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끝없는 세상 1~3 세트 - 전3권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46
켄 폴릿 지음, 한기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327년의 잉글랜드 킹스브릿지.

 톰과 잭이 지었던 대성당은 어느새 지은지 150여년이 흘렀다. 

가난한 좀도둑의 어린 딸 궨다는 가족들과 함께 킹스브릿지 수도원 구호소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노숙자와 병자들을 수용하는 수도원 구호소는 다음날인 '만성절' 을 맞아 모여든 사람들 중, 여인숙에 기거할 형편이 안되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미사 시간이 다가오자 주교와 사제들의 행진을 보기 위해 성당 입구에 사람들이 까맣게 모여들었다. 궨다가 노린 인물은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귀족. 

 궨다는 작고 어린 꼬마 여자아이였지만, 제 오빠인 필리먼보다 솜씨가 좋았다. 같은 좀도둑질을 해도 필리먼은 실수 투성이에 치안관에 잡힐뻔한 적도 많았지만, 궨다는 아직까지는 큰 실수가 없었다.  소녀는 하나님이 무서웠고 치안관도 무서웠지만, 아버지의 매질이 훨씬 더 무서웠다.


 궨다에게 주머니가 털린 인물은 제럴드 경이었다. 

부유해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는 몰락해서 이름만 남은 상태. 오늘 그가 킹스브릿지의 대성당을 찾은 것은 명목상 소유권만 남아있는 작은 영지를 수도원에 기탁하고 자신과 가족들의 거처를 부탁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킹스브릿지는 영지 전체가 주교의 관할 아래 있었다. 상업, 농업, 공업 등 모든 산업은 교구 길드에 속해야 했고, 주교의 허가를 받아야했다.  제럴드경은 자신의 영지 소유권을 수도원에 기탁하고, 킹스브릿지 안에서 수도원이 마련해준 집에서 살며 매일 하루 두끼의 식사를 제공받는 피부양자가 되고 말았다. 

 제럴드 경에게는 두 아들, 머딘과 랠프가 있었다. 머딘은 제 동생보다 체구는 작았지만, 사려깊고 똑똑했으며, 손재주가 좋았다. 반면, 동생 랠프는 제 형보다 덩치는 컸지만, 성정이 포악하고 제멋대로인 구석이 있었다. 그래도 머딘과 랠프는 서로의 장단점을 잘 알고 있었고, 서로에게 의지하는 바도 있었다. 


 킹스브릿지의 주요 산업은 양모거래였다. 분기별로 열리는 킹스브릿지 양모시장은 일대에서 가장 큰 규모였고, 에드먼드는 이 곳에서 큰 돈을 벌 수 있었다. 인품이 훌륭하고, 사업수완이 좋은 그는 오랫동안 상인 길드의 장을 맡고 있었다. 그의 약점이라면 아내가 오랫동안 병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과 가업을 물려줄 아들이 없다는 점 뿐이었다. 대신 그에겐 아름다운 두 딸이 있었다. 첫째 딸은 이미 건축가 길드의 수장과 결혼해 안온한 삶을 누리고 있었고, 둘째인 캐리스는 에드먼드의 장점을 쏙 빼다박은 재능 넘치는 소녀였다. 

 에드먼드의 성공에는 누나인 페트라닐라의 도움도 컸다. 페트라닐라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통찰력이 뛰어났고, 어떻게 조종해야 하는지 알았다. 다만, 여성으로 태어났기에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 오직 남동생인 에드먼드의 조력자로서 만족해야 했다. 에드먼드는 페트라닐라의 이러한 장점을 모르지 않았다. 상당히 열려있는 인물이었던 에드먼드는 누나의 의견을 존중했고, 현재의 부는 그녀의 도움이 크다는 점 또한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 시대의 가부장 답지 않게 딸들에게 폭넓은 선택지를 준 이유이기도 했다.


 한편, 페트라닐라에게는 일찌감치 수도사로 종교의 길에 뛰어든 고드윈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고드윈은 페트라닐라가 여성이라는 태생적 한계로 인해 가질 수 없었던 권력과 야심을 한 손에 쟁취할 수 있는 '아들'이었다. 고드윈은 킹스브릿지 대성당의 주인, 수도원장이라는 목표가 있었고, 그 목표에 닿는 길은 어머니인 페트라닐라가 그 누구보다 잘 안내해줄 수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가족들이 수많은 인물들과 함께 만성절 미사에 참여하고 있던 그 시간, 이저벨라 여왕의 수하인 기사 토머스가 선왕인 에드워드 2세의 편지를 가지고 비밀 임무를 수행중이었다.


한명의 기사와 두 쌍의 소년 소녀. 토머스와 머딘, 캐리스, 랠프, 궨다가 킹스브릿지 인근 숲 속에서 마주치면서, 작가 추산 약 41만 5천자 이상의 거대한 서사시가 시작된다.    

 


  이 서사시의 시대배경은 1300년대 초~중반. 14세기 유럽의 중심을 가로지른다.

100년전쟁이 막 시작될 무렵이다. 이 시기의 잘 알려진 인물이라면, 단연 (게임 애호가들에게도 익숙한) '흑태자' 에드워드를 떠올릴 것이다. 100년전쟁의 수많은 전쟁영웅들 중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인물이다.

 이 작품 속에서는 에드워드 3세가 막 왕위에 올랐다. 이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이 '흑태자' 에드워드다. 흑태자가 이끄는 잉글랜드 군대가 프랑스의 칼레를 점령하기도 했고, 페스트;'흑사병' 이 전 유럽을 강타해 전쟁과 병마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던 시기다. 현대에 역산해본 결과 이 시기에 유럽 전체 인구의 약 1/3이 죽었다고 하니, 이 기간동안 세 집 중 한 집이 사라진 것이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줄줄이 끌려갔다가, 철과 피의 향연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와보니, 이곳은 이미 전쟁터보다 더한 파리와 쥐떼들의 시체 뷔페였던 것이다.


 이런 아비규환 속에서 톰의 먼 혈연인 캐리스와 고드윈,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 넘어온 머딘과 랠프, 킹스브릿지에 터를 잡긴 했지만, 큰 애착은 없는 궨다와 울프릭의 이야기가 절절하게 그려진다.

재미있는 점은 톰이나 잭과 전혀 관계가 없어보이는 머딘에게 건축의 재능을 선사했다는 점이다.

이는 작가로서 대단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정신적으로도, 서사적으로도 완벽한 [대지의 기둥]의 속편인데, 등장인물들에게 전편의 주인공들을 1도 투영하지 않는다.


 [끝없는 세상] 은 크게 캐리스와 머딘의 러브스토리와 궨다와 울프릭의 러브스토리로 정리할 수 있는데, 서사 전체를 이끌어가는 딱 한명의 주인공을 꼽으라면 단연 '캐리스' 다.

켄 폴릿은 꾸준히 대하 역사소설을 집필하며 당대 여성들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된 듯 하다.

'스파이 소설' 을 비롯해 건축과 전쟁 등 남성 중심의 서사를 집필하던 노작가의 후반기가 신선하게 다가온 이유기도 하다.

이러한 경향은 '20세기 3부작' 으로 불리는 [거인들의 몰락] [세계의 겨울] [영원의 끝] 연작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역시 굵은 줄기는 절절한 러브스토리이지만, 양차 세계대전과 흑백갈등이라는 거대한 사건 속에서 남성사회에 눌려 있던 여성들이 어떻게 이 사회의 전면으로 나설 수 있었는지 설득력 있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캐리스는 그 누구보다도 예민한 감각을 타고난 인물이다. 그 감각은 '부조리' 에 대한 감각, 즉, '균형' 에 대한 감각이다.

이러한 감각은 처음엔 상업에 대한 소질로 드러난다. 아버지의 일을 도우면서, 누구에게 뭐가 필요하고,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감각적으로 터득하고, 행동력까지 갖춘 인물로 성장한 것이다.  

이 균형감은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반감으로 드러난다. 정신과 육체, 권력과 양심, 특히 종교인과 일반인 사이에 비틀린 균형을 감지해낸 것이다. 

이것들이 맞물려 당대의 사회제도, 왕과 신하, 영주와 농민, 남성과 여성에 대한 부조리에 대한 탐구심으로 발현되고, 그 안에서 최대한 합리적이고 균형잡힌 대답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캐리스의 이러한 재능은 평범한 사람들도 쉽게 알아챈다.

킹스브릿지에서 가장 부유한 상인 길드장의 딸이라는 휘장도 있긴 했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캐리스의 '합리성' 을 단박에 눈치챈다. 딱히 어려운 말이나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캐리스는 언제나 공정하게 대했을 뿐이다. '균형' 적으로. 사람들은 캐리스의 합리성에 매료되고, 그 리더쉽을 인정한다. 다만, 사회적으로 여성은 공적인 자리에 오를 수 없다는 사실을 그들 모두가 아쉬워했지만, 그 누구도 그 규칙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캐리스의 합리성은 여기서도 발현된다. '합법적' 으로 리더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귀족도, 남성도 아닌 캐리스가. 전쟁터나 무법지대도 아닌 교황과 주교의 땅 안에서. 심지어 당대 사회에서 여성은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을 수 없었다. 캐리스는 당대 평범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거의 모든 재능을 선물받았지만, 오직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것들을 갈고 닦을 수 없었다. 

 

한편, 머딘 역시 대단히 합리적인 인물이지만, 캐리스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예민하게 발휘하지는 못한다.

다만, 그는 물리적인 감각이 뛰어났다. 과거에 해왔던 것들이 '틀렸음' 을 알았고, 그것들을 보완하기 위해 '공부' 를 하고 '계산' 을 해야한다는 점을 합리적으로 이해해낸 인물이다. 캐리스도, 머딘도 당대의 시대상에 비췄을 땐 지독할 정도로 진보적인 인물이지만, 현대의 시각으로 본다면 단지 '대단히' 합리적일 뿐이었다.

당시 사회는 왕과 귀족을 위한 사회였다. 거기에 기독교적 세계관이 혼재되었다. 기독교적 세계관이라고는 하지만, 그 역시 신과 인간이라기보다 왕과 귀족이라는 지배층과 일반 백성이라는 피지배층을 고정시켜주는 안정제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왕의 이름, 신의 이름이라는 콘크리트로 단단하게 굳어져 있었다. 

 캐리스와 머딘은 이 단단한 콘크리트 안에서 몸부림치는 작은 입자 같은 존재들이었다.

이 세상에 통하는 사람은 서로밖에 없었기에, 이 둘은 급속도로 빠져들지만, 단 하나 둘이 타협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건 '결혼' 이었는데, 캐리스는 이 제도의 불합리성, 특히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된다는 사실, 여성의 모든 의무가 육아와 내조에 묶이는 현실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이로 인해 캐리스는 머딘이 인정할 수 없는 선택을 하며 둘 사이는 크게 멀어지기도 한다.

이후 이 둘은 서로에 대한 마음이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하며 자신들의 균형적이고 합리적인 감각과, 그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사회와 세상 사람들의 고정관념 탓에 수많은 고난을 겪고 겪으며 또 겪어나간다.


캐리스가 고난을 당하는 이유는 그가 가지고 있는 '용기' 때문이기도 하다.

합리적이고 부조리한 상황을 결코 좌시하지 않는다. 1300년대는 우리가 '암흑기' 라 불리는 중세의 한 복판이긴 하지만, 그래도 1200년대보다는 훨씬 '법' 적이다. 불과 100년 전만 하더라도 영주들이 소작민들을 거침없이 취할 수 있었지만, 1300년대는 세속군주보다 교회의 힘이 더 강력했기에 왕이나 영주도 교회가 만든 '법' 위에 군림할 수 없었다.

이러한 당시 사회의 성문법이 캐리스를 비롯한 모든 인물들을 옭아매기도 하고, 솟아날 구멍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리고, 도시 전체를, 나아가 유럽 전체를 뒤흔든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100년 전쟁과 유럽 전역을 지옥으로 뒤바꾼 흑사병의 재앙이 도래하면서 등장인물들의 삶은 크게 뒤바뀐다.  


 어쩌다보니 국내에 번역되 켄 폴릿 작품들을 거의 다 읽었는데, 켄 폴릿은 등장인물들을 엄청나게 괴롭히지만, 기본적으로 해피엔딩 주의자이다. 등장인물들에게 가해지는 육체적, 정서적 폭력들은 크나큰 상처를 남기고, 때론 장애와 같은 후유증을 그 몸에 새기지만, 모두가 정신적인 성숙의 자양분이 된다. 

이 작품에서도 캐리스와 궨다는 당대의 여성이 겪을 수 있는 고난이란 고난은 모조리 다 당한다.

하지만, 그 어떤 고난도 이 여성들의 정신을 꺾지 못한다. 남성들과, 남성들이 이뤄놓은 세상속에서 자신들만의 균형을 찾아 빈틈을 메우고, 보완해서 끝끝내 자신만의 정의를 관철해낸다.


물론, 이들의 작은 성공은 소설속이라 가능할 수도 있다.

현실의 벽은 그보다 단단하고, 현실의 기득층들은 그보다 탐욕스럽다. 

작가는 등장인물들을 사랑하지만, 현실에 존재하는지 안하는지 모를 신- 운명, 섭리등 뭐든 좋다-은 그렇지 않다.


소설은 답을 주지 않는다. 작가는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책에 답이 있다면, 우리 사회가 이렇게 부조리할 리 없다.

작가가 언제나 책 안에 답을 넣을 수 있다면면, 우리 사회가, 이렇게 부조리할 리, 없다.

책은 문제를 제시한다. 그 문제의 답은 오직 독자들의 것이고, 각자만의 것이다.  

캐리스도 항상 옳은 선택을 한 것만은 아니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인물도 아니었다.

고난 앞에서 좌절하고, 포기한 적도 많았다. 

인물들은 단지 그 세상 안에서 살기위해 노력했을 뿐이다. 작가는 인물들에게 고난을 던져주었고, 인물들은 그 고난을 각자의 방식으로 대응했다. 

고드윈도, 필리먼도, 캐리스와 머딘도, 랠프와 궨다, 울프릭도. 그리고 그 밖의 수많은 인물들도 모두 1300년대 잉글랜드 킹스브릿지에서 버티고 또 버티다, 죽어갔다. 

그들 자각의 삶을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독자인 우리의 몫이다. 


페이지가 줄어드는게 아쉬울 정도로 푹 빠져 읽었다.

모든 인물들이 애틋하고 사랑스러워서 그들의 선택 하나하나에 가슴아파했고, 화냈고, 안쓰러워했고, 비통해했고, 이해할 수 없었고, 납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페이지. 작가추산 41만 4천 9백 9십 몇번째 단어들로 이루어진 마지막 단락.

등장인물들의 고난이 끝났다는 사실에 깊은 안도감이 들었고, 그 고난의 삶을 함께 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충만함으로 가득했다. 그래, 대하소설을 읽는 맛은 이런거지. 

고난에 가득찬 삶을 걸어온 머딘과 캐리스, 궨다와 울프릭 커플에게 해피엔딩 주의자인 켄 폴릿은 충분한 선물을 준비했고, 그 선물은 결국 독자들을 위한 것임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대지의 기둥]의 후속작은, 사실 [대지의 기둥] 과는 사뭇 달랐다.

보다 치밀했고, 보다 격정적이었으며, 보다 다채로웠고, 보다 입체적이었다. 보다 많은 인물들이 등장했으며, 보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무엇보다, 보다 길었다.(그래서 나는 좋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