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끝없는 세상 1~3 세트 - 전3권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46
켄 폴릿 지음, 한기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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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27년의 잉글랜드 킹스브릿지.

 톰과 잭이 지었던 대성당은 어느새 지은지 150여년이 흘렀다. 

가난한 좀도둑의 어린 딸 궨다는 가족들과 함께 킹스브릿지 수도원 구호소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노숙자와 병자들을 수용하는 수도원 구호소는 다음날인 '만성절' 을 맞아 모여든 사람들 중, 여인숙에 기거할 형편이 안되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미사 시간이 다가오자 주교와 사제들의 행진을 보기 위해 성당 입구에 사람들이 까맣게 모여들었다. 궨다가 노린 인물은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귀족. 

 궨다는 작고 어린 꼬마 여자아이였지만, 제 오빠인 필리먼보다 솜씨가 좋았다. 같은 좀도둑질을 해도 필리먼은 실수 투성이에 치안관에 잡힐뻔한 적도 많았지만, 궨다는 아직까지는 큰 실수가 없었다.  소녀는 하나님이 무서웠고 치안관도 무서웠지만, 아버지의 매질이 훨씬 더 무서웠다.


 궨다에게 주머니가 털린 인물은 제럴드 경이었다. 

부유해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는 몰락해서 이름만 남은 상태. 오늘 그가 킹스브릿지의 대성당을 찾은 것은 명목상 소유권만 남아있는 작은 영지를 수도원에 기탁하고 자신과 가족들의 거처를 부탁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킹스브릿지는 영지 전체가 주교의 관할 아래 있었다. 상업, 농업, 공업 등 모든 산업은 교구 길드에 속해야 했고, 주교의 허가를 받아야했다.  제럴드경은 자신의 영지 소유권을 수도원에 기탁하고, 킹스브릿지 안에서 수도원이 마련해준 집에서 살며 매일 하루 두끼의 식사를 제공받는 피부양자가 되고 말았다. 

 제럴드 경에게는 두 아들, 머딘과 랠프가 있었다. 머딘은 제 동생보다 체구는 작았지만, 사려깊고 똑똑했으며, 손재주가 좋았다. 반면, 동생 랠프는 제 형보다 덩치는 컸지만, 성정이 포악하고 제멋대로인 구석이 있었다. 그래도 머딘과 랠프는 서로의 장단점을 잘 알고 있었고, 서로에게 의지하는 바도 있었다. 


 킹스브릿지의 주요 산업은 양모거래였다. 분기별로 열리는 킹스브릿지 양모시장은 일대에서 가장 큰 규모였고, 에드먼드는 이 곳에서 큰 돈을 벌 수 있었다. 인품이 훌륭하고, 사업수완이 좋은 그는 오랫동안 상인 길드의 장을 맡고 있었다. 그의 약점이라면 아내가 오랫동안 병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과 가업을 물려줄 아들이 없다는 점 뿐이었다. 대신 그에겐 아름다운 두 딸이 있었다. 첫째 딸은 이미 건축가 길드의 수장과 결혼해 안온한 삶을 누리고 있었고, 둘째인 캐리스는 에드먼드의 장점을 쏙 빼다박은 재능 넘치는 소녀였다. 

 에드먼드의 성공에는 누나인 페트라닐라의 도움도 컸다. 페트라닐라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통찰력이 뛰어났고, 어떻게 조종해야 하는지 알았다. 다만, 여성으로 태어났기에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 오직 남동생인 에드먼드의 조력자로서 만족해야 했다. 에드먼드는 페트라닐라의 이러한 장점을 모르지 않았다. 상당히 열려있는 인물이었던 에드먼드는 누나의 의견을 존중했고, 현재의 부는 그녀의 도움이 크다는 점 또한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 시대의 가부장 답지 않게 딸들에게 폭넓은 선택지를 준 이유이기도 했다.


 한편, 페트라닐라에게는 일찌감치 수도사로 종교의 길에 뛰어든 고드윈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고드윈은 페트라닐라가 여성이라는 태생적 한계로 인해 가질 수 없었던 권력과 야심을 한 손에 쟁취할 수 있는 '아들'이었다. 고드윈은 킹스브릿지 대성당의 주인, 수도원장이라는 목표가 있었고, 그 목표에 닿는 길은 어머니인 페트라닐라가 그 누구보다 잘 안내해줄 수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가족들이 수많은 인물들과 함께 만성절 미사에 참여하고 있던 그 시간, 이저벨라 여왕의 수하인 기사 토머스가 선왕인 에드워드 2세의 편지를 가지고 비밀 임무를 수행중이었다.


한명의 기사와 두 쌍의 소년 소녀. 토머스와 머딘, 캐리스, 랠프, 궨다가 킹스브릿지 인근 숲 속에서 마주치면서, 작가 추산 약 41만 5천자 이상의 거대한 서사시가 시작된다.    

 


  이 서사시의 시대배경은 1300년대 초~중반. 14세기 유럽의 중심을 가로지른다.

100년전쟁이 막 시작될 무렵이다. 이 시기의 잘 알려진 인물이라면, 단연 (게임 애호가들에게도 익숙한) '흑태자' 에드워드를 떠올릴 것이다. 100년전쟁의 수많은 전쟁영웅들 중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인물이다.

 이 작품 속에서는 에드워드 3세가 막 왕위에 올랐다. 이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이 '흑태자' 에드워드다. 흑태자가 이끄는 잉글랜드 군대가 프랑스의 칼레를 점령하기도 했고, 페스트;'흑사병' 이 전 유럽을 강타해 전쟁과 병마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던 시기다. 현대에 역산해본 결과 이 시기에 유럽 전체 인구의 약 1/3이 죽었다고 하니, 이 기간동안 세 집 중 한 집이 사라진 것이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줄줄이 끌려갔다가, 철과 피의 향연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와보니, 이곳은 이미 전쟁터보다 더한 파리와 쥐떼들의 시체 뷔페였던 것이다.


 이런 아비규환 속에서 톰의 먼 혈연인 캐리스와 고드윈,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 넘어온 머딘과 랠프, 킹스브릿지에 터를 잡긴 했지만, 큰 애착은 없는 궨다와 울프릭의 이야기가 절절하게 그려진다.

재미있는 점은 톰이나 잭과 전혀 관계가 없어보이는 머딘에게 건축의 재능을 선사했다는 점이다.

이는 작가로서 대단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정신적으로도, 서사적으로도 완벽한 [대지의 기둥]의 속편인데, 등장인물들에게 전편의 주인공들을 1도 투영하지 않는다.


 [끝없는 세상] 은 크게 캐리스와 머딘의 러브스토리와 궨다와 울프릭의 러브스토리로 정리할 수 있는데, 서사 전체를 이끌어가는 딱 한명의 주인공을 꼽으라면 단연 '캐리스' 다.

켄 폴릿은 꾸준히 대하 역사소설을 집필하며 당대 여성들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된 듯 하다.

'스파이 소설' 을 비롯해 건축과 전쟁 등 남성 중심의 서사를 집필하던 노작가의 후반기가 신선하게 다가온 이유기도 하다.

이러한 경향은 '20세기 3부작' 으로 불리는 [거인들의 몰락] [세계의 겨울] [영원의 끝] 연작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역시 굵은 줄기는 절절한 러브스토리이지만, 양차 세계대전과 흑백갈등이라는 거대한 사건 속에서 남성사회에 눌려 있던 여성들이 어떻게 이 사회의 전면으로 나설 수 있었는지 설득력 있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캐리스는 그 누구보다도 예민한 감각을 타고난 인물이다. 그 감각은 '부조리' 에 대한 감각, 즉, '균형' 에 대한 감각이다.

이러한 감각은 처음엔 상업에 대한 소질로 드러난다. 아버지의 일을 도우면서, 누구에게 뭐가 필요하고,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감각적으로 터득하고, 행동력까지 갖춘 인물로 성장한 것이다.  

이 균형감은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반감으로 드러난다. 정신과 육체, 권력과 양심, 특히 종교인과 일반인 사이에 비틀린 균형을 감지해낸 것이다. 

이것들이 맞물려 당대의 사회제도, 왕과 신하, 영주와 농민, 남성과 여성에 대한 부조리에 대한 탐구심으로 발현되고, 그 안에서 최대한 합리적이고 균형잡힌 대답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캐리스의 이러한 재능은 평범한 사람들도 쉽게 알아챈다.

킹스브릿지에서 가장 부유한 상인 길드장의 딸이라는 휘장도 있긴 했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캐리스의 '합리성' 을 단박에 눈치챈다. 딱히 어려운 말이나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캐리스는 언제나 공정하게 대했을 뿐이다. '균형' 적으로. 사람들은 캐리스의 합리성에 매료되고, 그 리더쉽을 인정한다. 다만, 사회적으로 여성은 공적인 자리에 오를 수 없다는 사실을 그들 모두가 아쉬워했지만, 그 누구도 그 규칙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캐리스의 합리성은 여기서도 발현된다. '합법적' 으로 리더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귀족도, 남성도 아닌 캐리스가. 전쟁터나 무법지대도 아닌 교황과 주교의 땅 안에서. 심지어 당대 사회에서 여성은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을 수 없었다. 캐리스는 당대 평범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거의 모든 재능을 선물받았지만, 오직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것들을 갈고 닦을 수 없었다. 

 

한편, 머딘 역시 대단히 합리적인 인물이지만, 캐리스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예민하게 발휘하지는 못한다.

다만, 그는 물리적인 감각이 뛰어났다. 과거에 해왔던 것들이 '틀렸음' 을 알았고, 그것들을 보완하기 위해 '공부' 를 하고 '계산' 을 해야한다는 점을 합리적으로 이해해낸 인물이다. 캐리스도, 머딘도 당대의 시대상에 비췄을 땐 지독할 정도로 진보적인 인물이지만, 현대의 시각으로 본다면 단지 '대단히' 합리적일 뿐이었다.

당시 사회는 왕과 귀족을 위한 사회였다. 거기에 기독교적 세계관이 혼재되었다. 기독교적 세계관이라고는 하지만, 그 역시 신과 인간이라기보다 왕과 귀족이라는 지배층과 일반 백성이라는 피지배층을 고정시켜주는 안정제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왕의 이름, 신의 이름이라는 콘크리트로 단단하게 굳어져 있었다. 

 캐리스와 머딘은 이 단단한 콘크리트 안에서 몸부림치는 작은 입자 같은 존재들이었다.

이 세상에 통하는 사람은 서로밖에 없었기에, 이 둘은 급속도로 빠져들지만, 단 하나 둘이 타협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건 '결혼' 이었는데, 캐리스는 이 제도의 불합리성, 특히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된다는 사실, 여성의 모든 의무가 육아와 내조에 묶이는 현실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이로 인해 캐리스는 머딘이 인정할 수 없는 선택을 하며 둘 사이는 크게 멀어지기도 한다.

이후 이 둘은 서로에 대한 마음이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하며 자신들의 균형적이고 합리적인 감각과, 그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사회와 세상 사람들의 고정관념 탓에 수많은 고난을 겪고 겪으며 또 겪어나간다.


캐리스가 고난을 당하는 이유는 그가 가지고 있는 '용기' 때문이기도 하다.

합리적이고 부조리한 상황을 결코 좌시하지 않는다. 1300년대는 우리가 '암흑기' 라 불리는 중세의 한 복판이긴 하지만, 그래도 1200년대보다는 훨씬 '법' 적이다. 불과 100년 전만 하더라도 영주들이 소작민들을 거침없이 취할 수 있었지만, 1300년대는 세속군주보다 교회의 힘이 더 강력했기에 왕이나 영주도 교회가 만든 '법' 위에 군림할 수 없었다.

이러한 당시 사회의 성문법이 캐리스를 비롯한 모든 인물들을 옭아매기도 하고, 솟아날 구멍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리고, 도시 전체를, 나아가 유럽 전체를 뒤흔든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100년 전쟁과 유럽 전역을 지옥으로 뒤바꾼 흑사병의 재앙이 도래하면서 등장인물들의 삶은 크게 뒤바뀐다.  


 어쩌다보니 국내에 번역되 켄 폴릿 작품들을 거의 다 읽었는데, 켄 폴릿은 등장인물들을 엄청나게 괴롭히지만, 기본적으로 해피엔딩 주의자이다. 등장인물들에게 가해지는 육체적, 정서적 폭력들은 크나큰 상처를 남기고, 때론 장애와 같은 후유증을 그 몸에 새기지만, 모두가 정신적인 성숙의 자양분이 된다. 

이 작품에서도 캐리스와 궨다는 당대의 여성이 겪을 수 있는 고난이란 고난은 모조리 다 당한다.

하지만, 그 어떤 고난도 이 여성들의 정신을 꺾지 못한다. 남성들과, 남성들이 이뤄놓은 세상속에서 자신들만의 균형을 찾아 빈틈을 메우고, 보완해서 끝끝내 자신만의 정의를 관철해낸다.


물론, 이들의 작은 성공은 소설속이라 가능할 수도 있다.

현실의 벽은 그보다 단단하고, 현실의 기득층들은 그보다 탐욕스럽다. 

작가는 등장인물들을 사랑하지만, 현실에 존재하는지 안하는지 모를 신- 운명, 섭리등 뭐든 좋다-은 그렇지 않다.


소설은 답을 주지 않는다. 작가는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책에 답이 있다면, 우리 사회가 이렇게 부조리할 리 없다.

작가가 언제나 책 안에 답을 넣을 수 있다면면, 우리 사회가, 이렇게 부조리할 리, 없다.

책은 문제를 제시한다. 그 문제의 답은 오직 독자들의 것이고, 각자만의 것이다.  

캐리스도 항상 옳은 선택을 한 것만은 아니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인물도 아니었다.

고난 앞에서 좌절하고, 포기한 적도 많았다. 

인물들은 단지 그 세상 안에서 살기위해 노력했을 뿐이다. 작가는 인물들에게 고난을 던져주었고, 인물들은 그 고난을 각자의 방식으로 대응했다. 

고드윈도, 필리먼도, 캐리스와 머딘도, 랠프와 궨다, 울프릭도. 그리고 그 밖의 수많은 인물들도 모두 1300년대 잉글랜드 킹스브릿지에서 버티고 또 버티다, 죽어갔다. 

그들 자각의 삶을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독자인 우리의 몫이다. 


페이지가 줄어드는게 아쉬울 정도로 푹 빠져 읽었다.

모든 인물들이 애틋하고 사랑스러워서 그들의 선택 하나하나에 가슴아파했고, 화냈고, 안쓰러워했고, 비통해했고, 이해할 수 없었고, 납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페이지. 작가추산 41만 4천 9백 9십 몇번째 단어들로 이루어진 마지막 단락.

등장인물들의 고난이 끝났다는 사실에 깊은 안도감이 들었고, 그 고난의 삶을 함께 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충만함으로 가득했다. 그래, 대하소설을 읽는 맛은 이런거지. 

고난에 가득찬 삶을 걸어온 머딘과 캐리스, 궨다와 울프릭 커플에게 해피엔딩 주의자인 켄 폴릿은 충분한 선물을 준비했고, 그 선물은 결국 독자들을 위한 것임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대지의 기둥]의 후속작은, 사실 [대지의 기둥] 과는 사뭇 달랐다.

보다 치밀했고, 보다 격정적이었으며, 보다 다채로웠고, 보다 입체적이었다. 보다 많은 인물들이 등장했으며, 보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무엇보다, 보다 길었다.(그래서 나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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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아스트로룸 - 인류가 여행한 1천억분의 8
오노 마사히로 지음, 이인호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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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억 광년.
빛의 속도로 200억년을 달려야 한다.
우주의 끝에 도달하려면 말이다. 우주는 아직도 팽창하고 있으므로, 빛의 속도로 200억년 달려가도, 200억년동안 팽창한 만큼 더 달려가야 할 것이다. 사실, '광년' 이라는 단위가 '천문단위(1.496*108km)' 가 쓰이고 있지만, 아무래도 내가 배우던 시절엔 '광년' 을 많이 써서, 아직 그게 익숙하다. (다행히 이 책에도 광년이 쓰인다.)
200억 광년이라니...
너무 까마득하다.


우리가 사는 태양계 안으로 좁혀보자.
태양으로부터 가장 먼 해왕성까지가 약 100광년이다. 물론, 우리 태양계의 모든 행성들은 태양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고, 그 궤도는 매번 약간씩 변화하는 타원이기 때문에 거리를 아주 정확히 측정할 수는 없다.
다만, 공학적인 계산을 통해 어느정도 유추할 뿐이다. 빛의 속도도 사실 크게 와닿지 않는다. 이 책의 저자 역시, 그렇게 생각했고, 태양계 안 행성들을 시속 300킬로미터의 고속열차로 소개하고 있다.
지구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달까지는 53일 걸린다. 금성까지는 16년, 화성까지는 28년, 수성까지는 35년, 태양까지는 57년, 목성까지는 240년, 토성까지는 480년, 천왕성까지는 1000년, 해왕성까지는 1700년....
태양과 가장 가까운 프록시마켄타우리까지는 1500만 년이 걸린다. " (p.093)

1969년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다. 지구 밖 행성에 내딛은 인류의 첫발.

이제 막 인류의 유년기가 시작됐다.


'과학소설의 아버지' 쥘 베른으로 운을 띄운 이 책은 제2차세계대전 당시 로켓 개발을 주도했던 독일의 과학자 헤르만 오베르트를 시작으로 미국으로 넘어가 인공위성과 달 착륙선 개발에 지대한 공헌을 한 폰 브라운, 세계 최초로 지구 궤도에 인공위성을 안착시킨 소련의 코롤료프와 존 후볼트와 마거릿 해밀턴을 비롯한 수많은 나사 직원들을 거쳐 달에 첫 발을 내딛으며 도입부를 마무리한다.
달로 유인 로켓을 보내는 것은 1972년으로 끝나게 된 이유,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기 위해 시도되는 수많은 무인 탐사선들과 냉전기의 종막과 함께 사그라든 우주 개발 프로젝트, 그리고 지금까지 인류가 밝혀낸 태양계 행성들의 정체, 나아가 이제 막 눈뜬 우주의 신비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제 우리는 우주에 약 2천억개의 행성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이 광대한 우주에 비하면 우리는 미생물에 가까울 정도로 작고 미미하다.
하지만, 이 작고 미미한 존재가 우주의 크기를 알고있다. 우주에 행성들이 얼마나 많은지도 알고있다. 
그게 뭐? 라고 되물을 수도 있을터다.
우주에 나간다고 우리에게 큰 변화가 생기지는 않는다.
우주에 수천억달러짜리 인공물을 날려보내고, 목성의 위성 유로파에 오직 한번의 삽질을 위한 수조달러짜리 자동 삽질 기계를 보낸다. 진짜 삽질이다. 오직 단 한번의 삽질.

얼마전, 일본은 혜성에 인공물을 안착시켰다.(https://blog.naver.com/hellodd11/221472586708) 이는 날아가는 탁구공 위에 파리를 앉히는 것만큼 정밀하고 어려운 기술이었다고 한다. 이를 위해 일본은 엄청난 국가예산을 투입했다.
이는 생명의 기원을 찾기 위한 연구와 궤를 함께 한다.


'그래서 뭐? 그게 뭐? 알면 뭐???' 라고 되묻는 사람들도 많다.
한쪽에서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고 있는데, 이게 무슨 개똥같은 짓일까?
냉전기, 소련과의 우주개발 경쟁은 사상대결을 위한 프로파간다로 쓰였으나, 이제 그마저도 끝났다.
우주개발은 천문학적인 돈이 들고, 국가 사업으로서 예산을 따내기는 쉽지 않다. 우리나라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최저임금의 부족분을 메우기 위한 예산도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하는 정도니, 만약 혜성의 얼음조각을 채취하는 기술 개발을 위한 예산이 통과될 리 만무하다.
이건 일본도, 미국도,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화성에 끊임없이 탐사 로봇을 보냈다. 유인 실험은 지구 궤도에 떠있는 우주정거장에서만 하고 있지만, 지금 화성의 대지 위에는 총 네기의 로봇이 꿈틀꿈틀 돌아다니고 있다. 작은 구멍을 뚫고, 돌과 모래따위를 채취하고, 염소나 황산 따위를 뿌려보고 있다.


행성을 세어보기 위한 방법들도 고안중이다. 2017년 케플러 우주망원경이 찾은 행성은 2526개라고 한다. 이것은 백조자리 일부만을 관측한 숫자고, 이를 바탕으로 계산해보면 은하에는 수천억개의 행성이 있다고 한다. 

근데, 이건 우리의 은하에 불과하고, 우주에는 이런 은하가 수천억개가 있다고 한다.
수천억개의 수천억배의 행성이 이 우주에 있는 것이다. 


역시, 또, 그래서? 근데? 그게 뭐??? 라고 되묻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을터다.

근데, 그래서 뭐? 


언젠가 우주에 나가서, 우주적 인간, 즉 '호모 아스트로룸' 으로 진화한다 해도 그건 수천년 후 미래의 일일 것이다.
지금 여기 사는 우리는 도무지 경험해볼 수 없는 미래다.
그 전에 지구가, 인류가 멸망할 수도 있을터다. 

어쩌면 우리 인류는 영원히 유년기를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는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와 또 '어디로 가는가?' 와 맥이 닿아있는 질문이다.
그게 밝혀진다고 우리의 삶이 변하지는 않는다.
이건 '알고보니 우리 엄마가 친엄마가 아니야?'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기원과 종말과 맞닿아있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수천억개의 행성, 수천억년을 가도 갈 수 없는 어딘가.
그리고 그 곳에 있을 지 모르는 생명들, 혹은 그 정도로 고독할 지 모르는 인류.


 인류가 기원전부터 만여년간 1도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히 변한건 있다.
카이사르도, 아우구스투스도, 심지어 예수와 석가모니, 공자와 맹자, 아인슈타인도 페가수스자리 51b 행성이 항성을 4.2일 주기로 공전한다는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 이 행성은 목성만큼 거대한데, 태양을 한바퀴 도는데 4.2일이 걸린다!! 1년이 4.2일인 것이다.
지구와 가장 비슷한 행성은 약 1400광년 떨어진 곳에 존재한다고 한다. 
지름은 지구의 1.6배, 1년은 385일이다. 태양과 아주 비슷한 항성 주위를 돌고 있다. 

목성의 위성 유로파는 얼음으로 뒤덮인 행성이다. 이 단단한 얼음 아래 물이 있다. '갈릴레오 궤도선' 이 관측한 결과다.

지금은 이 수십킬로의 얼음을 뚫고 그 거대한 바다로 들어갈 방법을 고안하는 중이다.(위에 언급한 엄청나게 비싼 삽질이 그것이다.)


2012년 보이저 1호는 35년만에 태양계의 경계선을 넘어 성간 우주로 들어갔다. 

말 그대로, 별과 별 사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다.
보이저1호는 약 4만년 간 이 암흑공간을 지나야 다음 별 ; 'AC+79 3888' 이라는 이름이 붙은 별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4만년... 

42012년에 보이저 1호는 그 별의 사진을 찍어 지구로 전송할 터다.

그 전파가 도착하기까지도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이런 상상을 하면 정말로 아득해진다.
왜 나는 이런걸 궁금해할까? 왜 우주로 나가보고 싶을까?
공기원근이 없는 세계. 영원히, 영원히 유영해도 닿을 수 없는 그 언저리를 왜 보고 싶을까?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거라고.
그게 내 삶과 어떤 관계가 있다고.
아니,
내 삶이 뭐라고.
내 존재가 뭐라고.
'내' 가 뭐라고. 


우리 어머니는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기독교인이지만, 이 영혼이 우주를 유영할 수 있을거라고 믿으신다. 


기독교인도 아니고 영혼의 존재도 거의 믿지 않는 나도 , 그랬으면 좋겠다면서 조금 덧붙였다.

우주를 가득 메우고 있는 암흑물질들이 사실은 온갖 생명체들의 영혼들이었으면 좋겠다.

우주가 자꾸자꾸 팽창하는게, 영혼들이 자꾸자꾸 우주에 나가서였으면 좋겠다.

맨눈으로 보면 보이지 않지만, 죽은 것 같은 이천억개의 행성들에 다종다양한 생명의 영혼들이 바글바글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 육신을 버리면 그들을 모두 만날 수 있었으면. 우주의 끝까지, 이백억년간 유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아득함을 털어내기 위해, 나는 헬스장으로 가련다.
하찮은 몸뚱이 안에, 티끌보다 작은 근세포들을 괴롭히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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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동네 출판사는 매년 데뷔 10년 이내의 작가들에게 이 상을 안긴다. 2010년, 처음 신설되었을 때는 김중혁, 편혜영, 배명훈 같은 작가들이 커트라인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처음이자 마지막 수상이 되었고, 이장욱 같이 새내기 작가는 이후로도 여러번 이 수상작품집에서 만날 수 있었다. 후기를 통해 어떤 작가분은 일종의 '장학금' 처럼 받아들였다고 했다. 크게 이름을 떨치기 전, 많은 위안과 응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 이름과 취지에 걸맞게 젊은작가상을 받은 작가들은 정력적으로 집필활동을 한다. 나도 한 3~4회정도 이 작품집을 읽은 것 같은데, 한번도 실망한 적이 없었다. 내게 '젊은작가상' 은 일종의 아방가르드와 같다. 최전방에서 앞만보고 질주하는 전위대.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적을 일격에 때려부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돌격, 또 돌격하는 선봉대. 때문에, 젊은작가상 수상작을 펼칠 때엔 조금은 다른 기대를 갖는다. 이번엔 누가, 내 뒤통수를 후려쳐줄까? 

맨 앞에 실린 작품을 비롯해 인상적이었던 몇 작품의 감상만 옮겨보겠다.


여느 수상작품집들이 그렇듯, 첫 작품이 대상 작품이다.

다만, 젊은작가상은 모든 상의 상금이 같기에, 대상은 오직 대표성을 가질 뿐이다. 그럼에도 '대표' 하기 때문에 조금 더 엄격한 시각으로 보기 마련이다. 그런 맥락에서 아방가르드한 이 수상 작품집의 맨 앞자리에 선 작품의 첫인상은 살짝 실망스러웠다.

박상영 작가의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은 그 제목부터 너무 참신하고 전위적이었어서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분량은 꽤 된다. 단편이라기보다는 중편에 가깝지만, 중편이라 하기엔 단편에 가깝다. 딱 그 중간 쯤의 분량. 

이미 암투병 전력이 있었던 엄마의 암 재발소식과 함께 시작되는 이야기는 상투적이었다. 그와 오버랩되는 과거 연인과의 이야기도, 꽤나 상투적이었다. 거의 띠동갑 정도 나는 연인과의 연애이야기. 화자는 회사를 때려치고 본격적으로 엄마의 병수발을 하는데, 동시에 과거의 연인에게서 몇년만에 연락이 오는 전개다. 설상가상. 엎친데 덮친. 

엄마와 화자 사이에 있었던 일들과 연인과 화자 사이에 있었던 일들이 교차되며 진행된다.엄마와의 일화는 화자가 섭섭했던 일들과 괴로웠던 일들, 고통의 기억만이 가득하고, 연인과의 일화는 '우럭 한 점' 처럼, 섭섭했던 일들을 사랑으로 꾹꾹 눌러낸 기억들이 가득하다. 대사나 문장들이 감정에 따라 생생하게 요동친다.

화자가 엄마에게 갖고 있는 미움은 미성년때, 유일한 가족이자 온 세상과 같은 엄마의 행위를 통해 받은 것이고, 화자가 연인에게 받은 감정들은 성인이 된 후, 불과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이 두 과거가 오버랩 되는데, 정서가 같을 순 없다. 작가는 그 지점을 명확히 판단하고, 밀도 높고 무거운 두 정서를 능숙하게 분리해냈다. 이는 세 덩어리의 시간대가 불규칙적으로 오가는 이야기의 형식과 시너지를 만들어낸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정서를 분리시키고, 그걸 문장을 통해 명확히 표현해냈다. 소설적 장치뿐 아니라 문장 가득한 정서를 통해서도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전환시키는데, 작가의 기술과 센스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소재가 너무 진부한거 아냐? 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랬고, 지금도 그에 동의한다.

다만, 진부한 소재를 세련되게 꿰는 능력도 중요하다. 그건 세상에서 가장 쉬워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뻔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것. 그리고, 누군가의 삶을 이야기로 압축해서 보면, 모두 다 진부해 보이기 마련이다. 소설이란 결국, 어딘가 '있을 법한' 이야기이니까. 

진부한 이야기를 진보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인물들이고, 이 작품의 특별한 지점 또한 그곳이다.


 이 이야기는 동성애자의 이야기다.

세상에서 가장 의지할 수 있었던 엄마에게 그 사실을 고백했던 순간, 엄마는 화자를 방학동안 정신병원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격렬하게 사랑을 나누었던 사랑하는 연인 '형' 은 화자에게 '사랑이라고 생각했어요?' 라고 되묻는다.  낳아준 엄마에게도, 사랑하는 연인에게도 거부당하는 관계. 우리 사회의 관념상 동성애는 없는 개념이기에, 이론적으로 동성애자는 존재하는 않는다. 감정은 그 사람 자체이다. 끊임없이 감정을 거부당하는 삶. 존재를 부정당하는 삶. 하지만, 삶의 주인은 삶을 부정할 수 없다. 그 모든 부정의 증거들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감내하고, 삭혀야 한다. 그 와중에 정신은 물러지고, 곪아터진다.

가장 사랑했던,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로부터 부정당한 삶의 편린들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 안에 녹아있다. 

BL에서나 보던 '퀴어' 가 순문학의 세계, 일상으로 들어오는 방법이다.

진부한 이야기가 진보한 이야기가 되는 지점이었다. 

지금 이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맞닥뜨리는 모든 순간 속에서 그들이 겪었을 모든 부정.

취업, 직장 상사와의 소통, 엄마의 걱정과 잔소리, 연인과 나누는 대화, 주고받는 손길, 타액, 감정, 오해, 갈등, 편견. 그리고 또 편견. 또, 또 편견, 편견, 그리고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는 강고한 고정관념. 


엄마의 암 투병에 10살 정도 연상의 래디컬한한 운동권 출신-이라고 쓰고, 꼰대라고 읽는다- 연인으로도 벅찬데, 거기에 게이를 끼얹은 이야기. 엄마의 일방적인 애착관계는 동성애자를 비롯한 대한민국 누구에게나 짜증나는 법이고, 꼰대는 게이라도 그 근성이 변하지 않는 법이며, 나쁜남(여)자에게 끌리는 취향 역시 성별을 가리지 않는 법인지라 이 이야기는 진부하지만 신선했고, 신선했지만 짜증났으며, 짜증났지만 읽는걸 멈출 수는 없었다.


현재에 있어 과거란 결코 벗어낼 수 없는 굴레다. 인간은 누구나 과거를 저당잡혀 오늘을 사는 법이다. 과거를 벗겨내는 일은, 모든 인간이 갈망하지만,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고, 그 갈망에 대한 모든 실패는 회한이라는 찌꺼기를 남긴다. 

화자인 '영' 역시, 어머니의 병과 함께 과거의 상처들을 씻어내고자 하지만, 쉽지 않다. 화자가 갖고 있는 상처의 깊이는 망각이나 용서라는 개념과는 이미 멀어졌다. 결국,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모든 선택에 회한이 따른다면,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체념, 밖에 없는 것일까? 

상처만 주었고, 용서할 수도 없는 엄마지만, 화자는 엄마에 대한 미련을, 어쩌면, 사랑인지도 모르는 그 감정을 놓아버릴 수 없다.

'용서하지 않았다' 는 사실을, 끝까지 감추는 것. 그것만이 엄마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을지도 모르겠다. 



두번째 작품은 김희선 작가의 [공의 기원]이다. 

이 작품은 SF/판타지 장르에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좀비물' '스페이스 오페라' 등과 함께 서브 장르로 자리매김한 '대체 역사물' 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장르는 '팩션' 보다는 거시적인 시각을 자랑한다. 역사의 한 인물과 에피소드를 뒤틀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상식 전반의 전복을 시도하는 장르다.     

이야기는 1882년 인천 제물포항에 정박한 영국함의 수병들이 모래사장에서 축구하는 것을 지켜보는 한 소년으로부터 시작한다. 축구공을 통통 튕기며 시작된 이 놀라운 이야기는 영국의 산업 전반을 강타한 아동노동착취와 세계 축구인들과 스포츠인들을 경악시킨 현대의 동남아 아동노동착취를 거쳐 세계인들의 미래상에 대한 충격을 몰고온 인공지능 무인화 공장까지 짚어간다.  

장르물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야말로 현실웃음을 빵빵 터뜨릴 수 밖에 없었는데, 마치 '포레스트 검프' 처럼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교묘하게 비트는 작가의 패기 넘치는 '뻥' 이 사랑스러울 정도로 능청스러웠기 때문이다. 

특히, 축구와 축구게임도 즐기는 나로서는 축구공의 역사와 디자인이 작품 안에서 언급될 때 마다, 머릿속에 공의 디자인들이 되살아나서 제법 풍성하게 작품을 즐길 수 있었었다. 무엇보다 더 재미있었던 점은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의 특징인 매 작품 말미에 붙어있는 작가노트와 해설까지도 작품의 일부처럼 구성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소설은 '뻥' 이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픽션' 의 정의 자체가 그렇다. 그런 맥락에서 내 기준으로 훌륭한 작가는 독자를 잘 속여야 한다. 그런 내게 있어 김희선 작가의 [공의 기원] 은 정말 훌륭한 작가의, 신나는 소설이었다. 



책의 말미에 나란히 실려있는 김봉곤 작가의 [데이 포 나이트]와 이미상 작가의 [하긴]은 [우럭 한 점~] 의 대척점에 있는 작품처럼 느껴졌다. 이 두 작품을 잘 섞으면 [우럭 한 점~] 의 등장인물들의 다른 일상처럼 보일 것 같았다. 

작품의 나열을 누가 했는지, 의도적이었던 것 같았고, 매우 좋았다.

[데이 포 나이트] 는 퀴어 커플의 자기파괴적인 연애담이다. 다만, 이 작품은 보다 '감정' 에 집중했다. 육체는 어떻게 감정을 지배하고, 감정은 어떻게 육체를 제어하며, 시간은 그 모든 것들을 어떻게 뭉뚱그리는가. 그리고, 작가는 그것들을 어떻게 분리하고, 어디에 담아내는가. 기억들 안에서 시간별로 카테고리를 만들고, 하나씩 분리해서, 감정들을 되살려낸다.

[우럭 한 점~] 과 통한다고 생각한 지점이 이 지점이었다. 

또한, 이 작품은 회한으로 가득한 과거의 연애담을 넘어, 창작 그 자체에 대한 커다란 메타포처럼 읽히기도 했다. 


[하긴]은 자녀의 교육에 매달리는 한 부모의 이야기다. 

딸의 이름은 김보미나래. 이 이름을, 화자인 '나' 는 반대했지만, 아내가 밀어붙였다. 그렇듯, 딸의 미래에 대한 결정권은 거의 아내에게 있었다. 화자는 아내의 길에 동참했다. 보미나래는 발달이 더뎠다. 화자와 화자의 아내는 대한민국 여느 부모들이 그렇듯 딸의 대학진학에 모든걸 걸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득하게도, 혼혈 손주였다. 


나는 작품집 전체에서 이 작품이 가장 좋았다. 

가장 의미심장하며, 가장 단호하고, 가장 많은 것들을 맥락 사이에 숨겨두었다.

김중혁 작가는 소설에서 '무엇을 쓸까, 를 결정하는 것보다, 무엇을 쓰지 말까, 를 결정하는 것이 더욱 어렵다' 고 했다. 그런 관점에서 완벽한 관찰자 시점으로서의 1인칭은 아내의 일생과 딸인 보미나래의 일생 전체를 뒤에 숨기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두 작가가 쓰지 않은 것, '여백' 으로 남는다. 나는 이 탁월한 여백들을 무수한 상상들로 채워갔는데, 어쩌면, [우럭 한 점~] 이 이 여백들 중 한 칸에 들어갈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여운이 남아, 문장들을 바라보고, 여백들을 상상하고, 또 문장들을 바라보고, 또 여백들을 상상했다. 

아내의 여백, 보미나래의 여백, 샘의 여백, 화자인 나의 여백. 




+

 그냥 지나치긴 아쉬우니, 언급하지 않은 작품들도 살짝씩 되새기자면, 

백수린 작가의 [시간의 궤적] 은 일상의 무료함과 결혼과 육아의 무의미함, 무상함을 되새기게 만들었고, 이주란 작가의 [넌 쉽게 말했지만]은 천명관 작가의 '고령화 가족' 의 다른 버전, 또는 김영하 작가의 '오빠가 돌아왔다' 의 변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정영수 작가의 [우리들] 은 대담한 불륜 커플에 관한 이야기로, 영화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 의 한국버전처럼 느껴졌는데, 파격적인 소재에 비하면 지나치게 보일 정도로 안온한 엔딩이 조금 아쉬웠다.


++

재미있는 부분은 일곱 작품 중 네작품의 화자들이 직업적으로 글 쓰는 사람들이었고, 여섯 작품이 1인칭 관찰자 시점이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1인칭 시점의 소설들은 대체적으로 사소설의 형식을 띈 것들이 많았는데, 그래선지 각각의 작품들이 모두 한 사람이 차례대로 경험하는 일들처럼 읽히기도 했다. 동성애자들의 연애가 소재로 등장하는 작품이 두 작품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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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불과 피 세트 - 전2권 - 얼음과 불의 노래 외전 얼음과 불의 노래
조지 R. R. 마틴 지음, 김영하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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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테로스 타르가르옌 왕조의 역사'
 '얼음과 불의 노래' 의 원작의 대장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드라마는 끝이 났다.
마틴옹은 본편을 이어나가기보다, 드라마의 팬들을 위해 세계관을 한번 정리할 필요를 느꼈던 것 같다.
'이 시점에 대체 왜??' 라고 생각했으나, 막 드라마판 '얼음과 불의 노래' 인 [왕좌의 게임] 8시즌 6화를 보고 나니, 마틴옹의 기획이 대단히 탁월했음을 알게됐다.
마틴옹은 아마 8시즌의 프리프로덕션부터 지켜봤을 것이다.
아니, 마지막까지 검수에는 관여한 것으로 알고 있으니, 대본을 미리 받아봤을 가능성이 높다.
드라마는 시즌6 후반부부터 원작과 다른 길을 걷게 된다. 8시즌에서 마무리가 되는 것으로 결정이 나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드라마 제작사는 7,8 시즌을 독자적으로 끌고가기로 결정했고, 그에 동의한 마틴옹은 아무리 원작자라도 드라마 작가들이 만들어놓은 디테일을 일일히 간섭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드라마 7,8 시즌은 앞 시즌들에 비해 내러티브가 상당히 부족하다.
부족한 내러티브는 자연스럽게 개연성의 부족으로 귀결됐다. 훌륭한 캐릭터들은 좌절하고 절망하고 어영부영하다가 어처구니 없는 결정을 내린다. 대너리스의 선택도 내러티브만 충분했으면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텐데, 너무 많은 부분들을 지나치게 생략했다.
8시즌의 호흡을 생각하면, 7시즌의 홧수들이 아까울 정도다. 

에소스 대륙에 있던 발리리아의 파멸과 함께 웨스테로스로 날아온 드래곤의 혈통 타르가르옌 가문과 그 기수가문이었던 바라테온 가문은 드래곤 스톤에 자리를 잡았다. '드래곤의 군주' 혈족이었던 아에곤 타르가르옌은 비세니아와 라에니스,두 누이와 함께였는데, 이 말인 즉슨 드래곤 세마리와 함께 도착했다는 의미. 혈통이 중요한 타르가르옌은 근친혼이 특별한 일이 아니었기에, 아에곤의 두 누이는 두 아내이기도 했다. 발리리아산 강철로 만든 검과 드래곤을 앞세운 침략자들은 주변을 차근차근 정복해 나간다. 
 [불과 피]는 이렇게 웨스테로스 대륙에 처음 발을 디딘 '정복자' 아에곤 1세부터 '미친왕' 아에리스 2세까지 약 280여년의 타르가르옌 통치기를 다룬다.
재미있는 점은 각 권 말미에 타르가르옌 가문의 연보가 실려있는데, 아에곤1세를 끝으로 '드래곤 왕가의 계보는 끊겼다' 고 단언한 점이다. 이는 마침 드라마의 엔딩과도 어느정도 접점이 있어서, 이 기획이 드라마와 무관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준다.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의 오랜 팬이라면 흥미로울 부분이 무척 많고, 드라마의 팬들에게도 충분히 어필할 부분들이 있다.
  
하렌홀이 드라마상에서 거대한 폐허와도 같은 모습인 이유, 협해에 위치한 요새인 드래곤 스톤의 홀에 있던 웨스테로스의 지도가 정교하게 조각된 거대한 테이블인 '채색 탁자'의 유래, 바라테온이 스톰스엔드를 근거지로 삼게된 과정, 도르네를 근거지로 삼고 있는 마르텔 가문이 왕가에 복속되지 않았던 과정, 왕의 직속 보좌관을 '핸드' 라고 칭하게 된 계기, 강철군도의 '그레이 조이' 가문이 스타크가문의 기수가 된 역사, 킹스랜딩에 레드킵이 건설되는 과정, 일곱개의 얼굴이 있는 유일신을 믿는 종단의 위세, 그리고 정복전쟁중에 입수한 적의 칼을 녹여 만들어진 철왕좌. 

나는 드라마가 제작되기 훨씬 전부터 이 시리즈를 팔로우하고 있던 오랜 팬으로써 너무너무 의미가 깊은 책이었다.
다만, 팬이 아니라면, 서술 형식이 실제 역사학자의 그것처럼 왕을 중심으로 사건들이 나열되어 있는 방식이라, 소설처럼 강력한 흡인력을 전혀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게다가 대너리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드래곤의 파워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와는 달리, 드래곤을 앞세워 주변 세력들을 복속시키는 아에곤의 행보는 지나치게 판타지스러워서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드라마판 얼불노,[왕좌의 게임] 은 8시즌을 끝으로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나 역시 다른 팬들과 마찬가지로 큰 실망과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그나마, 이 책 [불과 피] 가 부족한 개연성에 어느정도 땜질을 해줄 수 있었지만, 원작 팬들이 이십년간 기다렸던 '겨울' 과 백귀들의 침탈, 서세이와의 갈등, 대너리스와 존의 결말을 그런 식으로 매듭지어서는 안됐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5분의 장면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시리즈의 완결이라는 느낌은 충분히 들었다.)

[불과 피] 마지막권의 역자의 말을 보니, HBO는 이미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의 프리퀄 드라마 제작을 확정지었다고 한다.
'얼음과 불의 노래' 세계관의 단편집인 '세븐킹덤의 기사' 에 나온 내용들이나 '불과 피' 의 내용은 물론, 더 과거의 역사까지 폭넓게 접근하고 있는 듯 하다. 어쩌면 발리리아 왕국의 최초의 드래곤 군주들의 이야기나, 웨스테로스의 처음 터를 잡은 '퍼스트맨' 들의 이야기가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드라마는 끝났지만, 원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역시, 역자의 말을 빌려보면, 2016년 마틴옹은 [겨울의 바람]이 큰 난관에 봉착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지금이 2019년이지만, 아직도 출간소식이 없는 것을 보니, 그 난관에서 무사히 빠져나오지 못한 것일수도.... 
  
[불과 피] 는 원작 팬들에겐 더없이 소중한 텍스트가 될 것이다.
다만, 이제 막 얼음과 불의 노래에 입문한 독자들이라면, 가급적 한참 뒤에 읽으라고 조언하고 싶다.
적어도, 드라마 정도는 마지막편까지 정주행 하고 시작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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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멘타 하인학교 (무선) - 야콥 폰 군텐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
로베르트 발저 지음, 홍길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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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배우는 것이 거의 없다. 가르치는 교사들도 없다. 우리들, 벤야멘타 학원의 생도들에게 배움 따위는 어차피 아무 쓸모도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훗날 아주 미미한 존재, 누군가에게 예속된 존재로 살아갈 거라는 뜻이다. 우리가 받는 수업은 우리에게 인내와 복종을 각인시키는 데 가장 큰 의의를 둔다. " 

p.7


첫 문장이 아주 강렬했다. 너무나 신랄하고 발랄하게 자신이 몸담고 있는 상황을 '까는' 이 문장에 실제로 소리내서 웃으며 크게 공감했다. '벤야멘타 학원' 자리에, 내가 나온 학교들을 넣어도 될 것 같았다. 거의 100여년 전에 쓰여진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주 재미난 풍자소설임을 짐작케 했다. 원 제목이자 작중 화자인'야콥 폰 군텐'은 유력한 집안의 자식이다. 대대로 공직을 맡아온 귀족 가문 태생이다. 하지만, 야콥은 큰 돈을 내면서 '하인학교' 에 입학했다. 벤야멘타 남매가 운영하는 이 하인학교는 원생 수도 얼마 없는데다가 가르치는 것도 거의 없는, 직업 훈련소라고 부르기에도 미미한 학교다. 


비교적 흥미로운 도입부와는 달리, 읽을수록 지쳐갔다. 하인학교의 동료들인 하인리히, 샤흐트, 크라우스와 학교의 원장인 미스터 엔 미스 벤야멘타에 관한 다소 장황한 인평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화자의 심리가 두서없이 나열되기 때문이다. 특정한 사건도 없고, 일관되기 주지되는 메시지도 없다. 

그야말로 의식의 흐름이랄까. 중심된 이야기가 없이, 화자의 일상과 의식의 흐름을 따라간다. 큰 흐름 없이 시종일관 주변의 소소한 일상과 주변인물들과 나눈 이야기들이 가득한 이 작품은 소설의 형식을 빌린 일기와도 같다. 

주인공의 심리는 일관성 없이 수시로 바뀌고, 그 변화에 개연성이란 없다.


사람의 감정은 불안정하다. 인간이 사고활동을 시작했을 때 부터,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불안정함은 즉 감정의 동요, 이것은 종교와 예술의 기반이 된다. 때문에, 시시각각 이유없이 변화하는 화자 야콥은 무척이나 인간적인 캐릭터지만, '소설의 화자' 로서는 좋은 역할을 하고 있지는 않다.

작품을 읽다보면 수많은 '왜?? ' '읭?!' 같은 감탄사가 끊이질 않는데, 이 작품은 수많은 '왜?' 를 던져주지만, 그 대답은 '그게 왜 궁금해?' 라는 답으로 돌아오는 것 같다. 

그래서 '읭?!' 하게 되는 것.


개인적으로 독서는 일종의 체험이라고 생각한다. '간접경험' 이라는 용어로 종종 표현되어 왔는데, 글자를 읽으며 펑펑 울고, 크게 웃는다면 이미 그것은 '간접' 보다는 더 직접적인, 체험의 일종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은 내게 꽤나 신선한, 그리고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체험이었다. 

야콥이 학교 안에서 만나는 주변 인물들; 벤야멘타  원장과 부원장 남매와 몇분의 선생님들, 다섯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소수의 동료들, 그리고 예술가인 형 요한- 과 만나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그 이야기에 대한 야콥의 심상들이 장황하게 나열된다. 

그리고, 그게 계속 반복된다. 

야콥이 주변인들과 나누는 이야기들은 -비록 통찰력은 느껴지지만- 통일성도, 일관성도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소소한' 이야기들. 그러다 갑자기 벤야멘타양과 동화에서나 나올법한; 현실인지 몽상인지 구분할 수 없는 기묘한 일을 겪게 되고, 학교의 부원장인 벤탸멘타 양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학교가 사실상 폐쇄되고, 야콥은 벤야멘타 원장과 사막으로 떠나면서 소설이 끝나버린다.


 이렇게 한번 읽고 나서부터 이 책을 조금 다르게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소설은 당대를 주름잡던 모든 주류를 비트는 소설이다.

과거엔 지주였고, 현재엔 시의원을 지낸 유서깊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야콥은 자신의 신분을 버리고 가장 '미미한 존재' 가 되고자 하인학교에 들어갔다. 기본적으로 '하인' 의 일을 '배우는' 학교라는 장소부터가 지독한 역설이다. 유럽사회에서 학교는 크게 두 부류였다. 지금도 그런식으로 운영되는데, 한 갈래는 학문을 위한 기초를 닦는 방향이고, 다른 한 방향은 직업 기술을 익히는 방향이다. 애초에 학교라는 것이 국가의 공공정책으로 발전하기 전, 산업혁명 이후 공장에서 순종적으로 반복노동을 하는 직원들을 교육하기 위해 생겨났다. 우리나라에서도 공장에 딸린 기숙식 고등학교가 많았던 이유다. 책의 첫 문장에 쓰인것처럼 학교에서 행하는 교육이란 자신의 계급과 신분에 맞는 역할을 주입시키기 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태생에 따라 가늠되는 전통적 계급과 신분의 차이가 명징하고, 거기에 자본주의의 새로운 신분-부르주아와 프롤레타이아-까지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계급과 신분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런 부조리를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적응해서 어떻게든 살아냈지만, 또 많은 사람들은 부조리를 깨닫고,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을 것이다. 체념과 욕망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시기. 


 야콥이 원했던 '미미한 존재' 는 사실 그 사회의 가장 다수를 차지하며, 사회라는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굴러가게 하는 기반이다. 하지만, 사회의 시스템의 보호에서 가장 먼 계층이기도 하다. 야콥은 어머니와 하녀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기화로 사회의 부조리를 깨닫는다. 그 순간은 마치 번개처럼, 번득하는 순간이었다. 왕자였던 싯달타가 그 이후 가장 낮은 자들 사이에서 고행하며 구도자의 길을 걸어 열반에 올랐듯, 예수가 문둥병자와 교회 밖에서 구걸하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듯, 야콥은 하인학교에 들어간다.

 

 사실 그 이후 야콥의 생활은 싯달타나 예수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아마 저자인 로베르트 발저는 자신의 페르소나인 야콥을 당대의 평범한 보통 사람들로 치환시켰던 듯 하다.

사회의 부조리를 알아챘으나, 깨달음이나 구원과는 거리가 먼 보통 사람. 

그럼에도 야콥은 그의 형인 요한에 비해 '행동하는' 사람이긴 했다. 요한은 자신의 모든 것을 마음껏 누리면서 동생인 야콥에게는 제법 훌륭하게 들리는 조언을 건넨다. 예술과 대중, 부유함과 근검함, 자유와 자본주의에 대해. 요한의 말은 마치 중근세의 귀족층들이, 나아가 근현대 부르주아들이 서발턴(어제 배운 단어를 이렇게 써먹어본다)에게 강요했던 의식들과 일맥상통한다. 단지 그들을 '제어' 하고 '다스리기' 위한 공허한 가치들. 


 이 작품 전체를 당시의 시대와 사회에 저항했던, 일종의 '반감' 을 의식의 흐름대로 서술한 글이라고 이해하면 작품 전반에 느껴지는 유머러스함과 다소 히스테릭한 감정변화가 어느정도 이해된다. (특히, 로베르트 발저의 연보를 읽고 나니, 조금 더 이해되는 면이 있다.)

마치 매일매일의 일기 같은 형식의 짧은 내러티브들이 정신없이 나열된다. 

때로는 시간을 넘나들고, 몽상과 환상의 세계를 넘나들기도 하기때문에, 벤야멘타 하인학교의 원장, 부원장과 여러 친구들이 혹시 발터의 상상 속 인물은 아닐까? 아니면, 벤야멘타 하인학교가 아니라, 사실은 벤야멘타 정신병원은 아닐까? 벤야멘타 원장과 부원장 남매는 의사들, 여러 친구들은 발터와 함께 입원한 환자들은 아니었을까?


 매일매일의 감정과 일과가 모여 일주일이 되고, 한달이 되고, 일생을 이룬다. 

한 인간의 삶은 그가 태어난 혈통과 교육받은것들로부터 골격을 이룬다. 우리 사회의 시스템은 오직 그것만을 바탕으로 구별되고, 차별된다. 혈통은 선택할 수 없고, 바꿀 수도 없지만, 교육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유서깊은 귀족가문의 아들이었던 발터는 과연 하인학교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이뤄낼 것인가?

아니, 아마도 발터는 아무것도 배우지 않기 위해 하인학교에 갔을터다. 아무것도 이루지 않기 위해 사막으로 떠났을터다.

삶은 그저, 매일매일이 모인 것에 불과하니까. 

그리 대단한 것도, 의미있는 것도 아니며, 그리 대단할 이유도, 의미있을 이유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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