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2
메도루마 슌 지음, 유은경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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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이 지명을 들으면, 나는 어렸을 때 봤던 만화의 영향으로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 남국의 풍경이 먼저 떠오르고, 그 다음 거대한 부지를 차지하고 있을 미군기지가 떠오른다. 그와 함께 수년 전, 평택에서 있었던 미군기지 확대.이전 반대 시위도 떠오른다. 개간지 사이로 난 너른 길 주변으로, 벽면에 페인트로 '미군 기지 이전 반대' 등의 문구가 휘갈겨져 있는 주인 잃은 주택들이 드문드문 터를잡고 있었고, '미군기지 이전 부지' 라는 팻말이 붙은 철조망 또한 단단히 자리잡고 있던 그 날의 그 텅 빈 거리. 그 동네 주민 몇분과 몇몇 교회 청년부가 연합해 유인물을 나누고 깃발을 높이 들었지만, 그 소리를 듣는 사람도 우리 뿐이었고, 유인물을 읽는 사람도 우리 뿐이었으며, 거리를 걷는 사람도 우리 뿐이었다. 오키나와. 일본 제일의 휴양지이지만, 원자폭탄이 떨어진 나가사키와 히로시마만큼 큰 아픔을 지닌 지역. 

 우리 역사에 크나큰 고통의 이름인 일본이라는 나라에 속한 오키나와이지만, 오키나와는 사실 우리나라와 무척이나 닮아있다. 오키나와는 사실 메이지 유신 전까지 독립된 국가였다. 예전 모 신문을 통해 일본의 영토 분쟁과 함께 오키나와의 역사에 대해 읽었던 적이 있다. '류쿠' 라는 이름으로 중국 대륙과 일본 본토를 잇던 해상 무역국가로 시작해서, 메이지 유신때 일본군에 의해 겪었던 참혹한 학살 장면으로 전환되고,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군과의 격렬한 육상전과 해상포격, 자살 특공대의 참상으로 이어지다가,  2차 세계대전 패망 이후 겪었던 미군정, 그 이후 여지없이 무너져내렸던 일본으로부터의 독립 계획으로 마무리되는 길고도 참혹한 기획 연재물이었다.

 때문에, [물방울] 이라는 작품집이 오롯하게 '오키나와' 라는 공간에 천착할 수 밖에 없었던, 오키나와 출신 작가의 대표작 모둠이라는 사실에 강하게 이끌렸더랬다. 

 

 인간은 망각의 존재라고 하지만, 아무리 잊으려해도 잊을 수 없는 일도 무수히 많다.

이 적당한 두께의 작품집 안에는 총 세편의 단편작품이 자리잡고 있다. 작품집의 제목을 맡을 [물방울] 과 [바람 소리] 그리고, 가상의 책 리뷰 형식을 빌린 [오키나와 북 리뷰] 이다. 

[물방울]과 [바람소리]는 비슷한 주제의식을 갖고 있는 작품이다. 두 작품이 함께 대를 이어 연결되는 기억의 되물림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고, [바람 소리]의 경우에서는 부자세대의 이야기를 펼쳐냄으로써 그 느낌이 더 강하게 완성되기도 한다. 이 두 작품이 가지고 있는 주인공들의 기억과 정서가 오키나와의 전쟁 세대 전체를 아우르는 것으로 보인다. 성급한 일반화가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걸 인정받았으니 일본 전체에서 큰 사랑을 받았을 것이고, 문학작품에 주는 상도 여럿 받았을터다. 

평화로운 섬 안에서 각자의 꿈과 희망을 갖고 삶을 영위하던 평범한 소년, 소녀, 고등학생, 대학생, 혹은 농부들. 전쟁이란 이들은 순식간에 다른 세계로 이끌고 간다. 포탄을 피해 도망온 어두운 동굴 안에서 죽어가는 고향 친구를 버려야 하며, 친구들과 함께 수류탄으로 자결을 해야 하기도 한다. 폭탄을 실은 비행기를 조종해서 미군 군함에 돌격하는 임무를 위한 훈련을 받아야 하기도 한다.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의 경계 또한 모호해진다. 이러한 경계를 드나든 사람의 삶은 과연 어떻게 될까? 

'외상후 스트레스' 라는 단어의 의미가 지극히 협소하게 느껴질 만큼, 엄청난 내상을 입은 사람들이 돌아간 '일상' 이란 얼마나 끈적일까. 시커멓게 진득이는 타르처럼 늘러붙은 전쟁의 기억들을 안고,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아낼 것인가? 

 

 하지만, 메도루마 슈운이 그려내는 오키나와의 전쟁세대의 일상은 그렇게 불쾌하지만은 않다. 

[물방울]의 도쿠쇼는 진득이는 과거의 내상들을 깨끗하게 흘려버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바람 소리]의 세이키치 역시 비일상의 기억들을 아들인 아키라를 보며 씻어낸다. 아마도 이 작품들을 통해 일본의 수많은 전쟁세대들은 크나큰 위로를 얻었을 터다.

전설과 요괴 이야기의 왕국인 일본 작가답게 만화적인 상상력이 현실과 절묘하게 이뤄내는 균형추가 주사 역할을 하며 사람들의 마음속에 따뜻한 치유의 약물을 밀어 넣는다. 게다가 [오키나와 북 리뷰]라는 작품은 풍자와 해학으로 가득 차있다. 끊임없이 키득거리며 읽어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괴롭고 힘들었던 기억들을 깊이 묻으려 한다. 기억을 퍼올리는 순간, 당시에 느꼈던 고통과 공포가 고스란히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뇌는 방어적으로 가장 깊숙한 곳에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묻고 몇 겹 콘트리트를 부어 덮어낸다. 역사란, 우리의 부모님과 조부모님들이 겪었던 시대에 대한 기억이다. 우리 민족은 유난히 괴롭고 힘든 역사를 지니고 있다. 끊임없었던 외세의 침략, 일제 강점기와 미군정을 거쳐, 한국전쟁과 민주화 투쟁, 군사 쿠데타와 군부 독재시대까지.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역사를 다루는 문학가들은 지나치게 엄숙하다. 그도 그럴것이, 아직 그 고통의 기억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마 일본에서도 오키나와나 나가사키, 히로시마등을 다룰 때는 비슷한 정서가 공유될 것이다. 

 하지만, 메도루마 슈운은 그 고통의 기억들을 수면위로 끌어 올리되, 그 고통스러운 감정들을 기발한 상상력으로 상쇄시켜낸다. 사건들을 객관적이고도 담담하게 그려내되, 만화적이고 설화적인 소재를 차용하여 정서의 분위기를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생생한 등장인물들의 섬세한 감정묘사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단편이라는 제한된 지면 안에서 간결하면서도 섬세하게 표현된 인물들이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낸다. 

 

 서두에 언급했듯, 오키나와의 역사는 일본 역사와 별개로 본다면 우리 민족의 역사와 굉장히 닮아있다.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속에서 어이없이 바스라져간 수많은 생명들이 참 덧없게 느껴진다. 그때도, 지금도 힘없는 민초들은 누군가의 제물이 되어 덧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하지만, 살아있는 한,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밝은 햇볕 위로 끌어올려 바라보고, 받아들이고, 느끼고, 생각해야 한다.

억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일으켜야 하고, 절벽 위에 뚫린 새까만 공간으로 바득바득 기어 올라가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는 삶 속에서 새까만 죽음의 그림자를 밀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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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왼손 그리폰 북스 3
어슐러 K. 르 귄 지음, 서정록 옮김 / 시공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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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 딱 한 사람만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의 고독의 깊이는 어느정도일까?

외계인을 향한 인류의 갈망은 어찌보면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과 같은 심정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빛의 속도로 10억년을 가도 끝에 닿을 수 없는 광활한 우주. 이 상상조차 못 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넓은 시공간 안에 지적인 생명체가 인간밖에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가슴 한쪽이 쿵 내려앉을 정도의 고독감을 느끼곤 한다.

 

어슐러 르 귄은 영미권에서  'SF의 3대 거장' 이라 불리우는 아이작 아시모프와 로버트 하인라인, 아서 클라크 바로 뒤에 위치하는 작가이다. 당대의 SF소설들은 철저한 과학적 지식에 기반한 미래의 세계관을 풀어내는데 집중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어슐러 르 귄은 단지 지구와 지구의 미래 뿐 아닌 완벽한 '외계' 그 자체에 집중했다. 지구와 다른 환경, 다른 모습, 다른 역사를 가진 사회는 어떻게 발전해 왔을지, 그 안에 사는 지성체들은 어떠한 사고방식과 외모를 갖고 있을지에 집중했다. 그녀는 그야말로 놀라운 상상력과 깊이있는 통찰력으로 무척 뛰어난 리얼리티를 보여준다. 

 이렇듯 어슐러 르 귄은 당시 SF장르를 지배하던 남성들이 만들어낸 패러다임을 과감하게 역행하며 수많은 작품들을 끊임없이 발표했고, 그녀의 작품들이 내포하고 있는 인문학, 사회학적 통찰력은 수많은 독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결국 그녀의 노력과 재능은 SF는 물론 판타지 장르를 통해서도 가감없이 발휘되며, SF 쪽에서는 '헤인 시리즈' 라 불리는 장편 연작으로, 판타지 쪽에서는 '어스시 시리즈' 라 불리는 장편 연작으로 결실을 맺으며 장르를 초월해 문학사 자체에 깊은 발자국을 남겼다.

 

 그녀는 당시 남성중심 사회에서도 그 누구보다 찬란하게 빛났던 별로써, 작품 전반에 페미니즘적인 성격도 짙게 묻어있다. 그녀의 페미니즘은 남성을 적으로 상정하는 공격적인 성향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의 '다름'을 직시하고, 사회적인 불평등, 부조리함을 인지시킴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남녀 평등을 추구했다.

 

[ "같은 종족이긴 합니다만 그 차이는 매우 크지요. 저는 사람의 일생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이 남자로 태어났는지 여자로 태어났는지에서 결정된다고 생각해요.(...)"

 "평등은 보편적인 규칙이 아닌가요? 아니면 여자들은 정신적으로 열등한가요?"

 "(...)여자들의 지성이 모자란 것은 아닙니다. 몸도 근육질은 아니지만 남자보다 인내력은 강하지요. 그리고 심리적으로도..."

그는 난로의 불꽃을 한동안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하스, 여자에 대해서 도무지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왠지 여자란 존재가 당신보다 더 외계인처럼 느껴지는군요. 당신은 어쨌든 나와 같은 성이고..."]

p. 299~300. 지구인 겐리와 게센의 원주민인 세렘의 대화.

 

 

 [어둠의 왼손] 은 1969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Sf-판타지 문학상의 양대산맥인 네뷸러와 휴고 상을 동시에 휩쓴 작품이다.

어슐러 르 귄의 대표적인 연작 시리즈물 '헤인 연대기' 에 속하는 작품으로 83개의 행성과 3000개의 국가가 맺고있는 일종의 상호협력기구인 '에큐멘' 에서 지적인 생명체가 살고 있는 행성 '게센' 을 새로 발견하여 일종의 사자로 파견한 '겐리 아이' 라는 인물이 겪는 일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게센은 에큐멘에서 '행성 겨울' 로 불리우는 극한의 자연환경을 갖고 있지만, 지구인과 거의 비슷한 외모를 가진 원주민들이 독창적인 사회체제를 갖고 문명을 이루고 있었다. 이 행성에는 특이하게도 게센인들 외에는 다른 종의 동물이 거의 없었고, 자연 환경상 날짐승이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도 게센인들은 양성兩性이었다. 이들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케머' 라고 불리우는 기간이 주기적으로 찾아오는데, 일종의 임신가능기로써 게센인들은 바로 이 기간동안에만 상대에게 성욕을 느끼게 된다. 

 에큐멘에 속해있는 인간 종족 가운데서도 양성을 가진 종족은 게센인이 유일했기에, 겐리 아이는 게센의 사회에서 뜻밖의 상황들에 맞닥뜨리게 된다.

 

 이 작품은 타자他者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 관한 구체적이고도 명확한 이야기인 동시에, 남성과 여성을 차별하는 사회의 부조리와 불합리를 설명해주는 이야기이다. 나아가, 인류의 사회구조와, 문명 그 자체에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에 따른 역할 구분이 얼마나 근원적인 문제를 유발하는지에 관해 깊이있는 통찰을 보여준다. 

 

 작품은 놀라운 스토리 텔링을 통해 게센인들의 삶과 사상을 보여준다. 

성욕이 담보되지 않은 사람과 사람간의 우정과 사랑의 미묘한 경계, 지극히 지구인적인 관점에서 동성과 이성을 넘나드는 자유롭고도 미묘한 연인관계, 가족관계, 그리고 역시 그로 인해 파생되는 독특한 정치구조와 국가 구조, 그와 함께 게센인들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통찰력으로 인해 탄생한 종교 등 경이로운 상상력들이 깊이있는 통찰과 안목을 통해 생물-인문학적인 개연성을 끊임없이 획득해간다. 

 

 게센인과 그들의 사회에 관한 이야기도 참으로 흥미로웠지만, '에큐멘' 이라는 범 우주적인 협력기구 또한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들은 행성을 묶어주는 네트워크이지만, 구속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순수하게 행성간의 우호적인 교류를 위해 만들어진 협력기구인 동시에 체제로써 고도로 성숙된 이상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특히 사자를 파견할 때 단 한명이 행성으로 내려간다는 사실도 파격적이고도 놀라웠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연락용 위성을 행성 궤도에 띄워놓고, 11명의 선원이 수면대기중인 우주선이 위성궤도에 체류중이지만, 행성에 내려가 동맹임무를 수행하는 사자는 단 한 명. 그것은 상대 문명에 대한 지극한 존중이자 배려로써 에큐멘이 '진정한' 협력기구라는 점을 증명한다. 88개의 행성에 3000개의 국가가 가입해 있는 초 거대 단체이지만, 상대 행성을 굴복시켜 억지로 가입하게 하지 않는 것이다. 진정한 '협력' 이란 그런 것 아니겠는가.

겐리 아이는 자신의 진심. 에큐멘의 진심을 게센인들에게 보여주며 동맹 가입을 설득하려 한다. 그가 타고 내려온 우주선은 아낌없이 게센인들에게 내어주어 분해하게 하고, 가지고 있는 첨단 기술들을 대가없이 나눠주려한다. 

사실, 양성인이 등장하는 외계 행성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는 작품이지만, 이 작품 안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은 사실 에큐멘이라는 협력단체였다. 어떠한 이익도 바라지 않으며, 구체적으로 행정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기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에큐멘은 협력단체이며 협력기구이지만 동시에 거대한 체제이고, 88개의 행성과 3000여개의 국가가 공유하고 있는 평화에 대한 거대한 갈망이다. 이런 단체가 정말 가능할까?? 상식적으로 기능적인 면에서 불가능에 가까울터다. 

 좀 더 생각해보면, 에큐멘에는 이미 충분한 행성들과 충분한 인간들이 있다. 단체 자체가 충분히 성숙될 만큼 성숙되어 있는 상태이다. 무려 88개의 행성이다. 게센과 같은 외딴 행성의 자원이나 인력이 필요하지 않다. 전쟁은 공멸이지만, 교류는 공생이다. 88개의 행성과 3000여개의 국가가 가입되는 동안 분쟁이나 전쟁이 없었을 리 없다. 무수한 전쟁과 숱한 희생 속에서 당연한 진리를 깨우쳤을 것이고, 그로 인해 생겨난 여러가지 체계가 성숙될 만큼 성숙된 협력체계가 바로 '에큐멘' 인 것이다.이런 맥락에서 '에큐멘' 은 어슐러 르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성숙한 형태의 협력기구이며, 가장 갈망하는 협력체계이자 평화에 대한 갈망이 구현된 것으로 '헤인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어슐러 르귄의 희망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에큐멘의 입장에서 지적인 생명체들이 살고 있는 외딴 게센 행성은 고독하고 외로운 존재로써 빨리 이 친구를 우리 무리 안에 편입시켜서, 수많은 다른 친구들이 있음을 알려주고 싶은 것이다. 외롭지 않게 해주고 싶은 것이다. 

 

 "당신네 종족은 이 세계에서 소름 끼칠 만큼 외로운 동물입니다. 다른 포유동물도 없고 양성을 가진 다른 동물도 없으니까요. 심지어 애완동물로 기를 만한 정도의 지능을 가진 동물도 없지요(...)철학적으로, 정서적으로 보면 당신들은 너무도 고독하고 적의에 찬 세계 속에 살고 있어요 "

p. 297. 

 

[어둠의 왼손]은 여러번 읽은 책이다. 

어슐러 르귄의 소설은 너무나 다양한 안목과 놀라운 통찰력들이 깃들어 있어서 한두번 읽어서는 그 맛을 충분히 만끽할 수 없다.

처음 읽었을 때는 단순히 양성인 게센인들이 신기할 따름이었지만, 두번 읽을땐 게센인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 구조의 논리적 개연성, 게센의 자연환경으로 인한 게센인의 생활 양식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사회 구조, 정치구조, 그리고 중간중간 들어있는 게센의 전설과 종교들 등 매 번 놀랍고 새로운 발상들이 나를 깜짝깜짝 놀라게 만든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이야기는 지극한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당신은 혼자이면서도 실은 혼자가 아니군요. 아마도 당신은 우리가 이원론에 사로잡혀 있는 것 못지않게 전체성에 빠져 있는 것 같아요."

"우리 역시 이원론자입니다. 이원론은 본질적인 것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나' 와 '타자' 가 있는 한 말입니다."

"나와 당신... 그렇군요. 그 편이 성性보다는 더 넓은 범주이겠군요."

p.298~299

 

인간은 스스로를 자각하는 존재이다.

이 말은 인간은 누구나 본질적으로 외로운 존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작품의 제목인 [어둠의 왼손]은 작품 내에 등장하는 게센인의 노래에서 유래한다.

 

"빛은 어둠의 왼손

그리고 어둠은 빛의 오른손

둘은 하나, 삶과 죽음은

케머 연인처럼

함께 누워 있다

마주 잡은 두 손처럼

목적과 과정처럼"

p.298

 

즉, 이 책의 제목인 '빛' 인 것이다. 

 

어둠과 빛, 삶과 죽음, 목적과 과정.

남자와 여자, 그리고, 나와 당신. 

어쩌면 인류와 지구, 외로움마저도.  

함께 누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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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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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은 신神의 나라이다' 라는 문장을 본 기억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신' 이란 GOD와는 완전히 다르다. Ghost 나 Spirit에 가까울까. 샤머니즘에서 파생된 각종 신들이 일본에서는 여전히, 섬겨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큰 갈등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와 일본의 문화는 사실 쌍둥이처럼 닮아있다. 일본인들 대다수의 종교인 불교와 신도神道는  우리의 불교와 무속신앙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만물, 특히 자연과 조상을 섬기는 신도와 우리의 무속신앙은 쌍둥이처럼 닮아있다. 하지만 우리의 무속신앙이 '무당' 중심의 종교라면 일본은 '신사' 위주의 종교이다. 우리의 무속신앙은 불교와 결합한 형태로 발전하다가 기독교가 급속도로 유입되며 점차 갈 곳을 잃어버린 것에 비해 일본의 신도는 불교과 결합한 형태로 발전하여 지금도 일본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고 있다. 일본의 정치인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참전한 군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야스쿠니 신사를 지금도 참배하고 있고, 도쿄같은 대도시 곳곳에 신사가 자리잡고 있으며 여전히 수많은 일본인들이 복과 행운을 빌기 위해 찾을 뿐 아니라, 너구리나 고양이 같은 동물들은 물론 제의적인 의미를 지닌 상징들을 여전히 숭배하고 있다.

다시 언급하지만 우리 문화와 일본 문화는 그 뿌리가 거의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쇄국' 을 천명했던 우리 나라가 근대에 접어들며 일제와 미제의 통치를 받으며 기이하게도 기독교가 발달하며 무속신앙등의 전통 종교가 이른바 '미신'으로 폄하되며 배척당한 것에 비해 섬나라인 일본은 '개항' 과 함께 전통 종교인 신도가 발달한 현상은 많은 인문.종교.역사. 인류학자들의 구미를 자극하고 있다.      

 일본에 설화(모노가타리) 가 하나의 문학으로 자리잡은 것도 현상적으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우리는 '미신' 으로 치부하지만, 일본에는 '당연' 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수많은 것들이 '문학' 의 형태로 자리잡는 것 말이다. 기독교가 온전히 자리잡은 우리나라에 수많은 '기독교 서적' 이 있는 것 처럼 일본에는 수많은 '설화 문학 서적' 이 있고, 그러한 세계관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수많은 '기독교 간증집' - 이른바 기독교 서적 시장이 있다면,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크게 발달한 일본에는 수많은 모노가타리 문학 시장이 있다고 봐도 지나친 비약은 아닐 것이다. 

 내가 일본 문학을 처음 접했던 것은 90년대 후반. 고등학교 2~3학년 무렵이었다. 

남고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가 '노골적인 성애묘사' 부분만 접힌채로 지금의 야동처럼 손에 손을 타고 전해졌고, 그렇게 일본문학을 접했던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무라카미 류를 그렇게 접했었다. 비슷한 시기에 읽었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라는 작품은 그야말로 '신기' 한 소설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읽었던 '해변의 카프카' 역시 그와 비슷한 '신기' 한 느낌을 간직하고 있는 작품이었다. 특히, 만화가의 꿈을 꾸던 그 시기에 탐독했던 수많은 일본 만화들과 간간히 접했던 일본 문학은 '환상' 이라는 틀 안에서 밀접하게 맞닿아 있었다.

 

 '달'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작품은 일본의 고전 모노가타리 문학과 현대 문학과의 접점을 이룬듯한 느낌이다.

개인적으로 일본 문학에 대한 일종의 고정관념이 있었다. 장르문학을 중심으로 크게 발달한 일본문학은 캐릭터와 서사에 특히 강하다. 문장은 대부분 캐릭터를 묘사하고 서사를 풀어내기 위해 간결하게 벼려져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왔다. 치밀하게 계산된 단어들, 체계적으로 짜여진 문장들, 의도대로 나뉘어진 문단들. 간결하고 절제된 문체. 그리고 그 안에 잠재되어 있는 허무주의와 판타지, 그리고 마치 그것들을 까부수겠다는 듯한 노골적인 성애 묘사. 내가 가지고 있는 일본문학에 대한 편견은 그런 것들이었다.

 이 작품은 나의 그런 편견들을 완벽하게 까부수는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유려하고 화려한 묘사들이 첫눈에 들어왔다. 

 


"대단히 준수한 용모, 그러나 재빠르게 두세 번씩 연이어 깜빡이는 그 깊은 눈매에는 붉은 기 도는 동판에 예리한 침으로 수없이 선을 덧새긴 듯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개화기 이전에는 보기 힘들었을, 이국적인 흑담즙질 얼굴." 


"노승은 대답없이 입을 다문 채 붉은 저녁 해에 눈길을 던졌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 한 뭉치가 무심히 놓여졌다."

" 바로 조금 전까지 그윽이 바라보던 눈앞의 꽃이 활짝 핀 채로 돌연 바닥에 떨어지듯, 여인의 환상이 본래 자신의 세계로 물러가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불현듯 마사키의 마음속에 꿈이니 현실이니하는 말이 넘쳐나와 각각의 세계를 결박하기 시작했다. 여인은 언어에 의해 갇힌 몸이 되었다." 

   

 솔직히 조금은 과하게도 느껴지지만, 은유와 직유, 대유를 넘나드는 이런 화려한 수사법들은 물론, 고풍스럽고 전통적인 묘사와 함께 세련되고 감각적인 단어들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고전적이지만 고루하지 않고, 세련되지만 묵직하며, 유려하지만 튀지 않는 문장들이 첫인상을 사로잡는다. 

 독자의 호흡을 쥐락펴락하는 작품의 호흡 역시 기가 찰 만큼 적당하다. 마치, 소개팅 자리에서 지루해질 때 쯤 관심있는 화제를 툭툭 내뱉어 어색한 공기를 누그러 뜨리며 호감을 사는 파트너의 느낌이랄까. 아무렇게나 던진 듯한 말들이 큰 호감을 이끌어 냈는데, 알고 보니 그 말들이 다 계산된 것들임 -내가 이 화제를 꺼내면 분명히 네가 좋아할 줄 알았어. 같은?- 을 느꼈을 때의 기분이랄까. 순간순간 번득이는 작가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다.   마치 무엇에 홀린 듯, 혹은 아무 생각 없이 휘갈긴 듯한 일관성 없는 서사구조가 작가의 탁월한 호흡과 더불어 엄청난 시너지를 발휘한다. "이게 뭐지? 이게 뭐지??" 하면서도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독특한 흡입력이야말로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 아닐 수 없다. 


 작가의 의도대로, 주요 화자인 마사키를 중심으로 읽다보면, 서사의 흐름 자체가 혼란스럽고 어지럽다는 사실을 쉬이 느낄 수 있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시공간을 비틀고, 나비와 뱀 같은 메타포를 사용해 끊임없이 마사키를 혼란시키고, 마사키를 뒤쫓는 독자들을 혼동시킨다. 그리고 끝내 서사의 마무리는 마사키가 아닌 다카코를 통해 맺어버린다. 

 이 이야기는 난데없이 시작해서, 황급하게 마무리된다. 이야기의 구조 자체가 치밀하지 않은 듯 보이고, 여백이 굉장히 많은 작품이다.


 소설들을 읽다보면, 이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책을 덮으며, "아, 이건 이런 이야기였구나." 라고 할 때와, "이건 무슨 이야기야?" 라고 할 때.

대부분 전자의 책이 잘 읽히고, 후자의 책은 잘 읽히지 않는 편인데, 이 작품은 후자이면서도 잘 읽히는 편이었다.

거의 책을 펴자마자 단숨에 읽어내려갔을 정도로 술술 잘 읽혔음에도, 작가가 독자에게 던지는 엄청난 여백과 수수깨끼들에 정신이 몽롱할 정도였다. 마치 수수깨끼를 펼치면 여백이 채워질 것 같은 느낌이어서, 정신없이 수수깨끼에 매달렸더랬다.

읽고 난 뒤 한참동안, 그리고 며칠동안 문득문득 생각나며,

"그래서 이건 어떤거지? 이 장치는 뭐를 위한 장치였던거지? " 등등.


사실 개인적으로 소설에서 뭔가를 얻으려는 편은 아니다.

애초에 소설은 독자에게 답을 주기 위한 것도 아니고, 저자가 한가지 주제만을 위해 한 권을 책을 쓰지는 않는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화두는 있을지언정, 한 권의 책엔 한 작가의 수많은 사상들이 집적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이야기 그 자체에 집중하는 편인데, 이 작품은 이야기의 얼개 안에 독자의 상상력을 요하는 수많은 빈틈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화두는 '나 자신을 내던지는 사랑', 즉, '정열' 일 것이다.

주요 화자인 마사키는 정열을 잃고 희미하게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언젠가 자신을 다 바칠 정열의 대상을 찾기를 갈구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 정열의 대상이 사랑의 대상으로 귀결되었고, 결국 그것을 위해 스스로를 활활 태우게 된다.

작품을 '미사키의 여정' 이 아닌, '미사키의 정열' 중심으로 읽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빈틈이 어느정도 메워지고, 작가가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것처럼 보이는 장치들이 제 자리에서 삐그덕 거리며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알 수 있다. 


 한 때 '매트릭스' 라는 영화에 열광했던 적이 있다.

매트릭스가 정말 대단한 이야기였던 이유는, 현실現實과 실재實在에 관한 끊임없는 질문과 함께, 감독들의 철학적인 사유의 열매들이 툭툭 던져졌기 때문이었다. 뿐 만 아니라, 이야기의 중간 중간에 수많은 빈틈과 여백들을 늘어놓음으로써 자연스럽게 관객들이 끼어들 여지를 마련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수많은 매트릭스 관련 서적들이 나왔었고, 이공계에서 바라본 해설서와, 인문계에서 바라본 해설서들이 교차로 등장하여 수많은 매니아들을 끌어들였더랬다. 심지어 감독들인 워쇼스키 (당시)형제가 철학적인 바탕이라고 언급했던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르끄와 시뮬라시옹에 관한 책들이 국내에 출간되기도 했고, 기독교계에서는 매트릭스를 '반 기독교적' 이라고 공격하는 책들과, 주인공 '네오' 에 '예수 그리스도' 를 대입시킨 '친 기독교적' 종교서적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빈틈' 과 '철학적 사유'.

[매트릭스]와 [달]은 이야기의 구조면에서 상당히 닮아있다.

뭐랄까.

천재들의 작법, 화법이랄까. 

나는 그냥 내가 하고픈 말을 했는데, 하고픈 이야기를 썼는데, 관객과 독자들이 환호하고 열광하고, 파고들고, 분석하고, 수많은 다른 이야기를 양산해낸다. 

당연하게도 이런류의 이야기들은 호불호가 완전히 나뉜다.

치를 떠는 쪽과, 열광하며 파고드는 쪽. 

어떤 독자를 막론하고,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얇다는 것일 터다.


얇지만, 몇배나 많은 상상력과 이야기들을 이끌어내는 작품.

[달]의 진짜 매력은 그런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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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5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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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의 성性적인 기호嗜好를 가지고 있다. 

단순히 이성에 대한 '매력포인트' 라고 하기엔 보다 농밀하고, 보다 관능적으로 '느끼게 되는' 어딘가, 혹은 무언가 가 있다는 뜻이다. 개인적으로는 바로 이 '성적인 기호' 야말로 인간이란 존재에게 있어 섹스가 단순히 본능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만약 섹스가 단순히 본능에 의한 행위라면 그 대상의 생식력과도 무관한 단순한 '기호' 라는 것이 필요할 리도 없을 것이다. 이 '성적인 기호'는 대부분 '최초의 기억'이나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겨난다. 여성의 가슴이나 힙은 인간이라는 종족 자체의 번식과 관련되었기에 종족의 유지를 위해 기본적으로 성적인 매력을 갖고 있다고는 하지만, 손이나 발, 손가락과 발가락, 손톱, 복사뼈, 발목, 아킬레스건 등에 성적인 매력을 느끼는 것은 분명히 개개인의 기호가 발현되는 것이다. 이성의 목젖이나 잘록한 발목, 종아리, 얇은 손목, 가슴털 등에 섹시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성별이 다름으로 인해 '갖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한 욕구가 포함된 것일 수도 있다.  

 '페티시즘Fetishism'  의 개념에 포함시킬 수 있는 이와 같이 조금은 '특별한' 성적 기호는 한때는 일종의 정신질환적인 집착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현대에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욕들 중 하나라는 것이 통설로 적용되고 있다. 인간은 그 대상이 어떤 것이든간에 정도가 심하면 일종의 도착증세를 보이게 된다. 페티시즘 역시 마찬가지이다. 손이나 발, 손톱이나 털, 제복이나 스타킹, 레깅스, 타이즈, 속옷 정도라면 그나마 평범한 축이고, 때로 페티시즘은 특정 체위나 행위(목을 조른다거나 묶는 등 사디즘이나 마조히즘과 결합되는 경우도 많다.), 심지어는 대변이나 소변이 그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게 무엇이든, 정도가 어떻든간에, 이러한 성적인 기호가 사회가 용납하는 정도를  벗어나는 것들이 대상이 되면 당사자는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된다. 성적인 욕구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지만, 파트너와 공유되어야 하고, 결과적으로는 사회의 최소 구성원인 가족을 만드는 가장 상징적인 소통수단인 섹스와 가장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성적인 욕구에 심각하게 도착증세를 보이게 된다면 당연히 그 결과는 폭행이나 살인과 같은 강력 범죄로 이어지기 때문에 개인적인 부분인 동시에, 사회적인 부분일 수 밖에 없다.    

 

 험버트는 '님펫' 이라는 존재를 갈구한다. 님펫이 아니면 성적인 욕구는 해갈되지 않는다.  

험버트가 님펫이라고 명명한 이 존재는 간단히 말해, 육체는 미성년이지만 정신은 성인인 독특한 기운을 뿜어내는 '여자아이'들을 일컫는다. 험버트가 갖고있는 이 님펫에 대한 일종의 페티시즘은 어렸을때의 경험으로부터 기인한다. 어린시절 겪었던 첫사랑의 감정과 첫 성경험의 쾌락이 합쳐진 결과로써 그 당시 사랑했던 소녀의 나이, 피부, 헤어컬러, 미묘한 뉘앙스, 분위기등이 깊이 각인된 것이다. 무엇보다 심각한 부분은 험버트에게 각인된 성적인 대상이 반드시 '미성년' 이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미성년자는 대부분의 문명사회에서 가장 보호받아야 할 대상 1순위에 꼽히는 계층이다.  당연하게도, 인간은 필멸의 존재이기때문에 인류라는 종족의 생물학적인 지상과제는 '다음세대를 키워내는 것' 이기 때문이다. 미성년자에 대한 범죄는 그게 무엇이든 간에 너댓배로 강력한 처벌을 받게 된다. 특히 이 작품의 배경인 미국에서는 그 수위가 훨씬 높다. 특히 미성년자와 갖는 성관계는 무조건 처벌대상이 된다. 험버트는 자신의 이러한 성적인 '각인' 의 심각성을 알아채고,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하고, 성인 여성과 정상적인 관계를 갖기 위해 노력하며 심지어 결혼을 하기도 하지만, 이처럼 본능적인 욕구와 연결된 심리적 각인은 쉬이 없앨 수 없었다. 험버트는 가능한 미성년자들이 많이 모이는 곳 부근에서 거주하며 그 안에서 님펫들을 찾아 눈으로 보고, 혼자 상상하며 욕구를 해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험버트는 운명과도 같이 '돌로레스 헤이즈' 라는 소녀를 만나게 된다. 

타고난 님펫. '롤-리-타'. 험버트는 욕구의 발현인지, 꿈같은 사랑인지 알 수 없는 열병에 시달리며 아슬아슬한 운명의 외나무다리를 건너기 시작한다. 

 

 주석이 본편만큼 많은 문학동네판 롤리타는 20대 초반에 읽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충족감을 안겨주었다. 

우연히 문학동네 편집자들로부터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문체를 한글로 옮겨내는 데에 대한 어려움을 충분히 들었더랬고, 커뮤니티를 통해 여러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기에 넉넉한 마음으로 충분히 기다렸기에 엄청나게 부풀어 올랐던 기대감은 완벽하게 충족시켜주는 훌륭한 번역서였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이 긴 서사시를 엮어내며 비슷한 구조의 문장이 거의 단 한 줄도 없을 정도로 모든 문장들을 공들였다고 한다. 새로운 방식의 묘사, 새로운 방식의 풍자, 수많은 단어들을 비틀고 꼬아 말장난을 하고, 수많은 실존 인물들과 문학작품들을 인용하고 차용하며 풍자하고, 심지어 문장의 구조와 문법까지 마치 레고 조각처럼 부수었다 조합하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문학동네판 롤리타는 그런 부분들까지도 한국 독자들에게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썼다는 점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이 작품은 출간되었을 당시에도 문학계 전체가 큰 충격을 받았었고, 심한 평가를 받으며 심지어 법정까지 가서 판금조치(1955)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2심에서 그 판결이 뒤집히며 1958년 드디어 뉴욕에서 처음으로 발매되어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된다. 전체적인 내용을 보면 이 작품은 충분히 '포르노그래피' 라고 읽힐 만 하다. 만약 누군가 줄거리만 다이제스트로 뽑은 축양본을 낸다면, 엄청나게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포르노가 맞을 것이다. 사실 작품안에는 지나치게 노골적인 성행위에 대한 묘사는 없지만, 엄청난 문장력과 아이디어들로 점철된 관능적인 은유들이 꽉꽉 들어차있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단순히 소아성애자의 욕망에 대한 포르노가 아니라, 사회가 용납할 수 없고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커다란 욕망을 안고 태어난 불운한 한 남자의 처절한 서사시이다. 험버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보지만 님펫에 대한 성적인 욕구를 제어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나마 그는 분별력 있는 성인이었고, 충분한 교육을 받은 엘리트였기에 해볼 수 있는 수단이 많았고, 또 그 모든 수단을 충분히 활용했었다. 그럼에도 불가능했다.

 성적인 욕구와 사랑(에로스)이라는 감정은 서로에게 종속되어 있다. 성적인 욕구가 식으면 남녀간에 사랑은 더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된다. '사랑' 이 '다른 누구도 아닌 너와 함께 있고 싶다.' 는 것이라면 성적인 욕구는 그 '함께 있고 싶다' 에 포함되는 것이다. 신이 흙으로 '몸' 을 빚은 순간부터 그것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험버트는 하필이면, 운이 없게 '사회가 용납할 수 없는' 미성년자에게 그런 욕구를 갖게 된 것이고, 또 하필이면 롤리타를 만나게 된 것이리라. 험버트는 롤리타를 사랑하면서도 온갖 고뇌와 고충으로 가득 찬 생활을 하게 된다. 연애란 그런 것 아니던가. 마냥 행복하고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연인에 대한 수많은 의심과 오해와 갈등, 서로의 현재에 대한 직시와 미래에 대한 고민, 서로가 서로를 알기 전의 과거들에 대한 수많은 의문과 추측들, 거기에 험버트는 실제로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는 자의식까지 결합되며, 그야말로 어마무지하게 고난스러운 연애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까짓 사랑, 안하고 만다!! 했으면 좋겠지만, 사랑이라는 감정, 욕망이라는 감정은 그렇게 쉽게 제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험버트는 어쩔 수 없이 이 고생스럽고 고단하고 유난스러운 관계를 1초라도 더 길게 유지하고 싶을 뿐이다. 롤리타를 제어하기 위해 갖은 고생을 다 하고, 비위를 맞춰 '한 번 해볼' 구석을 찾아 안달복달 하는 모습은 같은 남자로서 안타깝고도 웃긴 모습들이다. 그 와중에도 법의 테두리에 걸치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모습은 전형적인 범죄자의 모습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롤리타라는 소녀 역시 쉬이 보아 넘길 꼬맹이가 아니다. 

그녀는 내가 읽어본 모든 소설들을 통틀어 가장 강력한 요부妖婦중의 요부이다. 무엇보다 사랑에 빠진 남자를 '갖고 놀' 줄 안다. 아마 롤리타는 험버트를 처음 만난 그 순간, '이 아저씨는 나한테 빠졌어' 라고 느꼈으리라. 이런 관점에서 이 책을 다시 읽어보면 롤리타의 무시무시함을 더욱 절절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이미 남자의 감정을 가지고 노는 방법은 물론 섹스를 무기로 이용할 줄 알았다. 몰랐다고 하더라도, 굉장히 빠르게 체득해 낼 수 있었으리라. 호락호락해 보이지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아름답고 강하고 위험한 롤리타.  

 

 결국 이 작품은 욕망에 허우적대는 가련한 한 중년 남자의 고되기 짝이 없는 연애사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은 어렵고 복잡하다. 어렵고, 복잡하지만 30대 중반을 코앞에 둔 나도 이것 한가지는 확언할 수 있다.

사랑은 가장 폭력적인 감정이다. 위험한 감정이다. 중세시대만 해도,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연적과 목숨을 건 대결을 하는 일은 흔하디 흔했다. 수많은 그들은 그녀들을 위해 검을 빼들고 총을 빼들었다. 심장을 바친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고, 폭행하는 일은 현대에서도 흔치 않게 볼 수 있다. 

'돌로레스 헤이즈 -; 롤 - 리 - 타'

그 이름은 험버트에게 있어 쾌락과 두려움을 동시에 주는 여신의 이름이었다.

그렇다. 어쩌면 욕망이란 쾌락과 두려움이 공존해야만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험버트가 님펫이란 존재에 집착하게 된 최초의 기억에도 쾌락과 두려움은 공존했었으니.  

 

 

 

ps. 롤리타의 엄마 --> 험버트 --> 롤리타  사이의 묘한 일방적인 삼각관계도 꽤나 재미있는 그림이다. 롤리타의 엄마가 험버트에게 보내는 욕망의 시선과, '엄마' 로서 '여자' 로서 발휘하는 자제력과 험버트가 롤리타에게 보내는 욕망의 시선과, '범죄' 로서 발휘하는 자제력과 '남자' 로서 취하는 행동들이 묘하게 비슷하면서도 대조된다. 무엇보다 작가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욕망에 관한' 남녀의 시각과 정서에 대한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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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팔이 소녀 말로센 시리즈 3
다니엘 페낙 지음, 이충민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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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이런 작품일거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다.

카피에 나와있듯, 코믹 - 스릴러 - 판타지라길래, 쑥쑥 잘 읽히겠거니, 하며 헬스장에서 고정 싸이클에 앉아 읽을 책으로 찜해둔 터였다. 계획대로 헬스장에 들고가서 고정 싸이클에 앉아 가볍게 펴들었는데, 잠깐 사이에 땀을 뚝뚝 흘리며 숨을 헐떡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책을 좀 더 읽기 위해 워밍업으로는 꽤 과한 30분동안 페달을 돌렸고, 그 뒤로부터는 헬스장에 갈때마다 고정 싸이클을 꼭 30분 이상씩 하게 되었다.(집에 가지고 가서 읽을 생각은 안했다. 사실 내겐 그 시간이 가장 집중이 잘 되는 시간이라서.) 

 

 끔찍하게 난자당한 샹프롱 교도소의 소장 생티베르의 시체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결혼식날 천국같은 교도소에서 천사같은 신랑을 잃어버린 신부 클라라와 그의 오빠 뱅자맹 말로센, 그리고 그의 연인 쥘리와 그의 사랑스러운 가족들, 그리고 뱅자맹의 일터인 탈리옹 출판사의 여러 사람들이 폭풍같은 연쇄살인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작품은 평이한 소재와 신선한 아이디어들, 평범한 서사와 유려한 묘사들이 모두 적재적소에서 놀라운 효과를 발휘한다. 작가인 다니엘 페냑의 문장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우며, 문장마다 위트와 유머가 송알송알 박혀있다. 게다가, 주인공인 뱅자맹 말로센의 가족 구성원들이 참 재미있다. 장르소설에서 종종 등장하는 예지력을 지닌 꼬마가 등장해 이야기의 큰 흐름에는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이야기 전체의 정서를 절묘하게 컨트롤 해 내고, 산전수전 다 겪은 종군기자 출신의 연인 쥘리는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미스테리 스릴러는 조율하는 역할을 한다. 작품의 주인공 격인 뱅자맹 말로센을 이야기 초반부터 배재시키는 대담함도 놀랍다. 무엇보다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뱅자맹의 일터인 탈리옹 출판사의 '자보 여왕' 이다. 그녀가 바로 타이틀의 주인공인 '산문팔이 소녀' 이다. 

 

 이 작품은 장르소설의 관점으로만 보아도 대단히 잘 짜여진 수준높은 이야기이다. 여러 복선과 트릭을 심어 독자의 뒷발을 잡아채고, 뒤통수를 후려치고, 코와 입을 막고, 개성강하고 사랑스러운 인물들을 등장시켜 마음을 잡아끌고, 손을 잡아당기고, 반전에 반전으로 독자들을 와락 껴안았다, 확 밀쳐낸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의 전체를 관통하는 소재인 '상업적인 소설' 에 대한 이야기와 '다른 사람의 탈을 쓰고 살아가는 현대인' 에 대한 주제가 작품 전반을 묵직하게 잡아당기고 있다. 

 

 각종 SNS가 범람하는 요즘에는 '온라인 인격, 사이버 인격' 이라는 것이 발현된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실제 만나보면 얌전하고 조용하지만, 인터넷 공간 안에서는 활발하고 넉살좋기도 하고, 파괴적이고 인신공격적인 댓글을 남기는 사람들을 실제 만나보면 착하고 온순한 사람인 경우도 많다고 한다. 나 역시 내가 올리는 글들을 봐도 '이게 내가 썼나?' 싶은 것들이 많다. 지나치게 공격적인 어조로 글을 쓰고, 잰체, 난체하는 글을 쓴다던지, 실제 만나면 결코 못 건넬법한 오글거리는 댓글을 달기도 한다. 평소에 컴플렉스가 많아 조금 내성적이고 소심한 면이 있는 나는 항상 자신감에 차있고, 아는게 많고, 매사에 쿨한 사람들이 좋았고, 닮고 싶어했다. 인터넷 공간 안에서 닉네임의 뒤에 숨어 내가 원하는 나를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대부분의 생활 공간에서 연기를 하며 살아간다. 직장 상사 앞에서는 얌전한 부하직원이어야 하고, 한편, 이런 업무 저런 업무들이 잔뜩 몰려들때엔 무능한 사원을 연기해야하는 경우도 있다. 인사평가가 달린 프로젝트 앞에서는 자신만만한 연기를 해야하고, 맘에 드는 소개팅녀 앞에서는 뭔가 있는 든든한 남자를 연기해야 한다. 만원 지하철 안에서 간신히 찾아내 비집고 앉은 의자 위에서는 잠자는 연기를 해야 하기도 하고, 명절 즈음에는 회사일이 잔뜩 쌓인 연기를 해야 하기도 한다. 그런 모든 연기들이 어쩌면 모두 각자의 본질일수도 있다. 

 소설이란, 그런 것 아닐까?

작가라는 한 사람이 익힌 모든 삶의 경험과 교훈들, 보고 듣고 느낀 것들, 순간마다 했던 수많은 연기들, 사회의 통념과 정해진 윤리관 안에서 밀어넣고, 숨겨놓고, 밀봉하고, 상상했던 그 모든 일들.

 

 뱅자맹 말로센은 좋은 오빠이자, 좋은 아빠이자, 좋은 연인이자, 좋은 편집자이자, 좋은 부하직원이자, 좋은 친구였다.

그 모든게 어쩌면 다 다른 탈과 연기였을 수도 있고, 다 뱅자맹이 가지고 있던 본질일 수도 있다. 그런 그가 '소설'을 만드는 일을 했고, 다른 작가인 척 연기를 했으며, 결국 정말로 다른 사람의 장기를 몸 안에 넣기도 했다니. 본질을 찾는 과정을 참으로 멀고도 험하고, 복잡했고, 다난했다. 그리고 그가 다시 돌아간 자리는 좋은 아빠이자, 좋은 연인이자, 좋은 편집자이자, 좋은 부하직원이자, 좋은 친구로 연기하는 바로 그 자리였다.   

 

 사람들은 소설을 읽는다.

소설을 읽으며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자기 친구를 발견한다.

자기 과거를 발견하고, 자기 현재를 발견하며, 자기 미래를 발견한다.

인류의 역사를 발견하고, 지구의 역사를 발견하고, 인류의 미래를 발견한다. 

'산문팔이 소녀' 자보여왕이 책에 빠져든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는 작품'들' 안에서 한 작가의 삶 전체를 느껴냈다.

 

 사실, 딱히, 내가 꼭 '나' 일 필요는 없어도 상관 없지 않을까 싶다.

연인에게는 영원히 든든하고 사랑스러운 연인이어도 좋고, 자식들에게는 영원히 이 자리에 서 있는 버팀목이어도 좋고, 가끔은 쿨하고 시크한 척 해도 좋고, 소심하게 삐진 척 해도 좋고, 부모님 앞에서는 언제나 재롱떨고 귀염떠는 아이인 척 해도 좋고, 힘들고 지칠땐 병약하고 허약한 척 해도 좋다. 사회가 용인하는 범주를 벗어나거나 도덕적, 법적 기준을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그 어떤 연기를 해도 된다. 

타인과 사회에 맞춰 각기 다른 자신을 연기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인간의 본질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가장 '나 다운 것' 이란 것은 연기하고 또 연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최악 중에서도 최악은 최악의 일을 기다리는 것이다."

p.81

 

"사랑이 죽고 나면 인생은 끝없는 고통뿐이야."

 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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