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정원 - 전2권 세트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평점 :
절판


요즘 나는 영어땜에 골머리를 썩고 있다. 어느수준 이상으론 잘 늘지 않는 실력도 문제이지만 시험신청하기가 어려워 밤을새기도 일쑤라 나는 진심으로 영어에게 온갖 기운을 뺐긴듯 했다.. 원래도 간간히 영어에 질리면 명랑하고 짤랑거리는 한글 문장을 읽곤 했었다.  나는 그 짤랑거림이 참 좋았었는데 이번 고비엔 은근하고 조용하고 나지막하고 그러면서도 그 속에 어떤 힘을 품고 있는 황석영의 글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이럴 땐 내가 한국사람이란게 참 좋아지는 것이다. 아아. 난 이 문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는 자부심. 오래된 정원에 빠져들면서 영어에 대한 증오(?), 시험등록에 대한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도서관엘 가면 이 노란빛과 연둣빛의 중간쯤 되는 한국판 '오래된 정원' 옆에 불어판이 나란히 놓여있는데 도대체 이런 말은 어떻게, 요런 말은 어떻게 번역했을까 엄청 궁금했다. '그네'라는 말은 그냥 '그'로 번역했을까? 그건 그 느낌이 아니잖아. 그 페이퍼 백의 하나도 모르는 불어를 ?어보며 왠지 내 맘이 안타까웠다.

그 시절엔 어떠했을까, 나는 그 시절이 궁금했다. 데모하던 시절, 최루탄이 날아다니던 시절, 운동이 당연하던 시절. 엉뚱하게도 책속에서 내 가슴속에 콕 박힌 표현은 '김밥을 신문지로 말았더니 잉크 냄새가 드문드문 배였다'라는 부분이었다. 내가 10살 좀 지났을 적엔가 신문사에서 콩기름 잉크로 바꾼다던가 광고를 대대적으로 했던 기억이 있으니 그 시대, 80년대의 신문내음은 지금과 다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 신기했다. 몇십년 전 '그때'의 한국과 '지금'의 한국은 이렇게 조금씩 작은 변화를 거듭하여 이젠  당시를 상상하기 조차 힘들어지고 말았다. 나는 86년생인데 초등학교 시절 매 학기 새 교과서를 받으면 첫 페이지에 이런 말이 씌여있었다. '.....여러분은 21세기를 이끌어 나갈....' 21세기를 이끌어 나가는 지는 모르겠다만 하여튼 21세기에 살아가는 우리 세대로선 그 어떤 상상력을 동원한다 해도 80년대의 치열함을 느낄 수 없다. 노력으로도 그 시대를 짐작하기 어려운 세대가 대학생이 되고, 고시를 치고, 취업을 하는 요즘이다.

요즘 대학생들은 운동권에 대해 막연히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고 대게의 대학생들은 운동권에 대해 무관심하다. 아마 운동권이었단 과거를 가진 사람중 지금은 그리 아름답지 못한 사람이 많아서 일까. 책을 읽고 든 생각은, 우리는 운동권에 대한 호불호를 여유롭게 흘려가듯 말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운동권이 되느냐 마느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그 나이에 가장 어려운건 자신을 속이는 일, 비굴하게 사는 일이 아닐까, 알면 알 수록 더 괴로운 것이 아닐까 그런 것들...참을 수 없는 것들. 그러한데 어떻게 운동권이 되고 말고를 선택할 수 있었을까, 운동권이라는 것도 인간의 정의, 인간의 선긋기 일 뿐인데, 그들은 그저 생각하는 대로, 믿는 대로 행동한 것이 아닐까.

신념대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적당한 롤 모델을 직접 눈으로 보기 어려운 21세기를 살아가는 나에게 오래된 정원은 신념대로 살았던, 빛나는 누군가의 삶을 보여주었다. 세월과 시대에 부딪혀 상처투성이 일지라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 시대의 은근한 말씨가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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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달 2007-03-29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짤랑거림이라..... 신선한데요? ㅋㅋ