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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처럼
김경욱 지음 / 민음사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인생이 동화같지 않다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때로는 신데렐라나 콩쥐팥쥐에 나오는 계모보다 친모가 더 악독하고 무서운 존재라는 사실을.
백설공주처럼 관에 실려있는 시체에 키스를 하는 왕자따위는 정신병자라는 사실을.
무엇보다, 이 세상에 그렇게 내가 내민 유리구두에 발이 딱 맞는 공주도 없을 뿐 아니라, 난 절대 백마 탄 왕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김경욱 작가의 이야기가 주는 매혹은 이미 익히 알고있었다.
어딘가 음울하고, 색으로 치자면 붉은기가 섞인 따뜻한 회색이 아닌, 푸른빛이 감도는 서늘한 회색에 가까운 잿빛을 담고 있는 이야기들.
약간 보랏빛이 감도는 듯도 하다.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잡는 소재들을 잡아채서 이야기를 빚어내는 그의 능력은 그야말로 '탁월' 그 자체였다. 게다가 아무렇지 않게, 그 잿빛을 글속에 풀어낸다.
담담하기 이를데 없는 문장들은 내 마음을 잿빛으로 물들였다가, 이내 새벽같은 어두움속에 몰아넣는다.
'위험한 독서' 라는 제목을 가진 단편집에서 그는 사랑에 관한 작품들을 많이 선보였었다.
그의 단편들에는 언제나 회색빛 로맨스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표제작이었던 '위험한 독서' 에서도 연애감정을 언듯언듯 내비쳤었고, '공중관람차 타는 여자' 에서는 결혼을 앞둔 여성의 심정을 아슬아슬하게 풀어내기도 했었다.
결국 이 작가도 장편은 사랑이나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소재로 선택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아니나 다를까, '로맨스' 라는 카피를 떡하니 달고 책이 나왔다.
제목은 '동화처럼'. 역시나 어딘가 판타스틱한 소재를 잘 끄집어내는 작가답게 평범한 사랑이야기를 평범하게 풀어나가지는 않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초반부는 지나치게 통속적인 멜로물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대단히 실망스러웠다.
아기자기 하지도, 가슴 설레지도, 예쁘지도, 사랑스럽지도 않은. 지나치게 평범하고, 아무렇지 않게 담담한 두 남녀의 만남과 헤어짐.
난 이 작품을 보는 내내 그의 단편들이 떠올랐다.
'공중관람차 타는 여자' 가 떠올랐다. '고독을 빌려드립니다' 와 '달팽이를 삼킨 사나이' 도 떠올랐다.
그 작품들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이미지와 뉘앙스와 미장센의 확장형에 불과한 듯 했다.
아마도, 작가는 이 한편을 통해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삶과 사랑에 대해 솔직하고 담담하게 풀어내고 싶었던 듯 하다.
위에 언급한 단편들이 조금은 난해하기도 했고, 압축, 축약된 장면들이 많았다고 한다면, 장편인 '동화처럼' 에서는 보다 넉넉하고 편안하게 풀어내고 있다.
프롤로그는 앞으로 여자주인공인 '백장미' 가 쓸 동화가 소개되고 있다.
눈물공주와 침묵왕자의 이야기.
처음엔 눈물공주의 시점에서, 그리고 다음 챕터에서는 동일한 사건을 침묵왕자의 시점에서 풀어낸다.
이처럼, 작품 또한 여자 주인공 백장미와 남자 주인공 김명제의 시점이 챕터마다 번갈아가며 사건이 전개되어 나간다.
이렇게 통속적이고 지나치게 평범한듯한 이야기는 중반을 넘어, 3부에 접어들면 180도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차갑고, 회색이고, 담담하고, 무심하지만, 감각적이고 통찰력있는 글귀들이 비로소 '삶' 을 담아내기 시작한다.
이미 만들어져 있던 가정.
그 가정에서 20년을 넘게 살아왔던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영원한 평행선.
그 평행선을 그제서야 명료하게 보여주기 시작한다.
삶이란 무엇일까?
객관적으로 보면, 삶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직선이다.
'태어남' 이란 시작점에서, '죽음' 이라는 종결점까지 쭉 뻗어있는 직선이다. 시작점도 같고, 종결점도 같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직선을 가지고 있고, 그 위를 줄달음쳐 달려간다.
그 누구도 나의 직선 위에 올라설 수 없고, 나 또한 타인의 직선 위에 올라갈 수 없다.
내가 남의 탄생을 대신할 수 없고, 남의 죽음을 대신할 수 없듯이 말이다.
그리고, 여기 한명의 남자와 한명의 여자가 있다.
이 두 남녀가 만난것은 우연이었지만, 자신들의 직선을 옆에 나란히 세우게 된 것은 필연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우연일지도 모르고.)
짜증날 정도로 담담하게 통속적인 로맨스였던 전반과는 달리, 후반부는 -하지만 역시 짜증날 정도로 - 특별한 성장기가 담겨있다.
너무 사무쳐서 결혼, 삶, 그런거 다 짜증나!! 싫어!!! 라고 소리치게 될 정도이다.
그래, 다 알고 있다. 삶이란 그다지 아름답지 않고, 사람들이란 그다지 좋은 존재가 아니라는거.
혼자 있으면 외롭지만, 같이있으면 짜증나는거.
인간이란 그런 존재라는거. 싫증내고 귀찮아하고. 없으면 또 찾지만, 찾은 뒤엔 또 싫증내고 귀찮아하며 상처를 줄거라는거.
결국 그렇게 귀찮아하고 지겨워 할건데 꼭 누군가 곁에 있어야 할까?
어차피 같은 직선 위에서 뛸 수 있는것도 아닌데? 대체 왜?
왜 그렇게 서로에게 고통을 주면서도, 그렇게나 찾아대는가.
삶이란 그런것이다.
귀찮아 하고, 찾고.
싫증내고, 또 찾고.
상처내고, 치료해주고.
징그럽고 지겨워하고, 안고 쓰다듬고.
그리고, 살아있는 한.
함께 있는 한 그것이 행복이라는거.
단, 전제조건이 반드시 필요하다.
반드시 '깊고 솔직한 대화'를 끊임없이 할 것.
아무리 사소해 보이고, 마음에 거슬리고, 거리낌이 있더라도.
진심을 담은 대화.
결국 모든 갈등과 사건들은 침묵에서 시작되어, 오해로 끝난다.
그리고 모든 갈등과 사건들은 대화로 풀려진다.
*덧:
꼭, 남녀가 -커플이든 아니든 - 함께 읽어봐야 할 책.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하겠다.
인생의 경험이 부족한 것일까.
좀 더 경험이 쌓이고, 나이라는 연륜이 켜켜이 쌓여갈수록, 보다 보다 더 많은것이 이해될 책.
한번보다는 두번, 두번보다는 세번 읽을때 얻는게 많은 양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