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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5월
평점 :
'일본은 신神의 나라이다' 라는 문장을 본 기억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신' 이란 GOD와는 완전히 다르다. Ghost 나 Spirit에 가까울까. 샤머니즘에서 파생된 각종 신들이 일본에서는 여전히, 섬겨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큰 갈등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와 일본의 문화는 사실 쌍둥이처럼 닮아있다. 일본인들 대다수의 종교인 불교와 신도神道는 우리의 불교와 무속신앙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만물, 특히 자연과 조상을 섬기는 신도와 우리의 무속신앙은 쌍둥이처럼 닮아있다. 하지만 우리의 무속신앙이 '무당' 중심의 종교라면 일본은 '신사' 위주의 종교이다. 우리의 무속신앙은 불교와 결합한 형태로 발전하다가 기독교가 급속도로 유입되며 점차 갈 곳을 잃어버린 것에 비해 일본의 신도는 불교과 결합한 형태로 발전하여 지금도 일본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고 있다. 일본의 정치인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참전한 군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야스쿠니 신사를 지금도 참배하고 있고, 도쿄같은 대도시 곳곳에 신사가 자리잡고 있으며 여전히 수많은 일본인들이 복과 행운을 빌기 위해 찾을 뿐 아니라, 너구리나 고양이 같은 동물들은 물론 제의적인 의미를 지닌 상징들을 여전히 숭배하고 있다.
다시 언급하지만 우리 문화와 일본 문화는 그 뿌리가 거의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쇄국' 을 천명했던 우리 나라가 근대에 접어들며 일제와 미제의 통치를 받으며 기이하게도 기독교가 발달하며 무속신앙등의 전통 종교가 이른바 '미신'으로 폄하되며 배척당한 것에 비해 섬나라인 일본은 '개항' 과 함께 전통 종교인 신도가 발달한 현상은 많은 인문.종교.역사. 인류학자들의 구미를 자극하고 있다.
일본에 설화(모노가타리) 가 하나의 문학으로 자리잡은 것도 현상적으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우리는 '미신' 으로 치부하지만, 일본에는 '당연' 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수많은 것들이 '문학' 의 형태로 자리잡는 것 말이다. 기독교가 온전히 자리잡은 우리나라에 수많은 '기독교 서적' 이 있는 것 처럼 일본에는 수많은 '설화 문학 서적' 이 있고, 그러한 세계관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수많은 '기독교 간증집' - 이른바 기독교 서적 시장이 있다면,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크게 발달한 일본에는 수많은 모노가타리 문학 시장이 있다고 봐도 지나친 비약은 아닐 것이다.
내가 일본 문학을 처음 접했던 것은 90년대 후반. 고등학교 2~3학년 무렵이었다.
남고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가 '노골적인 성애묘사' 부분만 접힌채로 지금의 야동처럼 손에 손을 타고 전해졌고, 그렇게 일본문학을 접했던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무라카미 류를 그렇게 접했었다. 비슷한 시기에 읽었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라는 작품은 그야말로 '신기' 한 소설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읽었던 '해변의 카프카' 역시 그와 비슷한 '신기' 한 느낌을 간직하고 있는 작품이었다. 특히, 만화가의 꿈을 꾸던 그 시기에 탐독했던 수많은 일본 만화들과 간간히 접했던 일본 문학은 '환상' 이라는 틀 안에서 밀접하게 맞닿아 있었다.
'달'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작품은 일본의 고전 모노가타리 문학과 현대 문학과의 접점을 이룬듯한 느낌이다.
개인적으로 일본 문학에 대한 일종의 고정관념이 있었다. 장르문학을 중심으로 크게 발달한 일본문학은 캐릭터와 서사에 특히 강하다. 문장은 대부분 캐릭터를 묘사하고 서사를 풀어내기 위해 간결하게 벼려져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왔다. 치밀하게 계산된 단어들, 체계적으로 짜여진 문장들, 의도대로 나뉘어진 문단들. 간결하고 절제된 문체. 그리고 그 안에 잠재되어 있는 허무주의와 판타지, 그리고 마치 그것들을 까부수겠다는 듯한 노골적인 성애 묘사. 내가 가지고 있는 일본문학에 대한 편견은 그런 것들이었다.
이 작품은 나의 그런 편견들을 완벽하게 까부수는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유려하고 화려한 묘사들이 첫눈에 들어왔다.
"대단히 준수한 용모, 그러나 재빠르게 두세 번씩 연이어 깜빡이는 그 깊은 눈매에는 붉은 기 도는 동판에 예리한 침으로 수없이 선을 덧새긴 듯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개화기 이전에는 보기 힘들었을, 이국적인 흑담즙질 얼굴."
"노승은 대답없이 입을 다문 채 붉은 저녁 해에 눈길을 던졌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 한 뭉치가 무심히 놓여졌다."
" 바로 조금 전까지 그윽이 바라보던 눈앞의 꽃이 활짝 핀 채로 돌연 바닥에 떨어지듯, 여인의 환상이 본래 자신의 세계로 물러가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불현듯 마사키의 마음속에 꿈이니 현실이니하는 말이 넘쳐나와 각각의 세계를 결박하기 시작했다. 여인은 언어에 의해 갇힌 몸이 되었다."
솔직히 조금은 과하게도 느껴지지만, 은유와 직유, 대유를 넘나드는 이런 화려한 수사법들은 물론, 고풍스럽고 전통적인 묘사와 함께 세련되고 감각적인 단어들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고전적이지만 고루하지 않고, 세련되지만 묵직하며, 유려하지만 튀지 않는 문장들이 첫인상을 사로잡는다.
독자의 호흡을 쥐락펴락하는 작품의 호흡 역시 기가 찰 만큼 적당하다. 마치, 소개팅 자리에서 지루해질 때 쯤 관심있는 화제를 툭툭 내뱉어 어색한 공기를 누그러 뜨리며 호감을 사는 파트너의 느낌이랄까. 아무렇게나 던진 듯한 말들이 큰 호감을 이끌어 냈는데, 알고 보니 그 말들이 다 계산된 것들임 -내가 이 화제를 꺼내면 분명히 네가 좋아할 줄 알았어. 같은?- 을 느꼈을 때의 기분이랄까. 순간순간 번득이는 작가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다. 마치 무엇에 홀린 듯, 혹은 아무 생각 없이 휘갈긴 듯한 일관성 없는 서사구조가 작가의 탁월한 호흡과 더불어 엄청난 시너지를 발휘한다. "이게 뭐지? 이게 뭐지??" 하면서도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독특한 흡입력이야말로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 아닐 수 없다.
작가의 의도대로, 주요 화자인 마사키를 중심으로 읽다보면, 서사의 흐름 자체가 혼란스럽고 어지럽다는 사실을 쉬이 느낄 수 있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시공간을 비틀고, 나비와 뱀 같은 메타포를 사용해 끊임없이 마사키를 혼란시키고, 마사키를 뒤쫓는 독자들을 혼동시킨다. 그리고 끝내 서사의 마무리는 마사키가 아닌 다카코를 통해 맺어버린다.
이 이야기는 난데없이 시작해서, 황급하게 마무리된다. 이야기의 구조 자체가 치밀하지 않은 듯 보이고, 여백이 굉장히 많은 작품이다.
소설들을 읽다보면, 이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책을 덮으며, "아, 이건 이런 이야기였구나." 라고 할 때와, "이건 무슨 이야기야?" 라고 할 때.
대부분 전자의 책이 잘 읽히고, 후자의 책은 잘 읽히지 않는 편인데, 이 작품은 후자이면서도 잘 읽히는 편이었다.
거의 책을 펴자마자 단숨에 읽어내려갔을 정도로 술술 잘 읽혔음에도, 작가가 독자에게 던지는 엄청난 여백과 수수깨끼들에 정신이 몽롱할 정도였다. 마치 수수깨끼를 펼치면 여백이 채워질 것 같은 느낌이어서, 정신없이 수수깨끼에 매달렸더랬다.
읽고 난 뒤 한참동안, 그리고 며칠동안 문득문득 생각나며,
"그래서 이건 어떤거지? 이 장치는 뭐를 위한 장치였던거지? " 등등.
사실 개인적으로 소설에서 뭔가를 얻으려는 편은 아니다.
애초에 소설은 독자에게 답을 주기 위한 것도 아니고, 저자가 한가지 주제만을 위해 한 권을 책을 쓰지는 않는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화두는 있을지언정, 한 권의 책엔 한 작가의 수많은 사상들이 집적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이야기 그 자체에 집중하는 편인데, 이 작품은 이야기의 얼개 안에 독자의 상상력을 요하는 수많은 빈틈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화두는 '나 자신을 내던지는 사랑', 즉, '정열' 일 것이다.
주요 화자인 마사키는 정열을 잃고 희미하게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언젠가 자신을 다 바칠 정열의 대상을 찾기를 갈구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 정열의 대상이 사랑의 대상으로 귀결되었고, 결국 그것을 위해 스스로를 활활 태우게 된다.
작품을 '미사키의 여정' 이 아닌, '미사키의 정열' 중심으로 읽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빈틈이 어느정도 메워지고, 작가가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것처럼 보이는 장치들이 제 자리에서 삐그덕 거리며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알 수 있다.
한 때 '매트릭스' 라는 영화에 열광했던 적이 있다.
매트릭스가 정말 대단한 이야기였던 이유는, 현실現實과 실재實在에 관한 끊임없는 질문과 함께, 감독들의 철학적인 사유의 열매들이 툭툭 던져졌기 때문이었다. 뿐 만 아니라, 이야기의 중간 중간에 수많은 빈틈과 여백들을 늘어놓음으로써 자연스럽게 관객들이 끼어들 여지를 마련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수많은 매트릭스 관련 서적들이 나왔었고, 이공계에서 바라본 해설서와, 인문계에서 바라본 해설서들이 교차로 등장하여 수많은 매니아들을 끌어들였더랬다. 심지어 감독들인 워쇼스키 (당시)형제가 철학적인 바탕이라고 언급했던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르끄와 시뮬라시옹에 관한 책들이 국내에 출간되기도 했고, 기독교계에서는 매트릭스를 '반 기독교적' 이라고 공격하는 책들과, 주인공 '네오' 에 '예수 그리스도' 를 대입시킨 '친 기독교적' 종교서적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빈틈' 과 '철학적 사유'.
[매트릭스]와 [달]은 이야기의 구조면에서 상당히 닮아있다.
뭐랄까.
천재들의 작법, 화법이랄까.
나는 그냥 내가 하고픈 말을 했는데, 하고픈 이야기를 썼는데, 관객과 독자들이 환호하고 열광하고, 파고들고, 분석하고, 수많은 다른 이야기를 양산해낸다.
당연하게도 이런류의 이야기들은 호불호가 완전히 나뉜다.
치를 떠는 쪽과, 열광하며 파고드는 쪽.
어떤 독자를 막론하고,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얇다는 것일 터다.
얇지만, 몇배나 많은 상상력과 이야기들을 이끌어내는 작품.
[달]의 진짜 매력은 그런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