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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독깨비 (책콩 어린이) 23
마이클 모퍼고 지음, 피터 베일리 그림, 천미나 옮김 / 책과콩나무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마이클 모퍼고는 영국이 자랑하는 동화작가이고 발표한 작품도 대단히 많다.(국내에 소개된 것도 꽤 많지만 다 소개되지는 않은듯) 나로서는 손꼽을 수 밖에 없는 작가인데, 나를 어린이 문학세계에 빠뜨린 작품이 바로 이 작가의 <켄즈케 왕국>이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 나는 책이 없어서 못읽는 아이였는데 청소년기 이후로는 거의 책을 잊고 지냈다. 켄즈케 왕국은 어릴 때의 독서추억을 단번에 되살려 주었고 그 이후로 나는 어른책보다 아이들책을 훨씬 더 많이 읽으면서 산다. 그게 10년 정도 된 일이다.

 

켄즈케 왕국 이후로도 훌륭한 작품이 많았는데 전작의 감동보다 더 크게 다가오지는 않았었다. 그래도 변함없이 작품마다 훌륭한 주제의식과 아름다운 문체를 보여주는구나 라는 생각은 했다. 그러다 최근에 이 책을 읽고 충격에 가까운 감동을 받았다. 이런 작품은 정말 나와야 마땅한 작품이고 진작 나왔으면 더 좋았을 작품이다. 그런데 이런 주제의 작품을 이렇게 아름답게 쓸 수도 있구나.

  

같이 근무하는 부장선생님이 있다. 전의 학교부터 같이 근무해 꽤 오랜기간 알고 지내는 사이다. 처음 뵈었을 때부터 이분은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으셨고 환경단체의 회원이시기도 했다. 그러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부터인가, 이분은 원전과 방사능 문제에 완전히 '꽂혀'버리셨다. 그런데 누구든지 붙잡기만 하면 전도하는 사람을 피하듯, 이분을 피하는 사람도 많고 그 학급에 민원도 심심찮게 들어오고 영양사 선생님과는 불편한 관계가 되어 버렸다. 이분이 방사능과 식품에 대해 본인이 알게 되신 것들을 필사적으로 전하려 하시기 때문이다. 그게 그분에게는 사명인 듯하다. 나도 가끔은 모든 것을 그쪽으로 몰고 가시는 그 분의 화법에 대화가 즐겁지 않을 때가 있다. 하지만 '모르겠다 알게뭐냐' 하는 태도로 사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훌륭한 분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그분이 수시로 보내주시는 자료나 정보들을 때로는 흘리지만 가끔은 챙겨보기도 한다.

 

추석연휴를 보내고 있는데 그분에게서 카톡이 왔다. "지난 9월 15일 밤 SBS에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원전과 방사능에 대하여 진실된 방송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지상파에서 이정도  방송되었다는 것은 획기적입니다. 방사능 시대에 온 가족이 꼭 시청해야 할 프로그램입니다."

때가 딱 맞았다. 마침 마이클 모퍼고의 <집으로>를 읽고 무거운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을 때였던 것이다. 나는 컴퓨터를 켜고 그분이 말씀하시는 프로그램을 찾아보았다. SBS스페셜이었다. 죽음의 습격자-후쿠시마발 방사능 공포.

대부분 그 부장님께 들었던 이야기이긴 했지만 생생한 취재와 관련자들의 증언을 통한 방송을 접하니 새삼 답답함이 몰려온다. 어째서 저렇게 예측 가능한 것을 몰랐단 말인가? 똑똑함을 자랑하던 인류가? 정말 몰랐던 것일까? 모르는 척 했던 것일까? 알면서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것일까? 누구를 위해서? 분노가 몰려온다.

 

잊고 있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20년이 다 되어가는 기억이다. 초임시절, 서툰 나를 예쁘게 보시고 잘 도와주시던 교감선생님께서 어떤 1박2일 연수에 내 이름을 넣는다고 하셔서, 나는 정확한 내용도 모르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원자력 무슨무슨 연수라 했다.  "엄청 좋은 연수야. 공짜고."

대절한 버스를 타고 가면서 알았다. 이건 연수라기엔 뭔가 껄적지근 하구나. 엄청 좋은 밥에, 호텔 수준의 숙소에. 연수라 할만한 건 원전 시설을 둘러보며 안내를 듣는 것이었는데,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걱정하지 마라. 원전은 이렇게 깨끗하고 안전하며 효율적이다.... 뭐 그런 내용이었던 듯. 어리고 무식했던 초임시절의 나는 그냥  '쫌 그러네.... 이런 건 줄 알았으면 오지 말걸...' 하면서도 주는 밥 먹고 좋은 숙소에서 자고 돈 한푼 안내고 여기저기 구경하고 돌아왔다.

잊고 있다가 지금 생각해보니, 교사들에게 그런 연수는 도대체 왜 했을까? 그 좋은 밥과 숙소와 교통비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화가 난다. 동시에 나의 어리숙함과 무식함에도.  

 

이 책이나, SBS스페셜은 말해준다. 그 연수에서 했던 말들은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이산화탄소가 나오지 않으니 친환경이고 깨끗하다고? 방송에서 에너지시민연대의 한 연구원이 쓴웃음과 함께 울컥하며 했던 말이 머리속에 맴돈다. "태평양 전체를 지금 방사능으로 오염시킬 기세인데 이산화탄소 배출하지 않는다고 원자력을 친환경적인 전원이라 하는 말은... 이제 더이상 할 수 없는 시대가 왔습니다."

안전에 대한 주장은 이미 다시 세울 수 없을 정도로 무너졌다. 체르노빌에 이어 후쿠시마 사고가 터지기까지 20년 남짓이 지났을 뿐이다. 백만 분의 일이라는 확률 자체가 엄청난 거짓이라는 것을 알수 있다. 설사 백만분의 일이 맞다 해도 그것은 무시할 확률이 아니다. 어쨌든 0은 아니니까 말이다.

효율성에 대한 주장도 눈가리고 아웅이었던 것. 원전이 제대로 가동되고 있는 몇십년 동안은 비용대비 전력 효율이 높다고도 볼 수 있지만,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얘기다. 가동이 끝난 원전은 철거가 불가능하며 수백년동안 두꺼운 콘크리트로 뒤덮어 두어야 한다. 설비부터 폐기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본다면 효율이란 말은 어불성설이다.

 

이런 모든 이야기를, 마이클 모퍼고는 두껍지도 않은 동화 한편을 통해서 잔잔하고도 가슴아프게 들려준다. 주인공은 50년만에 추억 속 풍경을 찾아 고향으로 간다. 어릴적 추억에 남겨져 있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사람은 페티그루 아주머니다. 그 마을 습지에 기차 한 칸으로 만든 집에서 아주머니는 각종 동물들과 함께 자연을 가꾸고 지키며 살아가고 있었다. 결혼하자마자 남편을 잃는 슬픔을 당했지만 아주머니는 자연 속에서 슬픔을 이기며 조용히 아름답게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들의 작고 조용한 행복을 방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원자력 개발의 바람은 바로 아주머니의 그 터전으로 불어닥쳤다. 처음에는 원전 건립을 반대하던 이들도 개발과 발전의 논리에 넘어갔고 아주머니는 끝까지 외로운 싸움을 해야 했다. 결국 건설 승인이 떨어지고 아주머니는 평생의 터전이던 기차집을 스스로 불태우고 말없이 마을을 떠났다.

 

 

이것이 주인공의 가슴아픈 추억이다. 50년이 지나 되돌아온 주인공은 무엇을 보았을까? 흉물스러운 원전 단지의 모습이었다. 그것도 그새 수명을 다하고 콘크리트로 뒤덮인. 마을에서 만난 한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사람들이 몰려가서 그 여자를 쫒아내고 저런 흉물스러운 물건을 지었지. 어쩌자고? 겨우 몇 년 전기 만들다가 쓸모없게 돼서 끝나 버린 것을. 발전의 대가라나.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는 것 같더군. 나는 그걸 수치의 극치라고 부르오.”

 

대다수가 몰랐을 때는 어쩔 수 없었다 해도(나의 어리숙한 초임시절과 같이) 이제 문제들이 극명하게 드러난 지금, 아직까지도 개발의 논리에 질질 끌려가는 것이야말로 수치의 극치가 아닐까? 현재까지 지어진 원전만 해도 그 위험성과 파괴력을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그 짓을 계속하는 어리석음까지 범하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닌가. 방송의 마지막 나레이션이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때론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무섭고 위험하다.

그리고 때론 당장의 달콤한 풍요와 편안함에 길들여져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원자력 에너지도 그런 것 아닐까?

후쿠시마 사람들도, 체르노빌 사람들도, 재앙이 닥치기 전에 죽음의 습격자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제 우리는 미래를 걸고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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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사의 코끼리 일공일삼 74
케이트 디카밀로 지음, 요코 다나카 그림, 김영진 옮김 / 비룡소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가끔씩 어떤 작가의 최근작이 나왔나 검색을 해볼 정도면 팬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나? 케이트 디카밀로는 내게 그런 작가다. 그런데 작품은 정말 가뭄에 콩나듯 가끔 한 편씩 나온다. 다작을 하는 작가가 아닌듯. 하지만 작품을 읽어보면 알 것 같다. 그가 왜 다작을 하지 않는지. 아니, 할 수가 없는지.

 

그의 작품은 인생을 생각하게 한다. 주제는 표면에 드러나지 않으며 단순하지도 않다. 서사는 환상적이고 매력적이나 느낌은 눈물겹다. 그래서 "재밌다"라는 표현을 잘 쓰게 되지 않는다. 작품의 흡인력이 대단한데도.

 

내 친구 윈딕시나 생쥐기사 데스페로, 에드워드 툴레인의 신기한 여행을 아이들에게 권해주고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동화를 쓰는 작가이나 사실 그의 주제는 어른들에게나 와 닿는 것이 아닐까? 라는 걱정(?)을 해본다. 요즘 '동화작가가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는 사람인가, 아이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인가, 어느 쪽이 더 동화작가의 본질에 맞는가'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본다면 디카밀로는 내 경험상 후자와는 거리가 좀 멀다.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을 작품 속에 녹여내기 때문이다. 그것을 아이들이 찾아내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그의 작품이 꾸준히 잘 팔리고 있으며 영화로도 제작되어 상영되는 것을 보면 주제의식만을 고집하는 작가는 아니라는 점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내가 왜 이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는가 하면, 특히 이 책이 가장 어려웠기 때문이다. 중반 이후까지도 고개를 갸우뚱하며 읽었다.

 

이 작가가 창조한 인물들은 이분법으로 나누기 어렵다. 그리고 대부분 인생의 무게를 안고 살아간다.

피터 - 아버지는 전쟁터에서, 엄마는 동생을 낳다가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전우인 빌나 루츠에 의해서 일반적인 가정의 따스함과는 거리가 멀게 양육된다.

빌나 루츠 - 의족을 한 상이군인이다. 군인으로서의 삶과 명예를 고집하고 싶지만 마음은 늘 괴롭다.

마술사 - 그의 생애에 시시껄렁한 마술이 아닌 대단한 마술을 한번 보여주고 싶었다. 그게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고 그는 감옥에 갇혔다.

라 본 부인 - 마술 공연 구경하다가 이게 웬 날벼락이람. 코끼리가 지붕을 뚫고 그녀의 무릎 위로 떨어졌고 불구가 되어 휠체어에서 살아야 한다.

레오 마티엔느 - 시인의 영혼을 가진 경찰. 아내 글로리아와 함께 피터의 아래층에서 살고 있다. 그들이 사랑해 줄 아이가 생기지 않아 슬퍼한다.

바르톡 윈 - 괴물상을 특히 잘 만들던 전직 석수장이. 성당 꼭대기에서 떨어져 척추를 다친 후 코끼리 시중꾼으로 일하게 된다. 늘 큰 소리로 웃는다. , 기뻐서 웃는게 아니다.

한스 익맨 - 라 본 부인의 충실한 하인. 오랜 기억 속 어린 시절의 하얀 개를 떠올린다.

 

이야기는 시장에 심부름을 나왔던 피터가 "1플로릿만 내면 당신의 마음이나 머릿속에 간직된 가장 심오하고 어려운 문제에 대한 답을 알려드립니다" 라는 쪽지에 이끌려 심부름할 돈으로 점쟁이의 천막에 들어간 일로부터 시작된다. 피터의 마음 속에 간직한 질문은 이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제 동생을 찾을 수 있나요?"

 

점쟁이의 대답은 황당했다. "코끼리가 널 그곳으로 안내해 줄 거야."

코끼리라니. 될 말인가? 그러나 그날 저녁, 오페라 극장에서 위에 쓴 것과 같은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코끼리는 나타났다. 한 귀부인의 다리는 부러졌고 마술사는 감옥에 갇혔고 코끼리는 처치곤란이 되었다.

 

이후로부터 짜여져 가는 이야기는 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다가 한순간에 맞춰져 버린 퍼즐처럼 마지막에 완성되었다. 모든 등장인물과 동물들은 자신의 역할을 했다. 자신의 가슴 속에 키워 오던 꿈을 통해서. 그러면서 모든 것들은 있어야 할 자리를 되찾았다. 이야기는 따뜻하게 끝났다.

 

끝까지 내 마음을 풀어주지 못한 부분이 있는데 불구가 된 부인에 대해서이다. 나머지 이야기가 다 해피엔딩이라 해도 부인은 다리를 잃었지 않은가? 부인의 다리가 다른 이들의 행복보다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 그렇다면 마법으로 부인의 다리가 원래대로 낫는게 좋은 결말이었을까? 그랬더라면 서사적 가치는 뚝 떨어졌을 것이다. 그래도 난, 부인의 다리가 자꾸만 마음에 걸려서..... 이야기에 몰입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모든 일이 끝난 뒤 감옥 마당에서 라 본 부인은 이렇게 말한다.

"마술사를 감옥에 다시 가둘 필요가 없다고. 그래 봤자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야. 그러니 저 사람을 그냥 풀어 주세요."

"부인."

"그래요. 가 보세요."

마술사가 가 버리자 라 본 부인은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짐이 갑자기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가는 것 같았다.

 

케이트 디카밀로는 용서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생쥐기사 데스페로에서 그랬던 것처럼.... 내가 부인의 다리에 집착하는 것처럼 용서는 힘든 일이다. 그러니 디카밀로의 작품이 쉬울 리 없다. 작가는 좀처럼 편안하고 부유한 삶을 그리지 않는다. 고단한 삶에서 서로 버팀목이 되어주는 사람들의 관계와 그들의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 사이에서 나는 내 것을 잃을 수도 있고 누군가를 용서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아직 이것이 안된다. 그래서 힘든 것일게다.

 

디카밀로의 작품 속 세계는 짙은 안개 속 같다. 불투명한 유리창에 눈을 대고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뭔가 뚜렷한 윤곽도 색채도 아니지만 그립고 따스하며 아름답다. 모르는 사이에 그의 작품은 내 마음을 어루만지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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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로 시작하는 어린이 인문학 - 똑똑똑! 생각의 문을 여는 인문학 질문 76가지
뱅상 빌미노.샤를로트 그로스테트 지음, 박언주 옮김, 에르베 플로르 그림 / 한울림어린이(한울림)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상당히 좋은 책이라는 것을 충분히 인정하는데, 내 취향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야 솔직한 글을 쓸 것 같다.

 

인간의 사상과 문화를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 그 광범위한 것을 한 권의 책으로, 그것도 어린이용으로 풀어낼 수 있을까? 궁금해 하며 책을 신청했다. 책을 읽고 역시 그것은 무리라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펼친 화면 한 장에 인문학 질문 하나가 제시되어 있고 질문의 실마리가 되는 간단한 만화, 질문에 대한 설명, 용어설명, 관련된 이야기로 딱 짜여진 구성을 갖고 있다. 난 이것부터가 약간 숨이 막힌다.

 

평상시에 생각을 아주 많이 하는 아이라서 이 책에 나온 질문을 평상시에 가슴에 담고 살았다면, 이 책의 목차를 보고 어? 평소에 내가 궁금해 하던 것들이네? 라고 탄성을 지를 수 있는 아이라면 이 책이 더할나위 없이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가 이 책을 뒤적인다면 삼키지를 못하거나, 아니면 삼키더라도 식사대용 캡슐과도 같을 것 같다. 나에게는 바로 그랬다.

 

캡슐처럼 매끈하고 영양소가 자로 잰 듯 들어있지 않아도 좋다. 나라면 인문학의 털끝 하나를 건드리다 말더라도 그냥 이런저런 책을 읽고 싶다. 영양가가 검증되지 않아도 내 혀가 맛을 느낄 수 있는  그냥 음식들을 먹고 싶다. 캡슐은 내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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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노는 법 - 동화를 쓰려는 분들께
위기철 지음 / 창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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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사서 읽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뭐에 홀린 듯하다. 다른 책을 검색하다가 이 책이 걸려들었는데 보자마자 구매하기 버튼을 눌렀고 다음날 책이 내게로 왔다.

 

제목은 <이야기가 노는 법>, 부제는 <동화를 쓰려는 분들께>인 이 책을 왜 나는 홀린 듯이 장바구니에 담았을까? 나는 동화를 쓰려는 분들이 아니다. 문학성이 담긴 작품을 창작해 본 적도, 시도해 본 적도 없다. , 사실 학교 다닐 때 월요애국조회 시간을 은근히 기다린 재수없는 애이긴 했었다. 독후감대회나 백일장을 하고 나서 단상위에 올라가 상 받는 그 기분이 짜릿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졸업한 후에는 글과도 멀어지고 가끔 실용적인 글은 쓰지만 문학작품을 창작해본 적은 없었다. 해야 될 필요도 없었고.

 

그런데 나의 무의식 속에는 사십이 넘은 이 나이에도 애국조회의 단상에 서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었던 것인가? 이 책을 보는 순간, 혹시 이걸 읽고 나도 한 편 써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던 것일까? 내 마음 나도 모르지만 그렇다 치고.

 

이 책을 읽기를 잘했다. ‘넌 할 수 있어!’도 좋은 말이지만 넌 안돼!’도 때로는 인생에 도움이 된다. 저자는 작가란 어떻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그저 작가로 살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동화란 하루아침에 쓰여지는 일이 절대 없다고, 엄청난 습작을 통하여만 탄생할 수 있다고 한다. , 들인 시간에 비례한다는 것이다.(물론 재능 없는 이가 시간만 들인다고 되지는 않을 테지만)

 

나는 저자가 말하는 세월 말아먹는 삽질과 노가다를 시도해 볼 의향이 전혀 없다. 현재 내가 하는 업종에서 버텨내기도 힘든데 무슨 그런 엄청난 곁눈질을 하겠는가. 이 책을 장바구니에 담는 순간만큼은 어쩌다 보석을 줍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내가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 덕분에 이제는 그런 말도 안되는 생각을 명쾌하게 날려 버렸다.

 

순간 들었던 착각을 날려버린 것만으로 만족하기에는 책값이 비싸지 않나? 다행히 한 가지가 더 있다. 동화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는 것.

 

별로 밝히고 싶지는 않지만 내가 몸담은 업종에서 동화는 대단히 중요하다. 물론 그렇게 여기지 않는 분들도 있긴 한데 나는 심지어 내 장사밑천이라고까지 여기는 사람이어서 늘 옆에 두고 읽는 편이다. 서평을 쓰기도 하고 동료들에게 추천을 해주기도 했는데 이 책을 읽으며 그동안 내가 동화를 보았던 시각을 다시 짚어볼 수 있어서 그게 꽤나 쏠쏠한 재미를 주었다.

 

첫째로 동화는 다른 장르에 비해서 독자중심 글쓰기를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동화가 담는 일보다는 꺼내는 일에 우위를 두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곧 독자와의 소통에 주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같은 맥락으로 저자는 동화작가가 아이들을 대변하는 사람인가,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인가를 묻고 있다. 전자도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동화로서의 의미는 아무래도 후자에 있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인 것 같다.

 

그렇다면 좋은 동화를 고르는 일을 어른이 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모순일 수도 있겠다. 뒤돌아본다. 내가 읽고 무릎을 쳤던 책들이, 아이들에게 읽히고 싶어 안달이 났던 책들이 과연 아이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였는지. 내가 아이들 눈높이에서 읽었는지. 동화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실상은 어른들을 대상으로 말하고 있었기에 내가 감동했던 것은 아닌지. 동화를 통해서 나 스스로 감동받는 것에 족한다면 상관이 없지만, 아이들에게 권해주고 아이들과 함께 하려 한다면 아이들의 시각에서 좋은 동화는 어떤 것인가 좀 더 고려해 볼 필요가 있겠다.

 

다음으로 동화를 쓸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공간, 플롯, 패턴, 짜임, 내용, 리듬 등에 대한 강의가 이어지는데 이 부분은 가장 공부(?)스러운 부분이면서도 가장 재미있었다.(이렇게 재미있는 강의를 하는 교수님이 있다면 이 늦은 나이에 공부를 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결론을 굳이 정리하자면 이 모든 것들이 중요하되 여기에 얽매여 쓰면 안된다는 것.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공식이 없다는 것! ‘이야기가 이야기를 쓴다.’ ‘이야기는 일종의 유기체이다.’ 라는 말들이 이 사실을 잘 표현해 준다.

 

이어서 좀더 세부적이면서도 전문적인 글쓰기의 원칙이나 기법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이 강의들 또한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들어봤던 말들이면서도 착착 감기게 재미있다. 한번 읽은 지금 당장은 못하겠지만 이 책을 한두 번 더 읽고 나서는 좀 더 세부적인 눈을 가지고 동화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게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괜히 입맛 까다로운 독자가 하나 더 느는 것에 불과할 수도)

 

이 책은 서두부터 동화작가 아무나 하는거 아니다. 폐인 될 각오하고 덤벼라.”라고 시작을 했고 읽으면 읽을수록 우와.... 단순한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데, 각고의 노력을 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라는? 모든 예술들이 다 그러한데, 피나는 연습으로 어느 정도까지는 되지만 그 이상을 넘어서는 것은 타고나야 되더라는 거다. (이건 저자가 한 말은 아니다. 살면서 내가 본 바에 의하면 그렇다) 동화도 마찬가지인 듯.... ‘열심히 노력하셨구나이분은 타고났구나가 어느 정도는 눈에 보인다. 그런 걸 보면 세상은 참 불공평?...........하지만, 어쩔 수 없다. 타고난 분들의 붓놀림에는 나도 모르게 끌려 들어가게 되는 것을.

 

마지막으로 타고나셨거나, 노력하고 계시거나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살아가고 계신 이땅의 동화작가님들(저자 포함)께 한 말씀 드린다.

어쩌다 영감을 얻으면 죽기 전에 한 편은 쓸 수도 있는 줄 알고 이 책을 샀습니다. 하지만 거저 얻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독자로, 참견꾼으로(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철수엄마로), 아이들과 함께 열심히 읽으며 누리겠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작품 많이 부탁드립니다. 저자의 말씀대로 힘 빼시고 편안하게 쓰세요.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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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각시 방귀 소동 길벗어린이 옛이야기 9
김순이 글, 윤정주 그림 / 길벗어린이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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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하면서도 좀 색다른 방귀쟁이 며느리 이야기이다.

 

옛이야기를 재화할 때는 중요한 화소를 생략하거나 맘대로 바꿔버리면 안된다고들 한다. 이건 좀 심하지 않나? 교육적이지 못해, 이렇게 바꾸면 해피엔딩이 되니까 느낌이 더 좋을거야, 이런 등등의 생각으로 이야기를 바꿔버리는 것은 자칫 옛이야기가 가진 힘을 무력화시켜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한다. 옛이야기에는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인간의 내면을 다루는 상징이 숨어 있고, 그 상징은 아이들의 무의식에 작용하여 치유의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크게 놀랐다. 옛이야기는 그저 옛이야기이고 재미있게 재화할수록 더 좋은거 아냐?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후, 옛이야기 그림책들이 달리 보였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도끼눈을 뜨고 살펴보게 되는 것이 아닌가? 어디보자, 원형에 충실하게 재화한 이야기인가....?

 

아서라,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데, 내가 옛이야기를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도 아니고 원형에 충실했는지 어떤지 정확히 파악이나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냥 재미있게 읽어보자. 판단은 비평가들이 해주실 테고, 나중에 그것을 참고는 할 수 있겠지. 그냥 읽어라, 너의 느낌대로!!

 

그렇게 읽었다. ~ 재미있었다.^^*

 

원래 아이들은 방귀 소리만 나와도 좋아 죽는다. 뭐 달리 개그가 필요없다. 이 책은 그 탁월한 개그소재인 방귀를 선택했으니 일단 절반은 먹고 들어간 셈이다. 그런데다가 작가가 배치한 자잘한 소재들도 깨알같은 재미를 선사한다. 시집간 갑순이가 혼자 있는 데서 방귀 좀 뀌려고 뒤란에 가면 시동생이, 부엌에 가면 시어머니가 따라 들어와 진땀이 팍팍 솟아나는 장면을 보면 쿡쿡 웃음이 삐져나온다. 돼지밥이나 닭모이를 주다가 저도 모르게 조금 새어나온 방귀에 기절해버리는 돼지와 닭들. 뱅뱅 돌아간 그 눈들. 아이들이 배꼽을 잡을 듯하다.

 

그렇게 방귀를 참다 갑순이는 얼굴이 노래져버렸다. 이른바 노랑각시가 된 것이다. 걱정하던 가족들은 이유를 알게 되고, 맘대로 방귀를 뀌라고 말해준다. 갑순이는 식구들에게 단단히 준비를 하라고 이른다. 이제 기존 옛이야기에서 많이 본 장면이 나온다. 시어머니는 솥뚜껑을 잡고, 시아버지와 신랑은 문고리를 잡고, 시동생들은 기둥에 몸을 꽁꽁 묶고.... 여기에서는 그림작가의 재치가 돋보인다. 동작 뿐 아니라 표정들도 얼마나 웃긴지, 거기다가 우리의 갑순이는 헛둘헛둘 준비운동까지 하고 있네?

 

드디어 방귀를 뀌려는 순간이다. 그런데 다른 책에서는 못보던 사람이 구석에 보인다. 옆집 영감님이다. 웃음코드를 위해 투입한 조연.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계신다.

드디어 방귀는 터졌고 우리가 아는 대로 모든 것들이 그 바람에 날려갔다. 가족들은 대비를 해서 괜찮았지만 돼지와 닭, 웬만큼 가벼운 세간살이들, 그리고 영감님 또한 당연히 날려갔다. 그런데 영감님이 날려가 떨어진 곳을 보고 푸하! 하고 웃음이 터졌다. 여기는 한양인가 보다. 그리고 때는 개화기. 화면 중간에 전차가 보인다. 휘둥그래진 영감님의 눈을 보라! 구경 제대로 하시겠구나!

 

다른 방귀쟁이 며느리 책에서는 큰 방귀를 뀌고서 며느리가 쫒겨나는데, 이 책에서는 그런 내용이 없다. 시동생들은 낑낑거리며 먼 동네까지 가서 돼지들을 다 몰고 오고, 시부모님들은 농기구와 세간들을 손보고, 신랑은 지붕을 고치고, 며느리는 장독대에서 깨진 장독들을 손보고 있다. 그리고 나서 갑순이는 뀌고 싶을 때 방귀를 뀌며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아 참! 영감님! 영감님은 거지꼴이 돼서 보름 후에 나타났는데 만면에 웃음이 가득하다. 구경 한 번 잘했다며. 그래서 갑순이가 언제 또 방귀를 뀌나 기웃거리신다는데, 이제는 날려갈 일은 없겠지?

 

쓰고 보니 옛이야기의 원형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개작함으로 인해서 옛이야기의 가치를 일부라도 상실하게 된 것인지, 나로서는 파악을 못하겠다. 하지만 나는 무릇 이야기라면 재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그런 면으로 본다면 이 그림책은 자기 할 몫을 다했다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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