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노미아 출판사, 인류 천재들의 지혜 시리즈의 첫번째 책이라고 한다. 이제 한국말 천재는 우스개로 쓸 때 말고는 안 보면 안되나 하는 개인적 생각은 뒤로 하고, 첫 작가가 울프라니 기뿌다. 버지니아 울프의 산문 세 편과 짧은 소설 일곱 편이 실려 있다.
편집 후기에 따르면, 첫번째 글 <여성의 직업>은 <자기만의 방>의 속편으로 울프가 구상한 글이라고 한다. 여성의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지적하고 “허위에서 벗어난” 여성이란 누구일까, 여성의 본질을 궁리하자며 독자에게로 질문을 돌린다.
버지니아 울프는 처음 기사를 쓰고 받은 고료로 고양이를 들였다고 한다.
“기사를 쓰고 거기서 얻은 수입으로 덜컥 페르시안 고양이를 사다니 그것만큼 세상 쉬운 일이 뭐가 있을까요?”24
울프와는 상관 없는데 그림책 작가 마가렛 와이즈 브라운이 첫 책 팔고 번 돈 털어 꽃수레의 모든 꽃 통째로 산 거 생각났다. 그림책의 이 펼침면이 얼마나 화사하고 책에다 코를 벌름거리게 하는지, 화면으론 담아낼 수 없어 아쉽다.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3/0203/pimg_7276211843732683.jpeg)
적다가 보니 어쩌면 상관있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고정 수입 그 이후의 삶을 질문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울프와 브라운 모두 부유한 가정 출신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과 연 오백 파운드의 수입을 얻기 시작한 여성을 가정하고 나서 “이런 자유는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방은 여러분의 것이지만 여전히 텅 비어 있습니다. 그러니 방 안에 가구를 갖춰야 합니다. 장식도 해야 하고요. … 그 답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최초로 여러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가렛 와이즈 브라운은 어떻게 결정했냐면, 저 많은 꽃으로 자기 방을 꾸미고 친구들을 초대해서 파티를 했다.
다시 울프.
“그 천사는 죽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뭐가 남았냐고요? 수수하고 평범한 어떤 대상이 남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허위에서 벗어난 그 여자는 오롯이 그녀 자신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 그런데 그녀 자신이란 무슨 의미일까요?”
버지니아 울프가 직업생활에서 당면하는 문제 두가지 중 첫번째가 집안의 천사 죽이기였다. 읽으면서 내가 그동안 착각했다는 걸 깨달았는데.. 강요된 역할 규범이고, 외부적 명명일 뿐이라고 생각해서 집안의 천사랑 밖에서 싸우고 들어오면 될 줄 알았다. 근데 읽다 보니까 버지니아 울프는 이 집안의 천사와 자기 머릿속에서 맹렬히 싸우는 거다. 속삭일 때마다 막 잉크병을 냅다 던지고ㅋㅋ 목도 조르고, 법정에서 정당방위를 주장할 생각까지 미리 하는ㅋㅋㅋㅋㅋㅋ 아주 치열하고 귀여운 전투란 말이다.
흐하하. 내가 웃을 때가 아니다. 나는 주부고 급여 없는 노동을 한다. (그래서 잘 안한다) 그런 상황이 잘 없기도 하지만 “저는 주부입니다.” 어디가서 이렇게 말하게 되기까지 꽤 걸렸다. 전업 주부라는 말은 아직이고.
울프는 여성의 본질을 묻는데 난 어쨌든 자기소개를 해야하니깐 주부가 뭔지 궁금하다. 묶는다면 어떤 카테고리에 들어갈까.
학생, 직장인, 주부,
노동자, 무직자, 주부,
변호사, 의사, 소방수, 운동선수, 공무원, 주부,
인부, 잡부, 주부,
카테고리는 포기. 접미사로 모으면 어떨까. 한자 잘 모르지만. -사, -자, -인, -수, -부, -생, .. 뭐가 더 있나.
주부만이 며느리 부를 쓴다. 주부의 본질은 사람에도, 그가 수행하는 노동에도 있지 않다. 성별이다. 이 성별이 배태한 위치와 상황이다. 주부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사람을 안다고 착각하게 되지 않나? 가깝지는 않다고 쳐도, 반드시 본 적 있을 누군가를 대입하는 게 꽤 수월하지 않나? 과거의 나는 그랬다. 이를테면 그 사람이 하루종일 무얼 하며 보낼지, 주로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 어디일지, 하루하루가 어떤 모양일지, 대략 어떤 가족 구성원과 지낼지, 어울리는 친구풀과 인간관계가 어떻지, 가치관과 살아온 인생이 어땠을지 쉽게 예측한다. 그리고 그런 판단은 그 사람에 대한 나의 호기심도 삭제했다.
“그 봄에 내가 가장 거리낌없이 쓰던 해시태그는 ‘#직장인취미’ ‘#직장인소확행’이었고 쓰기 전에 가장 오래 망설이고 가장 적게 썼던 해시태그는 ‘#주부취미’였다.”70
혐오혐오 그렇게 밖으로 외치면서 그게 날 겨누는 줄도 몰랐다가, 최은미 소설 <눈으로 만든 사람>에서 똑같은 사람 만나고 휘청했더랬다. 집안의 천사를 목조르는 건 우습지도 않지. 집안의 여자가 죽어나갈 마당인데. 잘 썼지만 아는 얘기라 굳이 책으로는 읽기가 그랬다는 지인의 말에 지금 그게 전데요, 언니. 살려줘여. 속으로만 말했다. 흠모하는 언니와는 반대의 이유로 나는 실린 소설들이 좋았다. 대신 속을 까발려주어서. 나오는 여자들 지긋지긋한 데도 있지만 밉지 않아서. 책 속 인물들의, 이야기가 하고 싶다는 욕구를 포착해주어서.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건 자기혐오가 아니다. 좆빨러가 되지 않으려고 피오줌을 싼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게 전부는 아니니까. 나는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마음 붙일 곳 없는 낮에 대해서. 눈을 붙여도 잠들 수 없는 밤에 대해서. 남편과 노동을 나누기 위한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에너지를 뺏긴 채로 ‘행복한 아이를 키워내는 다른 여자들’과 ‘편하게 사는 다른 여자들’을 가위눌리듯 떠올리던 것에 대해서.
우리가 서로를 욕심내기 시작한 순간부터 어떻게 다시 고립되어갔는지. 그 외로웠던 봄에 대한 얘기를.”
다시, 다시, 울프.
“그녀(천사)는 죽었습니다. 그런데 나만의 경험을 솔직히 말하자면 두 번째 일은 내가 해결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여성도 아직 그 부분은 해결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명목상으로는 길이 열려 있을 때조차도, 다시 말해 여성이 의사나 변호사, 공무원이 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게 아무것도 없을 때에도 여성의 앞길에는 수많은 환영과 장애물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무엇인지 논의하고 실체를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대단히 가치 있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방, 돈, 천사를 해결하는 게 먼저이기 때문에 울프가 해결하지 못한 두번째 질문은 사실 내게 요원하다. 한국소설을 탐미하며 읽는 일이 아득한 만큼이나 멀다ㅋㅋ 그래도 몇가지 수확은 있다. 인정하기 힘들지만 내가 생각보다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것, 그걸 들어주는 사람도 있다는 것, 그게 나를 듣는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는 점. “여자 자신이란 무슨 의미일까요?” 물음에 대한 내 대답은 이런 것들에서 시작한다.
손에 펜을 쥐고 앉아 있는 한 소녀를 마음속에 그려 보세요. 소녀는 펜을 쥐고 있지만 몇 분이고, 몇 시간이고 잉크병에 펜을 담그지 않습니다. 제가 이 소녀를 생각할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깊은 호수 가장자리에서 낚싯대를 물 위로 드리운 채 꿈 속 깊숙이 잠겨 있는 낚시꾼의 모습입니다. 소녀는 저 깊숙한 곳에 가라앉아 있는 무의식적인 세상의 구석구석을 자신의 상상력이 제멋대로 휩쓸고 다니도록 내버려 두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경험이 찾아왔습니다. 제 생각에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훨씬 보편적으로 나타날 경험 말입니다. 낚싯줄이 소녀의 손가락 사이로 휘리릭 빠져나갔습니다. 소녀의 상상력이 쏜살같이 좇아갔지요.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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