작가로 평가된다. 일본 만화계에서 '천재' 라는 호칭는 귀재나 명인, 장인과는 다른 의미로 신인시절부터  '번득이는 무언가' 가 있는 작가들에게 붙게되고, 실제로 이들은 일본 만화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곤 한다. 

 이들 '천재' 작가들의 공통점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재능이 빛을 발한다는 데에 있다.(몇몇 반대의견이 있을수도 있지만)

'진짜' 천재 작가는 작품과 함께 연륜을 쌓아내 이윽고 그것들을 종이위에 녹여내는 경지에 다다른다. 그러한 경지에 이른 작가들은 그야말로 영혼을 뽑아 종이위에 그려낸다. 

 

 마츠모토 타이요가 진정한 천재로 불리는 이유들 중 하나는 현실과 공상을 넘나드는 묘한 경계를 굉장히 드라마틱하면서도 만화답게 표현해낸다는 데에 있다. 대중과 예술의 경계선에 걸쳐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그는 독창적인 필치로 극사실주의와 표현주의를 찰흙처럼 주무르며 판타지를 그려낸다. 때문에 현실도, 환상도 아닌 대단히 묘한 느낌이 난다. 

이런 묘한 느낌이 드는 데에는 마츠모토 타이요만이 갖고 있는 절묘한 표현력과 연출력에 독특한 그림체가 이뤄내는 조화 덕분이기도 하다. 얼핏 보면 개발괴발, 초등학생이 그린 어설픈 그림 같지만, 꼼꼼히 뜯어보면 인체와 배경, 앵글의 어우러짐이 절묘하다. 인체와 공간에 대한 이해력이 범상치 않음을 알 수 있고, 무엇보다 일관된 작화력을 유지해낸다는 점 역시 마츠모토 타이요라는 작가가 절대 그림을 못그리는 작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작품의 배경은 [별 아이 학원] 이라는 일종의 민간 보육시설이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Sunny 는 보육원 아이들의 놀이터인 버려진 자동차 Sunny 1200 모델을 말한다. 일본의 유수의 자동차 업체인 Nissan의 1970년대 모델인 이 노란 자동차를 보아,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1970년대 중~ 후반이 아닐까 싶다. 다양한 연령층과 성별의 아이들이 각자의 사연을 안고 올망졸망 모여있는 이 [별 아이 학원]에 세이라는 아이가 새로 들어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첫 권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하얀 머리의 하루오, 약간 지능이 떨어져 보이는 아프로 머리의 준스케와 동갑인 세이는 이들과 거리를 두고 싶지만, 어쨌든 같이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된다. 그 밖에 메구무, 키이코 등 동갑내기 여학생부터  중학생인 켄지와 고등학생인 아사코 , 보육원의 선생님 역할을 하는 아다치와 미츠코, 쇼스케와 같은 3~4살 무렵의 아이들과 재미난 감초 역할을 하는 쌍둥이 자매 등 가지 각색의 아이들이 잔뜩 등장한다. 이런 여러 색깔의 아이들을 등장시키면서도 마츠모토 타이요만의 고요한 분위기를 내고, 그 분위기에 상반되는 역동적인 느낌의 연출은 여전하다. 정중동. 그의 작품은 그 아이러니한 이미지를 완벽하게 형상화해낸다.

 책을 덮는 순간, 레이몬드 카버의 말년의 단편들과 아사다 지로의 최근 단편들을 덮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밀려왔다. 스스로의 삶과 세상을 동일시하며, 동시에 보다 객관적으로 관조할 수 있는 경지. 세상은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모든 것이기도 하며, 어떠한 기적도 일어나지 않는 정적인 세계임은 동시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는 동적인 세계라는 사실을 관조하며 표현해낼 수 있는 경지. 

마음을 크게 때리며 뒤흔들지는 않지만, 가슴 깊숙히 심겨있는 심지를 살짝 흔든 느낌.

가장 깊숙히에 있는 심지가 흔들리니, 그 파동이 점점 커져 가슴을 둥 하고 울리는 느낌.

 

 마츠모토 타이요는 유독 성장기에 천착하는 작가이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철콘 근크리트] 를 시작으로 [핑퐁] , [하나오] 등 그가 재능을 화려하게 꽃피운 작품들은 거의 다 성장의 플롯을 가지고 있다. 누구나 성장통을 겪기에 성장기 플롯은 가장 검증받은 플롯인 동시에, 반대로 가장 어려운 플롯이기도 하다. 플롯을 그대로 따라가면 1차원적이고 빈약한 작품이 되는 반면, 지나치에 내러티브를 우겨넣으면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장르가 되어버리고 만다. [철콘 근크리트] 와 [핑퐁] 같은 작품은 성장기의 플롯에 판타지와 조폭 스토리, 스포츠 등을 활용한 작품으로 장르간의 장점을 취합하여 이야기의 균형을 절묘하게 이뤄낸 작품으로 손꼽힌다. 이렇게 특징이 뚜렷한 하위 장르의 장점만을 취합하는 센스야말로 타고나지 않으면 획득할 수 없는 부분이기에, 마츠모토 타이요가 '천재' 로 손꼽히는 가장 대표적인 재능이라고 말할 수 있다.

[GoGO 몬스터] 를 통해 현실의 교육환경을 그려냈던 마츠모토 타이요는 만화의 모든 대가들이 최후의 최후의 최후; 스스로가 기량의 정점에 올랐다고 판단될 때 손을 댄다는 최후의 '밑천'- 자전적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싶다. 만화에서 자전적 이야기는 가장 어려운 소재로 손꼽힌다. 실제로 자전적 이야기는 만화가 지망생들이 수련 초기에 가장 많이 되풀이하는 것 중 하나로, 나만의 이야기를 남들에게 공감되게, 게다가 재미있게, 거기에 진정성까지 덧붙일 수 있어야 가능한 소재이다. 단편으로는 가능할 지 몰라도, 장편으로는 정말 어려운 소재인 반면, 기량만 원숙하다면 가장 안정적인 소재이기도 하다. 

 [Sunny]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이 작가가 실제 겪었던 일인지, 아닌지는 크게 중요치 않다. 사실 마츠모토 타이요가 그려온 모든 성장담이 자전적 이야기였을 수도 있을터이다.  아니다, 누구나 성장기는 있고, 누구나 성장통은 있다.  단순히 '나' 만의 성장기와 성장통이 아니라, '타인' 의 성장기와 성장통을 섬세하게 잡아서 재미있게 그려내는 그 능력이야말로 '천재' 만이 할 수 있는 과업일 터다. 이제, 그 첫 권이 등장했다. 과연 이 작품이 마츠모토 타이요라는 희대의 천재에게 어떤 지표가 될까.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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