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52) 배트맨 7 : 엔드 게임 시공그래픽노블
스콧 스나이더 지음, 그렉 카풀로 외 그림, 이규원 옮김 / 시공사(만화)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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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권까지 이어졌던 긴 시리즈의 일단락을 짓는 작품이다.(6권은 일종의 단편집)

시간의 흐름대로 타이틀을 나열해보면, [제로 이어: 비밀의 도시] - [제로 이어: 어둠의 도시] - [올빼미 법정 ] - [올빼미 도시] - [가족의 죽음] - [엔드 게임] 이 되는 것 같다. 이 작품을 시리즈의 일단락으로 소개할 수 있는 이유는 올빼미 법정에서 등장한 탈론부터 어둠의 도시에 등장했던 '닥터 데스' 칼 헬페른 사건까지 모두 아우르는 큰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엔드 게임]은 원더우먼이 부상당한 브루스 웨인을 공격하는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된다.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지만, 브루스 웨인은 아이언맨의 헐크 버스터를 연상케 하는 철갑 수트를 착용하고 원더우먼과 맞서게 된다. 아쿠아맨, 플래시를 재치있게 따돌리지만 결국 슈퍼맨을 맞닥뜨리고 마는 배트맨. 브루스 웨인은 철저한 준비성으로 저스티스 리그의 초인들을 적대시 할 지도 모르는 상황을 예상하고, 강력한 수트 "저스티스 버스터" 를 마련해둔 터였다. 그린 랜턴, 사이보그까지 상대할 비책이 녹아있는 수트였지만, 단 한 명만은 예외였다. 하늘에서 강림하는 신. 슈퍼맨이었다. 


마치 "배트맨 v 슈퍼맨: 던 오브 저스티스" 의 미리보기 버전인 듯 한 슈퍼맨과의 대결로 눈길을 끌지만, [엔드 게임] 의 주인공은 바로 '조커' 이다. 이 작품에서는 조커 본인과 배트맨의 입을 통해서 지금까지 명확히 정의된 적 없는 조커의 정체성이 보다 명확히 드러나게 된다. 조커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희대의 싸이코패스 살인마 정도로 해석되어 왔다. 놀란의 '배트맨 다크나이트' 에서 조커는 배트맨과 자신이 다를 것 없는 존재이며, 배트맨은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 불살不殺을 부르짖는다. 

조커라는 존재가 매력적인 지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조커는 싸이코패스 살인마일 뿐 아니라 대단히 영리한 인물로 배트맨의 정신을 강하게 공격한다. 배트맨의 정신 중 가장 약한 부분을 끊임없이 자극함으로써 배트맨은 보다 완벽해진다. 그 뿐 아니라 범죄에 대한 지극한 증오로 범죄자들을 죽이고자 하는 욕망을 막아주는 가로막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가장 죽이고 싶지만, 가장 죽이고 싶지 않은 존재. 배트맨에게 조커란 아이러니이자 딜레마이며, 배트맨이 테러리스트가 아닌 자경단이라는 주장에 가장 강력한 근거인 셈이다.


지난 '가족의 죽음' 에서부터 조커는 배트맨에게 또 다른 '가족' 으로 작용한다.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겠지만, '가족의 죽음' 이라는 부제는 다름아닌 조커의 죽음을 암시하는 의미이기도 했다. 스나이더와 카풀로의 배트맨 세계에서 완전히 퇴장한 줄 알았던(할 리 없는) 조커는 '엔드 게임' 을 통해 화려하게 복귀한다. 무려 원더우먼과 플래시, 아쿠아맨과 슈퍼맨까지 '중독' 시켜서말이다. 

조커는 이제 배트맨의 아이러니이자 딜레마 역할을 거절한다. 배트맨의 친구이자 가족으로 끊임없이 배트맨을 궁지에 몰아 넣으며 성장할 수 있는 동인이 되기를 원했던 조커는 이제 진심으로 배트맨을 배제시키고자 한다. 그야말로 진검대결. 고담시 전체를 건 최후의 대결이 시작된다. 


[뉴52] 시리즈는 정말 다 재미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시리즈의 서막을 장식한 '올빼미' 들과의 대결이 이야기의 완결성이나 전개에 있어서 최고라고 평가하지만, '엔드 게임' 역시 그 뒤로 꼽아 볼 만 하다.  

과연 한 시대의 조커와 배트맨은 정말로 '엔드' 를 맞이한 것일까? 

 

뉴52의 새로운 타이틀이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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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예 세계신화총서 9
예자오옌 지음, 김은신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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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장들이 새로 쓰는 21세기를 위한 만신전萬神傳' 이라는 타이틀을 보았을 때, '세계신화총서' 라는 이 시리즈의 정체성이 좀 궁금했었다. 신화나 전설, 민담 등 조금 특별한 이야기를 좋아했기에 더 관심이 가기도 했다. 한동안 잊고 있다가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중국의 신화들 중 일부를 재해석해 일종의 각색을 한 작품인 듯 했다. 본래의 신화가 가지고 있던 세계관이나 배경의 이미지, 의도 등을 그대로 가져오되 이야기의 흐름을 통일성 있고 세련되게 다듬고, 인물의 변화와 성장에 있어서도 인과관계를 명확히 해서 '신화' 가 가지고 있는 모호성을 최대한 줄이고 선명성을 높였다.


 이야기는 '유융국' 에 전리품으로 끌려가는 '항아' 와 '말희' 라는 여인으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대륙을 엄청난 기세로 점령해 나가던 군사국가인 유융국은 남자들의 지위가 거느리고 있는 여성의 수에서 결정되는 국가로, 쇠락일로를 걷고 있던 항아와 말희의 여인족을 노련하게 공략했다. 용맹하게 맞서 싸우던 여인족의 전사들은 모두 죽이고 어린 여인들만 전리품으로 취해 포로로 끌고 갔는데, 갓 열두살이 된 항아와 말희 역시 그 안에 있었다. 말희는 유융국에서도 지위가 높은 '조부' 라는 장인의 눈에 들어 먼저 선택되어지고, 비쩍 말라 볼 품 없던 항아는 오래 전 전쟁에서 다리를 다친 절름발이 칼잡이 '오강' 에게 선택되어진다.

 항아는 오강의 일곱번째 부인이 되었다. 오강의 부인들과 자식들은 항아를 따뜻하게 맞아주진 않았지만 딱히 못되게 굴지도 않았다. 오강이 첫째 부인에게서 얻은 아들인 오능과 오용, 둘째와 셋째 부인에게서 얻은 딸인 여축과 여인과는 나름대로 잘 지냈다. 여축, 여인과 돼지 치는 일을 맡게 된 항아는 어느날 엄청난 호우로 불어난 계곡물에 휩쓸리게 된다. 돼지들과 함께 떠내려간 항아는 신기한 조롱박을 손에 넣어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3일이나 거센 강물과 씨름하면서도 항아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조롱박은 뜨거워졌다 식었다를 반복하며 항아의 체온을 유지시 주었을 뿐 아니라, 설명하기 힘든 초자연적인 기운을 불어주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오강의 두 딸인 여인과 여축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던 끔찍한 환란 속에서 임신한 암퇘지와 수퇘지를 데리고 3일만에 생환한 항아는 신의 보살핌을 받은 특벽한 여인으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그런 항아를 미워하는 인물들도 있었다. 항아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조롱박을 항상 품고 다녔고, 그러던 어느날 조롱박이 깨지며 사내아이가 태어난다.      


 상상히 큰 스케일의 이야기는 제법 익숙한 전형적인 영웅 서사의 모습으로 흘러간다. 이야기의 전개는 대단히 빠르고 군더더기 없이 사건 중심으로 쭉쭉 진행된다. 등장인물의 감정선도 특별한 수사 없이 간략하고 적확한 단어들로 표현되는데, 대부분의 신화들이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인 것을 떠올려 보면 충분히 납득된다. 우리에게도 많은 영향을 준 중국 신화와 전설 속 이야기들이 세련되게 각색되어 요소요소에 자리잡아 고대 신화 시대의 분위기를 물씬 풍겨준다.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드라마틱한 변화를 한두차례씩 겪게 된다.

캐릭터 자체가 굉장히 입체적이고 다채로워서 정신없이 그들을 따라가게 되는데, 그리 두껍지 않은 볼륨 안에서 사랑, 권력, 탐욕, 정욕, 미움, 성장, 그리고 타락과 좌절 등 인간사의 모든 것들 뿐 아니라, 영웅의 탄생과 몰락, 또한 제국의 흥망성쇠도 유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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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들의 사생활 - 이승우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7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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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이 어찌될지 궁금했던 책은, 그야말로 오랜만이었다. 

책의 중간을 읽다가 맨 뒤를 펼치면, 책을 그냥 쓰레기통에 쳐박는 것과 다름 없다는 나름대로의 깨달음을 얻은 지 수 년 이지만, 어지간히 날고 기는 미스테리 스릴러 작품들을 읽으면서도 '뒤가 궁금' 한 적은 거의 없었는데. 

맨 뒤를 펼치고픈 욕망과 한없이 싸웠다!! 

지금 이 순간의 즐거움을 위해서.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그 다음은?" "아 빨리 말해봐~~!!!" 라고 안달하는 그 즐거움.

정말 오래간만에 '이야기의 힘' 그 자체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과거를 미스테리하게 숨긴 주인공도 아니고, 중첩되어 복잡 미묘한 플롯을 가진 것도 아니고. 

지나치다고 느껴질 만큼 친절하게 길을 안내하지만 그 길의 끝이 궁금해 미칠 것 같게 만드는, 우직하게 한 방향으로 끌고 나가는 이야기의 힘, 말이다. 


이야기의 첫 머리에 주인공 기현은 성매매를 하는 여성을 한 명 구해 차에 태운다. 여성에게 선불로 넉넉한 화대를 지불하고, 기현은 한 모텔 방 으로 그 여성을 들여보낸다. 방 안에는 한 남성이 누워있다. 기현이 낙향하기 전에는 몇 년 동안 기현의 어머니가 그 성인 남성을 등에 업고 창녀촌을 전전했다고 한다. 창녀가 들어간 모텔 방에 누워 있는 남성에게는 두 다리가 없었다. 기현의 형인 우현의 다리가 잘려나간 것은 5년 전이었다. 장래가 촉망되던 명문대생 우현은 기현이 모르는 새에 군대에서 두 다리가 잘린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기현은 자신의 형의 두 다리가 잘려나간 것에 대한 자책감을 갖고 있다.


 이것은 '가족' 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디서 읽었더라.

가족이란, 신이 주신 가장 큰 선물인 동시에 가장 큰 짐이라는, 내용을.

이 이야기는, 그 내용이 담겼던 문장 자체가 그냥 멋에 겨워 쓴, 무의미한 문장이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애초에 삶 자체가 짐이 가득한 선물인걸. 


 꽤 오랫동안 가출했다가 낙향한 기향은 다리가 잘려나간 형을 업고 사창가를 전전하는 어머니를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기현은 어머니를 보며 어떤 이미지를 떠올렸을까? 짐을 지고 가는 어머니? 선물을 지고 가는 어머니? 

기현이 어머니를 본 것은, 작은 개인 심부름 센터를 하는 기현에게 온 의뢰 때문이었다. 상당한 착수금과 함께 어떤 여성을 미행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는데, 알고보니 그 여성이 자신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이 후로도 기현에게는 자신의 어머니를 미행하라는 의뢰가 끊이지 않고, 생활비에 쪼들리던 기현은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의뢰를 받아들인다.

다리를 잃은 뒤 주기적으로 성충동적인 발작을 일으키는 형 우현. 특별한 비밀을 가진 어머니, 항상 없는 사람처럼 조용히 화단을 가꾸는 아버지. 평범한 중상층보다 약간 더 위쪽 포지션이었던 기현과 우현 가족에게 과연 어떠한 과거가 있었을까? 

결말이 궁금하지 않고 배길 수 없었다. 


 오래간만에 한 자리에서 책 앞표지와 뒷표지를 다 봤다. 몇 초 만에 맨 뒤로 넘길 수 있었지만, 욕망을 참고 참아 두어시간 동안 한 장씩 맨 뒷 페이지를 향해 읽어 넘겼다. 그렇게 책장을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덮고 난 뒤 한참동안 이야기 속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우현과 기현 형제는 물론, 그들 부모님의 삶까지 지배한 사랑이라는 감정의 지극한 파괴성과 삶의 냉혹함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얽매여 살고 있을까. 불현듯 그 거대함에 몸서리가 쳐졌다.

얼마전에 봤던 [이웃집에 신이 산다] 는 영화가 떠올랐다. 

세상을 창조한 신이 자신이 창조한 인간들을 괴롭히기 위해 매일매일 기상천외한 규칙들을 만들어내고, 자연재해를 일으키고, 사고를 일으키는 내용이 있었다. 인간들을 괴롭히기 위해 창조해낸 규칙 중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같은 것과, "배우자가 있을 때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와 같은 것이 있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일종의 착란과도 같다. 정신병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도무지 설명할 수 없지 않나. 

자기 자신을 온전히 타인에게 맡긴다거나, 타인의 모든 것 - 빚이나 병이 있는 가족 등 까지- 떠안는 일 따위는, 상식적으로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리해야, 그 어떤 짓도 서슴없이 저지르곤 하는 사랑에 빠진 인간들을 설명할 수 있을터다. 그리해야, 사랑 놀음은 결코 행복하거나 달콤할 수 없다는 나의 주장도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터다. 아니 그런가? 1초의 행복과 달콤함을 위해 남은 모든 시간은 괴롭고 화나고 슬프고 우울해야 한다. 

 하지만, 결국 인간은 외로움이라는 선천적 질병 앞에서 사랑이라는 모르핀을 취할 수 밖에 없다. 희망 없는 삶 속에서 유일한 빛은 사랑이다. 1초의 행복을 위해, 1초의 달콤함을 위해, 사람들은 마약쟁이처럼 매달리고, 구걸하고, 끈덕지게 달라붙는다. 


 누구에게나 사랑의 기억은 있다. 마치 남에게 들키면 안되는 불법적인 일처럼 꼭꼭 숨겨놓은 그 곳에 말이다. 

이야기의 여운 속에서 한참을 허덕이다가 [식물들의 사생활] 이란 제목에 시선이 머물렀다. 

온갖 종류의 식물이 떠올랐다. 잡초, 푸성귀, 벼, 보리, 배추, 무우, 브로콜리, 피망, 양상추부터 개나리, 진달래, 프리지아, 히야신스, 물망초 등의 꽃은 물론, 단풍나무, 소나무, 은행나무, 버드나무, 미류나무, 밤나무, 잣나무 이 작품에 언급된, 야자나무, 물푸레나무 등까지. 식물들은 우리가 볼 수 있는 부분보다 볼 수 없는 부분이 더 많다. 우리 집 뒤의 산만 생각해 봐도 그렇다. 빼곡한 숲을 떠올려도 그렇다. 상상의 범위에도 담지 못하는 엄청난 뿌리들이 서로와 얽혀있다. 얼마나 많은 나무와 풀들이 서로에게 얽혀있을까? 어지간한 비가 와도 흙이 쓸려 내려가지 않을 정도로, 그 어떤 태풍이 몰아쳐도 끄떡하지 않을 정도로 서로에게 굳게 얽혀있다.

 사람들도 그렇지 않던가.

애인의 스마트폰을 몰래 열어 전화부를 열어 보면 보이는 수 많은 사람들. 마치 집 뒤의 산이 떠오를 만큼 가득 찬 나무처럼 빽빽한 이름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과의 관계를 모두 알 수는 없다. 우연히 문자나 카톡 메시지를 통해 흙 밖으로 비죽이 솟아나온 뿌리를 본 연인처럼 히스테리를 부려봐도 결코 쉽게 알아챌 수 없는 어마어마한 관계의 뿌리들이 어디에든, 누군가와든 닿아 얽혀있다. 그리고 그 어딘가에 사랑의 기억이 묻혀있다. 당신과 나만 아는 곳. 그 곳에. 


 이 작품에서 기현은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오해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람; 아버지, 어머니, 형제의 뿌리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뿌리는 대부분, 사랑으로 얽혀있다. 딱히 숨기려 하지도 않았고, 드러내려 한 적도 없으나, 세월의 흙이 켜켜이 덮여 저절로 숨겨진 비밀스러운 어찌보면 '대부분의' 삶들.  (재미있게도, 가족들의 뿌리를 파헤치는 기현의 뿌리는 독자들만이 볼 수 있다.)


 뿌리는 흙 속에 있을 때 비로소 제 기능을 발휘한다.

함부로 누군가의 뿌리를 파헤치다가는, 그 누군가가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이란 감정은 지극히 폭력적이고, 파괴적이기에 아랑곳 하지 않는다. 

사랑으로 점철된 뿌리는, 또 다른 사랑으로 파헤쳐진다. 사랑과 사랑이 얽히고, 시간속에 묻힌다.

삶이라는 식물은, 그렇게 자라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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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겨울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8
켄 폴릿 지음, 남명성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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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기둥' 으로 세계적인 역사소설작가가 된 켄 폴릿이 야심차게 뽑아든 칼은 '20세기 3부작' 이었다.
3부작 중 1부인 [거인들의 몰락] 은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가까스로 살아남은 주인공들은 각자 결혼해서 자식을 낳았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그리고, 세상 그 어떤 부모가 자식을 전쟁에 보내고 싶을까?
그것도, 전쟁에 참전해 본 적 있는 부모들이라면. 적군의 총알에 뼈가 부서지고, 상대의 몸 안에 쇳덩어리를 박아넣고, 회오리쳐 도는 작은 쇳조각에 고향 친구의 두개골이 산산조각나는 장면을 두 눈으로 목격한, 전쟁의 참상을 몸으로 겪어본 부모라면 더더욱 자식들을 전쟁의 포성 밑으로 밀어넣고 싶지 않을 것이다.

 서방 승전국들은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한 전쟁' 이라며 자위했지만, 사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승전국을 주축으로 한 세계연합의 창설은 지지부진했고, 피해를 본 국가들은 독일에 무리한 전쟁보상금을 떠넘겼다. 소비에트 혁명 이후 러시아는 혼란한 상황 속에서 전후 복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를 틈타 일본은 과격한 팽창정책을 펼치며 동남아시아와 중국은 물론 러시아로까지 탐욕의 손길을 뻗쳐나갔다. 유럽 전체가 전후 혼란을 적절히 수습하지 못하는 사이 러시아의 볼셰비즘에 맞서 파시즘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고,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과격한 방식으로 정부를 장악했다. 심지어 영국 런던 한복판에서 파시스트들이 도로를 점거하기도 했다. 스페인에서는 파시스트와 볼셰비키의 지원을 받는 정부군사이에 내전이 일어났고,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와 밀약을 맺은 히틀러의 독일은 기어코 폴란드를 침공하고, 프랑스까지 단숨에 진격한다.   


[세계의 겨울] 역시 [거인들의 몰락] 처럼 이야기의 중심을 크게 셋으로 나눠볼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을 겪는 영국과 미국의 상황, 독일 내부, 러시아의 상황을 각 국가에 살고 있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풀어내는데 시기적으로는 히틀러의 집권부터 미국의 원폭투하, 전후 처리와 독일의 분단까지 다루어진다. 전작의 주인공들도 모두 등장하며 상황에 따라 일부는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자식들이 이번 작품의 주인공들이라 할 수 있겠다.  
분량의 압박에도 불과하고 굉장히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담아냈다. 스페인 내전도 어느정도 다루고 있고, 진주만 폭격과 노르망디 상륙작전, 마른 강 전투, 맨해튼 프로젝트,루즈벨트 대통령의 재선과 사망, 독일 분단 등 잘 알려진 역사전 사건을 중심으로 촘촘하게 인물들의 역할을 배정하고, 걸맞은 드라마들을 적절하게 그려냈다. 대단히 복잡한 작업이었을텐데 인과의 고리가 빠지는 부분 없으면서도 생략할 부분들은 과감히 생략하며 대단히 스피디한 전개를 보여준다. 단어 그대로 인물들이 '휩쓸려간다' 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정신없이 펼쳐지는 이야기 속에 감정과 정서의 전달도 명확하다. 

전작이라 부를 수 있는 '거인들의 몰락' 에서 에설과 모드라는 두 여인이 인상적이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데이지와 카를라가 그녀들을 대신한다. (누구의 딸들인지는, '거인들의 몰락' 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생략... 대부분의 주인공들이 전작 주인공들의 자식들이라 인물 소개는 한 명도 못하겠다. 전작은 누가 뭐래도 절절한 로맨스니까.)
미국 태생의 데이지는 자유분방하고 활달한 인물로 거침없는 남성 편력을 지니고 있으며 화려한 이미지의 여성이고, 카를라는 독일 태생으로 남자들보다 영특해서 충분히 의대에 진학할 실력이었지만, 나치의 집권과 전 국가적인 전쟁준비로 인해 진학 자체에 실패하고 결국 간호사에 머무르게 된다. 이 두 여성을 통해 당시 영미와 독일의 극심한 차이를 보여줌과 동시에 모든 국가를 휘감은 전쟁의 참상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 펼치기(접힌 부분 에는  전작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사실 큰 스포이기도 하지만, [거인들의 몰락] 에서는 주요한 인물들이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는다. 읽는 내내 자꾸 '왕좌의 게임' 이 떠올라서, 정말 조마조마 했었는데, 다행히 켄 폴릿은 조지RR마틴이 아니었다!!! 
하지만, [세계의 겨울] 에서는 달랐다. 이번에는 착한 사람, 용감한 사람들이 먼저 죽어나간다. 마치 마틴옹이 빙의한 듯이...ㅠㅠ
진짜 깜짝깜짝 놀랐다. 1차 세계대전의 업화 속에서도 간신히 살아남은 주인공들은 때론 자신이, 그리고 때론 자신보다 소중한 자식들이 전쟁의 참화 속에 스러져간다. 2권은 정말 내내 가슴이 덜컥덜컥 내려 앉았다. 죽지 않으면 죽을만큼 고통을 겪기도 하고. ㅠㅠ



 

펼친 부분 접기 ▲



 
두께는 상당하지만, 굉장히 잘 읽힌다. 술술 넘어간다.
실제 역사에 대한 고증도 대충 하지 않았다. 역사 학자와 수많은 에이전트들이 달라붙어 모니터를 했다. 당시 독일에 대한 고증은 당시를 겪은 독일인들이 감수를 했다. 허구와 실재의 완벽한 조화. [거인들의 몰락] 과 [세계의 겨울]을 통해 1,2차 세계대전에 얽힌 당시 열강들의 이익관계나 외교관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전후 처리 과정을 통해 동구권의 소비에트 연합 가입 과정이나 독일의 분단 과정도 무척 상세히 그려 놓았는데, 더불이 우리 나라의 분단 과정도 함께 읽혀서 가슴 한쪽이 아릿했다.
소비에트 연합의 탄생 과정도 물론이지만, [거인들의 몰락] 에서도 줄기차게 시도해온 세계연맹의 창설 과정도 충분히 드러나고 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북한에 대한 유엔의 경제 제재 조치가 내려졌다.
단숨에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쥐를 자꾸 구석으로 몰아 넣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임은 역사가 알려주고 있다. 
독일도, 일본도 궁지를 벗어나 목숨을 부지할 방법은 가로막고 있는 적을 물어 뜯는 수 밖에 없었다. 나치에 환호한 독일 국민들도, 아시아 일대에 큰 고통을 안긴 일본도 가로막은 강대한 적을 물어 뜯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의 전쟁 행위에 대해 면죄부를 줄 수는 없지만, 수많은 피를 양분으로 만들어진 세계 연합은 전쟁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결과물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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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4
윌리엄 포크너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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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끝없이 펼쳐진 광야.

하늘의 독수리가 보기에 마치 신이 연필로 선을 그은 듯, 얇고 검은 선이 때론 직선으로 곧게, 때론 완만한 원을 그리며 벌판을 가로지르고 있다. 황야를 가로지르는 검은 선은 이윽고 드문드문 연둣빛이 보이는 초원지대에 접어들고, 곧이어 무성한 침엽수림을 만난다. 수백년, 어쩌면 수천년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을 것 같은 고고한 침엽수림. 

검은 선을 따라 시커먼 기운을 토해내며 느릿느릿하게 달려가던 쇳덩어리는 그 앞에서 멈춰서고 만다. 

이 숲은 통과할 수 없다.

아직은.

쇳덩어리는 잘 몰랐지만, 쇳덩어리의 창조주이자 검은 선을 그린 인간들은 알고 있었다. 이 숲은 누가 누구에게 팔았고, 또 그 누가 다른 누군가에게 팔았기에, 함부로 나무들을 베어 넘겨 계속 선을 그릴 수 없었던 것이다. 

인간들은 소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매매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매매권을 주장한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소유할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고, 매매할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지만, 아무도 그만큼 생각하지 않거나, 생각했으나 생각하지 않은 척 했다.


 거대한 숲의 관점에서는 개미나 여우, 토끼등과 구별하기 힘든 크기였으나 개미나 여우, 토끼의 시점에서는 마치 태산처럼 거대한 곰 한마리가 있었다. 곰의 발 밑에 깔려 으스러진 잡목 부스러기와 각종 낙엽, 나무 그루터기와 드러난 뿌리의 일부, 흙 등은 곰의 한 쪽 발에 발가락이 없다는 사실을 눈치챘지만 개의치 않았다. 곰도 그다지 개의치 않았는데, 곰을 뒤쫓는 인간들은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곰에게서 발가락을 앗아간 그 인간들이었다. 

 곰은 인간들이 두렵지도, 밉지도 않았다. 곰이 연어나 토끼, 여우, 나무 따위를 두려워하거나 미워하지 않는 것 처럼 말이다. 미워서 나무를 긁는게 아니었고, 두려워서 연어를 잡거나 토끼를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곰의 뒤를 쫓는 것은 수 년 간 같은 인간들이었다. 

 1년 내내 뒤쫓는 것은 아니었고, 한차례. 긴 잠에 빠져들기 전에 찾아왔다. 그들은 해마다 몇 주간 숲에 머물며 사냥을 했다. 숲 한쪽에 지어놓은 튼튼한 오두막은 꽤나 아늑해 보였고, 곰은 몇 차례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기도 했다. 인간들은 매번 적당한 수의 짐승을 사냥하고 오두막을 떠났다. 물론 인간들의 최종 목표는 곰임을, 그 곰은 잘 알고 있었지만, 아직 인간들은 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비록 그들에게 많은 상처를 입었지만, 생명이 생명을 사냥하는 일은, 숲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웠기에 곰은 인간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약해지면 먹힌다. 곰은 인간들이 무기로 삼는 개들을 해치웠고, 인간들의 개는 곰을 두려워했기에, 곰은 인간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느날 곰은 지난 해 처음 온 새파랗게 어린 인간과 마주쳤다.

소년은 자기 몸 만큼이나 긴 쇠붙이를 쥐고 있었고, 눈동자는 두려움에 가득차 있었다.

그 쇠붙이는 제법 매서웠지만 애초에 인간은 곰에게 너무나 허약한 존재였다. 어디든 베어물면 두부처럼 으깨어졌고, 앞발로 후려치면 마른 덤불처럼 으스러졌다. 피로 가득찬, 움직이는 가죽부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이 지니고 다니는 쇠붙이들은 제법 매서웠지만, 애초에 인간은 곰에게 두려움이 대상이 아니었다. 곰은 적의를 보이지 못하는 소년이 하찮았다. 구태여 앞발을 휘둘러 경직된 가죽부대를 터뜨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어쩌면 곰은 소년의 눈빛에서 다른 느낌을 읽었을지도 모른다. 두려움이나 미움, 증오 같은 감정이 아니라, 곰이 한번도 느껴본 적 없는 그런 것. 지금은 잃었지만, 언젠가 본 적 있던 갓 태어난 자신의 새끼를 보았을 때 느꼈을 지도 모르는 그런 것. 


소년은 언젠가 이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깨닫게 될 것이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 자신의 몸뚱이 하나 말고는 다 무의미할 것이며, 인간이 인간을 사고 팔 수 없듯, 대지와 수목도 사고 팔 수 없으며, 종국에는 자신의 몸뚱이 하나조차 흙으로 돌아가게 될 것임을. 모든 것을 버리고 자연의 품 안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될 것임을. 사고 팔 수 없는 것을 사고 팔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누군가, 무언가가 생기게 되리라는 것을. 인간들이 기묘한 쇳덩어리를 이용해 어머니 대지 위에 흩뿌린 피와 살점들이 그 댓가가 되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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