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광금지, 에바로드 - 2014 제2회 수림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연합뉴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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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반게리온.

나처럼 90년대 후반을 중고등학교에서 보낸 평범한, 아니, 만화를 좀 좋아했던 축 치고 에바 신드롬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거다. 

휴일이고 자시고를 떠나 애초에 TV관람권(?)이 전무했던 내가 단짝 친구녀석과 함께 시험이 끝난 날 일찌감치 비디오 대여점에 빌려 대원동화에서 정식으로 라이선싱한 '신세기 에반게리온' 비디오 테이프를 빌려 녀석의 집으로 향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사실 나는 그 전까지는 창간된지 얼마 안 된 '뉴타입'을 통해 기사와 일러스트로만 접했더랬는데, 녀석의 집에서 '가장 재미있다' 며 틀어주었던 회차는, 7편인가 9편인가였는데, 그 유명한 에바 초호기가 사도를 우적우적 씹어먹는 모습이었다. 시뻘건 피가 도로에 흘러 넘치고 마스크처럼 감싸고 있던 봉인구가 부서지며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장면이 있는, 바로 그 회차였다.

당시의 기억이 하도 강렬해서, 아직까지도 내게 많은 영감을 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 뒤로 녀석과 허구헌 날 에바 이야기로 시간을 죽였더랬고, '사해문서' 나 작품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온갖 기독교적 메타포들을 찾아 해석하는데 골몰했더랬다. 엔딩을 보며 안노 히데아키를 열렬하게 비판하기도 했고, 뒤이어 감독한 '그와 그녀의 사정' 까지도 함께 보며 '이러다 축하해~ 박수치며 끝날거다' 고 희희덕거리기도 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보내고 성인이 되고 녀석은 유부남이 되기도 했던 어느날, 에반게리온의 새로운 극장판이 나온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 녀석은 회사에서 근무중에도 '소식 들었냐?' 며 문자를 보내오기도 했었다. 국내에서 개봉하는 곳을 찾아 보러가고 싶기도 했지만, 녀석이나 나나 이제 그렇게 쉽게 시간 내서 애니메이션을 보기에는 녹록치 않은 상황이었다. 특히 나는 몰라도, 녀석은 직장도, 가정도 너무나 바빴던 시기라서. 

 그 즈음, 디씨 인사이드나 루리 웹, 웃긴 대학 등 당시 오타쿠들이 모여 놀던 이터넷 커뮤니티에서 크게 회자되던 사건이 있었다.

당시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개봉을 기념해서 세계 곳곳의 에반게리온 관련 부스에서 스탬프를 찍어주고 , 이것을 다 모은 '용자' 에게 특별한 선물을 준다는 '에반게리온 월드 스탬프 랠리' 라는 가이낙스의 특별한 이벤트가 있었는데, 스탬프를 다 찍은 용자가 무려 한국인이라는 사실이었다.


 여튼, 만화가가 되겠다는 막연한 꿈을 갖고 있던 당시의 내게 '에바' 는 조금 특별한 의미인 것은 사실이다.

때문에, 이 책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등줄기를 오싹~ 하게 만드는 묘한 느낌이 오기도 했다.

'설마 이 에바로드가 그 에바로드는 아니겠지?'

시끌벅적한 송년회 모임 자리에서였는데, 순간 사위가 고요하게 느껴질 정도로 노랗고 보랏빛인 표지가 순간 나를 그 시절로 이끌고 가는 듯 했다. 


 책은 펴자마자 아주 술술 읽혔다.

워낙 잘 아는 이야기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장강명 작가는 요즘 세대 대표적인 스토리텔러 아니던가.

이야기는 작가의 말에 따르면 30%의 실재와 70%의 허구로 이루어져있는, 모큐멘터리 형식의 작품이다.

70%가 허구라지만, 장면이나 에피소드가 워낙 디테일해서 실제 <에바로드>를 두명이 찍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게 진짜야 허구야,' 헷갈릴 정도로 깊이 빠져들었다.  


주인공 종현은 어린시절 가족들을 버리고 훌쩍 떠난 엄마에 대한 기억을 뒤로 하고 인쇄업을 하는 아버지와 두세살 터울의 형, 셋이서 살고 있었다. 공부에 열심이지도 않았지만, 크게 엇나가는 짓을 하지도 않은 학창시절은 비교적 평범했지만, 밝은 에너지와 멀끔한 외모를 지닌 종현은 유독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묘한 매력의 소유자였다. 중학교때 우연히 '에반게리온'을 접하고 고등학교 때 만화연구부에 들어 유쾌한 학창시절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때는 IMF의 광풍이 거세던 시기, 인쇄업의 몰락과 함께 사람 좋은 아버지는 사업체를 팔고 집을 팔아 친구들의 사업자금을 대주는 등 자식들의 바램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고, 종현과 그의 형의 인생도 요동치기 시작한다. 

정말이지 이야기 자체로만 봐도 참 재미있는데,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방식의 르포타주 형태라서 설득력과 몰입감이 배가된다. 

전반부는 종현의 학창시절 만화동아리 '베들램' 과, 1년 선배인 경희에 대한 짝사랑이 그려지고, 중반부는 몰락한 집안에서 대학 휴학을 반복하며 각종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어렸을 때 집을 나간 어머니와의 재회, 형과의 갈등이 주로 다뤄진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병치레를 하시면서 본격적으로 회사에 다니며 월드 스탬프 랠리를 준비하는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진행이 빠르고 군더더기가 별로 없어 매우 흡인력이 높다.


 개인적으로는 공감할 수 있는 코드가 정말 많이 나와서 더더욱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에도 에반게리온이나 국내에서 방영하는 만화영화들을 제외하면, 뉴타입 등을 통해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소문을 들을 수 있었으나 정식으로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PC통신의 만화 동아리들을 통해 각종 신작의 오프닝 정도만 감상할 수 있었으나, 1분 30여초 남짓 한 그 영상을 보기 위해서는 반나절 가까이 자료를 다운로드 받아야 했다. 중간에 전화라도 오면 그야말로 말짱 도루묵이었고, 그 뒤에도 어마어마한 전화요금 폭탄에 부모님께 들을 큰 꾸지람을 각오해야 했다. 일본쪽에 친척이나 친구가 있는 녀석들은 비디오 테잎이나 당시 유행하던 레이저 디스크를 공수해 불법 복제를 해서 팔기도 했다. 물론 용산이나 이태원, 동대문, 고속버스터미널 등에 불법 복제된 일본 애니를 유통하는 장사꾼들도 있었으나, 가격이 어마어마했고, 그나마 집이 부유해서 취미삼아 복제해서 용돈벌이 정도 하는 친구들 덕을 봐야 했다. 당시 비디오 복제는 녹화 기능이 있는 비디오가 두 대 있으면 가능했기에, 몇명이 돈을 모아 한편을 구입하고, 공 테이프에 몇편을 복제해서 나눠갖기도 했다. 당연히 자막은 없었는데, 역시 PC통신 만화 동아리에서 훌륭한 덕후들께서 손수 번역하신 대사집을 무료 배포하기도 하셨어서 그 덕도 많이 봤다. 

 

물론 역사적인 '서울 코믹월드' 의 첫회도 기억한다. 추억속 이름인 '거평 프레야'. 지금은 두산타워가 동대문 패션시장의 아이콘이지만, 밀리오레보다도 전에 거평프레야가 동대문의 밤을 밝히던 시절이었다. 이후 여의도 무역전시장으로 옮겨 '리버(스타크래프트에 등장하는 프로스의 바로 그 유닛)돔' , '에벌레 돔' 등으로 불리던 건물 주변으로 모여들던 각양각색 코스플레이어들의 모습과, 일본 동인지를 연상시키는 수많은 개인,동인회지들, 일일히 손으로 그려 코팅해 오려 만든 각종 팬시들이 가득했었다.

 요즘엔 워낙 인쇄기술이 발달해서 동인지의 퀄리티도 높고, 팬시물품들의 완성도도 상당하지만, 그 때만 해도 좋아하는 캐릭터를 직접 그려 사인펜으로 외곽선을 따고 마카로 색을 입혀서 코팅한 것에 핸드폰이나 가방에 달 수 있게 고리를 맨 것이 전부였다.   

뭔가 같은 취미를 가진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 유쾌한 공기를 사방으로 뿌려대던 기억이다.


90년대를 지나 2000년대 초반, 종현이 하던 알바들도 나 역시 생생하게 알고 있다.

당시 다니던 교회가 동대문에 있었기에 친한 형들이 동대문, 창신동 토박이들이 많았는데, 따라서 평화시장 알바를 따라간 적이 있었다. 구불구불한 매대 사이로 원단을 나르거나 음식을 나르는 일이었는데, 비염에 먼지 알레르기까지 있고, 일 자체도 너무 힘들어서 하루만에 그만두긴 했는데, 새벽에 불타오르던 그 분위기도 충분히 기억한다.  

IT붐과 함께 웹디자이너가 각광받던 시기도 2~3년 쯤 있었다.

나도 그 광풍에 편승해서 군대 말고 산업체 가라며 꼬시던 컴퓨터 학원에 수십만원 갖다 바치고 웹디자인 과정과 정보처리 기능사 과정을 이수했던 기억이 난다. 자격증도 따고 산업체만 알아보면 될 즈음에 그냥 군대를 갔었는데, 내가 웹디자이너의 끝물이었어서 사실 취업할 수 있는 산업체를 찾기도 힘들었던 터였다. 웹디자이너에 대한 수요는 2~3년만에 포화상태가 되었고, 웹마스터가 자연스럽게 병행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책에도 이러한 장면들이 등장하기에, 나도 넋 놓고 옛 추억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그러고보니, 어느덧 90년대의 단상들이 드라마와 소설 등에서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도 그만큼 나이를 먹었다는 의미기도 하겠지.


무슨 리뷰가 아니라 내 추억을 풀어놓는 글이 되어버렸다.ㅋㅋㅋ

이렇게 다시 작품을 되새김질하다 보니, 이게 소설인지 내 이야기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여튼, 사람이 늙으면 추억만 먹고 살게 된다던데.

난 아직 미래에 대한 고민이 더 크니, 덜 먹었나보다!!! 



p.s 참고로 이 작품의 모태가 된 '에바로드' 의 용자들은 EBS에도 짧게 등장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3Alox690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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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52) 배트맨 5 : 제로 이어 - 어둠의 도시 (뉴 52) 배트맨
스콧 스나이더 외 지음, 이규원 옮김 / 세미콜론 / 2015년 12월
평점 :
절판


 [배트맨 5 제로이어 - 어둠의 도시](이하 [어둠의 도시])는 전작에 이어 '제로 이어' 타이틀을 공유하고 있는 작품으로 역시 배트맨 탄생 초기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흐름 상으로도 지난4편과 이어지는데, 레드후드 갱단의 흑막이었던 에드워드 니그마가 본격적으로 야심을 펼쳐낸다. 스콧 스나이더가 리부트된 배트맨 시리즈를 잡은 뒤, 유독 연작이 많이 나온다. 아마도 2000년대 후반부터 DC의 기조가 변하면서 시작된 흐름 같은데, 커다란 프로젝트가 아니라 스콧 스나이더와 그렉 카풀로 페어에게 긴 호흡의 장편 타이틀을 맡겨 둔 듯 하다. 

 [어둠의 도시]는 웨인 인더스트리에 근무하던 칼 박사의 괴상한 연쇄살인에서부터 시작된다.
뼈가 제멋대로 자라 끔찍한 몰골로 살해된 시신들이 연달아 발견된 것이다. 사건을 쫓는 배트맨은 지난4권에서부터 고담 시경의 공공의 적이 되어 이중고를 겪고 있었다. 게다가 니그마가 사사건건 끼어들며 배트맨을 궁지에 몬다. 그리고, 니그마는 배트맨이 궁지에 몰린 사이 자신의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시켜, 고담시를 외부로부터 완벽하게 고립, 자신만의 '수수깨끼 지옥' 을 건설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바로 그 니그마의 입을 통해 '제로 이어' 라는 부제의 의미가 드러난다.

 스콧 스나이더는 4권에 이어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에드워드 니그마;리들러의 거대한 계획을 차근차근 풀어내는데, 간간히 이야기와 상관 없는 듯 한 장면들이 몽타주처럼 등장하는데, 책을 덮을 때 쯤 '아!'하게 만드는 치밀한 연출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배트맨은 여전히 고생고생, 생고생을 한다. 작품 초~중반에 맞닥뜨리는 칼 박사 자체도 강력하지만, 고담 경찰들의 집요한 추적도 배트맨을 시종일관 힘들게 한다. 여기에 오해로 얼룩져있는 고든과의 관계 회복도 되지 않은 상태라 배트맨은 홀로 경찰과 범인 모두에게 쫓기는 절박한 상황에 시달린다. 
 작품 속 설익은 배트맨은 아직 스스로를 제대로 못 다루고 있다. 고담 시경에 대한 불신과 범죄에 대한 분노, 스스로에 대한 분노가 활활 불타오르고 있다. 자신의 몸도 아끼지 않고, 주위 인물들도 신경쓰지 않은 채 온 몸 던져 니그마의 계략에 맞선다. 
그 숱한 고생을 하고, 작품의 막바지가 되어서야 고든과 그리고 루시우스 폭스와 힘을 합치게 되고, 고담시를 구할 수 있는 진정한 길을 찾내게 된다.

 스콧 스나이더의 배트맨 시리즈는 유독 '브루스 웨인' 이라는 한 개인과 얽힌 사건들이 많이 등장한다. 
[올빼미 법정][올빼미 도시] 의 주 적도 웨인 가문과 조상을 함께 하고 있는 먼 혈연 가문과 관련된 해묵은 악연이었고, 레드후드 갱단과는 삼촌인 필립 웨인이 깊이 개입되어 있었다. 칼 박사가 니그마의 계획에 동조한 원인도 브루스 웨인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사회적 영향력이 큰 '웨인' 이라는 이름은 때로는 큰 우산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큰 원한의 이름이 되기도 한다. 

[어둠의 도시] 는 여러모로 놀란 감독의 배트맨 3부작 중 마지막편인 [다크나이트 라이즈]를 떠올리게 한다.
고담시를 고립시키는 것도 그렇고,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알프레드가 평범한 삶을 사는 브루스 웨인을 갈망하는 것 또한 그랬다.

마블이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분리했다지만, 출간되는 이슈들이 그와 맥을 함께 하는 것을 떠올려보면, DC의 '뉴52' 유니버스 역시 영화의 분위기를 아예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놀란의 배트맨3부작이 안정적으로 마무리 되는 동안 코믹스도 안정적으로 리부트를 마쳤고, 드라마 라인인 '그린 애로우' 와 '플래시' 도 안정적인 시청률을 구가하고 있다. 결국 개봉을 앞두고 있는 [저스티스의 시작] 이 DC유니버스의 진정한 시험대가 될 듯 하다. 
배트맨은 인간의 모든 어두운 감정, 공포, 복수, 분노가 응축된 인물이다.
그는 항상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범죄에 분노하며, 범인과 자신의 생사를 외줄에 올려놓는다.
과연 스콧 스나이더와 그렉 카풀로는 배트맨을 또 어떤 곤경에 빠뜨릴 것인가, 그리고 또 그 곤경에서 어떻게 탈출시킬 것인가.
앞으로의 시리즈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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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52) 배트맨 4 : 제로 이어 - 비밀의 도시 세미콜론 배트맨 시리즈
스콧 스나이더 외 지음, 이규원 옮김 / 세미콜론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이제는 미국 그래픽 노블의 제작 시스템에 관해 많이 알려졌지만, 사실 미국 그래픽 노블은 마블이고 DC고, 그야말로 가지가 엄청나게 많은 나무와도 같았다. 회사가 저작권을 갖고 있는 캐릭터가 나무 줄기라면 각각의 스토리들은 모두 곁가지들. 줄기를 따라 위로 쭉 뻗어가는 스토리 없이 수많은 탄생, 모험, 죽음 이야기들이 수백, 수천명의 작가들을 통해 백여년 가까이 태어났다.

20세기에 들어서며 지금까지 축적된 이야기들을 정리할 필요를 느낀 회사와 소속 작가들은 일종의 다차원 평행우주론을 도입해 캐릭터별 탄생설화를 모으고 비슷한 성격의 이슈들을 모아 지구를 나누었다. 예를들어, 이렇게 탄생한 배트맨은 12차원의 지구 배트맨, 저렇게 탄생한 배트맨은 15차원의 지구 배트맨...등등 그야말로 억지 짜맞추기였지만, 당시에는 이러한 컨셉의 작품들이 영화와 드라마등에서 유행처럼 쏟아질 때라 외려 트렌디한 좋은 선택이기도 했다. 이런 컨셉은 마블과 DC에서 모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차원간의 충돌과 여러 차원에서 불러 모아놓은 캐릭터들이 총출동하는 초대형 크로스 오버 프로젝트를 수행하기도 했는데, 특히 스파이더맨 TVA판에서는 각 차원의 여러 모습의 스파이디들이 모여 힘을 합치는 클라이맥스 에피소드는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마블의 경우엔 영화의 흥행에 힘입어 다차원의 마블 유니버스를 더욱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원칙적으로 영화의 세계관과 만화의 세계관은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지만, '영화의 세계관이 마블 유니버스의 지구0000번의 어벤저스와 같다~' 는 식으로 발표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된 것이다. 실제로 마블에서는 영화의 성공 이후 영화의 세계관에 부합하는 이슈를 발간하기도 했고, 의도적으로 사뮤엘 잭슨을 연상시키는 닉 퓨리가 등장하는 작품을 이슈를 출간하기도했다.

 반면 DC의 경우엔 2011년을 기점으로 다차원 평행우주를 과감하게 접어버린다.

[플래시 포인트]라는 상징적인 초대형 프로젝트를 통해 그동안 차원 이동의 아이콘이었던 '플래시'를 내세워 그린랜턴, 배트맨 등 DC의 간판 캐릭터들을 리부트시킨 것이다. (참고로 [플래시 포인트]의 플래시 스토리는 새로 제작된 미드 [플래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DC의 이슈들은 표지에 죄다 'NEW52' 라는 작은 마크를 하나 달고 출간되기 시작했고, 간판 캐릭터 이슈들이 새로운 분위기에 새로운 이야기로 재정립되기 시작했다. 

 그 중 '배트맨' 은 특히 큰 호응을 받았는데, 배트맨의 뉴52 첫 작품인 '올빼미 법정'이 폭발적인 반응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메인 스토리 작가 스콧 스나이더와 메인 펜슬러 그렉 카풀로가 페어를 이뤘던 '올빼미 법정' 은 후속 프로젝트인 '올빼미 도시' 까지 오랜 팬들의 큰 지지를 받으며 승승장구, 현재까지도 배트맨 이슈를 도맡고 있다.


 [배트맨: 제로이어.비밀의 도시](이하[비밀의 도시])는 국내에서도 미국과 같은 순서로 발간되고 있는 뉴52의 배트맨 시리즈이다. 

'제로 이어' 답게 배트맨의 탄생기를 다루고 있다. 일전에는 '이어 원' 등의 부제를 통해 탄생기를 다루곤 했는데, 비슷한 방식으로 부제를 붙여 '탄생기' 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전의 작품들, [올빼미 법정][올빼미 도시][가족의 죽음] 을 통해 완성된 배트맨의 모습과 강력한 적, 새로운 빌런 '탈론' 과 영원한 숙적 '조커' 를 통해 새로운 프로젝트가 안정궤도에 오르자 캐릭터의 역사를 재정립하는 프로젝트로 들어간 것이다. 

 [비밀의 도시]는 갱단이 장악하고 있는 고담시 외곽지역에서 시작된다.

당시 고담시는 코블팟의 갱단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레드후드 갱단'이 엄청난 속도로 세를 불려가고 있었다. 한편 도시의 재계를 주름 잡고 있는 웨인 엔터프라이즈는 브루스 웨인의 삼촌인 필립이 경영을 맡고 있었다. 꽤나 오랫동안 행방불명이었던 브루스 웨인은 비밀리에 고담시에 돌아와 웨인 저택의 지하에서 집사 알프레드와 함께 갱들로부터 도시를 되찾을 계획을 세운다. 


[비밀의 도시]에서는 배트맨의 시작점은 물론 배트맨 팬들이라면 잘 알만한 몇몇숙적들의 탄생기도 함께 그리고 있다. 

바로 코블팟과 화학 약품 속에 빠지는 레드후드 갱단의 보스, 그리고 니그마이다. 

코블팟은 바로 펭귄이고, 화학 약품 속에 빠지는 레드후드 갱단의 보스는 조커, 니그마는 리들러이다.


뉴52의 새로운 배트맨 시리즈가 사랑받은 이유는 다름아닌 안쓰러울 정도로 고통받는 배트맨 덕분이기도 하다.

[올빼미 법정] 부터 배트맨은 시종일관 터지고 떨어지고 부러지고 찢어지고 난리도 아니다. 그야말로 탈론에게 떡이 되게 얻어맞고, 죽음의 위기에서 몇번이나 간신히 살아나고, 조커에게는 정신적으로 농락당하기도 한다. [비밀의 도시] 에서는 수트를 입지 않은 상태에서도 철퇴로 얻어맞고, 총에 맞고, 불바다가 된 저택에서 간신히 도망쳐 나오고...처음 등장한 이유로 좀처럼 멀쩡한 얼굴을 볼 수가 없다.

배트맨의 진정한 매력이 바로 이것이었다.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 두뇌와 재력을 이용해 사건들은 힘겹게 힘겹게, 온 몸으로 부딪혀 이겨 나가는 것. 

'엉겁결에' 배트맨의 스토리를 담당했던 스콧 스나이더는 그야말로 놀란의 배트맨 못지 않게 리얼하고 어두운 배트맨을 훌륭하게 그려냈다. 그렉 카풀로의 그림체 역시 이 시리즈의 백미. 그동안 짐 리의 배트맨으로 섹시하게 인식되었던 배트맨은 그렉 카풀로의 투박하고 리얼한 배트맨으로 잘 교체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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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워즈 : 제국의 와해 시공그래픽노블
그렉 루카 지음, 앙헬 언주에타 외 그림, 이규원 옮김 / 시공사(만화) / 2015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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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워즈 에피소드6: 제다이의 귀환' 의 클라이맥스인 엔도 전투가 한창이던 시기. 

제국의 황제 펠퍼틴과 다스베이더는 차세대 포스 센서빌러티인 루크 스카이워커를 데스 스타로 끌어들이고 그의 눈 앞에서 반란군들을 무참히 무너뜨리려 한다. 동료들이 제국군의 공격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루크의 마음속에 포스의 어두운면이 드러나면 그것을 이용하려는 심산이었다.  

 이야기는 바로 그 시점, 우주에서 속절없이 공격당하던 반란군 전투 비행단의 샤라 베이 소위의 시점에서 펼쳐진다. 

샤라는 제국군의 맹공을 무사히 버텨내고 데스 스타와 펠퍼틴 황제가 최후를 맞는 순간을 함께 한다.  

하지만, 황제가 죽었다고 은하계 전체를 지배하던 제국이 끝장난 것은 아니었다. 이후로 샤라 소위는 한 솔로가 이끄는 특별 부대에 들어가 제국의 잔당 퇴치에 나서는데, 레아 공주와 나부 행성을 방문하기도 하고, 새로운 세대의 제다이 루크 스카이워커와 비밀 임무를 함께 수행하기도 한다. 


 말미에 실려있는 레아공주 이슈를 빼면 전반적으로 엄청난 수준의 작화를 자랑하고, 무엇보다 스타워즈 팬이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특히 '스타워즈 에피소드7: 깨어난 포스' 와 연관이 있어 보이는 이슈가 등장한다. 

영화를 본 많은 팬들이 레이의 태생은 어느정도 짐작하는데, 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레이는 일찌감치 포스 센서빌러티로써 루크에게 포스 수련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데, 포는 평범한 파일럿인데 갑자기 광선검을 엄청 잘 사용하게 된다는 점에서 심각한 우려를 드러냈다.


해서 많은 해외 팬들이 바로 이 작품 '스타워즈:제국의 와해' 에 등장한 이슈 한가지를 핀의 숨겨진 과거와 연관시켜 해석하고 있다. 

제국의 와해의 주인공인 샤라와 남편 케스는 짙은 피부색으로 나오고, 결정적으로 루크 스카이워커와 수행했던 마지막 임무에서 제국군이 탈취했던 '포스가 깃들어있는 나무'를 되찾게 된다. 이 나무는 코러선트의 제다이 사원에 있던 것으로, 루크 스카이워커는 새로운 제다이 사원을 세우기 위해 이 나무가 필요했던 것이다. 루크 스카이워커는 샤라와 함께 무사히 포스의 나무를 되찾게 되는데, 제국군이 탈취한 이 나무가 한그루가 아니라 두그루였다. 루크는 한 그루는 자신이 가져가고, 다른 한 그루는 전역을 생각하고 있는 샤라와 케스 부부에게 선물한다. 

 

 '만약 포가 샤라와 케스 부부 사이의 아들이라면, 포스의 나무 곁에서 태어나 자랐을 것이고, 선천적으로 포스를 다룰 수 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여튼, 스타워즈의 오랜 팬으로 이 시리즈가 다시 시작되며 정식 세계관으로 인정받은 그래픽 노블 이슈들이 국내에까지 출간된 것은 정말 기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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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인생의 이야기 행복한책읽기 작가선집 1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그 유명한 테드 창을 드디어 만나봤다. 

책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바빌론의 탑] 부터 그야말로 쑤욱 빨려들어갔다.

무엇보다 원시적인 기술로 거대한 탑을 쌓아가는 공정과 그 안에서 이뤄지는 그들만의 작은 세계에 관한 통찰력이 돋보였다. 

현실인듯 아닌듯, 오묘한 세계관도 맘에 들었고, "인간은 아무리 오랫동안 여행을 해도 결국은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라는 문장으로 대변되는 주제의식도 새롭고 신선했다.

대부분의 SF소설들은 인류의 미래에 관한 테마를 다루고 있다.

그 중에는 아서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으로 대표되는 인류 진보의 정점에 관한 축이 한 편을 담당한다. 

인류의 '진보' 라는 개념은 기독교에서 출발한다. 인간의 운명에 '시작' 과 '끝' 이라는 직선의 계획이 존재한다는 것은 지극히 기독교적인 세계관이다. '끝' 에 다다를 때 까지 인간은 끊임없이 신에 가까워질 ;진보할 것이라는 신념이 기저에 깔려있다.  

반면 힌두교와 불교의 개념에 진보는 없다. 인간은 끊임없이 우행을 반복하며 동식물을 넘나드는 광대한 윤회의 고리에 갇혀있고, 인간의 삶이란 단순히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행에 불과하다. '다음 단계' 가 존재하지만, 그것은 인류 공통의 과제라기보다 개개인의 영혼에 관한 문제이다. 

때문에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명백해 보이는 이야기속에서 주인공이 결국 깨닫게 되는 진리는 지극히 동양적이어서 많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두번째 [이해] 는 21세기 들어 영화와 만화로 가장 많이 다뤄진 소재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 역시 현재의 과학 세계관 안에서 인류가 어떤 모습으로 진화할 수 있을지 그려내고 있다.

[바빌론의 탑] 에서 인간들이 신에 가까워지기 위한 방법으로 서로가 연대하며 바닥에서부터 돌을 한장씩 쌓아 올라가는 것이라면, [이해]에서는 화학 약물을 통해 뇌의 기능을 급속도로 높여내는 방법으로 다루었다. 

한편의 서스펜스 스릴러처럼 초장부터 종장까지 쉴 틈 없이 거침없이 내달린다. 

영화 [루시]와 [트렌센던스]가 떠올랐다. 약물을 통해 인간의 신체능력을 극대화시키는 소재는 넘쳐났지만, 뇌의 처리속도를 통해 감각으로 와닿는 정보들을 모두 종합해 순식간에 계산해내고, 귀에 들리는 소리, 시각정보의 패턴, 호르몬의 분비 등을 통해 상황을 조립하고, 결국 그걸 이용해 누군가와 대결까지 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숨막힐 정도였다.

물론, 펼쳐내는 지식의 양이 너무 방대해서 어떤 부분은 몇 번을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다음 작품인 [영으로 나누면] 은 그 이해 되지 않음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수학의 결정적 오류를 깨달은 수학자의 이야기인데, 개인적으로 아주아주 어렸을 적에 수학을 포기했던 한 사람이지만, 수학의 가치와 논리적 즐거움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작품의 주인공이 발견한 수학의 오류와, 그것을 설명하는 내용은 도통 이해가 잘 되지 않았지만,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은 명징하게 와닿았다. 

"아직도 모르겠어? 난 방금 수학 대부분이 오류라는 것을 증명했어. 이젠 그것들 모두가 무의미해진 거야." 

수학자들은 수학이야말로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숫자와 등식으로 모든 것이 논리적으로 맞아 떨어지는 세계. 때문에 수많은 학자들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숫자로 치환하고 풀이한다. 그리고 그것들 대부분은 정말로 진리인 것 같기도 하다. 

이 작품은 수학에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여성 수학자 레네와, 그 수학자보다 재능은 떨어지지만 동료 수학자이자 그녀를 사랑하는 남편 칼의 이야기이다. 수학의 중대한 오류를 이해하고 증명한 레네는 조금씩 히스테릭해져가고 칼은 그와 함께 자신의 결혼생활도 조금씩 파괴되어 감을 느낀다. 

이론 세계의 파괴와 현실 세계의 파괴가 서서히 닿아가는 과정이 절묘하게 그려져 있었다.

무엇보다, 도통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저자의 수학에 대한 사랑과 깊이에 대해 잘 느낄 수 있었다.


네번째 작품은 표제작이자, 드디어 테드 창에게 네뷸러 프라이즈를 안겨준 [당신 인생의 이야기] 이다. 

이 작품은 아주아주 단순한 아이디어에서 시작한다.

우주에서 외계인이 내려왔는데, 중력과 대기를 포함, 살아온 환경이 다른 것은 물론 신체의 크기와 특징, 구조 자체가 다르다. 

바디랭귀지도 통하지 않고, 아무리 관찰해도 서로의 습성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데, 과연 어떻게 의사 소통을 해낼 것인가? 

뭔가 문자가 있는 것 같긴 한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뭔가 비교할 사물이 있긴 있는데, 그 사물이 대체 어디에 쓰는 것인지 알 수가 없는거다. 외계인들이 그 사물로 뭔가 하긴 하는데, 뭘 하는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상황. 대뜸 뭔가 때려부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호전적인 종족은 아닌 것 같고, 대화를 하고 싶어하긴 하는 듯 한데, 도무지 방법이 없다. 

각지에서 뛰어난 언어학자와 수학자, 물리학자들이 동원되어 커뮤니케이션 창구를 개설한다. 

그것은, 외계인들이 개설해 준 것이긴 하지만, 인간들은 그들을 '헵타포드' 라고 칭하며 대화를 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함과 동시에, 이들이 과연 인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언젠가 공격을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우주여행을 위한 어마어마한 기술을 사사해 줄 것인지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애쓴다. 이 작품에서 역시 수학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그나마 이 작품은 언어와 문자에 대한 작품이었어서 전작보다는 술술 이해됐다. 특히 표의문자와 표음문자에 관한 부분은 언듯 한글과 비슷한 개념이 등장해서 외려 이해하기 쉬웠다. 이 작품은 단편만 발표했던 테드 창이 6년만에 낸 작품이라던데, 그동안 문자에 관한 자료를 얼마나 많이 수집했을까, 싶을 정도로 방대한 지식이 담겨있었다. 

학술적인 이야기들 속에서도 남녀의 묘한 케미스트리나 감정, 정서적인 묘사들이 양념처럼 얼마나 잘 들어가 있는지, 이야기꾼의 면모가 느껴졌다. 

또한, 새삼 언어와 문장이 인간의 사물인식에 관한 사고방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다섯번째 작품 역시 문자, 언어에 관련된 작품이다.

[일흔 두 글자] 는 과학 소설이라기보다 판타지 소설의 느낌이 물씬 나는 '골렘' 을 소재로 삼고 있다. 

진흙인형에 특별한 문자를 적어 넣으면 살아 움직인다는 아이디어가 돋보였는데, 판타지 소설에서 흔히 등장하는 언령言聆마법을 떠오르게 했다. 그와 함께 진흙 인형이 일종의 컴퓨터 소프트웨어 처럼 느껴지기도 했는데, 골렘을 움직이는 키워드가 마치 프로그램 코딩으로 읽히기도 했다. 골렘을 디자인하는 과학자들과 골렘을 신의 영역으로 여기는 카발리스트의 대립이 서스펜스를 불어 넣으며 결국 생명의 근원이라는 주제의식을 관통하는 줄기의 이야기 전체를 긴장감 넘치게 이끌어갔다. 위에도 언급했지만, 기본적으로 독자들의 호흡을 쥐락펴락하는 스토리텔링 센스가 무척이나 돋보였다. 이 세계관 안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읽고 싶을 정도로 내게도 꽤 많은 영감을 주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자동인형에 관한 아이디어도 그리 신선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거기에 접붙여진 아주 작은 신선함과 탁월한 스토리텔링 기술이 만나 완전히 새로운 느낌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 테드 창이라는 젊은 작가가 왜 이렇게 큰 주목을 받게 되었는지 수긍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좋았던 작품은 그 다음의 [지옥은 신의 부재] 라는 작품이다.

주인공 닐 휘트먼이 몸 담고 있는 세상은 때때로 천사가 강림하는 세상이다. 천사는 랜덤하게 지상에 강림했고, 대기와 지면에 물리적인 충격을 가져왔다. 강림의 순간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때로 불가피한 사고로 목숨을 잃기도 했고, 불치병이나 장애가 낫는 기적을 경험하기도 했다. 강림에 휘말려 목숨을 잃는 사람들은 천사의 빛에 의지해 영혼이 천국이나 지옥으로 향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도 있었고, 천사는 때떄로 '주의 힘을 보라' 따위를 외쳤기 때문에 신의 존재가 명명백백히 드러나는 세상이었다.

강림이 일어나는 순간에는 천국이나 지옥의 단편을 볼 수도 있었는데, 지옥은 이 세상과 별 다를 바 없는 똑같이 생긴 세상이었지만, 그 곳에는 신이 부재한 세상이었다. 강림이 일어나지도 않고 기적도 없는, 신의 숨결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세상이었다. 

닐은 그러한 세상에서도 신의 의지를 크게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 신의 존재는 확실했지만, 신이 인간에게 어떠한 목표나 의지를 갖고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그는 장애를 안고 태어났는데, 그것 역시 단순히 우연일 뿐이고, 천사의 강림이나 그로 인해 사고를 당하거나 기적을 체험하는 사람들도 오롯히 우연의 산물이라 믿었다. 그는 신을 사랑하거나 비난할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전 일어났던 천사 나다니엘의 강림때 휘몰아치는 불길의 장막에 산산조각 난 카페의 창문에 직격당해 사랑하는 아내인 사라가 즉사하면서 닐의 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종교'를 다룬 소설은 많지만 이토록 신선하고 충격으로 다가온 작품은 없었다.

너무나 인상적이고, 여운이 길게 남아서 좀처럼 책장을 넘길 수 없었다. 

꽤나 오랫동안 기독교에 심취했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 때에도 나는 신이 자애롭거나 사랑이 많다는 표현을 좀처럼 믿기 힘들었다.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증거를 찾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성경을 기록한 자들의 해석일 뿐, 하나님이 인간에게 한 행동 자체를 보면 그것이 과연 '사랑' 일까 싶은 것들이 참 많았다. 인간에게 뭔가 거대한 계획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힘들었고, 인간 한명 한명을 지켜본다는 것도 무책임한 해석이라고 여겼다. 신에 대한 믿음의 크기로 천국행과 지옥행을 결정짓는다는 것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졸속적이었고, 예수를 걸고 갖가지 구원론을 갖다 붙이는 것도 참을 수 없었다. 결국, 사후세계조차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20대를 열심히 바쳤던 교회를 미련없이 떠났다.

 신의 존재를 믿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한 종교가 내린 신에 대한 정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지옥은 신의 부재] 는 1차원적으로 완벽하게 느낄 수 있는 '신' 을 내세워서 '신의 존재' 가 아닌 '신앙심' 그 자체에 대해 다루고 있다. 신이 눈에 보인다고 사랑할 수 있지는 않을 것이다. 숨을 쉴 수 있게 해 준다고 대기를 사랑하지는 않는 것 처럼 말이다.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신앙심' 이란 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대기를 사랑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하는 듯 하다. 대기는 나에게 완벽하게 무관심하다. 우연의 산물로 내가 호흡할 수 있는 기체들이 모여 있을 뿐이고, 내가 대기를 사랑한다고, 대기가 나에게 더 많은 것을 베풀어주지는 않는다. 신앙심은, 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은 바로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 


두터운 책의 마지막 챕터를 장식하고 있는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는 제목 그대로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그려진 작품이다.

'칼리그노시아' 라는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소재로 다루고 있다. '실인증' 이라는 병이 있다. 사람의 얼굴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병인데, 이걸 접목시켜 사람의 얼굴에 대한 미추를 구분하지 못하는 '실미증(칼리그노시아)' 이라는 조어를 만든 것이다.  

외모지상주의를 대놓고 풍자한 이 작품은 시종일관 해학이 흘러 넘쳐 보는 내내 키들거리게 된다. 한편 실제로 얼굴의 생김새가 한 사람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새삼 돌아볼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정말 어디서 본 듯 하면서도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

결국 '진부' 와 '진보' 는 한 끗 차이라는 금언을 되새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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