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센더 Vol. 2 : 기계 달 시공그래픽노블
제프 르미어 지음, 더스틴 웬 그림, 임태현 옮김 / 시공사(만화)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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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소년 아톰의 스페이스 오페라 버전.
이렇게 표현하면 이 작품 팬들이 들고 일어날지 모르겠지만, 주인공 팀-21은 분명 아톰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만약 아니라고 한다면, 단지 유사하다고 언급해도 상관없다. 나는 이 유사성을 결코 이 작품을 깎아내리기 위해 사용하려는 것은 아니다. 감정을 느끼고, 부모님의 사랑을 갈구하는 소년 형태의 로봇은 아톰 이후로 명백한 전형성을 갖게 되었으며, 수많은 작품들이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더 과거의 작품들을 파헤쳐보면, 소년형태의 인공물이 사람의 마음을 갖는다는 아이디어는 여기저기 널려있을지 모르지만, 일단 이 작품은 '만화' 이고, 나는 일본만화의 영향을 받고 자란 한국남성으로서 '팀-21'을 보는 순간 아톰을 떠올렸다.
다시 말하지만, 팀-21과 아톰의 유사성은 단지 캐릭터 뿐으로, 이 작품의 평가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았고, 혹시나 이 글을 보게 될 다른 분들의 감상과 평가에도 영향을 끼치지 않기 바란다. 

이 작품은 SF의 팬들에게는 "대단히 신선한" 아이디어로 시작하는 작품은 아니다.
오히려 많이 본 아이디어들을 설정화 해서 시작하는데, 특히 "지구가 멈추는 날" 이나 "우주전쟁" 같은 고전 SF의 아이디어들을 한층 세련되게 꾸미고, '터미네이터' 의 설정을 가져와 우주적인 스케일로 펼쳐놓는다.
아직 2권까지밖에 보지 못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순 없지만, 이 작품에서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작화가 더스틴 응우옌의 유려한 수채화다. 그림체 자체도 명확하고, 뎃셍도 아주아주 적확한 것은 물론, 연출과 색감도 아주 인상적이다.
요새는 디지털 툴이 워낙에 잘 나와있음에도, 수작업으로 작업한 것 같다. 
물감이 번지는 느낌과 종이의 질감이 잘 드러나 있어서 참 좋았다.
수많은 필터들이 난무하는 요새의 그래픽 노블과 확연하게 느껴지는 따뜻함과, 기술력이 돋보인다.

다시 말하지만, 로봇에 인격이 부여되는 소재의 작품들은 많다.
이제는 일종의 레퍼런스로서 공공의 재화처럼 사용되므로, 결국은 그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펼쳐낼 것이냐의 문제다.
그리고 만화의 경우, 연출과 컬러, 디자인을 포함한 작화까지 더해지면, 응용범위는 무궁무진해진다. 
인격을 가진 소년 로봇이 자신을 구입했던, 처음으로 사랑해줬던 인간을 찾아나선다. '엄마' 라는 그 인간은 이미 죽었고, 자신과 친구로 어린시절을 보냈던 소년은 로봇 사냥꾼으로 자라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인간과 로봇이 서로를 증오하며, 거대한 전쟁이 막 시작된 장대한 우주에서, 나이를 먹지 않은 소년 로봇이, 이제는 성인이 된 인간을 찾아나선다. 
프랑스 작가의 이야기와 베트남 작가의 그림이 만나 장대한 스페이스 오페라를 아날로그 기술로 그려낸다.
이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낭만적인가!!  
그것만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
다음권 언제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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넛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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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의 작품은 [속죄] 이후 두번째였다.

영미문학에서는 이미 지울 수 없는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작가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고, [속죄] 역시 굉장히 푹 빠져 읽었었는데, 왠지 그의 전작들은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엄청 하드코어하다는 소문도 알고 있었고) 

작품 전반에 흐르는 우아함과 고상함이 내 취향에 맞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넛셸]은 솔직히 다 읽은 뒤, 그다지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물론 훌륭한 작품이고, 보기드문 소재를 대가다운 빼어난 능숙함으로 잘 버무렸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폐부를 파고드는 느낌은 없었다. 

'햄릿' 을 모티프로 했다지만, 나는 비교비평의 '교' 자로 모르는 사람이기에, 굳이 견주어 보려 하지는 않았다. 

다만, 직전에 '햄릿' 을 읽었기에, 조금 의식한 정도.

전지적 '태아'시점이라는 스토리 텔링의 접근방식은 대단히 신선하고 흥미로웠지만, 정작 스토리 자체가 새로울 것이 없었던 것이다.

새로운 시각으로 진부한 스토리를 바라보는 접근법은 사실 국내외의 수많은 젊은 작가들이 시도하는 것들이고, [넛셸] 이 보여준 그것도 크게 신선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러다, 불현듯, 북쉐어링 모임에서 들었던 이언 매큐언의 토크쇼 동영상이 떠올랐고, 유튜브를 찾아 들어가봤다.

이언 매큐언의 풀네임을 영어로 검색하니 수많은 동영상이 떴다. 영어 일자무식자이지만, 유튜브 번역 자막을 켜서 단어들을 유추해가며 영상들을 몇 편 찾아봤다. 

물론, 전작을 고작 한편 읽고, 유튜브로 영상 몇 편 찾아보고, 씨알도 안먹힐 작가주의비평의 흉내를 내려는 것은 아니다.

역시 나는 비평의 '평' 자도 모르는 사람이니까. 

단지 그의 눈빛과, 목소리, 인터뷰어를 대하는 태도 등을 보고 싶었다.


왜냐하면,


얼마전, 나는 [넛셸]을 읽는 새로운 키워드가 퍼뜩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인공 태아는 기본적으로 모든 등장인물들을 얕잡아 보고 있다.

태아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볼 수가 없다. 양수를 통해 전달되는 어머니의 목소리와, 어머니가 듣는 소리들, 뱃가죽을 뚫고 들어오는 소리들을 통해 단지 '추측' 할 뿐이다. 그는 실재하는 것들을 그 어떤방식으로도 실증할 수 없는 상태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재하는 모든 것들을 자신의 잣대로 가치 판단을 하고 평가한다. 심지어 팟캐스트나 뉴스 등의 제한된 정보를 바탕으로 인류와 문명의 미래를 예측하기도 하는데, 태아가 하는 모든 것들이 우리 사회의 일부 '지배층'과 대부분의 '지식층'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탁상공론만 늘어놓는 지도자들, 실천하지 않는 지식층,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다지 인과관계가 없는 낙관론들, 대안 없는 비판과 현실에 적용할 수 없는 이론들.  끝 모를 데 없는 오만과 교만, 편견으로 가득 찬 시각.

그리고, 결코 그러한 것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 그 자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주제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한 수 아래' 로 보고 있다.

실재하지 않는 존재가 실재하는 모든 것들을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지독한 아이러니를 이야기 전체에 관통시키자 [넛셸]의 문장들에서 새로운 느낌들이 생겨났다.


어쩌면, 이언 매큐언은 인류 전체에 대해 영국식 유머를 가득 담은 블랙 코미디 한편을 선사한게 아닐까.

풍자의 대상은 인류 문명 그 자체이자, 지독한 낙관론, 그 자체인 것이다.

엄마 뱃속에서 풀어내는 철학이나 예측, 낙관론에 그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심지어, 이 태아는 '태어나지 못할 수' 도 있다. 실제로 이 주인공은 유산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공포스러워한다.

최악의 순간에, 최악의 결단을 내림으로써 자신의 삶을 보다 절망적인 쪽으로 이끌어가는데, 어쩌면 이것은 이언 매큐언이 생각하는, '1%의 양심' 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최악의 순간에, 최악의 결단으로 바닥에 고인 피와 양수 안에서 태아가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어머니의 외모' 이다. 

이것은 단순히 여성 비하나 외모 비하적인 표현이 아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여성,심지어 어머니의 '외모'에 관심을 빼앗기는 인간 남성-특히 엘리트라 불리우는 사람들이 젊고 예쁜 여자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떠올려보면ㅋㅋ- 에 대한 풍자이자 조롱이다. 

주인공 태아가 사회를 이끌어가는 엘리트 집단에 대한 메타포로 읽었더니, 이 엔딩이 [넛셸] 이라는 한편의 우화가 갖는 엄청난 완성도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물론 내 해석들이 모두 곡해이고, 지나친 독법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책은 독자들의 것이고, 독서의 열매는 각자 알아서 따먹는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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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4모 - 박근혜 4년 모음집, 본격 시사인 만화 2013~2017
굽시니스트 지음 / 시사IN북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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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고 보니, 짧았던 것 같은데. 박근혜 정부도 무려 4년이었다. 

2017년 5월 29일 공판때 박근혜는 혼잣말로 '다 조작이야' 라고 궁시렁 거렸고, 급기야는 문에 발가락을 찧었다며 MRI까지 찍는 희안한 일을 벌이고 있다. 정유라의 결정적 증언에도 이재용은 사실 삼성의 실세가 아니었다는 말로 최악의 사태를 피해가려 하고, 최순실과 변호인측은 여전히 사법부를 농락하는 듯 고성을 멈추지 않고 있으니, 그네들의 정신세계를 알 것 같다.

이 책은 이제는 시사만화계의 거두로 자리잡은 '굽본좌' 굽시니스트가 시사인에 장기 연재중인 '본격 시사인 만화'에서 박근혜의 집권기간동안 연재된 분량을 묶은 책이다.

본격 시사인 만화가 2권까지 나왔으니 3권인 셈이다. 

아무래도 박근혜 집권기는 기존의 대한민국 정치사와 사뭇 다른 부분이 있어설까, 기존의 시리즈를 이어가기보다 '박4모' 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편집부의 의도가 좀 궁금하긴 한데.... 문재인 정부는 어쩔라구???? @,@

아마 박근혜 정부를 우리나라의 '정부' 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속내가 보이는 듯도 하고.

 

 굽작가 책의 트레이드마크인 각 편마다 달려있는 해설도 역시 그대로다.

패러디로 사용된 작품들과 책이 묶이기 직전 소회를 풀어내듯 몇줄씩 코멘트가 달려있는데, 탄핵 이후에 쓰여진 것들이라 당시에는 어처구니 없었던 몇몇 결정들이 지금 보니 '그랬구나' 싶은 부분들이 많다.


2012년 10월, 문재인과 안철수의 단일화와 박근혜 당선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2017년 4월, 문재인과 안철수의 양강구도로 막을 내린다.

윤창중의 발탁과 낙마, 문창극 총리 후보 지명,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의 미스테리한 마무리와 무시무시한 크래킹 프로그램을 통한 도감청 의혹 등등. 빨간 마티즈 안에서 사망하신 국정원 직원분은 제대로 눈이나 감으셨을까... 세월호 아이들에 비할수는 없겠지만, 원통한 죽음도 꽤 많았던 4년이었구나, 싶다.

 

엄청나게 긴 시간이었던 것 같지만, 지난해 촛불혁명부터 문재인 정권의 출범까지, 고작 1년 남짓이었다.

최순실의 태블릿이 발견된 지도 이제 1년 넘어, 2년째인거고. 

아직 해야 할 일들이 엄청나게 많다. 박근혜, 최순실, 이재용의 공판은 끝나지 않았고, 블랙리스트의 김기춘, 조윤선도 마찬가지.

심지어 조윤선은 무죄 선고를 받고 호화로운 집으로 돌아갔다. 

최순실의 은닉 자금은 세계 각지에서 어마어마한 규모로 발견되고 있으나 환수법은 지지부진하고, 동네 건달들의 강령 같은 혁신안을 발표한 박근혜 정부의 일등공신 자한당은 사사건건 적폐청산의 앞길을 막고 있다. 

박근혜 탄핵도 쉽지 않았으나, 앞으로의 길도 험난하다.

미국은 여전히 우리 정부를 따 시키고, 중국은 여전히 민간 기업들을 내몰면서 압박 하고, 그 와중에 북한은 미사일을 펑펑 쏴댄다.

일본은 스스로 정한 평화헌법에 끊임없이 균열을 내며 우리의 영토와 역사를 걸고 넘어지며 분쟁을 조장하고. 

동아시아의 지형은 북,중,미 대 한,미,일의 대결구도가 선명해진 가운데, 한국에서 먼저 정치적인 환난이 잘 극복됐고, 일본에서도 극우 정권을 향한 의미있는 움직임이 포착되는 중이란다. 


우리의 역사는 언제나 위기의 연속이었다. 

수많은 위기 끝에 문민정부를 세우고 평탄대로를 걸을 줄 알았더니, 이명박근혜 10년이 민주주의를 엄청나게 후퇴 시켰다.

하지만, 역시 수많은 위기로 단련된 시민들이어서 기회가 주어지자 잃어버린 시간보다 훨씬 빠르게 되돌아갔다.

어쩌면 우리는 10년쯤 뒤에 또,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할지도 모른다.

인간은 어리석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한다니까.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곱씹어야 한다.

박정희를 잊지 말고, 전두환을 잊지 말고, 노태우와 김영삼, 김대중과 노무현, 이명박과 박근혜를 끊임없이 되살려야 하는 이유다. 

광주 민주화운동과 남북정상회담, 보건복지부와 삼성, 삼풍 백화점과 대구 지하철 참사, 세월호와 촛불 혁명을 끊임없이 돌이켜야 하는 이유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지난 10년은 그 증거였다. 

당장 다음 해에 총선. 그리고 그 뒤에 또 찾아올 대선. 아마 그 중간 어디선가 개헌이 있을수도.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먼지로 돌아갈 만한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

외계인이 침략한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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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하는 글쓰기 (특별판) - 스티븐 킹의 창작론
스티븐 킹 지음, 김진준 옮김 / 김영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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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이 책이 엄청 유행했던 적이 있다. 

나는 20대 후반에 처음 접하고, 이 책을 고등학교때 읽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두고두고 아쉬움을 삼켰다.

그리고, 40을 바라보는 30대 후반에 다시 읽어보니, '이런 내용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새롭게 다가오는 부분들이 있었다.

특히,'연장통' 에 대한 부분이 정말 새롭게 다가왔다. 

스티븐 킹은 누구나 글을 쓸 수는 있지만, 그것을 위한 '준비' 에 관해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연장통이 바로 그것이다. 

스티븐 킹은 글쓰기의 기본 능력은 누구나 갖고 있지만, '최선의 능력' 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연장이 필요하고, 연장의 활용법을 충분히 익혀야 하며, 많은 연장을 담을 통과 그 통을 들고 다닐 수 있는 팔의 힘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연장통의 맨 위칸에는 '낱말' 이 있다. 그 옆에는 '문법' 이 있고.

적확한 낱말을 간결한 문장 안에 넣는다. 

이 대목에서 그 유명한 "부사는 여러분의 친구가 아닙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수많은 부사로 뒤덮여 있다고 믿는다." 와 "부사는 민들레와 같다. 잔디밭에 한 포기가 돋아아면 제법 예쁘고 독특해 보인다. 그러나 이때 뽑아버리지 않으면~~' 과 같은 이야기가 등장한다.(p.151) 그리고, 관용구를 피하는 방법과 수동태를 자제하고 능동태를 지향하라는 주장이 여러 예문을 통해 쏟아진다.

문장들이 알맞게 모인 "문단"의 중요성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아, 그래.

이 부분은 대충 읽었었지. 

스티븐 킹은 수많은 대가들도 잘못된 문법을 사용한 예가 있지만, 탄탄한 문법적 기초 위에서 파생된 것이고, 수동태는 작가의 소심함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설파한다. 시종일관 유머러스 한 그의 책은 거의 중반인 이 즈음부터 상당히 진지해진다. 


그 뒤에 등장하는 "창작론" 역시 재미있다.

그는 작가란 "화석을 캐내는 고고학자" 라고 생각한다. 

물론, 수많은 다른 작가들의 수많은 창작론을 인정하고, 자신의 창작론을 진리로 따르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각자 자신만의 창작론을 따르라고.

그는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 어떤 인물을 훅 던져 두고, '관찰' 함으로써 이야기를 '발굴' 해낸다고 한다.

작가의 역할은 그 이야기를 최대한 원형 그대로 캐내는 것이다. 적절한 연장을 적확하게 사용해야 한다. 붓이나 솔을 사용해야 할 곳에 망치나 끌을 들고 덤비면 큰일이다. 그것이 '연장통' 의 중요성이다.


"독서를 통하여 우리는 평범한 작품과 아주 한심한 작품들을 경험한다. 이런 경험을 쌓아두면 나중에 자기 작품에 그런 단점들이 나타났을 때 얼른 알아보고 피해갈 수 있다. 또한 독서를 통하여 우리는 훌륭한 작품과 위대한 작품을 경험함으로써 자신의 목표를 정하고, 과연 이런 작품도 가능하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독서는 작가의 창조적인 삶에서 핵심적인 부분이다."


맞아. 이 뒤에, 어디서든 읽으라, 러닝 머신 위도 좋은 공간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래그래. 내가 헬스장에 책을 갖고 다니게 된 이유였다. 러닝 머신은 좀 위험하고, 인도어 사이클 위에서 읽는다.  

이 책도 헬스장 러닝 머신 위에서 다 읽었다. 


스티븐 킹은 시종일관 겸손하고, 유머러스하다.

에세이처럼 시작한 이 한권의 작법서는 수많은 '주의사항' 을 설파하고, 수많은 예제를 던져주며 마무리된다.

아마, 이 책을 다 집필하고도, '아 이런 부분이 있었는데,' 한 부분들도 많았겠지.

수많은 '지망생'. 장래의 동료들을 위한 존중과 배려, 따뜻한 시각이 느껴져서 참 좋았다.



 아마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향하는 한 지점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선' 을 그리는 것이다. 

아...이제는 컬러로 면을 표현하기가 쉬워진 시대라서 이런 지향점은 고루한 것이 되어 버렸을 수도 있겠지만, 


'살아있는 선'.


 어린 시절에는 그 선이 도구의 차이에서 나오는 줄 알았다. 

하지만, 정작 그런 선을 그리는 작가들은 날카로운 쇠붙이에 제도용 잉크를 찍어서 사용하는 원시적인 도구를 벗어어나지 않더라. 가끔 플러스펜이나 제도용 만년필등을 사용하는 작가들도 있긴 했으나 대부분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기능을 지닌 필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종이는 뭐, 조금 다르긴 했다. 물론 잉크도 조금 달랐다. '만년필용' 과 '제도용' 은 엄연히 다른 잉크이긴 하다. 

제도용 잉크를 만년필에 넣으면, 그 만년필은 거의 못쓰게 된다. 경유차에 중유나 등유(휘발유도 아니다)를 붓고 시동을 거는 격이랄까.

그러나, 역시 본질적으로 가장 간편하고 구하기 쉬운 도구들이었다.  


조금 지난 뒤엔 작가의 특별한 비법이 있는 줄 알았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긋나? 

종이를 비스듬하게 기울여서 쓰나??

뭔가 특별한 비법이나 수련법이 있을 것 같았다.

마치 무공 비급처럼.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에게 사사받았을법한 드로잉의 비밀 필살기를 업계 스승들로부터 은밀하게 배웠을 것만 같았다. 


최소한의 선으로, 최대한의 것들을 표현한다.


항상 시간의 제약에 쫓기는 만화가는 더더욱 그 경지를 바라본다. 


물론, 여기서 '선' 은 만화 안의 수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배경에 그어지는 선, 집중선, 컷과 컷을 나누는 컷선. 

심지어 텍스트를 담고 있는 말풍선과 흔히 '효과음' 이라고 부르는 의성어, 의태어까지.

때로는 말풍선 안의 텍스트조차 '선' 으로서 만화 안의 미장센으로 작용한다. 


'살아있는 선' 이란, 결국 '이야기를 담아내는 선'이고, 오랫동안 변치않는 기본중의 기본이다. 

만화의 기본인 '선'이 부족할수록 '장식'에 치중하게 된다. 



아, 나도 빨리 그려야겠다.

나도 빨리 이야기를 캐러 가야겠다.

연장통도 챙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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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의 야간열차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8
다와다 요코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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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페이지, 첫 문장부터 무엇에 홀린듯 단박에 빠져들었다. 


 화자가 '나' 가 아니라 '당신' 이다. 
그 낯섦에 흠칫 놀라 경계하는 마음으로 읽어나갔다. 
굳은 마음으로 몇 페이지 더 넘기다보니, 작품 안으로 독자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려는 저자의 의도가 또렷하게 드러났다. 
화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당신'-그러니까 책을 읽는 나我라면서 낯선 여행지에서 겪는 불안함과 현지의 사정으로 겪게되는 불편에 대한 투덜거림을 '강요'한다. 

 고작 열페이지 남짓한 첫 챕터; '첫번째 바퀴' 를 다 읽자,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이 작품은 누가 봐도 명확하게 메타소설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독자가 함께 여행을 해야 이야기가 시작되고, 진행되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발 떨어질 수는 있다. 독자를 작품 속 화자로 이입시키려는 작가의 의도 쯤이야, 무시하면 되니까.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당신' 으로 지칭했다고 여기면 된다. 
 나는 작가의 의도에 적극 동조하지 않기로 했다. 저자가 아무리 나를 '당신' 이라고 우겨도, 나는 '아닌데~!' 하기로 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화자를 한명 상상했다. 나 역시 저자처럼, '당신' 을 관찰하기로 했다. 


작품의 화자인 '당신'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명확하지 않다. 
'바퀴' 라는 이름이 붙은 열 세 챕터를 통해 수많은 국가를 오가는데, 성별과 직업이 드러나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각 챕터에 등장하는 모든 '당신' 이 한 인물이라는 증거는 명확하지 않다. 
 그것 또한 저자의 의도일터.
전통적 서사에 맞춰 주인공의 성별과 나이, 직업과 각 챕터의 시간 순서를 맞춰보려던 나는 어느새 그런 시도들을 모두 포기하고 여행담을 즐기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당신' 을 관찰하겠다는 의지도 무너져, 어둑한 야간열차 안에서 나는 수많은 외국인들의 냄새와 텁텁한 공기,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들을 상상하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체험감을 높이기 위해 구글링을 해서 각 챕터에 맞는 지명과 야간열차들을 알아보고, 그 지역 사람들이 적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적힌 블로그를 보고(구글 번역 만세), 슬라브어나 폴란드어, 러시아어, 산스크리스트어 등의 포합어의 발음들을 재생시켰다.    
화자가 상상하는 것들을 함께 상상하고, 잠에서 덜 깬 채 요의를 느껴 화장실을 갈까 말까 함께 고민하고, 내 좌석까지 오줌으로 적신 옆자리 꼬마에게 눈을 흘기는 동안 백 몇 페이지가 후딱 지나갔다.
무려 열 세 챕터라지만, 제일 긴 꼭지가 열두페이지 쯤 되고, 대부분 열페이지 안팎이다. 
소설만 따지면 딱 131페이지. 
 
 마음만 먹으면 한두시간이면 읽을 분량이지만, 저자인 다자이 요코가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라 가벼운 에세이처럼 느껴지면서도 자아성찰적인 부분들이 묵직하게 다가오고, 과거와 현재는 기본, 현실과 상상을 넘나드는 판타지의 색채까지 갖고 있다. 
정체성에 대한 갈망이 느껴지지만, 자아를 부정하는 메시지가 명확하고, 변화를 추앙하는 듯 하지만, 그다지 즐기지는 않는 것도 같다. 

 책을 덮고, 거의 작품의 1/3정도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주제에 더럽게 어려운) 해설에서 저자의 약력을 찾아보니 그러한 성향이 조금은 이이해가 됐다.
이 책의 저자인 다와다 요코는 와세다 대학 어학연구소에서 독일어를 배우고, 문학부에서 러시아문학을 전공하고, 독일의 서적 수출입회사에 입사하면서 독일로 이주하게 되고, 거기서 독일어로 시산문을 출간하고(?!) 함부르크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 뒤로 독일어와 일본어로 양쪽에서 각기 다른 작품들을 내며 양국가에서 여러 문학상들을 쓸어담는다.(헐...ㄷㄷㄷ)
솔직히 나는 소설보다 이 다와다 요코의 약력이 더 픽션같았는데,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었다.
20대 초반까지 일본에서 살았던 저자가 독일어를 배워서, 독일문학상을 받는다?? 번역소설도 아니고!!!
아니, 애초에 독일어로 독일에서 데뷔했다. 
정말로 인간의 정신은 언어에 의해 '많이' 좌우되는걸까? 
와 같은 생각을 할 때 즈음 TVN에서 방영되는 "알뜰신잡" 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허균' 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에게 '홍길동전' 으로 잘 알려진 허균의 작품은 한문으로 쓰인 작품과 한글로 쓰인 작품이 있는데, 두 작품의 주제의식과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완전히 상반된다는 내용이었다.
패널로 등장하는 김영하 작가님은 "한글이라는 글 안에서 자유롭고 호방한 작가적 기질이 가감없이 드러난 것이 아닐까" 라는 매우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하셨고, 그와 함께 바로 이 작품과 다와다 요코가 떠올랐다.
 "용의자의 야간열차" 는 다와다 요코의 모국어이자, 20대의 정체성을 만들어준 언어인 일본어로 쓰여진 작품이다.
그렇다면, 문학가로서의 길을 열어주고 더 넓은 세계로의 문을 열어준 독일어로 쓰여진 작품은 어떨까?
생활언어로써 '습득' 한 언어로 쓰인 문학작품과, 사교언어로써 '학습' 한 언어로 쓰인 문학작품에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최근엔 반론도 많아진 것 같긴 하지만, 언어결정론은 정설처럼 퍼졌던 주요한 이론이었다. 정말로 사고思考 와 언어에 특별한 연관이 있을까? 감수성이 특별한 '작가'라면, 시와 산문, 소설에 정통한 예술가라면 그 특별한 차이를 드러내주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텍스트는 텍스트 안에서 오롯하게 소화해야 한다고 여긴다.
물론 텍스트 밖의 상황을 대입하는 컨텍스트context의 개념이나 작가가 처한 상황과 밟아온 경력을 대입하는 작가주의 비평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개인적으로 좋아하진 않는다.
만해 한용운의 개인적 삶과, 시를 짓던 당시 시대상황이 '님' 이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에 영향을 주는 것 자체가 너무나 싫다. 내 나름대로 작품 속에 녹아들 1의 여지도 주지 않았던 그 빌어먹을 고등학교 수업과 수능시험이 싫다. 알퐁스 도데의 '별' 과 황순원의 '소나기' 를 한 방향으로만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고소감 아닌가?! (ㅋㅋ)
비평가의 해설은 읽어도 작가의 인터뷰는 읽지 않고, 독자모임은 찾아가도 작가대담은 찾지 않는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 만큼은 컨텍스트가 작품을 이해하는데 너무나 큰 영향을 줬다. 
우리는 국가의 경계가 허물어진, 아니 '허물어져 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만약 인류가 수백년 더 유지된다면, 인류의 역사기록에 19~22세기는 국가와 민족, 인종과 문화의 경계가 (격렬하게)허물어지는 시기였다고 기록 될 것이다. 그 중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기가 완벽히 허물어지기 직전에 그 모든 경계들이 수면 위로 부상한 시기라고 여기고 있다. 모든 탐욕스러운 이데올로기들이 정점에 다가서고 있다. 모든 민족과 인종들은 서로에게서 각자의 벽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감하고 있다. 이 정점에서 인류는 어떤 결정을 하게 될까? 
 각 국가의 정치 상황들을 보니 지난 세기처럼 쉽사리 화마속으로 던져넣지는 않을 것 같다. 브렉시트 이후 언듯 우경화의 일로를 걸을 것만 같았던 영국과 프랑스가 의미있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고, 우파일색이던 일본도 도쿄지방선거부터 무너져가고 있다. 아시아의 화약고인 북한을 머리에 이고 있는 우리나라는 말할 것도 없다. 미국에 극보수주의자가 집권하자, 세계 각지가 진보의 길을 택했다. 불과 지난 세기만 해도, 이런 상황이었다면 전 세계의 다른 국가의 지도자들도 빠르게 보수화, 폐쇄화를 택했을터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시민의식의 발달은 어떻게든 균형을 찾아내고 있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이처럼, 당신과 내가 살고 있는 이 시기는 수많은 이데올로기들의 경계를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시기인 것이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결혼하는 장면을 100년 전에는 어떻게 바라봤을까?
아니, 다 떠나서,
백인과 흑인이 결혼할 수 없었고 심지어 화장실과 버스좌석도 나눈다는 '법'이 실제로 미국에 있었던 시기다!!!
그 뿐 아니다.
남녀는? 동등한 직업선택의 권리와 참정권은 요원한 시기였다. 여자가 남성에게 종속되던 시기였다.
간신히 폐기된 대한민국의 '호주제'는 실제로 10대 꼬마에게 집안의 모든 여성들이 법적으로 경제권이 종속될 수도 있는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수많은 나라에서 여성은 남성의 재산이다. 특히 이슬람국가에서는 여전히, 매우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다. 


이 소설이 당대 유럽의 강대국으로 재도약하던 시기의 독일에 이주한 극동아시아 여성의 작품이라고 설명해야 옳을까? 
그런 여성을 문단에 데뷔시켜주고 상까지 준 독일 문단의 열린 마음(?)을 극찬해야 옳을까? 
아니면, '고작 컨텍스트'라고 해놓고 그런걸 상상하는 내 상상력의 편협함을 욕해야 맞을까? 

바야흐로 '월드 와이드'의 시대가 열리면서 모든 경계는 희미해진 것 같지만, 사실은 더욱 견고해졌다.
누군가는 진보적이라고 착각하지만, 상당히 보수적인 미국 사회에서 흑인은 아직도 '피하는' 인종이다. 단지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말이다.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은 어떤가. 자국을 보호하기 위해 끊임없이 타국의 역사와 영토를 물고 늘어지며 그 안에서 보호무역과 민족주의는 외려 강해지고 있다. 사실 이럴바엔 중국이 공정을 펴는대로 중국의 일원이거나, 뉴라이트 어거지들이 지껄이는대로 일본의 식민지로 쭉 남았으면 마음만은 얼마나 편했을까, 싶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경계가 희미해질수록 정서의 경계는 강해지는 것 같다. 인터넷은 '월드 와이드' 의 시대를 열었다지만, 그로 인해 우리는 서로의 뚜렷한 경계를 직시하게 되었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그러한 경계선을 견지하는 화자의 정신을 경험했다.
이야기를 읽어가는 과정은 즐겁기 짝이 없었지만, 이야기가 묘사하는 장면들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 이유는, 저자가 끊임없이 우리의 '경계선' 을 인식시켜주기 때문이다.
힘차게 달리고 있는 '기차' 는, 밖에서 보면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고 있지만, 안에 있는 승객들에겐 밀폐된 공간이다.
게다가 야간 열차 안에는 마치 관과도 같은 침대들이 꽉 차있고, 승객들은 유사 죽음과도 같은 잠에 깊이 빠져있다. 
그 사이에 관과 시신을 실은 거대한 강철상자는 엄청난 속도로 국가 사이의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가뿐히 넘어간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나는 결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드글그글한 동네에 동그마니 떨어진다. 
'나'를 정의하는 수많은 정체성들 중 '국가, 민족, 모국어' 등이 송곳처럼 툭 튀어나오는 상황이다.
 
 그렇다.
'정체성'. 화자는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당신'의 정체성을 명확히 알려주지 않는다.
성별, 직업, 모국. 아무것도 적확하게 묘사하지 않고, 언제나 두루뭉술, 모호하게 풀어낸다. 나의 근원적 불편함은 거기서부터 파생된다. 
​그리고 '당신' 이라는 인칭은 '나' 보다 훨씬 더 경계를 뚜렷하게 느끼게 한다. 챕터를 읽어 나가면서, 진짜 '나' 라면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반응할지 떠올리게 됐다. 
옛 슬라브 지역에 동그마니 떨어져 낯선 언어들의 틈바구니에서, 광활한 시베리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몇박의 지루한 여행에서, 낯선 향신료의 냄새가 섞인 사람들의 냄새 속에서, 낯선 언어, 낯선 얼굴이지만, 어디에서나 보았음직한 행동들을 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나를 향한 의심의 눈초리, 호기심의 눈초리, 불쾌의 눈초리를 보낼 수많은 사람들 안에서. 
'나' 란 과연 어떤 '나' 일까? 
저자는 '당신' 이란 호칭을 통해 독자인 '나' 와 명백한 선긋기를 시도한다.
이 독특한 체험이 '독서' 라는 간접체험의 '체험'을 보다 농밀한 경지로 밀어올렸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타인을 오해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날카로운 손발톱도, 질긴 털가죽도 없다.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하고 판단해야 한다. 심지어 넓은 시각과 깊은 후각을 갖고 있지도 않다. 손에 닿을 듯 가까운 거리까지 와야 그나마 피아식별 정도를 할 수 있다. 빠르게 판단해서, 빠르게 대비해야 한다. 그나마 상대방이 먼저 밝은 낯으로 빈 손을 내밀면 그제서야 안심할 수 있다. '적은 아니구나,' 라는 오해를 할 수 있다. 극도로 제한적인 시간 안에서, 극도로 제한된 정보를 통해, 극도로 제한된 판단을 내린다. 인간이 생존을 위해 터득한 오랜 경험이다. 쉽게 다가가지 말고, 쉽게 손 내밀지 말고. 상대방의 '정체' 를 파악하기 전까지는. 

야간열차는 밖에서 보면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는 검고 긴 줄에 불과하다. 
그 안에는 어떤 사람들이 타고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인간의 자아 역시 마찬가지일터.
단단하고 두꺼운 철판 안에 수많은 정체성을 싣고 빠르게 질주한다. 
밖에서 볼 때는 그냥 하나의 길고 검은 덩어리. 너무 빨라 창문이 몇개인지, 객실이 몇개인지 알아볼 수도 없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그렇게 말하는 듯 하다.
굳이 정체성을 찾을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고. 
자아라는 것은 그리 단순화, 간략화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더 이상 고민하지 말라고. 찾으려 애쓰지도 말라고. 

"자는 동안에는 우린 모두 혼자잖아요.(...)
우리는 애당초 같은 공간에 있지 않아요. (...)
한 사람 한 사람 다 달라요, 발밑에서 땅을 빼앗기는 속도가.
아무도 내릴 필요 없어요.
모두 여기 있으면서 여기 없는 채로 각자 뿔뿔이 흩어져 달려가는 거예요."
p.140

그리고, '당신' 의 정체를 단단한 외피속에 굳이 가둬두지 말라고.
그게 인종이든, 성별이든, 나이든, 국가든, 언어든, 그 어떤 것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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