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라이프 온 코트

1979년 9월 1일. 사법연수원에서 연수를 받기 시작했다. 당시 연수원은 덕수궁 건너편의 서소문 법원청사 내에 있었다. 60명씩 A, B 두 반이었고 나는 A반에 속했다. 두 반을 통틀어 여자연수생은 혼자였다. 두 달이 미처 지나지 않은 10월 26일, 잊지 못할 사건이터졌다. 방송은 종일 장송곡이나 그에 가까운 음악을 틀었고, 광화문 일대에는 통곡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저녁 6시경 강의가 파하면  8시 통금에 걸리지 않기 위해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길은 없었다. 이듬해 광주민주화운동 때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호남 출신 연수생들조차도 광주에서 북한의 사주를 받은 세력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하더라는 유언비어를 전해 들었을 뿐이라고 했다. 입수할 수 있었던『뉴스위크』는 꺼멓게 지워져 있었으나 친구로부터 어렵게 구했다는 『뉴스위크』 원본을 받아보니 상황은 짐작한 대로 심각했다.
1980년 말, 4개월간 서울지방검찰청에서 검찰실무수습을 할 때 공안부의 부장검사가 공안부에 관하여 간단한 안내를 했던 기억이난다. 김지하의 시 「오적」 운운하면서 시간이 나면 명동의 소극장같은 데서 반국가적인 성향의 공연이 열리는지 보러 간다고 말하기도 했다. 길은 달라졌으나 공연계에서 활동하는 친구를 떠올렸던 탓일까 아직도 기억이 선명하다. 검사로 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그때 굳힌 것 같다. - P5

법적 판단은 과학적 사고와 달라서 대법관의 추가보고 지시에따라 정반대의 논리를 전개하는 보고서가 얼마든지 만들어지기도한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10년의 판사생활 동안 ‘사건에는 정답이있고 판결은 선택이 아니다‘라고 생각해왔는데 대법원에 와보니 판결은 선택이 되기도 했다. 너무 늦은 깨달음이었는지는 몰라도 그 충격과 그에 따른 두려움은 더 컸던 것 같다. 그로부터 10여 년후 대법관으로 재직할 동안에도 그 두려움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판사들은 어떤 기준으로 선택을 하는가. 판사들의 선택은 시대적 현실과 분리된 상태에서 해야 하는 것인가. 순수한 법리만으로 선택하는 것이 가능한가. 2013년부터 로스쿨에서 대법원판결들을 읽어보는 강의를 하면서 주로 전원합의체 판결을 대상으로 ‘대법관들이 자신에게 허용된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분석해보았다. 그리고 그 결과 내려진 판결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 P9

위계질서는 이원론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서로 대립하는 두 가지 요소에 토대를 두고 분류하는 것이다. "합리적/불합리적, 능동적/수동적, 사고/감정, 이성/감성, 문명/자연, 힘/섬세함, 객관적/주관적, 추상적/구체적, 원리원칙에 의하여 규율화됨/개별화·개인화됨이라는 이원론이다." 5 "불합리는 이성의 결여이고, 수동성은 행동성(능동성)의 결여를 의미한다. 사고는 감정보다 중요하고,
이성은 감정보다 우수한 것이다." "어떤 것을 ‘결여한 것‘ ‘덜 중요한 것‘ ‘열등한 것‘으로 여긴다는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이원론은계층화 질서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법은 원칙적으로는 것서원서의기존 질서를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원론에 토대를 둔계층화를 긍정하는 한 법질서도 이원론에 의한 계층화 질서를 지키려는 이념과 같이 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원론을 통한 계층화가 법 체계에 반영될 때 어떤 일이발생하게 되는가? 마사 누스바움 Martha C. Nussbaun은 낙인을 찍는등 수치심을 주는 처벌을 형벌체계에 도입할 수 있는지를 논하면서,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문제인 것은 ‘사회 구성원을 서열화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지닌 부족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집단을 형성하며, 보다 힘이 약한 일부 집단과 비교하면서 자신들을 ‘정상인‘으로 정의한다."" "수치심은 정상에서 벗어난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 또는 이런사람들로 이루어진 집단에 초점을 맞춘다. 이들을 대상화함으로써 지배적인 집단은 자신들을 정의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정상인‘들에게 자신이 지닌 나약함을 떠올리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이른바 희생양이 될 수 있고, 공동체에서 배척당할 수 있는 것이다. 누스바움은 이런 관점에서 "수치심 처벌이 진보적인 개혁효과를 보기보다는 사회적 동질성과 통제를 높이는 수단으로 기능하게 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 P20

프랜시스 올슨 Frances Olsen에 의하면 가족이라는 영역에서는 시장에서 찬양되는 개인주의와 달리 "가족들끼리의 애정과 나눔과상호배려와 애호""라는 일종의 애타주의가 지배한다. 그리고 가족 내 구성원에 대해 무엇이 최선인가를 정하는 것이 가장 이기때문에, 가족이 계층적 상하구조를 가지는 것은 당연시되었다. 자 - P22

유로운 시장이라는 생각에는 개인주의가, 그에 따른 시장거래에서는 형식적 평등이 깊게 관련되어 있으나, 가족이라는 사상에서는애타주의와 상하관계가 확실하게 연결되어 있다.‘ 개인주의는 국가가 시장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정당화한 것과 동시에,
가족의 영역에서 국가는 가족 간의 배려와 애호의 상호관계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전환되어 적용되었다. 가령 사회에만연하던 아내에 대한 남편의 폭력에 대해 국가가 제도적으로 개입하려고 해도, 그 개입이 많은 사람의 눈에는 국가가 가족문제에간섭하는 것으로 비추어졌다." 가정 내에서의 가부장 질서가 오랫동안 정면으로 문제시되지 못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찬가지 이유로 ‘가족적인 분위기와 질서를 내세우는 많은 집단들에서도 드러나지 않는 다양한 모습의 폭력이 여전히 문제시되지 않고남아 있다. 농경사회 이후로 폭력에 대한 가치관이 변화하고 있고가부장 질서도 약화되고 있으나 ‘가족적‘인 질서는 가장 느린 속도로 변하여온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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