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52) 배트맨 4 : 제로 이어 - 비밀의 도시 세미콜론 배트맨 시리즈
스콧 스나이더 외 지음, 이규원 옮김 / 세미콜론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이제는 미국 그래픽 노블의 제작 시스템에 관해 많이 알려졌지만, 사실 미국 그래픽 노블은 마블이고 DC고, 그야말로 가지가 엄청나게 많은 나무와도 같았다. 회사가 저작권을 갖고 있는 캐릭터가 나무 줄기라면 각각의 스토리들은 모두 곁가지들. 줄기를 따라 위로 쭉 뻗어가는 스토리 없이 수많은 탄생, 모험, 죽음 이야기들이 수백, 수천명의 작가들을 통해 백여년 가까이 태어났다.

20세기에 들어서며 지금까지 축적된 이야기들을 정리할 필요를 느낀 회사와 소속 작가들은 일종의 다차원 평행우주론을 도입해 캐릭터별 탄생설화를 모으고 비슷한 성격의 이슈들을 모아 지구를 나누었다. 예를들어, 이렇게 탄생한 배트맨은 12차원의 지구 배트맨, 저렇게 탄생한 배트맨은 15차원의 지구 배트맨...등등 그야말로 억지 짜맞추기였지만, 당시에는 이러한 컨셉의 작품들이 영화와 드라마등에서 유행처럼 쏟아질 때라 외려 트렌디한 좋은 선택이기도 했다. 이런 컨셉은 마블과 DC에서 모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차원간의 충돌과 여러 차원에서 불러 모아놓은 캐릭터들이 총출동하는 초대형 크로스 오버 프로젝트를 수행하기도 했는데, 특히 스파이더맨 TVA판에서는 각 차원의 여러 모습의 스파이디들이 모여 힘을 합치는 클라이맥스 에피소드는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마블의 경우엔 영화의 흥행에 힘입어 다차원의 마블 유니버스를 더욱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원칙적으로 영화의 세계관과 만화의 세계관은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지만, '영화의 세계관이 마블 유니버스의 지구0000번의 어벤저스와 같다~' 는 식으로 발표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된 것이다. 실제로 마블에서는 영화의 성공 이후 영화의 세계관에 부합하는 이슈를 발간하기도 했고, 의도적으로 사뮤엘 잭슨을 연상시키는 닉 퓨리가 등장하는 작품을 이슈를 출간하기도했다.

 반면 DC의 경우엔 2011년을 기점으로 다차원 평행우주를 과감하게 접어버린다.

[플래시 포인트]라는 상징적인 초대형 프로젝트를 통해 그동안 차원 이동의 아이콘이었던 '플래시'를 내세워 그린랜턴, 배트맨 등 DC의 간판 캐릭터들을 리부트시킨 것이다. (참고로 [플래시 포인트]의 플래시 스토리는 새로 제작된 미드 [플래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DC의 이슈들은 표지에 죄다 'NEW52' 라는 작은 마크를 하나 달고 출간되기 시작했고, 간판 캐릭터 이슈들이 새로운 분위기에 새로운 이야기로 재정립되기 시작했다. 

 그 중 '배트맨' 은 특히 큰 호응을 받았는데, 배트맨의 뉴52 첫 작품인 '올빼미 법정'이 폭발적인 반응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메인 스토리 작가 스콧 스나이더와 메인 펜슬러 그렉 카풀로가 페어를 이뤘던 '올빼미 법정' 은 후속 프로젝트인 '올빼미 도시' 까지 오랜 팬들의 큰 지지를 받으며 승승장구, 현재까지도 배트맨 이슈를 도맡고 있다.


 [배트맨: 제로이어.비밀의 도시](이하[비밀의 도시])는 국내에서도 미국과 같은 순서로 발간되고 있는 뉴52의 배트맨 시리즈이다. 

'제로 이어' 답게 배트맨의 탄생기를 다루고 있다. 일전에는 '이어 원' 등의 부제를 통해 탄생기를 다루곤 했는데, 비슷한 방식으로 부제를 붙여 '탄생기' 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전의 작품들, [올빼미 법정][올빼미 도시][가족의 죽음] 을 통해 완성된 배트맨의 모습과 강력한 적, 새로운 빌런 '탈론' 과 영원한 숙적 '조커' 를 통해 새로운 프로젝트가 안정궤도에 오르자 캐릭터의 역사를 재정립하는 프로젝트로 들어간 것이다. 

 [비밀의 도시]는 갱단이 장악하고 있는 고담시 외곽지역에서 시작된다.

당시 고담시는 코블팟의 갱단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레드후드 갱단'이 엄청난 속도로 세를 불려가고 있었다. 한편 도시의 재계를 주름 잡고 있는 웨인 엔터프라이즈는 브루스 웨인의 삼촌인 필립이 경영을 맡고 있었다. 꽤나 오랫동안 행방불명이었던 브루스 웨인은 비밀리에 고담시에 돌아와 웨인 저택의 지하에서 집사 알프레드와 함께 갱들로부터 도시를 되찾을 계획을 세운다. 


[비밀의 도시]에서는 배트맨의 시작점은 물론 배트맨 팬들이라면 잘 알만한 몇몇숙적들의 탄생기도 함께 그리고 있다. 

바로 코블팟과 화학 약품 속에 빠지는 레드후드 갱단의 보스, 그리고 니그마이다. 

코블팟은 바로 펭귄이고, 화학 약품 속에 빠지는 레드후드 갱단의 보스는 조커, 니그마는 리들러이다.


뉴52의 새로운 배트맨 시리즈가 사랑받은 이유는 다름아닌 안쓰러울 정도로 고통받는 배트맨 덕분이기도 하다.

[올빼미 법정] 부터 배트맨은 시종일관 터지고 떨어지고 부러지고 찢어지고 난리도 아니다. 그야말로 탈론에게 떡이 되게 얻어맞고, 죽음의 위기에서 몇번이나 간신히 살아나고, 조커에게는 정신적으로 농락당하기도 한다. [비밀의 도시] 에서는 수트를 입지 않은 상태에서도 철퇴로 얻어맞고, 총에 맞고, 불바다가 된 저택에서 간신히 도망쳐 나오고...처음 등장한 이유로 좀처럼 멀쩡한 얼굴을 볼 수가 없다.

배트맨의 진정한 매력이 바로 이것이었다.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 두뇌와 재력을 이용해 사건들은 힘겹게 힘겹게, 온 몸으로 부딪혀 이겨 나가는 것. 

'엉겁결에' 배트맨의 스토리를 담당했던 스콧 스나이더는 그야말로 놀란의 배트맨 못지 않게 리얼하고 어두운 배트맨을 훌륭하게 그려냈다. 그렉 카풀로의 그림체 역시 이 시리즈의 백미. 그동안 짐 리의 배트맨으로 섹시하게 인식되었던 배트맨은 그렉 카풀로의 투박하고 리얼한 배트맨으로 잘 교체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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