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 전날
호즈미 지음 / 애니북스 / 2013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일본의 여성만화를 보다보면, 종종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이야기들을 만나게 된다. 

 개인적으로 일본 만화의 흐름에 아주 빠삭한 것은 아니지만, 일본 만화가 '캐릭터 중심' 으로 이야기를 확장시켜 나가는 데에 특장점을 지니고 있다는 점 정도는 알고 있다. 캐릭터를 먼저 만들고, 매력을 충분히 설정한 뒤에 그를 중심으로 세계관을 확장시켜 나가는 방식에 능숙하다는 것이다. 예컨데, A와 B라는 두 인물을 축으로 그 인물들이 매력을 발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설계해 나가는 방식이다. 무척이나 효과적일 수 밖에 없고, 대중성을 획득할 수 밖에 없다. 캐릭터의 매력이 이미 명료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사건의 흐름을 어느정도 예측할 수 있고, 그런 독자들의 예측 - 혹은 니즈를 정확히 파악해 그대로 그려주는 것이 작가의 역할이 된다. 캐릭터가 독자들의 예측을 벗어날 수 있는 범위를 주도면밀하게 계산해야 하고, 사건들은 정확히 계산된대로 진행되야 한다. 캐릭터의 매력은 파생상품이 남기는 이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인기 캐릭터를 창조해낸 만화가에게 여러명의 담당자가 붙어 시장상황과 대중의 니즈를 예측하고 충족시킬 방법을 강구한다. 

때문에 신인 만화가를 등단시킬때에도 단편에서 '이 인물들의 앞으로의 이야기를 보고싶다.' 는 느낌을 중요시 한다. 

매력적인 캐릭터는 분명 힘이 있다. 토끼와 거북이과 같은 단순하고 명료한 플롯이라도 원피스의 루피와 나루토가 들어가면 독자들의 반응은 달라진다. 이 안에 독자들의 예측과 니즈가 포함되면 단순한 플롯 안에서도 어마어마하게 폭넓은 내러티브가 형성된다. 

 때문에, 평범한 인물로 평범하지만 매력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들은 두각을 드러내기 쉽지 않지만, 일단 등장하면 엄청난 수준의 실력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평범한 인물로 매력적인 인물을 이겨내려면 그보다 훨씬 대단한 이야기나 놀라운 소재를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이 모두를 갖춘 경우가 있는데, 그런 작가들은 대부분 '천재' 혹은 '귀재' 소리를 듣곤 한다.)

 

 지인들의 호평속에 당연스레 만나보게 된 [결혼식 전날]. 

6편의 단편속엔 매력적인 인물이나 놀라운 소재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평범한 인물과 자연스러운 소재들을 조합하여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각 단편들은 테마가 되는 감정들이 있다.

우애, 부父정, 모정, 고독 등이다.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럽지만, 억지로 그려내려 하면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호즈미 작가는 이런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 자체에 매우매우매우매우 능숙한 느낌이랄까. '모았다 터뜨리는' 호흡이 절묘하고, 독자들의 뒷통수를 칠 줄 안다. 타고난 감각이 아니라면, 충분한 훈련을 거쳤다는 느낌이다. 아니, 능숙을 넘어, 원숙에 가까운 느낌이랄까. 

6편 모두 마음을 어루만지는 이야기의 힘이 있었다. 작가가 던지고자 하는 따뜻한 메시지가 깊숙히 파고들어왔다. 뭔가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싶은데,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큰 실례가 될 것 같아 도저히 못 붙이겠다. 일단은 작품 속 단편들 중 [아즈사 2호로 재회] 와 [꿈꾸는 허수아비]후편이 특히 좋았다. 애묘인으로써 [그후] 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고. 

 

무엇보다 '플롯' 자체에 대한 이해가 매우 뛰어나다. 많은 작가들이 플롯에 대한 공부를 소흘히 하는 경우가 많은데, 플롯은 정해진 틀이 아니다. 오히려 정해진 틀을 뒤집고 엎고 비틀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되게 하는 일종의 공식이다. 3차 함수와 방정식을 이용해 입체를 만들어내고 세상에 구현시켜 내듯 플롯을 잘 활용하면 평면적인 이야기도 입체감을 얻고, 전형적인 인물도 변화무쌍한 인물로 변모한다. 인위를 작위로 만들지 않는 능력이 플롯에 존재한다.

이 작품은 사실 연출도 단조로운 편이고, 작화도 화려한 편은 아니지만, 호즈미 작가가 구사하는 이야기의 기술은 눈에 띄는 모든 단점(일 수도 있는 부분)을 완벽한 장점으로 바꾸어 버린다. 개인적으로 화면 연출이 지나치게 평면적이라는 느낌이 있지만(사실 일본의 여성만화가 전반적으로 갖고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이마저도 고개를 끄덕거리고 넘어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은 호즈미 작가가 매우 원숙하게 활용해내는 플롯의 힘이 아닐까 싶다. 앞뒤를 뒤엎고, 생략과 압축을 매우 잘 활용하고,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변화를 적절히 활용해낸다. 

아마 위에 언급한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도, 호즈미 작가가 하면 가슴을 등~ 하고 울리는 반전을 만들어줄 것 같다.  매력적인 캐릭터의 특별한 소재를 둘러싼 화려한 이야기도 물론 대단하지만, 호즈미 작가는 전형적인 캐릭터의 평범한 소재를 묵지근하게 녹여낼 줄 아는 것 같다. 


 

이런 이야기 중심의 작가는 장편에 능하지 못하다는 통설이 있다.

만화는 매체의 특성상 장편이 아니면 크게 어필하기 힘들다. 대부분의 단편은 장편을 위한 훈련의 일환으로 사용된다. 

호즈미 작가가 갖고 있는 플롯의 이해, 활용도와 스토리 텔링에 대한 장점은 단편이기 때문에 도드라지는 것일 뿐, 장편에서는 어떻게 활용될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개인적으로는 에피소드 중심의 드라마가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한데, 과연 여러 군상들이 어우러지는 긴 호흡의 연재물에서는 어떤 재능이 발휘될지 무척이나 기대된다. 아니, 이런 작가가 마음먹고 매력적인 캐릭터를 그려내면 어떨까 기대가 되기도 한다. 간단한 예로 우루시바라 유키는 단편집 [필라멘트] 에서는 탄탄한 이야기 중심의 작품들을 뽐냈었고, 히트작인 [충사] 역시 에피소드 중심의 옴니버스식 장편이지만, 깅코와 단유같은 중심 캐릭터의 매력 또한 어마어마했더랬다. 

작가의 필모를 보니 장편연재중인 듯 하다니, 언젠가 만나볼 수 있겠지.

잊지 말고 기억해둘 작가로 콕 박아 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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